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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강화섬나들길
 
 
 
카페 게시글
◎.제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 (16.2km,5시간30분) 스크랩 강화 나들길 제 3코스(능묘가는 길)
연개소문(한성희) 추천 0 조회 125 14.07.16 23: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강화 나들길 제 3코스(능묘가는 길) ▶  

◁ 전등사와 삼랑성을 거쳐 길정저수지를 따라 고려왕릉길을 가다 ▷ 

 

▲ 강화 온수리성공회성당 앞에서...

 

 

【  걷기일자 】 2010년 2월 28일(일)

 

【  걷기코스 】온수사거리→천주온수성당→정족산 삼랑성동문→전등사→삼랑성북문→대한감리교 온수교회→강화온수리 성공회성당→해랑대느티나무→강남중학교/강화학생체육관→길정저수지입구/강화지맥→길정저수지 뚝방길→문현상회→화장실/길정낚시터→곤릉입구삼거리/2차선포장도로→권능교회/곤릉&석릉갈림길↔곤릉→약수터쉼터→석릉→인천카톨릭대학교 뒷편 임도→조산리한옥→진강산등산로→강화능내리석실분&가릉→능내리마을회관/2차선포장도로→탑재삼거리/강화허브향기

 

【 코스거리 】 약 18.00km(길정저수지입구에서 문현리 방향 길정저수지 물가길을 따라 진행)

【 소요시간 】 총  6시간 43분 소요(휴식 : 2시간 20분 포함)

                             실제 걷기 시간 : 4시간 23분 소요

【 날    씨 】 흐 림

 

【 교 통 편 】 대중교통 이용

<< 갈 때 >> 부천시외버스터미널 '소풍'앞 버스정류장(08:00)→#330번 강화행 시내버스→강화버스터미널(09:20~09:30)-(#64번 군내버스)→온수리 버스정류장(09:47)

<< 올 때 >> '탑재'버스정류장(16:30~16:48)-(#3번 군내순환버스)→강화버스터미널(17:12~18:00)-(#330번 부천행 시내버스)→부천시외버스터미널 '소?'앞 버스정류장(19:37)

 

▷ 대중교통편 안내  

  

* 부천'소풍'시외버스터미널 앞 버스정류장↔강화시외버스터미널#330번 시내버스(3월2일부터 실시되는 운행시간)

      ①부천발 강화행=>06:20, 06:40, 07:00, 08:00, 08:50, 09:10, 10:20, 11:00, 11:40, 12:20~

      ②강화발 부천행=>~12:00, 12:40, 13:20, 14:00, 14:50, 15:30, 16:20, 17:00, 17:50, 18:40, 19:20, 20:00

      <참고> *2010년 2월 19일부터는 시내버스로 전환되어

                  경기, 인천, 서울 대중교통편과 환승.

                *2010년 3월 2일부터 운행시간 변경.

                  (버스운행시간 문의 : 강화운수 T.032-933-2533) 

  

* '탑재' 버스정류장→강화시외버스터미널 : 군내버스 수시 운행

 

 

[ 코스탐방 】

이번 강화나들길은 한국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 창건된 유서깊은 사찰인 전등사와 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품고있는 정족산 일대에 쌓은 호국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던 삼랑성, 1906년 건축된 한국 기독교 초기 교회 양식의 건물인 강화 온수리성공회성당 등 문화 유적과 볼거리가 많은 곳으로, 길정저수지를 끼고 돌아가는 물가 산책로 그리고 고려왕릉 3곳(곤릉~석릉~가릉)을 잇는 호젓하고 아늑한 숲길이 환상적인 코스이다.

곳곳에 펼쳐지는 쭉쭉 뻗은 소나무 군락지의 푹씬푹씬한 솔밭길이 걷는 이의 발을 편하게 하여 피곤함을 잊게 하고, 오르내림의 굴곡이 거의 없는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어 별 어려움없이 자연과 동화되며 걸을 수 있는 최적의 코스였다.

 

 

 

▲ 온수사거리 전경과 이정표

09:47=>온수사거리

     온수사거리 온수우체국옆 '삼랑성길' 따라 진행을 하며 제3코스 '능묘가는 길' 강화나들길 탐방을 시작한다.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약 5분 후 '길상초등학교' 와 붙어있는 '천주온수성당' 입구(09:52)에 이르게 된다. 성당 안으로 들어 본당 건물 뒤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오르내리면 대한성공회 '성안나의 집' 건물 앞에 내려서게 된다.

 

 

▲ 천주온수성당 

 

▲ 성안나의 집 

 

좌측으로 빠져 나오면 '삼랑성길' 도로에 이르게 되고, 우측으로 잠시 따르면 온수리에서 전등사주차장을 거쳐 함허동천이나 선두리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인 13번군도와 만나는 삼거리로 우측에 옛 코레스코콘도 였던 '종로학원 강화캠퍼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약 100여m 정도 떨어진 전등사주차장을 통과하고 전등사 매표소가 위치한 삼랑성 동문을 향해 오르막 도로를 이어간다.

 

 

▲ 전등사입구 매표소인 삼랑성동문과 강화나들길 이정표, 그리고 삼랑성 안내문

 

10:14~10:18=>삼랑성동문/전등사매표소 

♧ ♧ 삼랑성(三郞城)

*국가사적 제130호 

 

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정족산 일대의 삼랑성은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으로 성의 축성시기는 정확치가 않으나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 부우, 부소가 쌓은 것으로 '고려사'에 전해지고 있다.

이후 토성 자리에 삼국시대에 이르러 표면이 거친 할석으로 쌓았고,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어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은 성 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해발 222m인 정족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성벽이 꺾어 도는 곳마다 10여개의 곡성을 이루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이 마련되어 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1866)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중이었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성문 우측에 '삼랑성 안내문'과 강화나들길 이정표가 있다.

강화나들길 여권에 동봉된 할인권으로 입장권(대인 \2,000→\1,300)을 끊고 동문을 들어서면 삼랑성곽을 따라도는 정족산 둘레길이 성벽따라 양쪽으로 보이고, 좌측에는 이정표(←남문까지 250m/→달맞이길 달맞이고개까지 200m)가 있다.

직진의 넓은 관람로를 따라 진행하여 전등사 경내로 들어가게 되는데 관람로 초입 우측에 '양헌수승전비' 안내문과 비각이 있다.

 

 

▲ 삼랑성 동문 

 

▲ 양헌수승전비 

 

♧ 양헌수승전비

*인천광역시기념물 제36호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10년(1873)에 건립된 것이다.

건립 당시 양헌수 장군이 생존해 있을 때였지만, 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외침을 물리친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추측이 된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4년(1838)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중군을 거쳐 어영대장, 금위대장,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장공이며, 저서로는 '하거집'이 있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군을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 181cm, 비신의 높이가 163cm, 너비 60cm, 두께 27cm이다.

 

10:23~10:58=>전등사/경내탐방

 

♧ ♧ 전등사(傳燈寺)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종 46년(1259년),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 5년(1264년),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 하는, 불교 행사를 일컫는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 대조루를 중건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重修)되었다.   

 

▲ 명부전 

 

▲ 향로전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重修)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最古)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전등사 대웅보전 나부상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약사전

*보물 제179호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 전등사 범종 

*보물 제393호 

 

 

 전등사 범종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다.

이 종은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음통이 없으며 겉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이 종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

이 종은 일제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한때 전등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하마터면 귀중한 범종이 일본의 만행으로 없어질 뻔 했으나 부처님의 가피로 본래의 장소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 대조루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전등사의 남동쪽으로는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인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이다.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본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서적과 기념품 등을 파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 전등사 경내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약사전과 향로전 사이의 강화나들길 이정표가 있는 돌계단을 따라 삼성각에 오르며 전등사 경내를 뒤로 한다.

삼성각 앞을 지나 좌측 아래 자리를 잡은 전등사 전경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강화나들길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의 오르막을 따라 장서각(정족산사고)에 도착을 한다.

 

▲ 정족산사고 직전 갈림길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임진왜란(1892)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 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분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39년(1606) 4월 복인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분인 원본은 마니산사고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사고에 각각 봉안되었다.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4년(1653) 11월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내 정족산사고가 건립되어 이안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사고는 1931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은 1999년 강화문화원 사업으로 복원, 정비되었다.

 

정족산사고 담장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오르면 '삼랑성숲탐방로' 푯말이 있는 산길이 나타나고 돌계단길을 잠시 오르면 삼랑성 북문에 이르게 된다.

 

▲ 삼랑성 북문

  

  

 

11:00~11:17=>삼랑성 북문

     암문 형태의 문 입구 양쪽으로 이정표(①←정족산정상/↑온수리시장/↓전등사/→달맞이고개, ←성돌이길 서문까지 550m/→달맞이고개까지 500m)가 각각 설치가 되어 있고, 우측으로 강화나들길도 보인다.

성벽위에 서니 좌측으로 정족산 정상이 지척으로 조망이 되는데, 지난 번 강화지맥(철곶 평화전망대~길상산/택리마을입구) 제3구간(강화농촌기술센터~택리마을입구) 산행 때 정족산 정상에서 성벽을 따라 서문을 거쳐 지났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 삼랑성 북문 위에서 바라본 정족산

 

전날 장락지맥 첫 구간 산행으로 다리가 뻐근한 상태라 성곽을 따라 도는 정족산둘레길을 한바퀴 돌아보고 갔으면 좋으련만 포기를 하고 성벽위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주변 일대를 둘러보며 휴식울 취하고 성문을 빠져나가 온수리로 내려간다.

고정밧줄이 설치된 긴 내리막을 내려가면 밧줄이 끝나면서 완만하고 편안하게 산사면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이 이어진다.

 

▲ 강화나들길 표시

 

 

 

 

▲ 온수리 내려가는 길

 

Y자 갈림길(11:27)에서 우측의 편안한 낙엽덮인 길.

T자 갈림길(11:32)에서 우측으로 꺾자마자 다시 삼거리. 직진의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바짝 꺾어 내려가면 쭉쭉 뻗은 소나무숲이 인상적인 편안한 내리막길.

숲길이 끝나며 정면으로 '대한감리교 온수교회'(11:39)와 온수리가 시야에 펼쳐진다.

 

▲ 숲길을 벗어나며 시야에 들어온 대한감리교 온수교회와 온수리

 

교회를 지나 잠시 골목길을 따르면 2차선포장도로이다. 도로 건너 우측으로 50여m를 따르면 ┤자 갈림길이 나타나고, 전방 50여m에 보이는 제3코스 출발지였던 온수사거리를 확인하고 좌측의 '온수길'인 골목길로 들어 약 100여m 정도를 진행하면 우측에 강화 온수리성공회성당이 있다.

 

 

▲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 전경(사진 上:옛 건물/下:현 건물)

 

▲ 문루/종루 

♧ 강화 온수리 성공회(江華 溫水里 聖公會)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3

이 교회는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건물로 우리나라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 양식의 건물이다.

성당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루(정면 3칸중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로 사용하고 있다)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종교적인 성당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을 확립한 동서 절충형의 목조건물이다.

 

▲ 사제관 

♧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7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은 영국인 선교사들이 1898년 온수리에 선교를 시작한지 8년후인 1906년에 김강준 신부가 건축한 건물이다. 1933년에 한차례 중수가 있었지만 건축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사제관의 평면구성은 전통한옥이지만, 내부는 매우 다양하게 조합되어 영국인 신부의 한국전통주거문화에 대한 적응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천정은 구조미를 살리기 위해 노출시켜 목재의 질박한 자연미를 표현하였다. 건물 형식은 'ㄷ'자형 기와집 구조이다.

 

▲ 옛 성당 본당 건물 

 

▲ 본당 건물 내부 모습 

 

11:44~12:03=>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

     성당 입구 갈림길에 강화나들길 이정표가 있다. 우측으로 들어서면 100년이 넘은 우리나라 초기의 서양식 교회건물이 보존되어 있는 온수성공회성당이 있다.

엣 성당 건물인 '성안드레성당' 실내까지 들어가 내부를 구경하고, 12시에 실시된 옛 종루의 정오 타종을 지켜보고 성당을 뒤로 하고 갈림길로 나와 시멘트 포장길을 따른다.

 

▲ 온수리성공회성당에서 4차선포장도로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

▲ 횡단보도 건너 '해란길32번길'이 시작되는 4차선포장도로

▲ 논 사이로 이어지는 '해란길32번길'

▲ 뒤돌아본 정족산

 

뒤돌아 보면 지나온 삼랑성이 있는 정족산 일대가 조망되는 시멘트 도로를 약 3~4분 정도를 따르면 4차선 포장도로에 이르게 되고, 좌측으로 약 1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횡단보도를 건너 '해란길32번길'인 정면의 시멘트 도로로 들어서면 '온수성문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논 사이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 교회 앞을 지나 이어가면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는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 해랑대의 보호수인 느티나무

 

12:15=>해랑대느티나무/삼거리

     200여년이 넘은 보호수(수고 21m, 나무둘레 5.5m)인 느티나무와 강화나들길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이다. 좌측의 포장도로를 따라 방향을 바꾸어 이를 따르다 정면으로 강남중학교 건물이 보이는 ┬자 갈림길(12:19)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강남중학교 '강화학생체육관' 앞이다.

 

▲ 강남중학교와 강화학생체육관

 

12:21=>강화학생체육관

     강화학생체육관 낮은 철제 담장을 좌측으로 끼고 도로를 계속 이어가면 담장이 끝나고 '해란길32번길' 이정표가 있는 ┤자 삼거리(12:25)가 나타난다.

직진의 시멘트 도로를 계속 이어가면 1분 후 포장도로가 끝나며 비포장길이 잠시 나타나는데 이를 따라 200여m 정도를 진행하면 길정저수지가 시작되는 사거리이다.

 

 

▲ 길정저수지 입구 전경과 강화나들길 이정표

 

12:30~12:31=>길정저수지 입구

     강화나들길 이정표(↖길정저수지-문현리/→길정저수지-이규보묘)와 나들길 제3코스 안내도가 있는 갈림길이다.

이곳은 강화지맥의 마루금으로 지난 강화지맥 마지막 구간인 제3구간 산행할 때 이 길을 지나다 강화나들길 이정표와 안내도를 보고 강화나들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렇게 나들길 걷기를 하게 되었다.

강화지맥 마루금은 길정저수지를 우측에 두고 우측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이곳까지 진행하여 좌측의 산으로 올라 강남고교 앞과 강남중학교 입구를 지나는 17번군도로 향하게 된다.

 

▲ 길정저수지 제방으로 향하는 물가길

 

이번 탐방에서는 우측의 이규보묘로 향하는 코스를 포기하고 길정저수지 물가를 따라가는 좌측의 문현리 방향 코스를 따르기로 한다.

비포장 도로를 잠시 따르다 우측 저수지 물가로 내려가 물 옆으로 나있는 물가길을 잠시 따르면 길정저수지 제방 위에 이르게 된다.

 

▲ 길정저수지 제방길

 

12:39~12:49=>길정저수지 제방위

     제방 끝에 자리를 잡고 길정저수지 전경과 정면으로 보이는 강화지맥 덕정산에서 분기하여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상에 우뚝 솟아있는 진강산, 남쪽에 독립된 산군을 이루며 운해 속에 가려져 뚜렷한 모습이 조망되지가 않는 민족의 영산이며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의 하나인 마니산을 감상하며 여유있는 휴식을 취한다.

 

 

▲ 길정저수지 전경

▲ 제방 아래의 논과 운해에 쌓여 있는 마니산 전경

 

저수지의 겨울 철새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날개짓을 하며 날아오르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지는 길정저수지의 폭 넓은 뚝방길을 따라 9분 정도를 진행하면 뚝방길이 끝나는 좌측은 시멘트 포장도로이고, 우측은 비포장 도로인 ┬자 갈림길 도로에 이르게 된다.

 

▲ 길정저수지 제방 끝

▲ 길상저수지 물가에 자리잡은 '늘푸른호수가' 펜션

▲ '늘푸른호수가' 펜션으로 이어지는 저수지 물가의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 뒤돌아본 길상저수지

 

우측 도로와 저수지 사이에 펜션이 있고, 펜션 옆 길을 따라 저수지를 우측에 두고 따라 돌아나가는 길을 약 5분여를 진행하면 '펜션 늘푸른호수가' 앞에 도착을 하게 된다. 펜션 앞에서 우측 저수지 물가로 내려서니 몇일 전 내린 비로 저수지 물가를 따라 이어지는 나들길은 저수지 수위가 높아진 때문인지 물에 잠겨 끊어진 상태이다.

 

▲ 펜션을 지나 저수지 물가에 내려서서 뒤돌아본 끊어진 물가 나들길

▲ 저수지 물가의 나들길

 

어쩔 수 없이 펜션 뒤 산불감시탑이 있는 낮은 구릉지를 넘어 펜션을 끼고 잡목 숲을 잠시 헤집고 우회를 하여 다시 저수지 물가로 내려선다.

 

▲ 문현상회가는 길

 

수레길처럼 넓은 길이 잠시 이어지고 ┬자형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펜션 쉴만한 물가'(13:20) 건물이 나타난다. 건물을 우측에 두고 끼고 돌아 나가면 '다사랑식당'과 '문현상회'가 있다.

 

▲ 문현상회앞 강화나들길 이정표

 

13:20~13:22=문현상회

     강화나들길 이정표(문현상회곤릉)가 있고, 저수지 물가를 따라 계속 진행하면 우측 저수지변에 만들어 둔 쉼터를 지나 낚시꾼들을 위해 만들어 둔 길다란 나무부교가 저수지위에 떠있다.

 

▲ 물가 쉼터

▲ 저수지위에 설치한 나무부교

▲ 저수지 물가 나들길이 끝나는 마을 전경

 

부교에 앉아 휴식(13:24~13:30)을 취하고 물가를 따르면 잠겨진 화장실이 있는 공터(13:35)에 이르고 주위에는 닭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있다.

 

▲ 공터의 잠겨진 화장실

▲ 수로를 건너는 가교

 

저수지로 들어오는 수로를 가로지르는 검은 그물망이 쳐진 간이 철다리 건너 편으로 농가가 보이는데 이 그물망은 공터에 풀어 놓고 키우는 닭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를 해 두었다는 농가 주인의 말을 듣고 다리를 건너 길정저수지를 벗어 나 '↓길정낚시터' 푯말이 있는 2차선포장도로(13:41)에 도착을 한다.

이 포장도로가 길정저수지 입구 갈림길에서 갈라진 우측 이규모묘로 이어진 나들길과 다시 만나는 곳이다.

좌측으로 도로를 따라 100여m를 진행하면 '곤릉' 버스정류장과 '곤릉' 도로이정표가 있는 곤릉입구 삼거리이다.

 

 

▲ 곤릉입구 삼거리 전경과 도로이정표

 

13:43~13:49=>곤릉입구 삼거리

     버스정류장(불은면←곤릉→도장리)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강화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장리까지 하루 10회를 운행하는 #48번 군내버스가 지나간다.

도로를 건너 우측의 곤릉 방향 도로를 따라 가면 '길정리마을회관'을 지나 권능교회에 이르게 되고, 교회를 지나자말자 좌측 밭과 농가 사잇길 입구에 강화나들길 이정표(←석릉/↓권능교회)가 보인다.

 

▲ 권능교회 사거리

▲ 권능교회 사거리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 곤릉가는 길

 

이정표가 설치된 사거리에서 입구에 '곤릉' 이정표가 있는우측의 길 따라 곤릉으로 향하게 되는데 곤릉을 갔다가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 좌측의 석릉 방향 밭 사잇길을 따르게 된다.

우측으로 들어 비포장 길을 따르다 마을이 끝나는 Y자 갈림길에서 몇 개의 곤릉 이정표를 지나 우측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곤릉이 나타난다.

 

▲ 곤릉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13:58=>곤릉 

♧ ♧ 곤릉(坤陵)

*사적 제371호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고려 강종(재위기간 1211~1213)의 비 원덕태후 유씨의 능이다.

왕비 원덕태후는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이 능의 봉분과 석축의 곡장은 붕괴되고 각종 석조물은 없어진 채 폐허이었던 것을 1974년에 정화하였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 권능교회 사거리(14:06)에서 도로 건너 밭 사이의 길을 따라 폭 좁은 수로를 한 차례 건너 밭 사이 길을 빠져 나가면 임도처럼 넓은 수레길(14:15)과 만나게 된다.

 

▲ 수로를 건너고...

▲ 약수터 쉼터가는 임도

 

수레길 따라 우측으로 완만하게 오르면 산 밑 마지막 농가를 지나 우측으로 인삼밭이 잠시 펼쳐지는 넓은 산길을 따라 완만하게 올라간다.

 

▲ 약수터 쉼터

 

14:16~14:31=>약수터쉼터

     시멘트로 만든 벤치 4개와 지붕이 설치된 약수터가 있는 쉼터이다.약수터의 물은 수량이 풍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탁하여 그냥 음용하기에는 왠지 꺼림직하다. 

마침 진강산 산행중인 등산객 한 분과 조우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약 15분간 휴식을 취한다.

 

▲ 석릉가는 숲길

▲ 석릉 이정표가 있는 폭 좁은 시멘트 포장길

▲ 석릉 입구 삼거리

 

잠시 더 오르막길을 오르면 '↑석릉 50m' 이정푯말이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14:37)에 이르고, 포장도로를 따르면 다시 '→석릉 30m' 이정푯말이 있는 ┬자형 삼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좌측이 가릉가는 나들길이고, 우측이 석릉가는 길이다.

우측의 길따라 잠시 오르면 석릉이 나타난다.

 

▲ 석릉 입구

 

14:39~14:42=>석릉

♧ ♧ 석릉(碩陵)

*사적 제369호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182

 

고려 21대 왕인 희종(재위기간 1204~1211)의 무덤이다.

희종은 최충원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재위7년(1211)에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고종24년(1237) 8월 용유도에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안장되었다. 능의 지름은 8m의 원형 봉분과 주위에 'ㄷ'자형의 석축으로 낮게 둘러싸여 있으며, 묘비 1개와 문인석 2구가 있다.

2002년 발굴조사를 통해 청자상감국화문잔탁 등 12~13세기 상감청자 전성기에 만들어진 유물이 출토되었다.

 

▲ 되돌아 내려온 석릉 입구 갈림길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우측의 가릉가는 소로로 들어 편안하게 숲길을 따르면 '←석릉 200m' 이정푯말을 대하고 직진의 오르막길을 잠시 오른다. 오르막길 끝 통나무 계단을 오르면 '↓석릉 350m' 이정표가 있는 능선오거리(14:50).

 

▲ 능선오거리

 

▲ 가릉가는 숲길

▲ 철망펜스가 나타나는 내리막길

▲ 낙엽이 깔린 호젓한 산길

 

우측의 넓은 산길인 능선 옆 어깨를 따라 완만하지만 약간 긴 오르막을 극복하면 임도처럼 넓은 산길이 지나는 사거리(14:54)가 나타난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홈통형의 길을 따라 내려가면 우측으로 철망이 잠시 나타나고, ┬자 삼거리(14:57)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50여m를 이어가면 사거리가 나타난다.

다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산 허리를 끼고 돌아가는 굴곡없는 편안한 길을 따르면 ┤자 삼거리(15:02)에 이르게 된다.

 

▲ 나들길 좌측으로 보이는 작은 못

▲ 키다리 소나무 숲길

 

직진의 길을 따라 가면 좌측 아래로 작은 못이 보이고, 편안한 낙엽길을 따르면 우측으로 쭉쭉 뻗은 키다리 소나무숲이 나타나며 정면에는 대나무숲 뒷편으로 인천카톨릭대학교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 친천카톨릭대학교 뒷편의 '출입금지' 안내판과 넓은 임도

 

15:09=>인천카톨릭대학교 뒤 넓은 임도

     '출입금지' 안내푯말이 있는 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가면 낮은 돌담이 길게 이어지는 넓은 임도가 나타나고 우측 산사면으로 벌목이 된 벌목지대, 좌측으로는 대학교 건물이, 정면으로 연못 위로 정자가 하나 있다.

 

▲ 낮은 돌담이 길게 이어지는 넓은 임도

▲ 인천카톨릭대학교 건물과 정자

▲ 임도 주변의 소나무숲

▲ 인천카톨릭대학교 부지를 벗어나며 뒤돌아본 철문과 실개천

 

좌측에 위치한 연못(15:12~15:15)을 끼고 돌아가면 넓은 임도가 이어지고 주변의 키다리 소나무가 한층 운치를 복돋운다.

카톨릭대 사유지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알림' 푯말이 붙은 차단기와 실개천을 건너 약 50여m를 진행하면 임도사거리이다.

 

▲ 임도사거리 좌측 길

 

15:18=>임도사거리

     좌,우측으로 멋진 숲길이 이어지는 사거리에서 직진의 길을 잠시 따르면 임도는 좌측으로 90º 꺾이어 내려가는데 나들길은 직진의 소나무 숲길이다.

장송 숲길로 들어 운치있고 푹씬푹씬한 솔밭길을 편안하게 빠져나가면 ┬자 갈림길.

 

▲ 송림 숲길로

 

우측으로 약 30여m 내려가면 Y자 갈림길(15:23).

좌측의 넓은 임도따라 진행하여 좌측으로 철문과 철망이 있는 곳(15:27)에 이르면 임도는 끝이 나고 좁아진 오르막 산길로 변한다.

 

 

▲ 전신주에 표시된 나들길 표식을 따라...

 

15:28~15:39=>우측에서 내려오는 산길과 만나는 삼거리

    주변으로 소나무숲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너무나 환상적이고 운치가 있어 발길을 멈추고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산림욕을 한다는 기분으로 휴식을 취한다. 직진의 환상적인 소나무 숲길을 내려가면 Y자 갈림길(15:45).

 

 

▲ 운치있고 환상적인 소나무 숲길

▲ Y자 갈림길

 

직진의 넓은 길을 버리고 우측의 소로로 들어가면 우측으로는 계류가 흐르고 여러 기(6기)의 묘가 앞으로 나타난다.

묘지 옆을 지나 50m 정도를 내려가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실개천을 건넌다. 좌측으로 논을 두고 우측으로 돌아 쌍묘(15:49)가 나타나면 우측 숲길을 잠시 빠져 나가 묘 1기를 끼고 민가로 내려간다.

 

▲ 조산리 한옥 입구의 강화나들길 이정표

▲ 뒤돌아본 조산리 한옥

 

15:53=>조산리 한옥

     입구에 강화나들길 이정표(조산리한옥→가릉)가 세워진 돌축대에 올라 조산리 한옥을 좌측에 두고 한옥 뒷편으로 진행하면 잘 정돈된 '전주이씨 가족묘' 6기가 우측에 자리를 잡고 있다.

 

▲ 조산리 한옥 뒷편의 숲길 입구

 

묘지 앞을 지나 임도처럼 넓은 길 따라 오르면 우측에 커다란 저수탱크 시설물이 있고, 약 150여m의 오르막길을 극복하면 짧은 오르내림이 일부 포함되어 있지만 대체로 부드러운 산길이 진강산 등산로 푯말이 있는 임도까지 이어진다.

 

▲ 진강산 등산로인 임도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길

 

▲ 진강산 등산로인 임도와 임도에 설치된 강화나들길 이정표 

▲ 가릉가는 길

 

16:07=>진강산등산로/임도

     강화나들길 이정표(←가릉/→진강산)가 있는 임도 좌측으로 내려가면 좌측으로 여러 동의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진강산 등산로 이정표(↑주차장 0.8km/↓정상 1.2km)가 있다.

우측으로 강화능내리석실분이 보인다.

16:12~16:20=>강화능내리석실분/가릉

     능내리석실분에 오르면 석실분 안내문과 강화나들길 안내도가 있으며, 입구에는 이정표(↑주차장 495m/↓능내리석실분 20m)가 있다.

 

♧ ♧ 강화능내리석실분(江華陵內里石室墳)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8호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1번지 

 

이 석실분은 강화 진강산 남쪽에 위치한 고려시대 무덤이다.

무덤의 앞쪽에는 고려 원종(재위기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이 있다. 무덤은 지하에 석실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봉분과 그 바깥쪽에 난간석과 석수(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돌)를 배치하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곡장(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으로 이루어진 구조이다.

석실의 높이는 203cm로 무덤의 주인은 학인되지 않았으나, 석실 규모나 은으로 만든 장식 등 출토유물로 보아 왕실과 관련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축조연대는 강화 천도시기(1232~1270)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07년 발굴조사를 통해 2008년 정비하였다.

 

 

▲ 강화능내리석실분 

 

▲ 가릉 

 

♧ ♧ 가릉(嘉陵)

*사적 제370호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능내리 산16-2번지 

고려 24대 원종(1259~1274)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22년(1235) 원종이 태자로 책봉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그리고 고종31년(1244) 무렵에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후 충렬왕이 즉위(1274)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되었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은 파괴되어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하였다.

 

능내리 석실분 앞에 위치한 가릉 앞에도 이정표(↑가릉주차장 425m/↓능내리석실묘 70m)와 강화나들길 이정표(가릉→정제두묘), 그리고 셋째길 '고려왕릉길' 안내도가 있다.

 

 

▲ 가릉 입구의 이정표 

 

 ▲ 가릉 입구의 강화나들길 이정표와 안내도

 

주차장 방향으로 마을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능내리마을회관이 있는 2차선 포장도로에 이르게 된다. 마을길 입구에 '강화남로634번길'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도로 건너에는 강화나들길 이정표(능내리회관→하일리)와 넷째길 '아름다운 노을길' 안내도가 있다.

도로따라 좌측으로 약 150여m를 내려가면 도로이정표가 있는 '탑재삼거리'이다.

 

▲ 능내리마을회관 옆에서 뒤돌아본 전경

▲ 제3코스(능묘가는 길)와 제4코스(해가 지는 마을길)의 경계인 능내리마을회관 앞 2차선 포장도로

 

16:30~16:48=>능내리마을회관/탑재삼거리

     탑재삼거리에 위치한 '강화허브향기' 가게에 둘러 제 3코스 완주도장을 받고, 길 건너 은혜공인중개사 앞 '탑재' 버스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행 버스를 기다렸다 #3번 순환버스에 오르며 가랑비가 살짝 내리기 시작하는 탑재삼거리를 뒤로 하며 제 3코스 탐방을 마무리한다.

 

 

▲ 능내리마을회관 

 

▲ 탑재 버스정류장

 

▲ 탑재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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