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작가’ 2010 겨울호가 나왔다. 27일 정기총회와 겸해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신인상 시상식도 같이 했다. 시는 문충성 김수열 나기철 김광렬 문무병 김규중 김성주 김문택 김영미 김순선 현택훈 양원홍이, 시조는 장영춘 이애자 김진숙 서순영이 썼다. 2010 제주작가 신인상으로는 시 부문 당선은 문상희의 ‘지렁이의 지문이 나를 깨웠다’외 4편을, 소설 부문은 김학수의 ‘조용히 살아라’가 뽑혔다.
특집으로는 ‘나의 등단기’를 실었는데 오경훈 오영호 김병택 나기철 문영택 장영주의 글을, 소설 양혜영, 수필 문영택, 시나리오 김경훈, 평론 이성준, 연속 기획 제주어 산문은 한림화, 서평은 홍기돈 정학재, 포토에세이는 김창집, ‘책머리에’는 김동윤 교수가 썼다. 내년 2월에 일본 북해도 답사를 가는데 우편물을 발송하러 다녀오다가 동네에서 이 추운 겨울 날씨를 녹이며 피어 있는 벌노랑이를 만났다. 방으로 뛰어 들어와 얼른 카메라를 갖고 가서 찍어다, 제주작가들이 어떤 시련을 겪드라도 얼어붙은 사회에 빛을 발하라는 의미에서, 시 7편을 골라 같이 싣는다.
♧ 정뜨르 비행장 - 문충성 일제 때는 정뜨르 비행장 만드는데 끌려가 죽을 고생했다고 삼촌이 해방된 다음엔 4·3사건 터져 폭도로 몰려 정뜨르 비행장 어디에서 총 맞아 죽었을 거라고 삼촌이 소문 따라 말들만 육군 졸병 시절 나는 휴가와선 공군 장교였던 재민의 덕에 여기서 군용기 타고 오산까지 날아갔네 오늘날 대한항공이든 아시아나든 타고 국제공항 제주 날아올라 제주 바다 건너 오갈 때 문득 정뜨르 비행장 아직 살아 생각만
♧ 꿈꾸는 식물 - 김수열 한때 의사를 꿈꾸던 사내가 얄팍한 환자가 되어 초점 잃고 병실 구석에 오그려 있다 눈물밥으로 끼니 대신하며 이대로라도 살아있기만 바라는 아내에게 의사는 조심스레 집으로 모셔 가라 한다 동물성을 상실한 사내 그도 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가는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 이승 - 나기철 버스를 탔는데, 고봉식 전 교육감님이 오른다. 얼굴을 마주쳤지만 인사한 지 가 30년이 넘어 머뭇대는데 앞에 앉으신다. 내가 중1 때 그분이 우리 학교 교 장이셨다. 내가 아는 그 연세에 지금 저렇게 건강히 다니시는 분은 없다. 내 또래 아들도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목상(木商) 동창이시다. 팔십육 세, 나 보다 스물여덟 위시다. 다음 정류장에 내릴 때 인사해야지 하며 일어나는데, 손잡이에 머리가 닿아 멍멍하다. 나는 그냥 엄벙덤벙 내렸다. 욕하셨을 게다.
♧ 안개제국 - 김광렬 안개가 안개 속에서 꺼낸 것은 안개다 마술사처럼 꺼내고도 얼마든지 더 꺼낼 것이 있다는 듯 척, 척, 척 안개카드를 꺼내드는 손가락 알 수 없는 눈이 등 뒤에서 노려볼 때 등덜미에서 송충이가 스멀거리는 느낌처럼 기분 묘하게 다가와 뇌세포를 빨아들이는 먹어치워 버리는, 아, 우리는 안개제국의 먹이였던 것이다 안개의 유전자는 온통 뿌연 잿빛이어서 비판도 도덕도 중용도 가소롭다는 듯 가볍게 가려버린다 상충하는 논리는 고민하는 기색조차 없이 꾸깃꾸깃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저 간단명료하게 뒤틀어버리는 패러독스, 우리가 펼쳐드는 것은 언제나 거짓꾸며진 활자들이다 그것이 진실인양 이 아침을 우울하게 만든다 안개는 안개 속에서 안개만 꺼낸다
♧ 서귀포 - 문무병 서귀포에는 군데군데 내가 쓴 낙서가 있다. 작은 골목 먼 정 올레밖엔 당신의 따뜻함 배어 여기 아니면 저기도 오래 전의 당신이 살고, 지금은 가고 없는 그리움이 있다. 오늘은 섶섬이 보이는 카페에서 또박또박 그리움 접고 흘려 쓴 편지 하나 또 하나 염을 하는 하루
♧ 대접과 그릇 - 김경훈 그릇이 커야 대접을 받잖아요 그래요 나 그것 밖에 안 되어요 내 대접이 줄 땐 작지 않나 내 그릇이 받을 땐 크지 않나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잖아요 존재는 그릇이나 대접이나 내공만큼 그래요 채우거나 비워내면 그만
♧ 피아골 산장지기 - 김규중 피아골 산장지기로 38년간을 지내다 정년을 넘어 산장을 내려가야 하는 80살 넘은 산장지기 할아버지의 방송 인터뷰, 자신은 공해 테스터기라고 도시에 내려가면 몸에 부스럼이 나서 견딜 수 없다고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다행히 산에 또 다른 거처가 마련되었다는데 내가 도시에서 야! 저기 멋있는 빌딩이 올라가네 저 차는 못 보던 것인데 저 아가씨 옷은 최첨단 패션인데 하고 관심 쏟는 것처럼 그는 피아골에서 야! 올해는 산수유가 매화보다 먼저 꽃을 피우네 이 나비는 작년에는 보지 못했었는데 이 발자국은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녀석 것인데 했겠지 내가 그를 생각하며 청승맞은 시를 쓰는 지금도 그는 어둠 속에서 풀잎의 소리를 듣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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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