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이 닫히고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불청객만 가만히 응시했다. 하루아침에 이별 통보를 한 사람, 얘. 이별 사유는 으레 그렇듯 장거리가 힘들어서. 거기다 다른 사람까지 생겼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정리까지 다 한 상태에서 예고 없는 재회는 달갑지 않았다. 꺼진 마음처럼 복도 센서 등이 나갔다. 보고 싶었어, 나는 아니. 염치없는 거 아는데 네가 생각나더라, 나는 글쎄. 무안할 만큼 입 한 번 벙긋 하지 않았다.) 동거하는 사람이 있어서. (돌려보낼 궁리 끝에 사실을 토로했다. 관계에 거짓말을 섣불리 보태면 불똥이 차하온에게 튈 수도 있었다. 돌아올 대답이 그래? 알았어면 다행이고 그래서? 어쩌라고면 낭패다. 그런데 너 한 번, 나 한 번, 다른 사람 만난 일 퉁치고 다시 만나자. 예상한 대답보다 더 폭력적인 억지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온아, 잠시만. (결국 혹을 달고 들어왔다. 지나간 우리 사이를 언급하지 않는 조건으로. 날씨마저 나를 등지는 바람에.) 인근 숙소에 전화란 전화는 다 돌렸는데, 없대. 그래서 길 열릴 때까지 지내야 할 것 같아. 할아버지 댁에 가 있을래? 이따 갈게.
됐어. (혼자 들어올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뒤이어 들어온 달갑지 않은 얼굴과 또 달갑지 않은 말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에 등을 기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찌질해. 추하다, 차하온. 지금이라도 나가서 할아버지 댁에 간다고 할까. 아니, 그건 웃겨.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해. 그렇다고 여기서 셋이? 계속 뒤엉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려 방문을 잠근 뒤 침대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그냥 집이나 빨리 구할걸. 왜 같이 살겠다고 해서는. (손바닥으로 야속한 입을 탁탁 두어 번 때린 뒤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답답해. 침대 위에서 밍기적거리다 천천히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편해진 몸과 다르게 여전히 불편한 마음에 닫혀있는 문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 다른 친구라도 있었으면 좀 달랐을가. 아니, 좋았을까. 여기 돌아왔다는 걸 후회하기는 또 처음이네.) 그렇다고 데리고 들어오면 어떡해? 혼자 사는 집도 아니고.
봐, 나도 널 환영하지 않고 동거인은 더 불편해해. 날 밝는 대로 제설 작업 끝나면 돌아가. 부탁할게. 거기 내 방이니까 써. (초대받지 않은 손님 때문에 방문이 굳게 닫혔다. 게다가 걸어 잠그기까지 했으니 주말의 평화는 산산조각 났다. 원체 낯을 가리고 입씨름까지 해서 이 존재는 매우 고까울 것이다. 나도 거슬리는데 차하온이라고 다를 리가……. 본인은 신경 안 쓰는 것 같아 보인다. ~같아 보이다가 아니라 신경 안 썼다. 속 편하게 구경하고 있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미련에 불은 감정을 인제 와 쏟아내면 재결합할 줄 알았겠지만 크나큰 오산이었다. 미간 사이에 잡힌 주름을 지워 내며 식탁 위에 올려진 봉투를 정리했다. 아직 따뜻한 옛날 통닭 두 마리를 식어가게 둘 수 없다는 핑계로 차하온을 불렀다. 너 혼자 두기 싫고, 지금은 쟤랑 아무런 사이도 아냐.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까지 커밍아웃해 버리면 서로를 인식해서 돌이키지 못할까 봐 무섭다.) 배 안 고파? 난 배고픈데. 저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어.
안 고파. 왜, 손님 있잖아. 그 사람이 먹든가 말든가. (대화를 하면서도 문을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입을 꾹 다문 채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외투 주머니를 뒤져 저마다 떠들며 숫자가 올라가는 친구들의 대화방에 다시 휴대폰의 화면을 끄고는 몸을 뒤척였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답답한 마음에 벗어두었던 외투를 걸치고는 의자 위에 걸쳐있는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 일단 나가자. 얼굴을 안 보더라도 이 공간에 같이 있다는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밖으로 나가면 이 마음이 좀 사라지지 않을까. 잠긴 방문을 열고 나가자 여기저기 둘러보는 여전히 새로우면서도 달갑지 않은 얼굴과 지금은 보기 싫은 네 얼굴에 고개를 돌려 신발을 고쳐신었다.) 잠깐 바람만 좀 쐬고 올게. 좀 답답해서. 진짜 그냥 답답해서 그래.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온몸을 감싸는 차가운 공기에 목도리를 두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할아버지 댁으로 가면 싸웠냐는 잔소리 들으면서 이 좁은 바닥에 소문이 날 건 뻔하고.) 뭐, 어디든 갈 곳이 있겠지.
차하온, 하온아. (대설주의보가 뜬 마당에 어딜 나간다는 건지 신발을 욱여 신는다. 지금 나가 봐야 모든 가게가 닫혀 있었다. 원망이 담긴 눈빛에 뒤따르다 망설일 때 너는 내쫓겼다. 당장은 마땅히 해결책이 없었다. 뻣뻣해지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다 큰 성인이 답답하다는 이유로 바람 좀 쐰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차하온은 예외였다. 유일하게. 아무도 차게 식어 간 안줏거리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어느덧 시계의 시침이 열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연락 없는 휴대 전화를 들고 식탁 의자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생활 소음으로 적막이 깨졌다.) 너,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그냥 자. (소복이 쌓인 눈 위로 하나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이 발자국 주인을 찾으러 따라 밟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음성 사서함에 넘어간다는 안내만 들었다.)
[어디야?]
[데리러 갈게]
[걱정 돼]
아, 씨……. 휴대폰 안 가지고 나왔네. (무작정 나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한참을 걷고서야 침대 위에 던져놓은 휴대폰이 떠올랐다. 뭐, 상관없나. 오히려 어둠과 적막이 깔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빛이라도 있어 봐, 내가 얼마나 초라할 거야. 춥긴 엄청 춥네. 근데 또 집으로 들어가기는 싫고. 몸을 살짝 움츠리며 걷다 보니 외로이 비어 있는 정자에 걸터앉아 손잡이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와, 나 진짜 갈 곳 없네. 들어갈 가게도 없고, 집은 가기 싫고, 할아버지 댁은 이 시간에 민폐고.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시큰해지는 코 위로 목도리를 끌어 올렸다.. 서울에 있을 때는 이렇게 조용히 눈을 본 적이 있던가. 아, 엄마 보고 싶다. 눈 그치면 휴가 내고 서울에 좀 다녀올까. 부모님도 보고, 친구들도 만나고. 얼굴을 안 보면 그래도 이 마음이 좀 잦아들지는 않을까. 다시금 복잡해지는 머리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진짜 추해.
어디로 간 거야……. (보낸 문자도 읽지 않는다. 감감무소식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긴 숨이 새하얀 연기를 만들었다. 너라면 부상의 위험도 따를 수 있어 이젠 점점 조급해진다. 뒤늦게 나왔지만 살을 에는 듯 추위가 엄습했다. 속이 타니까 입도 바짝바짝 마른다. 코빼기 안 보이다가 정자에 언뜻 인영이 비치는 듯하여 뛰어갔다.) 아, 드디어 찾았네. 바람 쐬고 온다는 시간이 늦어져서. 연락도 없고. (부재중 전화는 열 통 이상 쌓아놨다. 네 앞에 쪼그려 앉아 갑작스럽게 돌아온 차가운 계절에 언 손을 잡았다. 맨눈으로 다친 곳 없는지 바쁘게 확인했다. 미리 데운 핫팩을 꼭 쥐여주고 금방 떨어져 나갔다.) 하온아, 본가 가서 밥 먹고 아이스크림 세 개 먹자. 어?
(손에서 훅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와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보이는 걱정이 묻어나는 표정에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핫팩을 쥐고 있는 손을 뻗어 잔뜩 얼어붙은 볼을 데워주며 말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본가 가자며. 짤막하게 말을 내뱉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핫팩을 꾹 쥐었다. 괜스레 올라가는 입꼬리에 목도리에 얼굴을 더 묻고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뭐가 마음에 걸리는 건지 쉽사리 옆에 서지 않고 계속 뒤를 따르는 모습에 자리에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옆으로 와. 뒤에서 걸으니까 이상하잖아. 너랑 내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지금 집 가면 엄청 민폐 아닌가.
(야속하다는 투였으면서 행동은 반대여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못마땅할 뿐인가, 데려온 사람과 따라온 사람을 내보내고도 남았다. 그래도 남아있는 불만이 말투에 묻어났다. 마음 바뀌기 전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목도리로 반쯤 가린 얼굴이 제게 꽂히자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주춤거렸다. 눈치를 보며 배도는 게 느껴졌나 보다.)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민폐 아냐, 내 집인데. 배고프지?
조금? 네 집이긴 해도 부모님 두 분 다 계시는데. 근데 누구야? 아까 분위기가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힐긋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차갑게만 느껴지던 눈들이 한 사람으로 인해 이렇게 따뜻한 느낌이 들 수 있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팔을 잡은 뒤 끌어당겼다. 옆으로 오라니까.) 그냥 친구 뺏기는 것 같아서 싫었나 봐. 나 몸만 큰 것 같지. 사실 그렇게 기분 상할 일도 아닌데. 솔직히 네 집인데 누구를 데리고 오든 뭐 어떻다고.
그냥, 뭐. 예전에 친했어. 무작정 찾아가도 부모님은 좋아하시잖아. 콕 집어 말하자면 기분 상할 일 맞아. 내 집이기도 하지만, 네 집이기도 해. 미리 양해를 구해야 했어. 나도 갑작스러워서. 하온아, 연락이 안 되던데. (나란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계속 올라가려는 입술 끝에 힘을 줬다. 가족과 지내온 날에 비해 짧지만, 가족보다 끈끈한 나와 너처럼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가 존재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밀에 부친 사실이 하나는 있다. 우리 집에 존재하는 전 애인을 친구라고 에둘러댔다. 용기가 없어서 같은 성 소수자임을 밝히지 못했다. 한발 앞서 걸으면서 뒤로 걸으며 잘 따라오고 있는 네게 물었다.) 아, 라면 끓여줄까?
나 휴대폰 안 가지고 나왔어. 나도 아까 알았다니까. 라면에 계란은 무조건이야. (주머니에 넣은 핫팩을 만지작거리며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네 발자국 위로 한 발, 또 한 발. 혼자 걸었던 길을 둘이 걸으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덜 외로워서. 아니, 꽉 찬 느낌이라서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래도 이제는 떨어질 수가 없는 건가. 걸음에 속도를 더해 네 옆으로 걸어가 걸음을 맞췄다.) 그런데 손님 혼자 그 집에 둬도 돼? 아, 몰라. 잠은 뭐 어떻게 할 거야? 넌 간다고 해도 나는 본가에서 잘래. 어차피 내일 쉬니까 괜찮잖아.
길이라도 잃어버리거나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앞으로 휴대폰 잘 챙겨. 응, 알겠어. 계란 네 개. 걔? 글쎄, 알아서 하겠지. 추워서 집까지 걸어갈 엄두가 안 나. 멀리도 왔다. 우리. (어깨를 한껏 과장해서 움츠리고 엇비슷한 속도로 걸어가는 네게 몸으로 툭 쳤다. 그만큼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 전 애인이었다. 되게 이상하지, 사랑했던 사이인데.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의존해 걷고 또 걷다 고요한 주택가 중 한 집에 섰다. 문고리를 잡고 내리자 역시 쉽게 열린다. 아무리 마을 사람들 간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아는 사이라지만 무방비하시다. 당연히 이 시간에 들어올 가족은 나밖에 없어도. 아, 한 명 더. 차하온까지.) 씁, 도둑 같은데?
그러게. 그나저나 우리 왜 살금살금 들어가? 아, 잠 깨시면 안 되니까? ……. 나중에 더 놀라시는 거 아닌가 몰라. (목소리를 낮추며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어두운 내부에 혹시나 넘어질까 싶어 네 옷깃을 꽉 붙잡았다. 작은 소음이라도 나면 흠칫거리는 모습이 네 말처럼 도둑이라도 된 것 같아 작은 웃음이 터졌다. 마치 수학여행 때 선생님 눈을 피해 방을 옮겨 다니는 학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랑 수학여행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서울로 안 갔으면 중,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겠지? 놓친 추억이 몇 개야.
음, 추억 쌓고 있잖아. 서른 다 넘어서 몰래 온 손님으로. 부모님 깨시면 잔소리 시작하지? 라면 불 때까지 대꾸만 해줘야 해. 나중에 놀라는 게 나아. 스위치 여기 있다. 수학여행은 같이 못 갔지만, 여름 방학 때 여름휴가 맞춰서 같이 놀러 가자. (외투가 제법 세게 당겨졌다. 이렇게 의지할 때마다 고양감을 느끼곤 한다. 이 세상에서 이만큼 좋아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은 가족 빼고 나일만큼 우월에 빠지기 쉬웠다. 지나간 과거에 내가 없다는 이유로 아까워하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부산스럽지 않게 주방 근처까지 와서 전등을 켰다.) 하온아, 앉아 있어. 끓여줄게.
그래, 휴가 맞추자. 놀러 가면 되게 좋겠다. 추억도 더 생기고. (의자에 앉아 외투와 목도리를 벗어 옆 의자에 걸쳐놓고는 훅 끼치는 온기에 몸을 살짝 떨었다. 아, 좋다. 익숙한 향과 익숙한 내부, 거기에 익숙한 얼굴까지. 주의를 둘러보다 서랍장 위에 놓인 액자가 눈에 띄어 시선을 고정했다.) 이영 졸업식 때 사진인가 봐. 뭐야, 지금이랑 다를 게 없는데? 뭔가 신기해. 그래, 이 옆에 내가 있어야 했다니까. 아무리 지금 이렇게 보고 있더라도 아쉬워. 나중에 사진도 같이 찍어야겠다. 어릴 때랑 비교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