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여름의 오멜라스에는 축제가 펼쳐진다. 멋진 예복을 차려입은 이들과 아이를 안은 명랑한 여인네들로 이루어진 축제의 행렬과 음악소리가 온 도시를 굽이치는 장관이 펼쳐진다. 축제의 행진이 끝나는 초록 들판엔 벌거벗은 아이들이 진흙탕에서 놀고, 금색, 은색 리본을 매단 말들이 위세를 뽐낸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했다.
이들이 행복하게 산다고 해서 결코 단순무지한 사람들은 아니다. 오멜라스엔 힘쎈 왕도, 규칙도 없었다. 그들은 군주제나 노예제를 채택하지 않은 것처럼 주식이나 광고, 비밀경찰, 폭탄 없이 잘 지냈다. 다시 말하지만 오멜라스 사람들은 단순무지하지 않았고, 유쾌한 양치기도, 고결한 야만인도, 유순한 유토피아주의자도 아니었다.
종교는 있지만 신성을 더럽히는 방종도, 억압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청교도적 규율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때로 드루즈에 취해 나른한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고 맥주 한잔에 소박한 축배를 들 줄 알았고 군인이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었다.
오멜라스의 아름다운 공공건물 중 하나의 지하실엔 방이 있다. 굳게 잠긴 문이 하나 있을 뿐, 창문도 없다.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한 줄기 빛과 녹슨 양동이, 두어 자루의 악취를 풍기는 자루걸레가 있는 그 방엔 어린 아이 하나가 산다. 태어날 때부터 정신 박약인 그 아이가 사는 지하방엔 가끔 누군가 들어와 아이를 발로 차 일으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단지 놀랍고 메스꺼운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한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음을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왜 그 아이가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도시의 아름다움, 사람들의 행복, 정, 아이들의 건강, 학자들의 지혜, 장인들의 기술, 심지어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조차 전적으로 혐오스러울만큼 비참한 그 아이의 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오멜라스의 아이들은 열 살 무렵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지하의 아이를 보러 가기도 하는데 젊은 구경꾼들은 언제나 충격을 받고 가슴아파하고, 토할것 같은 기분과 분노, 무력감에 빠진다.
아이를 햇살이 비추는 곳으로 데리고 나가 잘 씻기고 잘 먹인다면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부터 오멜라스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진다. 그게 계약이다. 단 한가지의 사소한 개선을 위해 오멜라스의 모든 사람들이 매일의 행복과 바꾸어야 한다는 그 이유가 지하에서 벌어지는 죄악을 방기하는 이유이다.
그 아이에 대한 행위에 가슴아파하는 이들은 이토록 끔찍한 정의를 알아차리고 수긍할 때쯤 메말라 간다. 어쩌면 그들의 눈부신 행복이야말로 눈물과 분노, 관용의 차단과 무력한 수긍을 거친 결과일지도 모른다. 무책임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이따금 지하실의 아이를 본 청소년들 중엔 눈물 흘리고 분노에 찬 채로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하루이틀쯤 침묵에 잠겨있다가 밤이 오면 마을을 떠나 어둠속으로 걸어들어가서는 다시는 오멜라스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가는 곳은 이 행복한 도시를 상상하는 것 보다 더 상상하기 어렵기에 제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그런 곳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Ursula Le Guin作,
<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요약
탄핵 1주년(2018년 3월에 쓴 글)
공중파 뉴스만 본 90의 노파도 ‘죄없는 대통령을 끌어낸 나쁜 놈들’이라고 욕하지만 충분한 정보를 접하고 있는 우리들은 모든 것이 명백히 그릇되었음을 알고도 그것을 바꾸고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십 가지 이유를 찾아냈다. 언론을 뺏겼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간절함이 외면당하거나 우스꽝스럽게 포장되는 현실 앞에 곧 죽어도 멋이 중요한 우파 대다수는 진실을 일단 묻어두고 모른척하는 데 잠정합의한 것이다.
우파는 아무것도 바꾸거나 막지 못했다.
대한민국 좌와 우의 공통점은 그녀를 가두고 봉인함으로써 오멜라스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좌로부터 '부정부패'라는 거짓의 죄를 덮어쓰고 우로부터 '무능'의 죄를 추궁당한 어떤 지도자는 이제 다수의 행복을 위해 어둔 방에서 정신박약의 어린아이만도 못한 반병신이 되어야 한다.
정치적 지도자는 어차피 용도폐기 후엔 버리면 되는 카드이니 버린 카드를 아쉬워말라는 어떤 이들의 글을 읽고 그것에 동조하는 이들의 반응을 보며 낙담한 것은 기껏 우파랍시고 그려내는 세상이 하나의 오멜라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모두의 행복을 보장하지도 못하는.
이 70년대의 소설이 지극히 좌파적 감성과 스탠스로 비판한 다수의 행복과 정의의 민낯을 확인하기에 2018년 대한민국의 보수, 우파+자유주의(라 쓰고 기회주의라 읽어 마땅한)무리만큼 적확한 사례가 있을까.
지금 힘과 정의에 취하긴 좌나 우나 매한가지다. 큰 차이는 좌는 그것을 가지고 취한 것이고, 우리는 갖지도 못한 것이다. 좌파들에게 현재는 정의의 승리이지만 우파인 우리는 오멜라스를 묵인하느냐 싸우느냐 중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탄핵이냐?'고 작은 양심의 소리를 망령으로 치부하고 그저 침묵이 능사인 단계로 바꾸거나, 저들보다 더 분노하여 지하방의 그를 혀끝으로, 손끝으로 때려눕히는 걸로 정신승리 중 이다.
한 사람의 희생을 빌미로 우리가 더 행복해야 하거나, 더 열심히 싸워 이겨야한다고 획책하는 것도 근본은 비겁함이다. 결과로 그릇된 출발을 포장하려는 행위에 대해서 첫째로 부끄러움이 먼저여야하고 둘째로 극복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어야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타협할 것이 아니라 분연히 떨치고 나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탄핵 1년. 우파 대부분은 지하방의 어둠을 외면하고 돌아와 그를 원망하는 것으로 현실의 방편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나아가 우파를 살리기 위해 차라리 장렬히 죽으라 한다. 불의에 대한 분노로 오멜라스를 떠나는 이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수의 환골탈태는 없었음이 증명됐다.
우파는 전혀 바뀌지 않았으므로, 바뀐 세상을 기대할 자격이 없다.
#우파의_탄핵을_인용한다_땅땅땅
- Alexander Wang (페이스북 친구)
첫댓글 오멜라스의 환상은 애초부터 알았지만 할 수 있는게 한정되어 있음에 답답합니다.
이 기만의 왕국을 진실의 빛으로 네로처럼 불싸질러야 (?) 체증이 내려갈런지....
대한민국의 위선적이고 야만스런 기만은 숨막히게 하지만 한편으론 세상과 인간을 통찰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