제52과 을미참변(乙未慘變)과 노국(露國)
조선(朝鮮)의 독립(獨立)이 공인(公認)됨에 처음으로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이 성립(成立)되니 민후(閔后)가 개혁당(改革黨)을 미워하여 노국(露國)의 세력(勢力)을 끌어드려 일본(日本)의 세력을 막고자 함으로 우범선(禹範善) 이두횡(李斗橫) 등이 일본낭인(日本浪人)과 합력(合力)하여 대원군(大院君)으로 하여금 정변(政變)을 주장(主張)케 하고 을미(乙未) 10월 8일에 경복궁(景福宮)에 침입(侵入)하여 민후(閔后)를 죽이니 고종(高宗)이 다시 친노당(親露盧黨)인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의 말로써 비밀히 노국공관(露國公館)에 이어(移御)하여 김홍집(金弘集) 정병하(鄭秉夏) 등을 죽이고 다시 친노파(親露派)의 세력(勢力)을 끌어드려 박정양(朴定陽) 내각(內閣)을 조직(組織)하였느니라. 고종(高宗)께서 노관(露館)에 있으신지 일년(一年) 후에 다시 경복궁(景福宮)에 환어(還御)하여 년호(年號)를 고쳐 광무(光武)라 하고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위호(位號)를 황제(皇帝)라 칭(稱)하니라. 이에 노국(露國)이 한국(韓國)을 간섭하게 되니 노국(露國)은 이에 마산(馬山) 율구미(栗九味)에 군항(軍港)을 정(定)하여 병원(病院)을 건축(建築)하고 또 용암포(龍岩浦)를 조차(租借)하여 점점 극동(極東)을 삼키려는 뜻을 두고 또 지나(支那)의 북청사변(北淸事變)을 기회로 하여 만주(滿洲)에 다수(多數)한 군대(軍隊)를 머물게 하거늘 일본(日本)을 이를 막기 위하여 일영동맹(日英同盟)을 맺었느니라.
- 한글
조선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처음으로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민비가 개혁당을 싫어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세력을 막고자 했습니다. 이에 우범선, 이두횡 등이 일본 측 세력과 합세하여 대원군에게 정변을 주장하게 했고, 을미사변에서 경복궁에 침입하여 민비를 살해했습니다.
이후 고종이 다시 친러 세력인 이범진, 이완용의 권유로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했고, 김홍집, 정병하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친러 파벌의 세력을 끌어들여 박정양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있던 1년 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연호를 광무, 국호를 대한, 자신의 위호를 황제라고 칭했습니다. 이에 따라 러시아가 한국 내정에 간섭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마산 율구미에 군항을 설치하고 용암포를 임차하며 극동 지역 진출을 꾀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이를 막기 위해 영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