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후에 다가오는 것들
박 문 철
“할 말이 있어. 나 다른 사람이 생겼어.”
남편은 나탈리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고 있던 나탈리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커다란 진동을 느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사랑과 존경심으로 강한 애착의 대상인 엄마마저 돌아가신다.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나탈리에게 홀로서기는 아프고 힘들다. 그러나 상처가 아무리 크더라도 더러 흉터는 남기겠지만 세월이라는 연고가 이를 치료해준다. 모든 것들이 떠나간 후에는 새로이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다가오는 것들을 마주하면서 나탈리는 담담하게 말한다. “지금껏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예요.” 이 말을 들으니 문득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고전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황금빛으로 노을이 지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스칼렛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라고 외친다. 상황은 다르지만 아마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다가오는 것들’은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영화다. 철학교사인 나탈리가 갑자기 닥친 시련을 극복하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황정은 작가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이 영화의 제목과 골수를 빌려다 썼다. 떠나간다는 것은 대상이 내게서 멀어져간다는 것이지만 때로는 내가 그것으로부터 뒷걸음치는 경우일 수도 있다. 노먼의 경우가 그렇다. 어린 노먼은 지역의 한인사회 사람들이 엄마인 안나를 주둔지의 직업여성이라고 수군거린다는 사실을 알고 창피해한다. 이에 대한 콤플렉스로 스스로 한국으로부터 뒷걸음질 친다. 모국인 한국과 한국사람들을 싫어하고 한국어를 모른 체한다. 사랑하는 안나도 애증의 대상이 되어 조금씩 멀어져간다. 뒷걸음질은 점점 빨라져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그를 떠나간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몰라도 노먼은 대중 속에서도 홀로 있는 무인도의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도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살려낸 이쁜 딸 제이미다. 무인도에도 가끔은 조류를 타고 다가오는 선물들이 있는 것이다.
한세진의 룸메이트 하미영은 지나친 박애주의자다. 예전 밴드그룹 송골매의 노래제목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말 그대로 ‘모두 다 사랑하리’다, 그것도 치열하게. 미영은 고양이를 밟은 뒤에 넘어졌다. 밟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오히려 심하게 넘어졌다. 밟아도 다치지 않거나 고양이가 피할 수도 있는데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심해서 일어난 일이다. 미영은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보면서도 숨이 가쁘다고 한다. 책으로 천천히 읽어야 할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문장들이 너무 쉽게 빨리 지나가 버려서 숨차다고 한다. 문학을 너무 사랑해서이다. 액션영화를 보면 다친 배우에 대한 연민인지 감정이입인지는 몰라도 피가 멈추고 공기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이는 과도한 연민이나 애정인데 정신적 애정도 육체적 애정 못지않게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러니 미영이 아픈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미영은 스스로 병원에 입원하여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떠나간다. 그 후로는 미영도 다가오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박범신 작가는 소설 은교에서 노교수의 입을 통해서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는 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젊음이나 늙음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는 떠나가는 것이나 다가오는 것도 모두 그저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한다.
한세진 일행은 미국 작가들과 대담을 위하여 미국에 간다. 대담의 주제는 ‘평화의 일기, 저항의 쓰기’였다. 이것은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서 얘기하려고 한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읽기와 쓰기를 들여다보면, 읽기는 작가가 글을 통하여 얘기하고자 하는 주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반대로 쓰기는 글을 통하여 나의 주장을 독자들에게 설득시키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평화는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단지 우리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면 저항은 반대하는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떠나가는 것을 잡으려 하거나 스스로 멀어지려는 강한 거부의 몸짓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다가오는 것은 평화의 쓰기처럼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떠나가는 것은 저항의 쓰기와 같으나 저항의 날카로움은 세월의 강물 속에서 둥글게 다듬어지므로 너무 미련을 갖지 말라고 한다.
장자는 부인의 장례를 치르면서 슬퍼하기는커녕 술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했다고 한다. 친구가 나무라자 장자는 부인이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제 우주를 거실 삼아서 편안히 누워 잠자고 있는데 슬퍼할 일이 무엇이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불교에서도 일체유심조(일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즉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이다. 작가는 떠나가는 것을 아프게 여기지 말고 다가오는 것에 들뜨지 말라고 한다. 이제는 다가오는 것들을 나탈리나 하미영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얘기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