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삼백열네 번째
숙제宿題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숙제장을 사촌 집에 두고 온 소년이 숙제를 해 오지 않아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선생님은 매정하게 소년의 연습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다음부터는 절대 봐주지 않겠다며 호통을 칩니다. 한편 하굣길에 소년과 놀다 넘어졌을 때 숙제장이 뒤섞여버린 것을 알게 된 사촌은 숙제장을 돌려줘야 한다고 말해 보지만, 엄마는 어서 들어가 숙제나 하라고 꾸짖습니다. 사촌은 밤새워 소년의 숙제까지 해서 소년에게 숙제장을 돌려줍니다. 숙제장을 검사한 선생님의 한마디, ‘잘했다’. 학교 숙제가 인생 최대의 걱정거리였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졸업 시즌이 다가옵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로 시작되는 졸업가를 부른 지 60년이 훌쩍 넘었지만, 숙제에 얽힌 추억들은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재활용센터에서 일하는 한 여인이 소개되었습니다. 산더미 같은 쓰레기 속에서 빠르고 능숙한 솜씨로 페트병을 골라내는 고된 노동으로 점철된 일상을 아무에게도 ‘힘들다’ 말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온 여인이 그랬습니다. 이담에 “숙제 잘했다”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말속에서 그녀에게 숙제란 부모님을 돌보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그게 인생의 숙제였던 겁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매일매일 주어진 숙제宿題를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게 삶입니다. 우린 여태 어떤 숙제를 풀며 살아왔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숙제가 있다는 건 우리에게 숙제를 준 어떤 존재가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 존재는 누구이며, 그 존재는 나에게 어떤 이유로 어떤 숙제를 내주었을까, 생각해 보는 겁니다. 이제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