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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망교회[상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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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하나님 나라 스크랩 천국에도 상급이 있는가? (풀러 신학교 김세윤박사)
조해강 추천 0 조회 119 14.07.01 18: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11월 5일 한국복음주의신약학회가 주최한 제1회 국제학술대회가 서울교회(담임 목사 박노철)에서 열렸다.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치고 있는 김세윤 교수가 “행위에 따른 심판과 선행의 보상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Paul’s Teaching on Judgment according to Works and Reward for Good Deeds)”이란 주제로 발표했고, 이한수 교수

(총신대), 정연락 교수(안양대), 정홍렬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대학교)가 논찬을, 그리고 김경진 교수(백서대)와

최재덕 교수(장신대)가 패널을 담당했다. 다음은 김세윤 교수의 발표 내용과 논찬 그리고 패널 토의에 대한 요약이다.

 

구원의 완성 외에 별도의 상급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는 마지막 심판날에 구원을 받지만 이 땅에서 행한 일에 따라 상급은 달라질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김세윤 교수는 바울에게서 이런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바울 서신의 여러 본문들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바울이 말한 바, 그가 마지막 심판에 받게

될 ‘보상(misqov"미스쏘스)’이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도적 소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여, 자신이 세운

교회를 주 예수님 앞에 신실한 모습으로 세우는 것이며, 바울의 자랑은 바로 여기에 있고 하나님은 이같은 바울의

성공적인 소명 완수를 칭찬하는 것이지, 부가적인 어떤 상을 수여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먼저 고린도전서 9:24~25에 언급된 ‘상(brabei'on브라베이온)’과 ‘면류관(stevfano"스테파노스)’은 구원에 덧붙여지는

어떤 보상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적 소명을 다함으로써 하나님께 받을 상은 다름 아닌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한 것”(고전 9:18)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사도들은 아내를 데리고 다니고, 일하지 않고 먹었지만

바울 자신은 그 같은 사도로서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그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 모든 헌신은 마지막 날에 구원 외에 별도의 다른 어떤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에 참여하고자

(sugkoinwnov"슁코이노노스) 함”(고전 9:23)이었다. 즉 바울 자신의 고백처럼 그는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였기에(27절) 자신의 소명에 최선을 다하여 구원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만약 바울이 상급의 차이를 믿었다면, 다른 사도와 달리 사도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던 자신이 더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9장에 분명 말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복음 사역자들의 수고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각기

다른 재료로 집을 세우는 행위(to; ergon토 에르곤. 공적)로 묘사한다. 그런데 어떤 재료로 세우느냐에 따라 마지막 날에

있을 불의 테스트에서 그대로 있는가(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세운 경우), 불에 태워질 것인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운 경우)가 드러날 것이라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상(미스쏘스)’을 받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

 ‘해를 받게 될 것(zhmiwqhvsetai제미오쎄세타이)’이다.

 

바울은 자신이 상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듯한데(즉 자신은 금과 은, 보석 등으로 교회를 세웠다고 믿었던 것 같다),

여기서도 그가 받을 상이란 별도의 어떤 상이 아니라 자신이 애쓰고 수고한 교회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처럼 아름답고

찬란하게 건재할 것임을 말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신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혹은 “영광이요 기쁨”(살전 2:20)으로 언급한 것, 또 빌립보 교회를 자신의 “기쁨이요 면류관”(빌 4:1)으로 부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바울이 받을 ‘면류관’은 자신이 담당한 교회들이 끝까지 신실한 교회로 서 있는 것 그 자체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4:1~5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칭찬(epaino"에파이노스)’도, 고린도전서 9:15~16에서 말하는 ‘자랑(kauvchma카우케마, 16절)’도 바울이 자신의 소명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교회를 주 앞에 아름답게 세우는 것을 말한다.

구원과 소명의 통합적 이해바울은 자신이 마지막 날에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과 자신이 받은 소명을 이루는 것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목적은 그를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전 9:27). 그가 복음 전파를 “부득불 할 일

(ajnavgkh아낭케. 16절)”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그가 자신의 사도적 소명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 혹은

능력을 뜻하는 ‘은혜(cavri"카리스)’로 자주 언급한 것(롬 1:5, 12:3; 고전 3:10; 갈 2:9; 엡 3:2; 빌 1:7 등)도 같은 이유에서다.

 

 

하나님의 은혜와 소명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이미-그러나 아직 아니’라는 구원의 구조를 보여준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구원의 완성(consummation)을

받을 것이다. 성도들은 믿음/구원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함께 선취적으로(proleptically)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미

의롭게 되었다. 즉 죄를 사면받았고,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했다. 또한 성도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이 의로움의 완성 혹은 확증(confirmation)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회복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

서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전 10:12; 빌 4:1; 살전 3:8).

 

그것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통치에 계속해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순종은 일반적으로 ‘의의 열매들’ (빌 1:11; 롬 6:12~22; 살전 4:3, 7)을 맺는 것이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에

따라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맺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여된 소명을

이루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과 개별적

소명은 별개가 아니다. 왜냐하면 온유, 충성, 인내, 자비 등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고는 자신의 소명을 이룰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소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실제로 그랬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공적 사역이 아니라 인간적 관점에서의 성공이 될 것이다.

 

은혜로 인한 칭의와 행함에 따른 심판김세윤 교수의 위와 같은 주장은 자칫 다음과 같은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러면 성도가 만약 자신의 소명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한다면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 김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성령의 열매(의의 열매)를 많이 맺거나 교회를 금으로 세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최대한 누렸던 반면에 육신의 열매, 악의 열매를 많이 맺은 자들 혹은 지푸라기로 교회를 지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최소한으로 누릴 것이다. … 육신의 열매를 많이 맺은 성도들과 지푸라기로 교회를 지은

성도들은 비록 ‘육신의 열매들’과 ‘지푸라기로 지은 건물’이 심판의 불에 의해 타버리겠지만 겨우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이 이미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했으며 비록 최소한이기는 하지만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을 위해서도 마지막 심판 때에 중재하실 것이다.

” 그러나 김 교수는 믿음에 의해 한번 의롭게 되었지만, 그 다음에 믿음을 완전히 버린 자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세대처럼 고통 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언약적 율법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앞서 정리한 김세윤 교수가 말하는 상급과

선행, 구원과 행위에 관한 바울의 사상은 제2성전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와 매우 유사하다.

김 교수 자신도 자신의 주장과 언약적 율법주의 사이에 ‘형식적 유사성 혹은 연속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십자가의 속죄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요,

다른 하나는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이다. 유대교의 율법은 할 수 없었던 죄의 치유와 회복을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룰 수 있다.

마지막 심판 때 모든 성도는 궁극적 의인 됨을 선한 행위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속죄하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얻는 것이다.

 

논찬과 패널 토의 내용세 명의 논찬자는 전반적으로 김세윤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세부적인 사항에 있어서

의문을 제기했다. 먼저 이한수 교수는 이 땅에서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는 자들 혹은 교회를 금으로 세운 사람들과

육신의 열매를 맺거나 지푸라기로 교회를 지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데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정연락 교수 역시 구원 그 자체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불 심판을

거치는 가운데 차이가 드러나는 사실은 조화되기 어렵고, 오히려 고린도전서 4:5에 따르면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각기

다른 칭찬을 받게 될 것이라고 시사한 점을 말한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또 이한수 교수는 순종의 삶이 칭의의 믿음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육체의 행위를 습관적으로 행하여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지 못한다 해도 구원을 빼앗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한지, 그리고 믿음을 저버리는 것과 육체의 일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이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매우 타당한 의문을 제기한다.

 

 실제로 중생한 성도가 불순종에 빠져서 악을 행한다고 해서 언제든지 구원을 빼앗긴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 사고가

아니지만, 성경 저자들은 성도의 범죄와 불순종을 경고할 때 구원은 유지되나 상급은 상실된다고 경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것이라(갈 5:19; 고전 6:9~10; 엡 5:3~5)고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또 이한수 교수는 바울이 로마서 8:31~39에서 성도의 구원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정초시킴으로써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구원을 얻는 성도가 자신의 정체성을 회개와 순종의 삶으로 논증하라는 경고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런 신자는 사실상 처음부터 중생한 신자가 아니라고 봐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이한수 교수의 입장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만약 이 교수의 입장을 따른다면 우리는 누가

중생한 성도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사람이 중생한 성도인지는 끊임없이 회개와 용서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 순종의 삶으로 나가는가, 아니면 거부하고 계속해서 불순종에 빠진 삶을 사는가를

보고 판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한수 교수는 칼뱅과 박형룡의 견해를 인용하며 성도의 ‘구원 서정

(ordo salutis)’과 관련하여 성도의 선행을 강조한다.

 

 

칼뱅은 구원의 첫 단계에서 행위가 칭의를 야기하는 원인으로 보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지만, 마지막 영생에 이르는

과정에서 성도들의 선행이 그것을 야기하는 여러 원인들 가운데 ‘하위 원인(inferior cause)’이라고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박형룡 역시 칼뱅과 유사하게 성도들의 선행이 그들의 미래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밖에 정연락 교수는 고린도전서 9:1에서 ‘상’으로 번역된 ‘미스쏘스’를 ‘고용(hire)’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이해하면 바울이 말하는 바는 “나의 고용된 것(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에 있어서 나의 권리를 다 쓰지 않고 값없이 전하게 하려 함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정연락 교수는 바울이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할 때, 구원을 얻도록 하라고

 하지 않고, 굳이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고 한 것은 목회적인 의도가 있어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미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구원이 아니라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고 말함으로써 일종의 선의의

경쟁, 열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교육적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조직신학자인 정홍렬 교수는 많은 학자들이 구원은 믿음(은혜)으로 받지만 상급은 공로로 받는다는 입장에 서 있는

상황에서 구원의 완성 외에 별도의 상급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 김세윤 교수의 용기 있는 견해에 박수를 보내며,

 김 교수의 입장이 종교개혁의 중심 주제를 이탈하지 않는 매우 건강한 종교개혁적 입장이라고 평가한다.

먼저 정 교수는 상급에 관한 주요 신학자들의 견해를 언급한다.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나 영광에 있어서는 동등하지 않다고 보았고, 멜랑히톤도 고린도전서 3:8을

근거로 ‘상급의 등급(gradus praemiorum)’이 있다고 말했다. 하인리히 헤페(Heinrich Heppe)도 영원에서 영화의 정도

차이(gradus gloriae)가 있다고 보았다. 헤르만 바빙크도 성도는 그들의 신실함과 열심에 따라 다른 면류관과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루이스 벌콥도 천국의 기쁨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을 통해 볼 때 분명하다

(단 12:3; 고후 9:6)고 보았다. 이렇게 볼 때 김세윤 교수의 주장은 기존 개신교 신학자들의 상급론과는 차별성이 있는

용기 있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현대복음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스탠리 그렌츠의

견해를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상급에 대한 기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김과 삶에 불순한 동기를 도입할 위험성이 있으며,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성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다. 자칫 상급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 땅의 인간

사회처럼 계층 체제가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에서 부정되었던

인간의 자기 긍정 및 공로사상이 다시 등장하는 것이라고 그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정 교수는 우리가 받게 될

구원의 은혜에는 부족함이나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지만, 그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고

보아, 김세윤 교수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면서도 비록 업적주의 및 승리주의의 상급론은 경계해야 하지만, 교육적인

의미(장려)에서의 상급론의 효용성은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패널로 나선 김경진 교수는 고린도전서 9장은 상급에 관해 말하기보다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자신의

사도권 변호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질문했다. 이어서 최재덕 교수는 김세윤 교수가 고린도전서 9장에서의 주장을

바울서신 전체의 내용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나타냈다. 나아가 상급에 대한 이해는 바울서신

안에서만 국한해서는 안 되며 복음서와 히브리서까지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찬과 패널에 대한 김세윤 교수의

대답답변에 나선 김세윤 교수는 먼저 한국 교회의 구원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특히 장로교는 로마서 8장을 예정론과 연결하고 있는데, 사실 로마서 8장은 육신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며

성령의 삶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이를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부분, 최후 심판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호하신다는 견인의 부분에만 매달리고 구원

이후의 성화 부분은 약화시켰다고 비판했다. 또 한국 교회는 구원은 동일하게 받았지만 전도 열심히 하고 헌금을 많이

내는 등 교회를 열심히 섬기면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중세의 공로신학에다 샤머니즘적

축복론이 더해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김세윤 교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신자도 구원을 빼앗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항상 양쪽을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예정론을 펼친다.

이 예정론은 성도의 견인론을 위한 교리이며 우리에게 확신과 안도를 주기 위한 하나님 쪽에서의 구원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바울은 고린도전서 9:27~10:22를 근거로 구원을 빼앗길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가 논리적 긴장을 이루면서 함께 있을 때에 건전한 신학이 된다고 답변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dk6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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