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에서 나오는 길에서 머지 않은 곳에 금평저수지가 있다
대순진리회와 관련된 동심원 옆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저수지 둘레길을 걸었다 데크로 잘 조성된 둘레길이다
동쪽 동(東), 같을 동(同), 아이 동(童)자를 쓰는 동동동심원은 '어린 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동이민족을 사랑하라'는 뜻이란다."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와 청도리에 걸쳐 있는 금평저수지는 1961년에 축조되었으며 모악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일명 오리알 터로도 불리는데 풍수지리에 밝았던 도선이 장차 오리가 알을 낳는 곳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도 깨끗하고 물도 깨끗한데다 찻집에서 흐르는 음악소리도 맑고 청아했다
금평저수지(金坪貯水池) 입구에서 바라본 동곡마을은 우뚝 솟은 제비봉(帝妃峰)과 수리개봉(水利開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깊고 짙은 쪽빛의 금평저수지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상제님을 신앙하는 한 교단인 증산법종교(甑山法宗敎) 본부가 보인다. 그곳을 지나서 수리개봉 아랫마을에 다다르면 동곡약방(銅谷藥房)과 그 바로 앞에 증산법종교에서 분파된 청도대향원(淸道大享院)을 볼 수 있다.
동곡은 『전경』에 나오는 중요한 지명 중 한 곳으로 52회 나오며, ‘구릿골’이라는 명칭으로는 16회 나온다. 이 마을은 상제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랐던 김형렬 종도의 집과 상제님께서 화천(化天) 하신 장소인 동곡약방이 있는 곳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수변 문화 체험 숲을 조성한 금평저수지 일대는 가로수가 터널을 이루어 특별한 운치를 자아내고 있는 곳으로 산책과 드라이브 코스로도 각광받고 있으며, 주변에 증산교본부를 비롯한 각종 신흥 종교 단체들이 운집해 있어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는 역사 문화의 보고이기도 하다.
수변로에는 조릿대 군락지도 있어 탐방에 또 하나의 운치를 준다
구성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도 있다
저수지 아래 신평마을, 캠핑장도 있어 여름엔 자연 속에서 별총총 하루밤이 근사하겠단 생각이 든다
저수지 둑방에서 보는 대순진리회 동심원과 모악산
저수지 오른편으론 증산도본부가 위치해 있다
보천교 교도였던 이상호가 세웠다. 그는 보천교의 핵심간부인 60방주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과의 불화로 인해 교단을 탈퇴했다. 그는 증산교의 전통을 확립하고자 증산교의 경전에 해당하는 〈증산천사공사기 甑山天師公事記〉·〈대순전경 大巡典經〉을 간행했으며, 그후로 나머지 다른 증산교단과는 달리 많은 문헌을 발간하여 증산교의 교리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교리와 의식상의 특징은 단군·수운(최제우)·증산을 동시에 모시는 삼단신앙체계이다. 즉 홍익인간·인내천·인존사상을 각각 재세이화·무극대도·천지공사와 연계시키고 있다.
이상호는 1880년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업하였다. 26세 때 만주와 북경 등지를 유전(流轉)하다가 28세 때 태을교(太乙敎, 또는 仙道敎:뒤의 普天敎)에 들어갔다.
점점 친일적으로 기울어지는 차경석을 보고 이를 배척해 탈퇴하였다. 1928년 그는 임경호(林警鎬)·이정립 등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용화동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이름으로 별도 종교를 창립하였다.
그 뒤, 이상호는 증산산교의 창교자 강일순(姜一淳:호는 甑山)의 행적과 언행을 수집하여 1929년에는 ≪증산천사공사기 甑山天師公事記≫, 1929년에는 ≪대순전경 大巡典經≫이라는 증산교단 최초의 경전들을 간행하였다.
1945년 이상호는 서울에서 최위석(崔偉錫)·이정립과 함께 많은 신도들을 모아 대법사(大法社)를 조직, 증산사상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948년 13개 증산교단이 모여 연합체를 조직할 때 교명을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라 고쳤다가, 1961년 민족종교단체 통합정책에 따라 동도교증산교회(東道敎甑山敎會)로 바꾸고, 1968년에 다시 증산교본부로 바꾸었다.
금평저수지를 한바퀴 돌고 근처 남강정사를 찾았다
남강정사는 전북 김제시 금구면 상신리에 있는 주택으로 전라북도기념물 제64호이다. 한일합방 때 단식 자결한 일우재 장태수의 생가로 자연석을 2단쌓기로 기단을 만든 후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지은 一자형 겹집의 초가이다.
그러나 한창 공사중으로 어수선해 이내 나와 광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