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설은 서로 다른 길을 가는 두 상징 인물을 내세우는 비슷한 이야기 구조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며 삶의 궁극 의미란 무엇인지, 구원 또는 해탈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이를 얻을 수 있는지. 내 식으로 말하면, 참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해야 우리가 참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두 소설을 읽으면서 비슷한 주제를 같은 이야기 구조로 만든 두 영화, 우리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임권택 감독, 강수연 주연)와 중국 영화 <색․계>(이안 감독, 양조위․탕웨이 주연)가 생각났다(영화 <색․계>를 모티브로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용기를 내보라고 부추기는 법학자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김두식이 작가 황정은과 함께 진행하는 창비의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도 꽤 들을만하다).
결국 헤세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참사람이란 자아에 충실해야 하고, 그 자아는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과 자연에 진심으로 다가서는 자아이어야 한다는 게 아닐까 한다. 헤세가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삶, 골드문트와 싯다르타의 삶이 그러했다고 보인다. 그렇다고 이들의 삶이 아름다운 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골드문트는 마리아상을 완성하지 못한 채, 싯다르타는 카밀라와의 마지막 정사에서 생긴 늦둥이 외아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해 다시 마을로 떠나보내고 삶을 마감한다. 불완전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참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면 좀 불완전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골드문트와 싯다르타와 대조되는 두 사람, 나르치스와 고빈다는 둘 다 종교 또는 부처의 가르침에 매달렸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자기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친구의 삶과 이를 통해 친구가 얻은 성취를 부러워한다. 여기에 추악한 종교․종교인뿐만 아니라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부하고 실제 경건한 종교․종교인에게 헤세가 하고 싶은 얘기가 담겨 있지 않을까? 광고 카피를 빌리자면 너희에게는 2%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2%로 날것 그대로의 삶, 일상이다. 일상을 벗어난 구원 또는 해탈은 보통사람에게 희망이 아니라 고통일 수 있다는 거다. 저자거리에서 사는 우리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성취라는 좌절과 절망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저자거리에 마구 뒹군 골드문트와 싯다르타의 성취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다. 내가 가진 종교관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에서 지난 가을 네팔 트레킹 때 적어본 ‘쉬’(시 수준이 안 되는 걸 '쉬'라고 한다더라. ^^)을 소개한다.
푼힐 새벽길
푼힐 오르는 새벽길
길 가득 메운 등산객 전등 불빛으로 환하다.
굳이 내 전등을 켤 필요 없다.
문득 떠오르는 친구의 말
밤 산길을 갈 때 전등을 켜면
불빛 닿는 곳은 환하지만
그 밖은 도리어 더 어두워지더라.
네가 종교인으로 살면서
네 종교의 가르침을 쫓느라
삶의 다른 영역을 보지 못하지 않기를 바란다.
친구야, 그리 살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그렇단다.
너도 그렇겠지?
골드문트와 싯다르타가 참사람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성애(性愛)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 골드문트는 수많은 여성들과, 싯다르타는 오로지 카밀라와 성애를 즐긴다는 차이가 있지만. 내 친구 하나는 중학생 때 골드문트의 애정 행각을 읽으면서 성적으로 흥분했었다고 한다(아내도 이번에 함께 소설을 읽으면서 이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고등학생 때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에 나오는 성애 장면을 읽으면서 성적으로 흥분되어 몇 번을 다시 읽었던 것 같다. 골드문트와 싯다르타처럼 자신만의 만족이 아니라 함께 행복해지고 만족을 얻기 위한 성애야말로 사랑하는 이와 함께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 가운데 하나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참에 아내와 함께 <소녀경>과 <카마수트라>를 공부해볼까? ^^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진짜 후기.
힘들어 보여도 골드문트가 되고 싶어라.
기왕의 편한한 공간에서 탈출한 골드문트는 새로운 사건들과 만나고 만든다. 때론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