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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민의 주적개념>의 줄거리:
‘2014 국방백서’를 보면, “...천안함 공격·연평도 포격과 같은 지속적인 무력도발 등.....이러한 위협이 지속되는 한 그 수행 주체인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화와 교류를 일끌어 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어쩌지 못해 갈팡질팡합니다. 그러면 선민에게는 주적이 누구입니까? 사단입니까? 그러면 선민에게 북한은 무엇입니까? 역시 주적입니까? 사단의 앞잡이라서? 복지 안보를 위하여 선민의 주적개념을 명확히 해봅니다.
선민의 주적개념
(사사기 3:1~6)
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선민의 주적개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선민의 주적개념’
2014년 국방백서를 보면 국방 목표를 발표함에 있어서 북한을 우리의 주적으로 명시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천안함 공격이나 연평도 포격 같은 무력도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도 수소폭탄을 실험해서 성공을 했다며 자축을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위협이 지속되는 한 그 수행주체인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주적입니다.
그런데 이 주적개념이 당국자들 간에도 갈팡질팡합니다. 1995년 국방백서에서부터 북한이 주적개념으로 등장했다고 기사에 나와 있는데, 1992년의 국방부 정책 발표를 보면 그동안은 북한만을 주적으로 명시해 왔었는데 앞으로는 주변 열강들의 잠재적 군사 위력도 적의 개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1992년 이전에도 북한이 주적개념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다 1995년의 국방백서에 다시 등장을 했다가 2000년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뒤로는 주적개념이 논란이 되어서 2004년부터 없어졌다가,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 이후에 현재의 북한정권과 북한군이 주적 형태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이렇듯 보수진영과 진보적 좌파 진영의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의견이 늘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려운 점은 평화적인 대화의 노력을 중단할 수도 없고, 마냥 평화적인 분위기와 기대 속에 빠져있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비난하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현 정권도 갈팡질팡합니다. 예를 들어 대북확성기를 껐다가 켰다가 껐다가 다시 켰습니다. 북한이 100% 주적으로 대화나 타협이나 평화적 교류의 가능성을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면 대북방송을 꺼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평화적 교섭에 방해가 될 것 같기에 껐다가 목함지뢰 사건이나 수소폭탄을 실험했다고 다시 켜는데, 글자로만 주적개념이 있고 실제로는 평화적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인데, 이 예측할 수 없는 북한의 태도에 참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실제로 주적이기만 하고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라고 하면 우리가 선제공격을 통해 무찔러도 되는데 그럴 생각은 못합니다. 이렇듯 방어적이기만 해야 하는 상대가 주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 신앙인은 북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신앙인에게도 북한은 글자로라도 명시해야 되는 주적일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아버지께서 이북에서 피난을 오셨습니다. 친가 쪽으로는 고모 밖에 안계신데 이북에서 오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절대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의견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몸에 밴 성향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늘에 계시며 세계 전체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전하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 세상에서 후천적으로 취득된 성향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우파 성향도 좌파 성향도 아닌 신앙만의 자체 논리가 있습니다. 이 신앙의 논리로 볼 때에 북한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는 목적이 이것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아주 귀중한 실마리를 우리에게 제공해줍니다. 본문의 목적은 진정한 신앙인에게 있어서의 주적개념을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명히 하다보면 성향에 휘둘리지 않는 신앙의 논리에 입각해서 북한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논리’라는 것은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라 내 주관적 성향에 휘둘리지 않는 신앙의 진리에 입각해서 볼 때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전쟁을 선봉에 서서 이끌어 갈 때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모든 땅을 정복하지는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수아의 손에 가나안 전체를 다 넘기시지 않고 남겨두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거점을 확보하고 땅을 분배했습니다. 그런데 분배된 땅 안에 가나안 족속들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지파별로 정복해나가도록 합니다. 이 현실이 하나님의 의도에 의한 것인데, 오늘 본문 1~4절에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족속이라 /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고 하십니다.
이방 민족을 남겨두신 이유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들이, 잔류하여 남은 이방민족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보시고 싶어 하셨던 것인데, 그 이방민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표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오히려 앞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삿2:2~3절에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라고 하시는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연평도 포격 사건이라든지 천안함 공격 사건 같은 일이 있을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 때의 북한에 대한 주적개념이 희미해진 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공격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빛정책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공격은 당연합니다.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같은 좌파적 성향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북한의 주적개념이 유지되고 강화되지 못하고 희미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박근혜 대통령도 딜레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적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100% 주적개념을 가진 상태에서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우리 측에서 북침을 해서 북한을 어떻게 점령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이스라엘 선민들에게 역사의 칼자루가 넘어 가면서, 잔류한 가나안 민족들에 대한 주적개념이 사라져버립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이나 전쟁 이후의 후유증을 경험하지 못했던 세대들은 북한에 대한 주적개념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는데, 본문은 그러한 주적개념의 승계가 불투명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알숭배에 빠져있는 가나안 족속들과 관계를 맺지 말라’고 하신 것은 ‘바알숭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멸절시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과의 단절은 모세나 여호수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속에서 결정되었던 생각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세나 여호수아에게서 나온 주적개념을 지원해주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주적으로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모세나 여호수아는 한 순간도 가나안 족속을 주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으면서도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했고 진멸시킨 당사자들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을 주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첫 번째 마음속 과제로 삼은 것은 어떻게 하나님께 마음을 붙일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조금의 유격도 없이 온전히 연합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했더니 하나님의 마음속에 사랑하는 선민들과의 관계에서 정해 놓으신 주적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주적개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주적들을 진멸시키시려는 계획에 올라탄 것이지, 모세나 여호수아가 가나안 사람들을 주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승계되지 못한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들이 가나안 족속들과 연합하고 결혼하고 계약하고 관계를 맺고 이들의 종교를 따라가게 된 것은, 주적개념이 흐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을 주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승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세로부터 여호수아와 갈렙과 동시대의 장로들로 승계되었던 하나님과 연합하는 신앙이 다음 세대로 승계되지 못하므로, 하나님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 족속을 주적으로 생각하시는데, 그 하나님과 연합하지 못하므로 가나안 족속과 친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선민들에게 진짜 주적이 누구인가가 명확해집니다. 우리 선민들의 주적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되어진 유전 죄의 성향으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 중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끌어당기고 싫어하는 것은 피하려고 하는데,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유격이 생기고 간격이 생기고 거리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주적과 이웃을 구분해 낼 수가 없게 되어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주적과 친하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웃을 원수시하며 이상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할 때에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그 마음이 하늘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육체에 마음이 머물러 있거나,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마음에 담아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자기 육체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 기도가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유격 없이 연합하다보니, 스데반의 몸을 치는 자들에 대해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이관되어져서 그러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주적은 우리 속에 있는 유전 죄이고, 그 유전 죄가 생기도록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입니다. 그런데 사탄을 대적하는 것이 구체적이질 않습니다. 우리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면 사탄을 대적하는 것인 줄로만 압니다. 오히려 그렇게 소리치는 그 마음 상태가 이미 사탄에 먹혀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병이 생기면 무조건 사탄이 병을 준 것으로 생각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선민에게 고난을 가져다주신 당사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고난을 향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사탄 편에 서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처럼, 사탄의 이름을 부르며 대적하면서도 내 마음은 사탄의 추종자일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사탄의 영향력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선악을 판단하게 함으로, 좋고 싫음을 마음에 끌어들이게 하여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자꾸 이 세상 것에서 좋은 것은 소원해서 끌어들이고, 싫은 것은 피하려고 하는 좌우로 치우치는 나의 성향이 나의 주적인 것입니다. 이 주적을 없애고 하나님께 내 마음이 붙기만 하면, 이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적으로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무찌르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대상이 이웃이라면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10:34~35, 38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내가 나를 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십자가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십자가에 거는 것은 나를 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적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서 그것만 가지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서 세상 것을 끌어들이려는 나, 반대로 이 세상 것을 싫어해서 피하려는 나, 그 내가 바로 개인적으로 나의 주적인 것입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적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좋아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고 마음이 죽으세요. 북한을 끌어들여서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면 이미 하나님과는 그 문제에 대해서 유격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서 부활과 승천에 연합하면서 아버지께로 마음이 가야합니다. 가면 북한에 대해서 하나님아버지가 가지신 생각이 있으신데 그 생각을 우리가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북한에 대한 정책을 입안하는 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신앙을 가진 자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대북정책이 갈팡질팡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북한에 대한 생각이 전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을 무조건 싫어해서는 우리는 절대로 진리에 입각한 관계를 해나갈 수 없습니다. 미워하지도 마시고 싫어하지도 마시고 일본에 대해 죽으세요. 그리고 우리 마음은 모두 하나님께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본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은 일본이나 북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내 자식이나 아내 남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나 남편, 자식이라서 무조건 좋아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마10:36절에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적이라는 것인데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 마음에 하나님보다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빼앗아가는 것이고 원수가 됩니다. 우리의 주적 개념은 내게서 하나님을 빼앗아가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주적이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북한이나 일본이 주적이 아니고, 주변 강대국의 잠재적 군사력이 주적이 아닌 것입니다. 내게서 하나님을 빼앗아 가는 자들이 주적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와 남편이 주적일 수 있고 우리나라가 주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주적개념이 분명한 사람만이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습니다. 내가 20~30년 동안 애써서 가꾸어 온 사업이 나의 주적인데, 나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만드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주적개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업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사업에 대해 가지고 계신 생각이 있으십니다. 그 생각을 따라가면 됩니다.
우리가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과 다윗 같은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승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유격을 없애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주적개념을 승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우리가 관계해야 될 모든 대상에 대한 성격 규정은 하나님 아버지가 해두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주적은 내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먼저 관심사가 되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리고 나면 이 세상에서 상대해야 될 모든 대상들은 하나님이 결정하신대로 상대하면 될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로 우리의 주적을 날마다, 매 시간마다, 매 분마다, 매 초마다 물리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내게 전부인 하나님을 빼앗아 가는 주적들을 파악조차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온전한 복지의 안보를 견고한 반석위에 세우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