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완서, 《세상에 예쁜 것》
* 바람직한 인간상
제가 박경리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리라고 마음먹었던 것 중에 하나가 육체노동입니다. 육체노동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정신노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풍토에서 균형 잡힌 인간상은 실생활 속에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조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경리 선생님은 밖에서 육체노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나는 이것을 글을 쓰는 정신노동의 휴식으로 삼는다, 또 육체노동의 고됨을 달래주는 것이 정신 노동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뜻의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진짜 건강한 인간은 몸을 움직여 결과를 보는 일을 천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신 노동하는 사람에게 육체노동이 중요하듯이 공장에서 일하거나 농사 등,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사람도 틈틈이 책을 읽거나 음악, 미술 등을 감상함으로써 정신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이상적인 인간상이 될 겁니다.
상동, p.61~62
* 문학을 꿈꾸는 소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마디?
♤저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6.25가 나고 휴전이 되기 전에 결혼해버려서, 국문과에 가긴 했지만, 정식 문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대신 고등학교는 지금처럼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니어서 선생님 재량껏 독서 지도와 토론으로 문학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창작 시간도 따로 있었으니까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학교(숙명여고)에 박노갑 선생님이란 중견 작가분이 국어 선생님으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좌익 단체인 문학가 동맹에 들고 그러셨는데, 6·25 때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근래까지 문학사를 다룰 때 복자(伏字)라고, 가운데 이름을 지워서 '박ㅇ갑'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우리 담임이셨고, 국어, 창작, 문학개론 같은 것을 마음대로 가르치셨는데, 해방 후에 우리 글, 문학에 대한 정열이 많아서 고전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일본말로 된 얄팍한 연애소설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런 책을 빼앗기도 하면서 혼을 많이 내셨습니다. 창작 시간에 선생님이 진저리치며 싫어하시는 것이, 우리 또래들이 경험의 무게가 실리지 않은 허황하고 감상적인 미사여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경험에서 나온 것을 써라. 그리고 쓸 게 생겼다고 금세 쓰지 말고 속에서 삭혀라. 그게 제일 인상적이어서 저는 친구들과 여고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박노갑 선생님의 그 말씀 생각나니? 하고 물어보면 기억하는 친구가 거의 없는데 저는 이상하게 그 말씀을 못 잊습니다.
또 하나, 선생님이 포도주를 만들 때 너희들 뭐가 필요한지 아니? 물으셔서 포도, 설탕, 소주, 이렇게 대답을 하면 또? 그러셔서 항아리 등, 별의별 대답이 다 나오면 선생님은 포도주는 포도를 버린 것이 땅에 고여 시간이 지나 발효하여 술이 된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하면서, 포도주가 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아! 오오! 따위 감탄사를 함부로 쓰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에 감동해서 쓰고 싶은 것이 생기면 속에서 삭여서 그것이 발효되면 쓰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온다. 폭발이 일어난다. 그것이 안 되고 잊혔다면 그 소재는 포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뭐가 될 것은 반드시 속에서 폭발이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철없는 우리보다는 당신 스스로 하신 말씀이 아닌가 싶어 아직도 기억하고 있고 여러분에게도 혹시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전해드리는 겁니다.
2009년
상동, p.65~67
** 작가가 되고 싶은 어린이에게
* 이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습니다. 작가는 다른 작가와 겹치지 않는 자기만의 글을 어떻게 만들 수 있나요?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도 작가의 경험이 전혀 섞이지 않은 상상력은 없는 법이다. 다행히 인간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도 타인과 똑같은 체험을 할 수가 없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감수성이 다르니까. 의식적으로 표절을 하지 않는 이상 겹칠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상동, p.71
* 글을 쓰는 것은 항상 혼자 하는 일이지요? 글을 쓸 때 외로워지지 않나요?
외로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동, p.71
* 자기가 쓴 글이 남들로부터 인정받을 때가 더 기쁘신가요? 아니면 자기 스스로 잘 썼다고 생각할 때 기쁘신가요?
신인 적에는 남들이 안 알아주면 불안했는데 지금은 안 그렇다. 자기만족의 기쁨이 더 크다.
상동, p.72
*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할까요?
공부 열심히 하고 책 많이 읽고 자기 나이에 맞는 경험을 소홀히 하지 말고, 가족, 친구,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관심을 가질 것.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말 것.
** 의연한 나목을 볼 때마다
~ 김상옥 선생님을 기리며
숲이 무성한 동산을 우리 마당처럼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는 교외에 사는 걸 늘 행복하게 생각했는데 계절이 만추를 지나 초겨울로 접어드니 그렇지도 않다.
바로 엊그제까지도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물든 은행나무가 우중충한 밤나무숲에서 유난히 돋보이더니, 하룻밤 비바람에 나무의 마지막 영광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다른 나무들과 다름없는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내 마당도 마찬가지다.
......
숲이 가까우니 바람 소리도 가깝다. 초저녁잠이 많아 새벽에 일찍 깰 수밖에 없는 나는 남 다 자는 시간에 호젓이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날 하루 할 일의 계획도 세우는 게 습관화돼 있다.
그러나 우수수…….
......
이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보다 저세상에 더 많구나, 그런 생각이 나를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들 역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제는 떨굴 잎사귀조차 안 남은 채 의연한 나목을 볼 때마다 특히 그립고 생각나는 저세상 사람은 고 박수근 화백과 김상옥 선생님이다.
박수근 화백은 그를 주인공으로 해서 쓴 소설 <나목>이 나에게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게 해 주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쳐도 감상옥 선생을 나목과 연관 지어 잊을 수 없는 사연은 나만 꺼내 보고 싶은 보물이다.
그분, 예술 전반에 대한 심미안과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유난히 까다롭고 엄혹하기로 유명한 그분이 내 처녀작 <나목>을 읽으시고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나를 데뷔시켜준 <여성동아>에 기고해주셨다.
참으로 진한 눈물 눈에 어찌 비칠 건가
어느 치운 겨울 나목(裸木)¹으로 울려놓고
가시에 찔린 마음들 이웃²하고 사니라
시조 뒤에는 주까지 붙이셨다.
1. 그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의 제목
2. 그녀의 문학 속엔 언제나 가난하고 마음 아픈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있다.
주를 단 선생님의 마음속엔 나의 실제보다 나에 대한 기대가 더 많이 서려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 앞에 아직도 부끄럽다.
이 시조 말고도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게 너무 많다. 선생님이 남편과 나를 위해 아름다운 시구와 그림을 그려주시고 선생님 마음에 들게 표구까지 해 주신 한 쌍의 부채는 내가 어디로 가든 한결같이 내 안방 머리맡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건 누구나 볼 수 있고 위의 시조는 나만 때때로, 특히 가을에는 자주자주 꺼내 보는 나만의 보물이다.
김상옥 선생님, 그립습니다. 2009년
상동, p.236~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