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학이 들어 옴
남인의 최후 승리자인 채제공(蔡濟恭)이 정계에 물러난 후로는 대개 서인들이 정권을 잡고 남인들은 정치요로에 물러나와 학구적으로 돌아가 그들의 머리에서 연구한 재료가 많았고 또 신비적으로 미래를 연구하던 중 조선 장래에 장차 이상의 나라가 남쪽에서 시작하여 일어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상국은 어디 있느뇨. 이로 말미암아 나라도 생명도 다 이 나라로 인하여 해결된다는 것이다. 당시 요로에 있는 사람들은 부귀에 깊이 잠들어 이런 방면에 뇌를 기울이지 않고 빈곤과 싸우는 남인들만이 이런 생각이 농후하였다.
이때에 우리나라 사절들이 북경을 왕래하는 편에 이상한 소문도 들리고 이상한 서적도 보았고 이상한 물건도 보았다. 십자가(十字架)를 통하여 천국(天國)을 이루는 것과 신약 구약이란 글과 자명종 화포 등은 다 우리나라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것이다. 신비를 좋아하던 남인 중 학자들이 이를 연구하여 그 편 학자들과 접촉이 되어 과연 서양에 큰 나라 문명한 나라들이 있는 것을 알고 그들의 조직된 나라는 무엇으로 부강한 것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상 조선이 여기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 연구하였다. 소위 서양학(西洋學)은 곧 천주교(天主敎)이다. 천주교는 선조 임진년부터 포도아 선교사 세쓰베데쓰가 조선에 들어와 천주교를 전하였으나 그때는 전쟁 중이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그 후 숙종 10년에 들어왔으나 역시 사교금지로 전치 못하였고 정조 때에 와서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간 이벽(李檗) 이승훈(李承薰) 두 사람이 천주교를 믿고 두 사람은 북경 천주교당에 가서 선교사를 보고 천주교의 서적을 가져오고 두 사람은 귀국 후에 동포들에게 전도하여 신도가 점점 많아지더니
김이소(金履素)의 상소로 인하여 금지되고 또 북경서 사오는 서적까지 금지하고 또 그 후에 채제공의 상소로 인하여 천주교의 선포를 금하였으나 그 가운데도 북경에 와있는 천주교 사교에게 청구하여 정조 18년 12월에 중국으로부터 파송한 주문모(周文謨)가 복장을 고쳐 입고 가만히 경성에 들어와 신자의 집에 숨어 있으며 포교에 종사하여 경기도 광주와 충청북도 제천과 충청남도 내포 등지에 교회가 가장 왕성하더니
순조 원년에 교인 황사영(黃嗣永)의 입으로 발각되어 많은 교도가 잡혀 죽고 주문모도 같이 죽었으며 교도 중 신망 있는 자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등 그 외 여러 귀천남녀를 묻지 않고 잡혀 죽은 자 오천 명에 달하며 이런 무서운 핍박 중에도 로마 법왕으로부터 불국사람 부리에계루와 선교사 암베루와 모반 등 세 사람이 헌종 2년 12월에 조선에 들어와 교도 정하상(丁夏祥)의 집에 유하더니 또 발각되어 주육을 당하고
철종 즉위 하신 때부터 왕이 금령을 좀 늦추어서 선교사 메이쓰돌과 베루네와 오베돌 등 삼인이 또 조선에 들어와 포교한 결과 신도가 다시 왕성하여 전국에 충만하였다. 대개 천주학이 서쪽에 나왔다 하여 서학이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