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디어】 김현준 기자 = 이 차는 미니밴이다. 미닫이문이 달려 있고, 합법적으로 7명이 탈 수 있으며, 시트를 접어 짐차처럼 쓸 수도 있다. 아무튼 크라이슬러 ‘그랜드보이저’는 미니밴이 갖춰야 할 건 다 가졌다. 하지만 그리 매력적이진 않다. 눈에 띄게 잘생긴 외모도 아니고, 경쟁 모델들을 압도하는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며, 가격도 경쟁 모델들보다 비싸다. 참고로 그랜드 보이저는 2012년까지 5,860만 원에 팔렸다. 2013년에는 잠시 판매가 중단되더니, 2014년에 편의장치를 늘리면서 가격을 올리고 복귀했다. 9인치 모니터, 등받이 테이블, 블루레이 플레이어 등 몇몇 옵션을 추가한 2014년형 그랜드 보이저는 6,070만원이다. 내심 걱정되는 가격이다. 오늘 오전에 기아자동차에서 신형 카니발을 내놨다. 디젤엔진에 버스전용차로 갈 수 있는 9인승, 11인승 카니발은 그랜드 보이저의 반값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랜드 보이저만의 매력은 도대체 뭘까? 3박4일 동안 샅샅이 뒤졌다.
이렇게 접고 저렇게 빼는 다목적 시트
그랜드 보이저는 7인승이다. 버스전용차로는 달릴 수 없지만, 널찍한 공간에 시트가 딱 7개다. 7개 시트는 모두 편하며 여러 방향으로 조절되고, 접거나 뗄 수도 있다. 2열 시트는 뺄 수 있고, 3열 시트는 끈을 4번 잡아당겨서 접어 넣을 수 있다. 장점이라면 장점인데, 혼다 오딧세이는 같은 동작을 끈 한 번 잡아 당기는 걸로 해결한다. 토요타 시에나는 이 동작이 전동식이다. 또한 신형 카니발의 4열 시트 역시 끈 한 번 잡아당기면 바닥으로 들어간다.
새로 추가된 옵션 ‘블루레이 플레이어’
생소하다. CD 플레이어도 아니고, DVD 플레이어도 아닌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들어 있다. 블루레이는 CD와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35배 이상 많은 데이터를 담을 수 있어 차세대 저장 매체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블루레이를 한 번 재생해보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결국 못 구했다. “요즈음 블루레이 누가 쓰나? 64기가 메모리도 얼마 안 하는데” 이런 얘기만 들었다.참고로 블루레이와 DVD는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이 올해 초에 발표한 ‘5년 내에 사라질 5가지 기술’에 포함되기도 했다.
여기도 번쩍 저기도 번쩍, 크롬 장식
빛을 받은 그랜드 보이저는 ‘번쩍 번쩍’ 빛난다. 크롬 도금된 라디에이터 그릴, 사이드미러 커버, 문 손잡이 등이 번쩍 번쩍 하다. 그런데 썩 잘 어울리진 않는다. 대형세단에 붙은 크롬 장식은 고급스러운데, 미니밴에 붙여 놓으니 어딘지 모르게 애잔하다. 청남방 소매에 반짝거리는 커프스 버튼을 달아논 느낌이랄까? 요즘은 미니밴의 고급감을 높일 때 주로 품질을 향상시킨다. 실내에 고급 소재를 사용하거나 조립 등의 마감을 꼼꼼히 다지는 게 트렌드다.
물침대 승차감, 과속방지턱 넘을 땐 턱 조심!
과속방지턱을 넘을 땐 ‘턱’을 조심해야 한다. 속도를 과감히 줄이지 않으면 그랜드 보이저가 턱을 다친다. 앞 범퍼 아래가 긁힌다는 얘기다. 푹신한 서스펜션과 길게 나온 앞 범퍼 때문으로 추측된다. 오딧세이는 같은 방지턱에서 앞 범퍼를 긁히지 않았다. 시에나로는 안 넘어봐서 모르겠다. 어쨌든 과속방지턱만 조심하면 딱히 모자라는 건 없다. 승차감이 물침대처럼 부드러운데도 제법 잘 달린다. 연속된 코너들도 노련하게 해치우고, 고속도로에서는 바닥에 묵직하게 깔린다. 물론 승차감도 편하다.
엔진과 변속기에서 머슬카를 느꼈다
우렁찬 배기음과 다소 헐거운 변속기에서 미국 머슬카의 향취를 느꼈다. 가속페달을 밟으면 엔진이 ‘그르르릉’ 거리며 울고, 변속기는 힘을 잠시 모았다가 용맹스럽게 분출한다. 컨트롤하는 재미보단 화끈한 맛을 즐기는 미국식 셋팅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이런 취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쫀득하고 손실 없는 독일차 스타일이 대세이긴 하지만, 세상엔 참 독특한 취향이 모여 산다. 한국에서 미국색 짙은 미니밴을 사고 싶다면, 사실상 그랜드 보이저 밖에 없다.
미국에서 태어난 유별난 고집
주유구 뚜껑을 열려면 열쇠를 꼽아 돌려야 한다. 셀프 주유가 일반적인 미국 문화 때문이다. 수납 공간은 많은데 의외로 선글라스 케이스는 없다. 선글라스는 주로 케이스에 넣어 수납함에 넣는다고 한다. 덩치는 산 만한데 휘발유를 태운다. 3.6리터 6기통 가솔린 엔진의 연비는 리터당 7.9km(복합)다. 기름값이 그나마 저렴한 미국에서는 용서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선 외면당할 숫자다. 이래저래 그랜드 보이저에는 물음표만 가득 붙는다. 시승기에 기자의 취향이나 고집을 넣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이 차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하지만 세상엔 다양한 취향이 어깨를 기대고 산다. 줄무늬 셔츠를 고집하는 남자와 꽃무늬 쫄티만 입는 여자가 엉켜 산다. 대체 그랜드 보이저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한국수입차협회 통계자료에서는 2014년에 14명이 크라이슬러 그랜드 보이저를 구입했다고 표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