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원동 성당의 설립 과정 *
가. 잠실리 본당의 설립
해방을 전후하여 약현 본당 소속의 공소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정착 단계에 있던 서초,강남 지역
의 전교 활동은 마침내 1947년에 이르러 신앙의 중심지를 갖게 되었다.
1947년7월, 이우철(시몬) 신부를 주임으로 한 잠실리 본당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당시 약현 본당의 주임으로 있던 이우철(시몬) 신부는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당시 잠실리 13번지 5호,
현 서초구 잠원동 신동 초등 학교 옆)에 고아들을 보육하는 성심원(聖心園)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성심원 내에 소성을 건립함으로써 이 지역의 공소 신자들은 이곳에서 주일 미사에 참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우철 신부가 이곳에 상주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이 지역 일대의 신자들 또한 이미사에 참례함으
로써 이곳은 실직적인 신자들의 상설 공동체로서의 본당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서울 교구는 이우철 신부의 전교 활동을 인정하고 성심원 성당을 중심으로 한
잠실리 본당(현 잠원동 본당)을 정식으로 설립 하였다.
그리고 성심원 원장인 이우철 신부를 잠실리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성심원의 설립일은 1947년 5월, 6월, 7월 등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현재 성심원에서는 이우철 신부가 중림동 본당에서 성심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던 1946년 7월을
설립일로 보고 있으니 잠원동 본당보다 1년이 앞선 셈이다.
당시 잠실리 본당의 관할 지역은 지금의 잠원동에서부터 사당동, 방배동, 반포동, 서초동, 양재
동, 역삼동, 논현동, 신사동, 압구정동, 청당동, 개포동 등이었다.
명실공히 잠실리 본당은 그 후 각 본당의 분할이 이루어질 때까지 서초, 강남 지역의 신앙 중심
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랫동안 중림동 약현 본당의 공소였던 이곳에 본당이 설립됨으로써 잠실리본당은1965년에 처음으
로 양재동 본당이 분할될 때까지 약 18년 동안 서초, 강남 지역의 복음 및 전교 활동에 있어서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성심원(聖心園)
성심원은 1947년 7월 10일 중림동 성당의 주임으로 있던 이우철 신부에 의해 당시 경기도 신동면
잠실리에서 창설 되었다. 1964년부터 중림동 성당의 주임신부로 봉직 하던 이 신부는 관할 지역
인 서울역 주변에서 떠돌던 고아들에 대해 사목 활동을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동년 7월 1일
에 고아5명을 중림동 교회에 수용.보육했던 것이 성심원을 창설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48-1949년에 걸쳐 성심원은 60명을 보육할 수 있는 원사와 성당 및 병원 건물을 미군의 원조로
준공 하였다. 또한 성심원의 운영을 돕기 위해 1949년 4월에 성가회(聖家會) 수녀 3명이 파견되
었다. 이들은 그 후 1955년 9월에 본원으로 귀환할 때까지 성심원의 운영을 본 궤도에 올려 놓는
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보육 시설의 체제를 구축해 가던 성심원은 6.25 사변으로 원사 및 성당 건물 모두 가파괴되는 피
해를 입었다. 당시 수용된 원아 65명이 피난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환
도 이후에도 원사의 소실로 새로운 원사가 재건될 때까지 영등포 성당 구내에 임시로 수용되었다.
그 후, 미군(존 P 캐논. 대위)의 도움으로 1954년 7월 18일에 원사 및 성당이 완공되었고 원아들
도 귀원함으로써 성심원은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다. 잠원동 본당으로 개칭
1970년대 접어들어 서초.강남 지역에 대한 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잠실리 본당의 관할 구역인 잠원
동 일대에도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었다. 잠원동 일대가 아파트 설립 지구로 지정되고 또한 이 지
역에 고속 버스터미널이 이전해 옴에 따라 신자들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잠실리 본당과 성심원이 있던 잠원동 부지가 1976년 10월 1일, 서울 특별시 도
시 계획에 의거하여 아파트 단지로 책정되었다. 잠실리 본당으로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감당하
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본당의 신축 문제를 시급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본당의 신축 문제는 성심원의 이전 문제와 맞물러 추진될 수밖에 없는 실정 이었다.
그리하여 1976년 6월 14일, 성심원 부지 1천50평 가운데 4백평은 서울 대교구, 나머지 6백10평
은 한신공영과 각각 계약을 체결하였다. 본당으로서는 서울 대교구의 도움으로 4백 평의 성당 신
축 부지가 확보된 셈이었다. 이때 확보된 4백 평의 신축 부지는 그 후 한신 공영측과 대토 계약
을 체결함으로써 현재의 본당 위치에 신축 성당을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앞서 1977년 12월, 강동구 잠실동에 ‘잠실 본당’ 이 설립됨에 따라 40년 동안 서초.강남
지역의 모본당으로서 복음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오던 ‘잠실리 본당’은 관할 지역의 중심 동
명을 따라 ‘잠원동 본당’ 으로 개칭하였다.
라. 에피소드
고아들을 돌보아 오던 이우철(시몬) 신부와 성심원에 관한 기사가 1983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 6
면에 게재되어 있다.
‘민중 속의 성직자들’ 이란 시리즈물 19회에 등장하는 이우철 신부는 ‘고아의 할아버지’ 로 묘사되어 있다.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천주교 안에서 ‘고아의 할아버지’ 로 널리 알려진 이우철 신부(68)는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 고속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파티마 성모 수녀원 구내 야산 기슭에서 고아들의 학비를 대줄
사과 복숭아 나무를 돌보고 있었다.
마침 겨울 방학을 맞아 시골 할아버지 집에 놀러 온 아이들처럼 서울 성심원에서 내려온 원아들
이 이 신부를 도와 과일 나무에 밑거름을 주고 재배법에 대한 설명도 듣고 있었다.
‘47년 봄 서울역에 나갔다가 해방의 와중에서 만주 북한 지역에서 넘어온 가족과 헤어진 아이들
이 방황하는 것을 보고 그중에서 어린애 다섯 명을 데려다 성당에서 기른 것이 고아들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였지요. 특별히 제가 사회사업에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불쌍해서 데려다 키
운 겁니다. 그 해 7월 성심원이 있었던 잠원동 한강 뚝 옆에 성당을 신축하고 정식으로 고아원도
설립했지요.
1941년 신부 서품을 받은 이 신부는 신의주, 서울 중림동 성당 등에서 보좌신부로 있다가 47년 잠
원동 성당의 신축과 함께 주임신부가 됐고, 고아원도 신축했다고 말했다.
지난 36년간 이 신부의 슬하에서 자란 원생이 1천 명을 넘고 지금은 초.중고교에 다니는 58명
을 파티마 성모 수녀원의 20명 수녀들의 도움을 받아 돌보고 있다.
‘처음부터 남자 아이들 전용의 고아원을 세웠어요. 당시 여자 보육원은 있었는데 남자 고아를 수
용할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의 마을 성심원」이란 정식 명칭도 남자 보육원이란 뜻에서
지었지요. 고아원 설립 후 가장 어려웠던 때는 6.25 동란 후 부산으로 피난을 못 가고 고향인 부
여가 북괴군에 점령되자 신부로서 애들과 같이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이 신부는 형님과 누님에게 65명을 맡기고 산속에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회상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고아들을 이끌고 올라 갔다가 1.4후퇴 때는 당시 서울 교구 안주교의 주선으
로 서울을 출발하는 마지막 기차편 으로 대구에 피난한게 가장 아슬아슬했다고 들려 주었다.
‘당시 서울에 올라와 보니 성당과 고아원이 몽땅 타고 폐허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쟁통에 고아
는 부쩍 늘어 1백 60여 명이 되고요.
성당 고아원을 다시 복구하고 무조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애들은 현재 설악 아파트가 들어선 샛강에 가서 물고기를 양동이로 잡아다 끓여 먹었구
요. 그렇게 큰 애들 중에 신부가 1명 나왔고 훌륭한 사회인 구실을 하는 사람이 많이 배출됨을
볼 때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80년 5월 성당 업무에선 은퇴하고 성심원 원장일만 보고 있는데 설날 생일 크리스마스에 백여 명
씩 성심원 출신의 성인이 된 아들들이 가족을 이끌고 찾아올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고아원 출신 아버지에게 자녀들이 ‘할아버지 어디 계시느냐?’ 고 물으면 바로 ‘신부님이 할아
버지’라고 대답하며 찾아온다는 설명이다.
중략...
50년대 처음 고아들을 데려다 키울 때는 ‘신부님’ 이라고 부르던 애들이 차차 정이 들면 ‘신
부 아버지’ 라고 부르고 요즘에는 ‘신부 할아버지’ 라고 부른다며 손자뻘의 원아와 얘기하는
이 신부의 모습에서 평생을 고아원에 바친 목자의 이미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