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름
박수현
바람이 지친 발끝을 내려
늘어진 나뭇잎을 흔들다 맙니다
강물 속 저어새 부리가 길어집니다
넘기던 책장이 손가락에 달라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햇살이
책상 위, 먼지 알갱이를 건드려보다 갑니다
-한겨레 신문, 지하철(시집 『운문호 붕어찜』)
호접란
봄엔 꽃잎들이 바람을 일으킵니다
흰 목덜미의 소소리바람이
한 천년 품었다가
다시 고쳐
띄워보낸 짧디짧은 편지입니다
꽃잎 끝에 앉은 내 눈길도
날개 접은
한 점 바람입니다
-세계일보 , 지하철 (시집 『복사뼈를 만지다』)
손톱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손톱을 깎는다
손톱을 잘라 낼 때는
조금 착해지는 것 같다
고개를 수그린 채
무릎 위 티슈 한 장에 모인 그것들을 들여다본다
주먹을 움켜쥔 아이의 손아귀를 펼치며
앞니로 첫아이의 무른 손톱을 끊어 주던
눈록嫩綠의 순간이 반짝, 돋아난다
좌석 밑으로 떨어진 몇 조각은 미처 하지 못한 말이며 차창 밖 흩날리는 토로스산맥
의 눈발처럼 종일 나를 관통해 간 열 개의 감정이다
(더는 할 말이 없는 손톱들)
아직 속의 분홍을 다 비워 내지 못했다
-서울신문 [그림과 시가 있는 아침 / 곽재구 시인] (시집 『샌드 페인팅』)
첫댓글 <호접란> 읽으며 베란다에 오래 피어 있던 호접란 생각이 납니다.
천 년 품었다가 띄어보낸 편지, 올해도 다시 받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