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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산에 대해 시 나부랭이로 아첨 몇 번 했다고 산이 덥석 열외로 쳐주리라 생각한 게 실수였다 허락도 없이 무단 점거한 산길 알아서 가만가만 그리로만 다닐 일이지 태초의 언어만으로 저희끼리 잘 사는 숲에 벌써 특권이라도 주어진 양 오염 겹겹의 은유와 상징 몇 외워 함부로 끼어들었으니 그럴밖에 가시넝쿨 헤치다가 무심결에 잠복한 나무와 정면충돌하고 말았다 그것도 아예 풀죽은 고목 가지에게 된통 일격을 당했다 눈두덩이 부어오르고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상처는 정확히 눈과 두덩의 경계에 딱 그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눈꺼풀이 저를 바쳐 눈알을 오구감탕 감싼 것이다 어미가 새끼를 품듯 껍질이 알을 꼭 껴안은 것이다 참으로 잽싸고 갸륵한 충정이다 얼마나 놀라운 경비태세냐 좋다 오늘은 비록 낯가림 심한 산에게 징벌의 낯붉힘을 당한 터지만 그래도 내겐 혼신을 다해 제 몸을 감싸는 초병이 있다 그것을 확인했다 든든한 백이다 이제 산도 알 것이다
― 김규성 시 「고목에게 당하다」
발명과 발견은 볼썽 새롭다는 점에서는 어슷비슷하지만 그 근원과 결과는 영 딴판이다. 기존의 사물을 離合集散하여 새로운 용도를 덧붙이는 게 발명인 반면 미처 눈에 띄지 못한 은닉을 찾아내 새로이 기리는 게 발견이다. 발명이 다다익선을 핑계로 한 문명의 기호학이라면 발견은 잠든 사실을 일깨운 문화의 고고학이다. 발명은 주로 손과 머리로 하지만 발견은 대개 발품을 팔아서 한다. 오지는 시망스럽고 호기심 많은 탐험가들의 머리서방 같은 발품에 의해 그 신비의 베일을 벗는다. 이를테면 어렵사리 발견 당하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의 오지는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내륙 깊숙이 숨어있는 땅을 이른다. 골짜기가 골짜기를 앞세워 으슥한 몸을 수줍게 사리고 있는 첩첩산중이 그에 해당된다. 겨우 흔적만 헤아려가는 밭머리쉼 길이 끊어질듯 말듯 아렴풋한 맥박을 추스르고, 실그러진 움집을 연상케 하는 오두막에서 아련한 저녁연기가 사리사리 피어오르는 정경이 그 메인화면이다. 호롱불조차도 기름이 아까워 초저녁부터 불을 끄는 바람에 애먼 두 눈만 똘람똘람 말똥거리는 아이들이 하루 종일 산타기에 지친 엄마의 옛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앙실방실 잠드는 팔 배게 둥지이다. 그렇듯 옛날에는 몸 밑천뿐으로 멍석잠처럼 마지못한 삶을 붙이는, 별로 몸을 받아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은둔처나 귀양지에 다름 아니었다. 요새는 왕배덕배 따지자고 들면 진정한 오지가 없다. 아무리 깊은 산에도 무참히 내장이라도 가르듯 서툰 가위질 같은 아스팔트 임도와 등산로가 흉측한 가르마를 왜뚤삐뚤 그어 놓았다. 깊은 암자에도 고급 승용차가 번질나게 드나들고, 수려하다고 소문난 곳은 어김없이 관광명소로 징발되기 마련이다. 독립가옥들은 철수한 지 오래인데 대신 초현대식 별장들이 천세나듯 잽싸게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골짜기마다 댐이나 저수지가 속이 비어 손부끄러운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다. 이제 예전의 오지는 오명을 벗은 지 오래다. 푸대접이 숙명이던 경원과 척박의 대명사가 아니라 새록새록 귀하신 몸이다. 바쁜 틈을 쪼개서라도 고된 다리 품 팔아 일부러 찾아가 숨 막히는 심신의 피로를 씻고 맑은 영혼과 원시의 건강을 되찾는 천혜의 휴식공간이다. 문란한 성풍속도 속의 정갈하고 참한 순결에나 비길 별천지인 것이다.
담양하면 우선 대나무가 떠오르지만 일찍이 소쇄원 명옥헌을 비롯한 정원문화, 환벽당 식영정 면앙정을 비롯한 정자 문화가 꽃을 피운 국문학의 보고이다. 그 눈부신 시문학의 꽃향기 속에 모처럼 산문의 진가를 리얼하게 드러내는 <미암일기>가 끼어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양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미암 유희춘(1513∼1577)의 친필일기이다.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친 만큼 선조 초 京鄕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풍속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또한 일상사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적어놓았기 때문에 당시 상류층 학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는데도 훌륭한 참고서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가 다 소실되는 바람에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와 함께 <선조실록>의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미암일기>를 소장하고 있는 대덕면은 담양군과 연접해 있는 대도시 광주는 물론 군소재지에서도 가장 멀다. 한편 산새가 척박하기로 내 놓은 화순, 곡성과는 경계를 이루어 이웃하고 있다. 군내에서도 유난히 한적한 변방인 셈이다. 면내 매산리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뗀석기 등이 발견되어 그 역사가 자못 깊은 것으로 추정 되지만 오로지 문명의 편리를 추구하기에 급급한 도시중심의 잣대로 손쉽게 가늠하면 사뭇 오지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만큼 인심 좋고 때 묻지 않은 청정 무공해지역이기도 하다. 大德은 이름처럼 덤턱스럽게 너글너글한 위의를 갖춘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품안에 크고 작은 골짜기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소재지에서 남북 십여 킬로에 걸쳐 긴 여정을 뻗치고 있는 두 골짜기가 만덕산을 경계로 유장히 흐르고 있다. 입석에서 소쇄원 쪽으로 가는 골짜기와 문재에서 화순온천 쪽으로 가는 골짜기이다. 전자는 곳곳에 배산임수의 진을 치고 있는 별장들이 말하듯 풍광이 수려하다. 그러나 산새가 가팔라 아늑한 샛골짜기가 드물고 광주와 가까운 탓에 산골 맛이 많이 가시는 편이다. 따라서 내 조촐한 발길은 山峻水急의 귀족적인 전자에 비해 다분히 山歌野唱의 민중적인 후자를 바투 찾곤 한다. 대덕에서 옥과 방향으로 빠듯한 핸들을 몇 번 휘감다 보면 “언덕 위에 하얀 집”이라는 간판이 볕바르게 눈에 띄는 모텔이 있다. 일부러 그렇게 썼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심살내리는 탈문법의 토씨 하나 덕분에 오히려 새삼 기억되는 하얀 건물이다. 이왕이면 그 언덕바지에는 종각이 우뚝 선 교회가 더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하며 모텔과는 별 볼 일 없는 발길을 다잡아 선걸음에 마주치는 고갯마루가 이른 바 문재이다. 좌회전하면 옥과 방향이고, 우회전하면 내 설레는 귀거래사가 草衣還鄕하듯 발새 익은 화순온천 방향이다. 갈 때마다 느끼는 터이지만 핸들을 오른 쪽으로 꺾기 바쁘게 화들짝 펼쳐지는 한 폭의 산수화가 온몸을 압도하곤 한다. 우선 나도 모르게 잠귀 질긴 숨통을 확 틔워주는 공기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山景이 수학여행길 선걸음에 지나쳐온 대관령이나 추풍령고개를 휘잡아 맴도는 기분에 젖게 한다. 산간분지나 진배없는 골짜기를 좇으려고 들면 오른 팔에 만덕산을 끼고 가야한다. 해발 575m인 萬德山은 이름 덕분인지 임진왜란과 육이오 등 많은 난리를 겪으면서도 화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산이 깊고 사람의 발길이 미치기 힘든 오지라는 이야기다. 중턱쯤에 물통거리라고 부르는 계곡이 있다. 사철 흐르는 물이 약효가 있어 천형을 앓는 환자들이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러 많이 모여들자 객지 병자들의 출입을 꺼린 마을 사람들이 그만 섬쩍지근한 길을 폐쇄해 버렸다는 에피소드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만덕산에서 흐르는 석간수를 마시고 사는 마을사람들은 무병장수해서 예로부터 산 아래 골짜기는 병 없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산 좋아 덩달아 물 좋은 청정지역이란 이야기다. 지금도 용대리 쪽으로 토종 음식점인 “두메 마을”을 잠시 꺾어 돌면 물맛 좋기로 소문난 약수터가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밤낮으로 산중귀물을 퍼가는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오지 여행을 시작하려면 일단 도로를 벗어나야 한다. 도로를 벗어난다는 것은 닻 감듯 불편의 심술에 갇힌다는 뜻이다. 반면 그것이 호연지기를 위한 물질문명과 공해로부터의 해방이라면 얼마쯤의 발 고생은 오히려 낭만이요 축복이다. 약수터에서 발밤발밤 왼쪽 샛길로 접어들면 은밀한 골짜기가 낯가림하듯 맞는다. 거기, “빈도림꿀초”라는 이름도 생소한 공방이 있다. 품앗이하듯 한국학을 전공한 독일인과 독문학을 전공한 한국여성이 우연히 들렀다가 평생의 둥지로 삼은 일터다. 토종꿀을 이용하여 형형색색의 밀랍양초와 촛대, 액세서리, 밀랍양초 재료를 만들고 있다. 이웃해 있는 “옥천골”의 산토끼탕은 남도 특유의 별미이다. 아쉬운 발길을 돌려 “화순온천” 쪽으로 가다가 역시 왼 켠 샛길에 한눈을 팔면 꺽둑꺽둑 키가 다 자란 오가피 밭이 검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반긴다. “오가피 농장”이라는 입간판을 따라 몇 걸음 접어들면 적송과 벌통을 겨드랑에 낀 소슬한 모정이 뜬금없는 발길을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용대리 방아재 마을이다. 아직도 살림을 붙일만한 빈 집 서넛, 수백 년 고향에의 의리를 지키려는 듯 숨죽이고 있지만 달랑 김영보씨 내외만 나이도 잊은 채 골짜기를 통째로 세내다시피 청년 몇 몫의 농장을 일구고 있다. 도시에서 웬만한 사업을 하던 터였지만 아늑하고 해맑은 산세에 감전돼 마치 계시라도 받은 듯 노후를 투자하여 산골농부로 전업을 한 것이다. 고사리, 줄풀, 헛개나무, 느릅나무, 옻나무, 꽃창포, 참빗살나무 등 다양한 약초를 재배하고 있다. 2만 그루가 넘는 주목을 비롯하여 철쭉, 백일홍 등 관상수 밭이 한창 골짜기를 물들일 때는 분에 넘치는 장관이 펼쳐진다. 거기에다 거름을 얻기 위해 살팍진 소를 키우고, 토종벌도 친다. 둘러보니 개집도 여러 채이다. 좀처럼 나이를 들키지 않을 듯 건강해 보이는 주인은 한 마리 두 마리 키우다 보니 개 천지가 되었다고 허허 웃는다. 산에서는 누구나 개를 키운다. 안으로 심심해서이고 바깥이 무서워서다. 그러니까 산중 외딴집의 개들은 말동무이자 초병이다. 개들과의 말을 트기란 쉽다. 인간의 복잡다단한 언어를 놓아버리면 된다. 개들과는 은유가 필요 없다. 직정적 직설만이 통한다. 그만으로도 정겹고 대화는 충분하다.
골짜기는 만덕산과 맞은 편 무명의 산줄기를 양 옆구리에 끼고 문재에서 운산리까지 달린다. 두 산줄기에는 골짜기 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 그 크고 긴 골짜기를 어미 품 삼은 무수한 산마루터기와 샛골짜기들이 실핏줄처럼 산자락을 파고들어 山明水淸의 천일야화들을 낳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렁잇속 옹골진 발품 값을 거두려면 왼쪽 산등성이를 타고 가며 잘잘한 샛골짜기들을 방문하는 것이 좋다. 방아재마을 골짜기를 가벼운 호흡으로 올라 중간 점검하는 그 산줄기는 만덕산에 비해 언뜻 아치랑거리듯 낮춤해도 엄연히 백두대간의 한 맥을 차지하는 속 깊은 산발이 걸음걸음 한참 해찰을 부리다가 성큼성큼 <태백산맥>의 한 대목을 이루는 백아산을 거쳐 멀리 지리산까지 단숨에 치닫는다. 만덕산이 숫산이라면 암산에 가깝다. 원래 이름이야 있었겠지만 곳곳마다 한 집 아니면 겨우 두서너 집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마을조차 사라진 지 오래고, 그 뒤로는 거의 인적이 끊긴 탓에 행정기관이나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마땅한 기호가 유야무야 돼버렸을 뿐일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발길이 드문 처녀지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하여 천년을 처녀막처럼 간직해온 태고의 언어들이 산보다 큰 골골마다 면면이 숙부드럽게 숨어 있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고인돌에 비길 원시의 흔적들을 만날 수도 있다. 무명 탓인지 하루 내내 사람 그림자 하나 구경하기 쉽지 않은 그야말로 호젓하기 이를 데 없는 산중이어서 行禪이나 사색의 공간으로는 더 없이 훌륭한 명당이다. 어쩌다 지루한 閑暇를 붓방아 찧는 딱따구리의 목탁소리가 내친 김에 염불삼매까지 재촉하는 호강도 누릴 수 있지만, 보기 드물게 어여쁜 적송이 산마다 빼꼭히 들어차 있어서 세파에 지친 이들에게 조용히 머리를 식히며 삼림욕을 즐기기를 권하고 싶은 충동이 절로 인다. 산에는 길이 셋이다. 입산 자격을 상실한 담뱃불의 이기적 부주의만 아니라면 굳이 그 흉허물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될 임도가 있고, 버젓한 남의 산에 허락도 없이 인적을 짱박아 놓은 등산로가 있고, 그 무지막지한 횡포를 어렵사리 비켜서서 토박이 주인이면서도 오히려 도둑처럼 숨을 졸여 다니는 호젓한 산짐승들의 길들이 따로 있다. 산 짐승들의 길은 폭이 좁은 반면 발자국이 한결 두렷하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고라니, 멧돼지, 살쾡이, 토끼들의 자취를 본숭만숭 더듬을 수 있다. 운 좋으면 누군가 방목하다가 놓쳤을 흑염소가 생파같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어느 등성이를 타거나, 나이 들어서도 무리 없이 오르기 알맞은 경사와 높이의 산봉우리들이 가려운 귀를 바짝 대고 도란도란 구수회의를 하고 있다. 에멜무지로 심술궂게 산코숭이를 치켜들면 올망졸망 아늑한 골짜기들이 잘 여문 고구마처럼 넝쿨 채로 달아오를 것 같다. 워낙 봉우리가 순하고 편한 탓에 계곡을 탐사하려면 먼저 봉우리에 오른 후 능선을 타고 가면서 기웃기웃 이 골짜기 저 골짜기 굽어보다가 그 중 유난히 발길을 끄는 골을 짚어 찬찬이 내려가는 편이 효과적이다. 울창한 숲은 아래서 위로 치켜보기보다 위에서 아래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것이 정석이기 때문이다. 가다보면 작은 동굴도 발견하게 되고, 미처 챙겨오지 못한 카메라가 못내 아쉬운 폭포를 만날 때도 있고, 옥빛 암반으로 포석정을 빚어놓은 계곡들이 컬컬한 목 한 잔 축인 후 속미인곡이나 한 수 읊고 가라고 발길을 부여잡는 경우를 당하기도 한다.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소쇄원이나 구룡폭포, 구천동 못지않게 눈길을 사로잡는 오밀조밀한 풍경들이 도처에 낯을 가리듯 숨어있다. 그뿐인가. 계곡, 등성이 가릴 것 없이 차라리 난 밭이라야 어울릴 정도로 무성한 난들이 함초롬히 초록 등을 밝히고 있다. 봄에는 두릅과 취나물, 여름에는 으름과 꾸지뽕, 가을에는 정금과 알밤이 주인을 못 만나 할 수 없이 낙엽귀근처럼 제 거름이 되기도 한다. 허공에게 먹이를 물리듯 달짝지근한 입술을 쩍 벌리고 있는 으름을 능청능청한 줄기를 타고 타잔이라도 된 양 종횡무진 사냥하는 맛이란 깊은 산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짜릿한 쾌감이다. 산왕대신도 아닌 주제에 아무래도 야생동물들의 몫을 빼앗는 것만 같은 부자연스런 송구스러움은 옛 기억을 더듬어 가며 맛있게 드시는 아흔의 어머니 덕에 금세 사라지고 만다.
산골짜기에는 칡, 등나무, 머루, 다래, 찔래, 인동초 등 넝쿨진 초목이 많다. 그중에서도 으름 넝쿨이 단연 돋보인다. 어린 잎사귀는 나물과 차로 먹으며, 토종 바나나로 불리는 열매는 보기 좋은 만큼이나 맛도 달콤하기 이를 데 없다. 유난히 입안에 씹히는 씨도 기름을 짜면 훌륭한 식용유가 된다. 잎, 줄기, 열매, 뿌리, 어느 하나 버릴 게 없이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다. 이웃 나무 등걸을 타고 오르는 낙엽성 넝쿨식물로 으름넝쿨과에 속하는 으름을 한방에서는 木通, 通草 등으로 이르며 열매는 燕覆子라 부른다. 줄기와 뿌리, 열매 모두 약재로 다양하게 쓰이는데 그 효능을 대충만 열거해도 손꼽다 지치기 일쑤다. 이뇨작용에 효능이 뛰어난 으름은 오래전부터 한방이나 민간에서 구내염, 인후염, 관절염, 요도염, 부스럼 등의 소염제로 애용해 왔다. 기와 피를 잘 돌게 하여 중풍을 다스리고, 풍습으로 인한 관절통, 타박상을 치료하며, 류머티즘이나 허리 아픈데도 좋은 약재로 알려져 있다. 진통, 진경, 인후통, 신경통 등의 통증 치유에도 유용하며 여성들에게도 요긴한 약재로 생리가 안 나올 때, 산모의 모유가 부족하거나 유선염이 생겼을 때 쓰인다. 강심, 진정 작용에 효과적이어서 심장의 화기를 다스려 불면증, 정신신경 안정제로 널리 쓰인다. 탈모를 치료하며 약독을 제거하는 한편 독충에 물린 상처에도 바른다. 암 세포의(위암, 폐암, 식도암, 간암 등)생장을 억제하는데도 한 몫 한다. 제 때에 수집하여 그늘에 말린 약재는 달여 먹거나 바짝 졸여서 고약을 빚기도 하고, 환을 만들어 복용해도 좋다. 외용약으로 쓸 때는 잘 빻은 가루를 걸쭉하게 개어서 바른다.<東醫寶鑑>에는 “으름(木通)은 정월과 2월에 줄기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말려서 쓰는데 12경락을 서로 통하게 한다. 그래서 通草라 한다.”고 적고 있고 <本草綱目>에는 “목통은 맺힌 것을 풀어서 편안하게 하고 利水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으름 열매는 이뇨작용과 더불어 이질, 폐결핵 등의 치료에도 효험이 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오래 복용하면 신장에 이상이 오거나 신부전증에 걸릴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몸이 허약하여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 설사, 비위가 약한 경우에는 삼가는 것이 좋다. 특히 임산부가 복용했을 경우 자칫 유산 위험이 있으므로 반드시 의사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이웃 수종을 타고 허공을 옥죄어 오르는 으름넝쿨의 모습은 장관이어서 정원을 꾸미는데도 한 몫하며 화분이나 꽃꽂이 등 장식 재료로도 환영 받는다. 4~5월에 피는 꽃향기가 그윽하여 옛날에는 이 꽃을 그늘에 말려 향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으름넝쿨은 1984년 올림픽을 개최한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공원에 한국을 대표하는 자생 수종 중 하나로 초대 받은 바 있다.
산자락을 타고 가며 통곬을 이루어 멀리 동복 댐까지 미치는 대덕천은 폭은 십 미터 남짓이지만 금방 떠 마셔도 탈이 없는 냇물이 사철 낭랑한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 대개가 암반과 수석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마치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가듯 들쭉날쭉한 제이 제삼의 변산 채석강이 못 박힌 눈길을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는 오지탐험에서 얻은 “야생의 사고”를 통해 <슬픈 열대>라는 기념비적인 사회학 텍스트를 낳았다. 김정호 역시 삼천리 방방곡곡 오지를 마다 않고 샅샅이 뒤진 결과 혼자서 <대동여지도>를 손수 그려냈다. 다산 역시 오지의 고독과 비참한 생활상을 몸소 체험한 터라 <목민심서>를 시작할 수 있었다. 등산가들이야 말로 오지 탐험의 대가다. 그러나 오지를 입 밖에 올리려면 현지에서 최소한 강산이 한 번쯤 변하는 십여 해는 나고 봐야 그 맛과 속내를 따따부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덤벙술덤벙 바람결에 스치듯 몇 마디 감상적 어투로 다루는 오지 여행기는 오지에게는 여간 불편한 모독이자 오해의 빌미이기 십상이다. 방아재 마을과 작은 샛골짜기 두엇을 사이에 둔 산자락. 마침내 나는 아직 때가 덜 묻은 반쯤 오지에 오랜 숙제이던 오지 여행의 배낭을 풀었다. 고향을 떠날 때 등허리를 짓누르는 대가족을 웬만큼 가벼이 건수하고 난 후 이웃에 폐 없이 몸 붙이고 살만만 하면 돌아오겠다고 벼르고 벼르던 터에, 몸도 마음도 한물간 즈음에야 어렵사리 그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러나 고향은 이미 개발의 맛에 중독돼 옛 맛은 사라진지 오래고, 친구들 또한 사방의 대처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아 한갓 낯선 이방에 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멀지 않은 곳에 고르고 고른 山林川澤의 적막강산. 밤이면 숨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 볼펜 구르는 소리만 거슬릴 뿐인 적요의 블랙홀. 고향의 추억과 정서에 가장 가까운 무명의 산골짜기에 산밖에 난 범의 남은 발길을 맡긴 것이다. 보기 드물게 아름답고 정겹고 쾌적한 주변 풍광이 한 몫 했음은 물론이다. 욕심 같아선 뼈대 실한 오두막을 구해 황톳집으로 고쳐서 만시지탄의 밀린 글이나 실컷 썼으면 했지만, 오래전부터 토종건강식품을 빚는 꿈을 갈고 닦아온 아내에게 차마 못 할 독선이어서 산골집으로는 너무 황송한 호화주택(?)을 고르기에 이르렀다. 냇가에는 제법 크고 오지랖 넓은 호두나무가 한 그루 주렁주렁 검푸른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용케도 주변의 논을 들락거리는 인근 마을 사람들 눈길을 벗어나 온전한 내 차지가 되었다. 횡재였다. 나는 틈만 나면 매끌매끌한 수석 위를 낙법이라도 익히듯 구르는 호도를 바구니 그득 채웠다. 야생 특유의 향기와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지만 깨뜨려먹기에는 좀 작은 편이라 손 마사지용으로 다듬어 쌓아놓고 만나는 손길들마다 아직까지도 나누어 주는 맛이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산중에 있을 때만은 돈이 별 쓸모가 없다. 쓸 돈도 별로 없지만 구태여 돈 쓸 필요가 없으니 시간이 그만큼 넉넉하고 실살스럽게 주어지기 마련이다. 문명의 옷이 두꺼울수록 자연과의 거리는 멀어진다. 마음도 그렇다. 자신을 잘 들여다보려면 마음의 옷, 즉 허위와 잡념의 때를 벗겨내 최대한 단순해야만 한다. 산중에 드니 굳이 거짓말이 필요 없다. 자연과의 소통엔 결코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 수식어도 필요 없다. 단순할수록 명쾌하다. 담양군 대덕면 용대리 555번지. 한적하면서도 시원하게 뚫린 도로에 비해 사방 500미터 이내에는 인가 없는 산채의 청량한 공기, 지하 148미터 석간 약수, 적송 숲 향기, 장차 작은 소쇄원으로 가꾸려고 이름도 洗舌園으로 맞춰놓은 뒷산계곡, 화순적벽을 압축해 놓은 앞개울의 다슬기와 피라미 떼가 샛노란 달맞이꽃 응원가 삼아 반딧불을 부르는 암호를 혼자 독식하기가 아까워 도시 문명에 찌든 미지의 글벗들과 나누기로 했다. 한 가구가 부리기엔 너무 큰 집과 주변을 마땅한 휴식처가 없는 작가들의 집필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아내는 친정에서 물려받은 비법으로 자신만의 된장과 간장을 손수 빚어 각별한 정분과 신뢰를 쌓아 온 지인들과 나누며 산과 텃밭에서 직접 채취한 산약초들로 만든 차와 효소도 곁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