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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 기(客氣)
가고파 메아리친
노비산 자락
뒤엉킨 판잣집
언덕배기 민둥산
통합 역으로
시끌벅적한 기운 빠져나가고
마지막 기차의 울음 머물러
휑덩그렁한 역사(驛舍)만 을씨년스럽다.
골목길 따라
아스라이 흔들리는
홍등가(紅燈街) 불빛은
아직도 늙은 작부의 교태로
도리질 하는가.
노산 선생이 유년기를 보내며 친구들과 뛰놀았던 노비산 주변, 구마산역이 삼역 통합으로 폐역이 되고 이제 반쯤 헐린 역사만 남아 처량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밤이 되면 골목길마다 여인의 은근한 추파가 흐르는 사창가는 그냥 남아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촌놈이 지겟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S교이다. 시병(時病)이랄까 유행이랄까, 하여간 그 때는 학교마다 수업연구가 활발하였다. 아무리 마음씨 순한 교장을 모시는 학교라도 교사의 반 수 이상은 이 홍역을 치러야만 했으니 말이다.
3월 하순 환경정리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이면 으레 어느 학년부터 교내수업 연구를 시작하게 할 것인가 하는 연구주임의 염려와 누구를 시킬 것인가 하는 학년주임의 고민이 맞물려 교내의 분위기는 마땅찮은 반목과 갈등으로 다소의 긴장감마저 감돌곤 하였다.
그 해 나는 6학년을 담임하게 되었는데 1, 2, 3반 담임이 모두 부장교사였다. 하루는 동학년협의회에서 학년주임이 6학년이 먼저 수업을 공개하기로 결정 되었다고 소식을 정해주는 것이다. 학교 방침은 동학년 전원이 수업을 공개해야 하나 교장 선생님께 간청한 결과 3명만 하기로 하였다면서 이렇게 반으로 줄인 것은 학년주임이 유능하기 때문이라는 공치사를 은근슬쩍 내비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작 누가 수업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결국 경력 순으로 수업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부장들은 자기들이 나이가 위니까 당연히 교육경력도 많을 것이라 지레 짐작을 하고 경력 순으로 할 것에 동의했지만 막상 확인한 결과는 2, 3, 5반이 수업을 해야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2, 3반의 주임들이 수업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학년부장은 다시 교장 선생님과 협의하게 되었고 결과는 전원이 수업을 공개하는 것으로 방향이 뒤틀리고 말았다. 다른 학년에서는 일제히 6학년의 처사를 원망하게 되었고 분위기는 경직되었다. 수업하는 날이 가까워지자 나이에 비해 경력이 짧은 J주임은 무척 고민을 하는 눈치더니, 하루는 나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다.
담당 과목이 도덕이고 선택한 단원이 백마고지 전투라 그 분의 학부모 중에 직접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한 분이 예비군 중대장으로 있음을 알고 자원인사 초빙학습을 하도록 권하였다.
그리고 수업안은 물론이거니와 대충의 시나리오까지 만들다보니 결국 내가 수업을 준비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남의 수업을 걱정했으니, 푼수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구나 부끄러워진다.
셋째 시간, J주임의 수업공개 시간이다. 수업안내를 슬라이드 화면을 통해 6·25로 인한 전쟁의 참담한 모습과 북괴의 만행을 보여줌으로써 동기를 유발하고 본시 학습목표를 인지시킨 후 실제 이 전투에 참전한 ○○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식으로 수업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평소 그 학부모는 입심이 대단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유머와 위트가 뛰어나 항상 인기 있는 분이라 이 날도 그 몫을 단단히 하였다.
“백마고지는 철원 서북방 해발 395m의 전략적 요 충지로서 1958년 10월 3일 부터 13일간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38군의 공격을 무려 12차례나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크게 전승을 거둔 전투였습 니다·····."
그는 적의 집중 포화로 전우가 죽어가는 장면을 실연함으로써 학생도, 참관하는 교사도 모두 눈시울을 적시게 했으며, 자기도 모르게 적개심이 불타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마룻바닥에 엎드려 포복을 하기도 하고, 지휘봉으로 총을 대신해 적을 사격하는 시늉을 하는가 하면, 모의 수류탄을 던져 학생들과 교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의 박진감 넘치는 제스처는 관중을 완전 매료시켜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어 3, 4교시 두 시간 연속상연을 하고 말았다. 시간 계획과 마무리만 잘 되었다면 정말 멋진 자원인사 초빙학습이 되었을 것이다.
연구주임의 고민 중 하나가 학습지도 연구대회의 준비와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 마산교육청 관내의 학습지도 연구대회는 마치 연구주임의 대결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S교는 학습지도 연구대회에 약한 징크스가 있었다. 나는 내 경험을 살려 연구주임이 된 첫 해에 수업자를 지원, 2등급에 입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경쟁이 치열하여 학교마다 조직력을 총동원 아이디어를 창출해 낼 수밖에 없었다.
연구주임 2년차, 대회 과목이 실과였는데 ○선생님을 추천한 후 지원을 하게 되었다. 결선 대회 단원이 가전기기 다루기였다. 동기유발 방법으로 다 쓴 건전지를 끼운 카세트의 스위치를 켜고 왜 소리가 나지 않을까? 이상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아동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 후 여러 가지 원인을 찾게 하여 확인해 보게 하였다. 결국 건전지를 바꾸어보자는 아동들의 의견을 듣게 되고 그에 따라 새 건전지를 끼우도록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그만 교사가 실수하여 건전지가 마룻바닥에 떨어지면서 뒤쪽으로 굴러갔다. 아동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고 교실은 소란해졌다.
아뿔싸! 틀렸구나.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히려 천연덕스레 건전지를 다시 끼우고 스위치를 켜는 것이었다. 그 순간 베토벤의 ‘운명’이 울려 퍼지고 아동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선생님처럼 기기를 잘못 다루면 많은 사람 앞 에서 이렇게 실수를 한답니다. 그래서 이번 시 간에는 가전기기를 다루는 방법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심사위원도 참관하는 선생님도 모두 박수를 보냈다. 성공이다. 나는 짐작했다. 결과는 1등급이었다.
그 다음 해 경남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자료로 도덕과 수업을 그리고, 그 후 산수과 수업 등 S교의 학습지도 연구대회 전통은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는 오로지 의욕으로 뭉친 젊은 교사들의 팀워크가 이룩해 낸 쾌거였다. 마산의 십 년 세월은 나에게 무한한 자극으로 새로운 교육 세계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 주었다.
멀리서나 가까이서 늘 지켜주고 보살펴 준 좋은 선배님들이 계셨고, 항상 뒤에서 받쳐준 자랑스러운 후배들의 추스름이 있었기에 겁 모르고 우쭐댈 수 있었다. 연구가 뭔지도 모르면서 연구를 한답시고 까불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젊은 날의 객기(客氣)였다고나 할까?
산행과 매실주
산(山)에 오르기를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같이하여, 자연 앞에서 겸손을 배우며,
정(情)이 사라져 가는 세파에 그것을 주워 담아 사람다운 심기를 가다듬고자,
회(會)의 깃발아래 모인지 어언 십 수 년의 세월이 뜀박질하듯 달렸다.
우리 지방의 이름 있는 산을 거의 답사하면서 어느 덧 창립회원들이 정년을 맞을 정도로 연륜이 쌓이고 말았다. 어떤 이는 민주 산악회라는 애칭(?)을 붙여주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이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하였겠지만, 그 목적 자체가 순수하고 가장 인간적이었기에 질시의 대상은 아니었으리라 자위해 본다.
지금도 기억 속에 너무나 또렷이 각인되어 있는 그 겨울의 무학산 첫 산행. 그날따라 매서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 멋모르고 산에 올랐던 우리들은 호된 자연의 질책에 몸둘 바를 몰랐다. 수건이라도 준비한 사람은 귀라도 싸맬 수 있었지만 시려오는 손발 끝이 발깧게 얼어버릴 때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볼에 눈물까지 타고 내려 추위를 더욱 느꼈던 그 날,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경험이 전차가감(前車可鑑)이 되어 만사 불여 튼튼이라는 의식의 전환을 가져 올 수 있었다. 또 황매산 산행도 잊지 못할 기억 중 하나다.
그 때는 몇 번의 산행에서 약간은 교만해져 등산로가 아닌 곳으로 하산해 보자는 제안에 따라 산을 내려오다 절벽을 만나게 되었고, 길을 찾다 급기야는 너덜겅을 타고 하산해 위기를 모면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모두 즐거운 추억이 되었고 그리움이 되었다.
산정회의 산행에서 역시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산정에서 마시는 매실주(梅實酒)에 있지 않을까? 산미(酸味)가 감돌면서 향기가 코끝으로 파고드는 호박색의 술이 목청을 타고 내려가면 벌써 뇌는, 산을 오를 때의 고통과 피로를 떨쳐버리고 황홀감에 빠져들게 된다. 나는 산행 모임을 통지 받은 날부터 딴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정상에서 마실 그 한 잔의 술에 미리부터 취하게 된다.
술은 원래 원숭이가 만들어 먹은 원주(猿酒)가 그 시초라고 한다. 고대 멕시코의 아스텍 족은 용설란의 수액을 발효시켜 데킬라를 뽑아냈고, 이집트인들은 대추야자 열매에서 야자술을 만들었다. 아마 수렵·채취 시대에는 과실주가 그리고 농경시대에는 곡물을 주로 하는 술이 나왔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에 이미 인번이나 증보리 같은 분이 새 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계림유사에는 술의 종류가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그리고 소주는 고려후기 몽고에 의해 그 제조법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백의 '삼배하면 대도(大道)를 깨치고, 말술이면 자연과 합치(合致)된다'는 음주예찬(飮酒禮讚)은 술꾼들에게는 좋은 핑계거리지만 ‘술은 인간을 쫓아내고 짐승을 들어낸다.’ 는 까뮈의 말에는 술맛이 뚝 떨어지게 하는 섬뜩함이 있다.
이왕 내친 김에 우리 술의 종류를 지방별로 살펴 보자. 서울 지방의 술로는 삼해주, 문배주, 송절주가 있고, 경기도는 옥미주, 옥로주, 부의주, 계명주 그리고 포천과 파주 막걸리가 유명하며, 충청도는 소곡주, 두견주, 청명주, 연엽주, 백일주가, 강원도는 감자술, 옥수수술, 율무술, 토밥소주가 이름나 있다. 경상도는 안동소주, 교동법주, 하향주, 국화주, 과하주, 호산춘이 있고, 전라도는 이강주, 송순주, 오곡주, 사삼주, 복분자주, 진도홍주, 장군주가 있으며, 제주도는 오메기술, 모주, 허벅술 등이 대표적인 술이다. 정말 술 종류가 다양하여 세계적인 술 소비국의 체통을 잘 지키고 있으며, 잘만하면 술 생산국가 베스트에 한 몫 끼일 수 있는 잠재력까지 충분히 갖추고 있다.
아! 그러나 애석하다. 아니 여기에 어찌 사천 곤양 이문(李門)의 매실주가 빠졌더란 말인가? 이건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누구든지 산정회원이 되어 한달에 한번 매실주 맛을 음미해 보았다면 이 맛을 정녕 잊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매달 모임에 빠짐없이 매실주를 챙겨 오시는 이형(李兄) 내외분을 생각하면 그 정성 그 정에 깊은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행여 퇴임하신 후 산행에 자주 빠지지나 않을지 내심 걱정이 되는 것은, 좀 얌체같이 속 내비치는 말인지 모르나 매실주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산행길이 험하고 힘들수록 정상에서 맛보는 술맛은 그 품격이 더하여진다. 그리고 산에 따라 느끼는 술맛 또한 다르다. 남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그 풍치에 빠져 금산에서 마신 술맛은 심장에서 코끝으로 매화의 진한 향이 솟아오르고, 사자평에서 영남의 알프스를 바라보며 그 맛을 음미할 때는 코끝에서 진한 향내가 뇌를 자극하여 상승작용을 한다. 그러나 비를 맞고 목장원에서 시작하여 비음산으로 오르다가 결국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너럭바위에 주저앉아 마신 그 날의 술맛은 무어라 형용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밀려오는 한기와 불쾌감을 자극시키는 습기로 피로에 지쳐 있을 때 한 잔의 매실주는 분명히 감로주(甘露酒)요 생사일탈주(生死逸脫酒)이다.
목구멍으로 단내 오르고,
주저앉고 싶은 고통이 온몸으로
스물 스물 스며온다.
젊은 사람 따라 잡으려 지만
숨소리는 커지고 심장이 멎을 것 같다.
땀을 훔치며 정상에 서다.
‘산에 올라 보라 그러면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귓가에서 중얼거리지만
같이 매실주 마실 사람 있는데……
옛날 사람 신정승은 같이 마실 벗이 없어
국화와 술을 나누고
강물이 불어 친구와 술을 나눌 수 없는
박아무개는
강가에서 마주보고
어이 자네 한 잔, 나도 한 잔
권(勸)커니 작(酌)거니 했다는데
산정회 있어 산에 취하고
산정회 있어 정에 취하고
산정회 있어 만남에 취해
세상사 이렇게 보낸들 어떠리.
재약산 산행기
표충사의 버스 정류소에서 차를 내려 절로 향해 올라가면 매표소가 나오고 매표소를 지나면 멀지 않아 표충사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석탑과 사우가 정갈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로 재약산이 배산을 이루어 보기가 좋다.
대충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볼 때 사명대사 유물 전시관을 꼭 둘러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영정 약수 한 그릇도 잊지 말고 챙겨 드시는 것, 또한 절을 찾는 의미를 더해 준다.
절 왼쪽 귀퉁이에 샛길로 들어서면 효봉선사 사리탑이 나온다. 효봉선사는 통합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분으로, 일제 때 사법부 판사로 재직하던 중 한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해 형이 집행된 뒤, 진범이 잡혀 죄 없는 목숨을 잃게 한 자신의 오판에 큰 충격을 받아 입산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평생 참회의 기도를 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효봉선사는 이곳에서 일생을 마감하고 열반의 길로 들어섰으며 그의 유골을 봉안한 자연석 부도가 경내와 지척 간에 자리하고 있어 참배객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사리탑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게 되는데 오른쪽으로 급하게 나 있는 오르막길을 한 20분쯤 오르자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한 30여분 오르락내리락 산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노라면 목을 축일 샘터가 나온다. 이름도 희한한 ‘소금쟁이 샘’. 이 샘은 옛날 울산의 소금장수가 밀양으로 소금 팔러 다닐 때 이용하던 샘이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여기서 다시 비스듬히 40분쯤 쉬지 않고 종종걸음을 치면 산위에 민가가 몇 채 보이고 유난히 태극기가 펄럭이는 슬라브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건물이 사자평 분교(일명 고사리 분교)다.
몇 년 전에 문을 닫았다가 학생이 두어 명 생겨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민가는 모두 민박을 하거나 상점으로 등산객을 위한 음식물을 제공하고 있었다. 토종닭 백숙에, 큰 항아리 속에 온갖 잡것이 들어 있는 막걸리를 퍼내어 벌컥벌컥 들이키니 그 맛을 세상에 누가 나만큼 더 잘 알 것인가? 모두 퍼져 일어설 기미가 없자, 일행 중 일부는 수미봉을 향해 다시 도전을 하게 되었다. 분교에서 25분쯤 오르니 다시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곧장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산마루에 다다르자 산정으로 비스듬히 이어진 수천 평의 억새 평원이 외국의 영화에서 본 멋진 장면처럼 펼쳐진다. 황색의 대궁과 하얀 수염으로 단장한 억새가 무질서하게 물결치고 있다. 이곳이 사자평! 사방은 고요한데 보이는 것은 억새뿐이다. 누가 억새꽃이라 했던가? 사자평을 뒤덮고 있는 억새 숲에 바람이 불면 은빛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재촉하여 전진을 계속한다.
길에 이어진 능선을 따라 곧장 오르니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딱 버티어 선다.
해발 1108m의 수미봉이다.
재약산의 산세를 가만히 살펴보면 마치 한 송이의 거대한 연꽃송이를 연상하게 한다. 사자봉, 수미봉, 문필봉, 관음봉, 문수봉, 재약봉, 고암, 향로봉 등 8개의 봉우리가 8개의 꽃잎으로 활짝 피어난 지상의 연화. 그 중앙에 표충사가 천년을 지켜오고 있다. 모두가 불가와 인연을 가진 이름들이니 이 땅이 부처님의 땅임을 알 수 있다. 수미봉에서 다시 북쪽으로 45분쯤 능선을 계속 타고가면 재약산의 주봉인 사자봉(1189m)에 닿게 된다. 정상에 서면 주위 사방이 높은 봉우리에 쌓여 있어 가히 영남의 알프스라 부를 만하다. 가지산과 운문산, 영취산과 신불산, 간월산 등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산이 앞 다투어 재 듯 우뚝 서 있다.
오호라. 여기가 바로 불국토이구나!
삶은 산행의 과정
삶은 마치 산행의 과정과 같다. 누구나 등산이 건강에 좋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에 적절한 것임을 잘 알기에 그 시작 또한 쉽게 할 수 있다. 또 산을 오르는 사람은 누구나 산꼭대기에 선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상상한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과정은 사람에 따라선 힘겨움의 연속이다. 이런 힘겨운 일을 같이 해 보자고 만난 모임이 山情會다.
누가 ‘인생을 만남’이라 했던가? 부처와 아난존자는 종교적인 영혼의 만남으로 인연을 맺었고, 공자와 안회는 지인의 사제지간으로, 관중과 포숙아는 우정의 만남으로 우리에게 만남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기에 혼자로는 뭔가 허전한, 그래서 어울려 살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기에 만남은 존재하는 것이다. 중년이 지나면서 늦게나마 철이 들었는지 만남을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고 이런 만남을 산을 배경으로 엮어 보자는 의견의 일치로 산정회가 탄생해 이제 어느 덧 100회를 지난 등정의 연륜까지 쌓였다.
산다는 것이 모진 풍랑을 헤쳐 가는 배와 같이 운명을 개척해 가는 과정이라고 볼 때 초지일관하는 자세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살펴나가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새해 아침 마음속에 다졌던 결심이 섣달그믐까지 연속적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한 해를 산 보람에 감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세상 일에 부딪히고 갈등을 겪으면서 그만 잊어버리기가 일쑤이며 마침내 무엇을 생각했었는지 조차 잊을 때가 있는 것처럼 지난 10여 년간 우리 개개인에게 항상 새로운 만남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지, 혹시나 새해 아침의 결심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한 번쯤 속마음을 꺼내 흔들어 보고 싶다.
산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달리 선두 그룹이 자주 바뀌고 점차 낮은 산이나 근교의 산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사실에 약간은 실망스러웠지만 꼭 높은 산을 올라야 정이 더욱 돈독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반박 논리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만다. 어쨌든 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세월이 그렇게 만든 것일 거라는 턱없는 변명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동안의 산행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상을 향해 힘겨운 등정을 성공적으로 끝냈을 때의 그 감격과 환희는 항상 하산의 아쉬움을 동반하고 있으며, 출발점을 같이 한 산행이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서가 바뀔 때는 생의 단면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인생을 느끼게 하는 산행에서 결속의 의미를 재음미하면서 저쪽 책(저승세계에 있다는 인간 개개인의 운명을 기록한 책) 속에 우리는 이미 만나도록 기록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山情會란 이름으로 모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과정과 끝이 있는 법. 10여 년이라는 모임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연을 날리는 마음으로
<솥뚜겅 보고 놀란다.>
Y초등학교는 교감으로 승진한 후 세 번째 옮긴 학교이다. 새로 모시게 된 교장은 일찍 전문직으로 출발해 두 곳의 교육장과 연구원장을 지낸 분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사라 그 유명세에 나는 미리 주눅이 들어 썩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제까지 근무한 학교에서 무지한 교장에게 혼줄이 난 뒤여서 교장이란 모두 같은 족속(?)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 터라 상대가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달갑잖았다.
내가 갖고 있는 심정적 판단으로는 대개 행정직에 오래 머문, 이름난 유명 교장일수록 말로는 민주적인 학교 경영을 하는 체 하면서 실제로는 교감이나 교사를 자기 발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자기중심적 권위주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땅굴 견학을 다녀온 어느 교장, 갈 때 선생님들의 인사가 없었다는걸 괘씸하게 생각한 그는 느닷없이 임시 직원조회를 소집하고, 하시는 말씀 왈,
“시애비가 외출을 하면 며느리가 용돈을 주는 법 이고, 친정 애비가 딸집에 들리면 갈 때 노잣돈을 주는 법인데 그런 것도 모르는 것들이 선생이라 고……"
이쯤 되면 교장에 대한 이미지가 어떨까 생각해 보라. 하여간 교장에 대해 부정적 편견을 지닌 나로서 임지를 바꾸어 새 교장을 모신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꼭 나보고 한 소리 같아 씁쓸한 기분이었다.
악명 높은 교장일까? 유명 교장일까?
〈선생님들과 같은 수준에서 생각하라〉
인사차 교장실에 들른 나에게 교장은,
“교감선생님과 같이 근무하게 되어 나로서는 얼 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육청에서 나를 특 별히 예우한다고 교감선생님을 보내셨다고 들었 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교장이 교감에게 잘 부탁한다니 참 듣기 어려운 인사말이었다. 돗수 높은 안경 너머로 위압적이고 근엄한 표정으로 다가올 줄 알았는데, 검소한 교장실, 인자한 모습, 친절한 말씨,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확 풀어짐을 느꼈다.
부임 삼일 째, 교장은 서무를 불러 앞으로는 교감의 결재를 받아 경리를 집행하고, 도장을 맡기더니 각종 장부와 공문서도 교감이 판단하여 교장이 꼭 알아야 할 것만 직접 결재를 받고 나머지는 교감이 알아서 바로 결재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수시로 나를 불러 학교경영 전반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기도 하고, 자기의 견해와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갖가지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때로는 모의상황을 설정한 후 이런 경우 교감선생님 같으면 어떻게 처리하겠느냐고 대답을 주문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를 옳은 관리자로 만들어보고자 나름대로 연수를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감선생님의 수준을 아주 낮추어 선생님들을 보셔요.
교장선생님은 항상 교감의 수준을 낮추어 선생님들을 보고, 대하라고 당부하셨다. 교감이 자기 수준에서 교사를 보게 되면, 교사들의 하는 일이 하나도 마음에 차지 않아 미워하게 되고, 교사들은 피로해져 결국 학교 조직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됨을 예견하시어, 미리 내게 내려준 처방이었을 것이다.
〈협의를 통해 결정합시다.〉
공휴일인데도 십여명의 선생님들이 학교에 나와 진지한 모습으로 토론을 하고 있다. 새 학년도의 담임 추천을 위한 인사자문위원회가 진행중인 것이다.
“담임 결정은 교장의 고유 권한인데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미안해하며 교장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들의 추천이 나중에 보면 우리 생각과 거 의 일치합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담임 추천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하시 는 것이다.
그 원칙은 각 학년에 업무주임을 한 명씩 고루 배치하고, 계속 근무한 분들을 학년당 2명이상 배치하여 전입 교사를 홀대하지 않으며, 1, 2학년 담임은 본교 근무 기간 중 1회에 한하고, 학년당 성별 비율이 전체성별 비율과 비슷하게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부장과 담임의 추천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표창 추천도 인사자문위원회에서 이루어지며, 근무성적 평정은 1차로 자기평가, 2차로 학년부장이 평가, 3차는 교감이 평가하여 종합한 결과로 서열을 내어 객관도와 신뢰도를 높였다.
교장선생님의 지론은 선생님들이 교장의 입장에 서 보아야 진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고, 나는 이런 경험을 현장연구 주제로 잡아 '권한 공유의 개방적 지도성이 학교경영 민주화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출품 전국 대회에서 상위 입상하기도 하였다.
〈선생님이 즐거워야〉
Y교는 특별실이 많았다. 오후 3시 반 이후 전 학년이 수업을 마치고 청소가 끝나는 시간부터 퇴근시간까지 이러한 시설을 활용 자율 연수를 하게 하자는 교장선생님의 복안에 따라 동호인 클럽이 생기에 되었다. 테니스, 탁구, 컴퓨터, 사진, 서예 등은 자체 강사로, 수채화, 마직공예는 외래 강사를 초빙 주2∼5회 연수를 실시하였다.
가장 인기가 있는 클럽은 테니스와 탁구로 월례 대회를 개최하여 시상까지 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지금도 잊지 못할 일은 매주 수요일 실시하는 직원체육 시간에 항상 제일 먼저 나와 앉아 계시는 분이 교장선생님이었다. 체육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배구장이건 테니스장이건 시계처럼 나와 계신다는 점이다. 체육부장이 혹시 잊고 있다가 교장선생님이 나와 있는걸 보고 그때서야 허겁지겁 준비에 부산을 떤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직원체육이 있는 날은 으레 손수 술을 준비해 오셔서 남녀를 불문하고 한잔씩 권하셨다.
“선생님이 즐거워야 아이들이 즐겁지......” 늘 입 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연을 날리는 마음으로〉
교감의 수준을 낮추라고 말씀하시던 교장선생님은 급기야는 내게 숙제를 내셨다. 교직은 전문직이고, 전문직은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교감은 자율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왜 교사들의 자율성이 신장되지 않는지 다음 주에 토론을 해 보자는 것이었다.
숙제를 받긴 했어도 바쁜 와중에 잊고 있다가 끝내 약속한 화요일, 교장실에 불려갈 때까지 정리를 하지 못한 채였다.
나는 엉겁결에 자율성 신장은 연날리기와 같다고 주장했다. 연을 가장 높이 날리기 위해서는 얼레에 감긴 연실을 최대로 풀어준 상태에서 적당히 바람을 받게 하면 최고로 높게 날게 된다. 그러나 연실을 풀어주면 풀어주는 순간은 연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와 잘못하면 땅에 떨어지게 된다. 결국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자주 당기면서 조금씩 풀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오는 게 안타까워 얼레로 감아버리면 연은 다시 올라가지만 최고로 높게 날수는 없다.
교장선생님은 빙긋이 웃으시면서,
“바로 그거요. 교감은 내가 사십년이 넘어서야 겨 우 터득한 진리를 일주일만에 깨우쳤다니 정말 대단하오.
평소와는 달리 아이들 같이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나는 마치 백점 맞은 학생처럼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그래, 맞습니다. 관리자들이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면 될 텐데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다시 조 이니 자율성이 신장되기 어렵지요.
그 후 우리 학교는 동학년 중심 경영체제로 바꾸고 교육계획을 실천하게 하였다. 그 해 마침 시범학교를 운영해야 했는데, 1학기 동안은 이게 학교인지 시장통인지 무질서하고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지도 기관에서는 이래 가지고야 무슨 시범학교가 되겠느냐고 야단들이어서 나도 괜히 교장선생님 앞에서 우등생이 되었던 걸 후회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좀 더 참고 기다려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면서 거짓말처럼 학교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방과 후 특별실 마다 활기가 넘치고 선생님과 학생들의 모습에 생기가 넘쳐 학교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해 시범학교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고비를 넘기면 반드시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책임감만 느끼게 되면 자율성은 큰 힘을 발휘하 게 됩니다.
명언집에는 없으나 내 가슴속에 영원히 수록된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히 울려오고 있다.
후기) 나는 어떤 한 개인을 미화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게 아니다. 이년간의 짧은 체험이었지만 교장에 따라 학교가, 교사가 그리고 학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깨달았고, 그런 의미에서 함축된 교장상을 실제 인물로 나타내고 싶었다.
대통령에서 미화원으로
몇 년 전 선생님 한 분이 갑자기 병가로 결근을 하는 바람에 3학년 교실에 들어가 내가 대신 수업을 맡게 되었다. 마침 장래 희망, 즉 자기 꿈에 대한 발표 시간이었기에 무리 없이 수업을 할 수 있었는데, 이 때 나는 시대에 따라 장래 희망에 대한
가치 기준이 얼마나 변하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자, 너희들 이 다음에 자라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 이 되고 싶니?”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저요, 저요”
여기 저기서 손을 번쩍 들고 야단들이다. 지명도 하기 전에 한 아이가 교단까지 뛰어나와 절을 꾸벅 하자 아이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저는요 커서 가발회사를 차릴래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나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대머리라 항상 고민을 하거든요”
아이들은 와아 함성을 지르며 책상을 두들기고 야단이었다.
아이는 마치 가발회사 사장이라도 된 듯 폼을 재며 제자리에 가 앉았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엔 긴머리를 한 귀여운 여학생이 예쁜 걸음걸이로 나와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나는요 간호사가 되겠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나요?”
나는 여학생에게 물었다. 그 학생은 나를 힐끔 쳐다보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백혈병에 걸려 2년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병에 걸려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 와주고 싶어요.”
나는 대견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래 꼭 간호사가 되어라”하고 격려해 주었다. 아이들도 덩달아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다.
“누구 또 없나요?”
이번엔 키가 큰 아이가 나왔다. 미처 아이들이 손뼉도 치기 전 에 유창하게 말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아름다운 이야기, 기쁜 이 야기. 그리고 가슴 아픈 이야기 등 모두 찾아내어 세상에 알려,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며 또 행복해 지도록 방송국 기자가 되겠습니다.”
친구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나는 그 아이의 꿈이 꼭 영글 수 있기를 바라며 칭찬했다.
“예, 방송국 기자가 되어 좋은 일 많이 해 주세요.”
“또 다른 사람 없나요?”
한 아이가 친구들에게 등을 떠밀려 나왔다. 아마 아주 내성적인것 같았다.
아이는 얼굴이 빨개지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복지사라고 말했다.
“예, 복지사가 되겠답니다.”
나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복지사가 무엇이냐고 묻길래 나는,
“복지사란 국민 복지사업에 관여하는 사람으로 국민들의 국민들의 생활 향상과 행복을 위해 일 하는 사람이다. 특히 양로원, 보육원, 아동 상담원 등에서 불우 한 사람을 돕는 일에 많이 종사하고 있다.” 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도 나도 모두 복지사가 되겠다고 야단이다.
“자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 조용히 한번 들어보자꾸나”
나는 이 아이가 너무나 대견해서 큰 기대를 걸고 대답을 재촉했다.
“저는 저번 노는 토요일에 부모님과 함께 양로원 에 갔습니다. 저는 거기서 무의탁 할아버지, 할머 니를 만나게 되었어요. 자식 도 친척도 돌봐줄 사 람이 없는 분들이라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을 부모처럼 모시고 돌보는 사람들이 있 었어요. 저 사람들이 누구냐고 어머니께 여쭈어보 니 복지사와 자원봉사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복지사 아저씨께 물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되 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한 달에 한번 양로 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나올 때와는 달리 제법 어른스럽게 또박또박 자기의 생각을 잘 말했다. 아이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자기 가족들도 다음 노는 토요일에는 꼭 가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흐뭇한 풍경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버릇없고 천방지축인줄만 알았는데 속마음이 이토록 여물고 알찬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또 누가 한번 말해볼까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아이가 달려 나왔다.
“저는요 선생님이 될래요.”
“왜 선생님이 되려고 하지? 네 얘기 좀 들어보자.”
“선생님은 숙제도 없고 학원에 안 가도 되잖아요.”
아이의 대답은 엉뚱했다.
“그래 참 그렇구나. 그렇지만 그건 선생님이 아닌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 아니니?”
“아니예요, 아버지는 회사에서 숙제를 받아오나 봐요, 밤늦게까지 일을 하거든요. 그리고 영어 학 원에 나가 영어 공부를 한답니다.”
“아하 그랬구나. 그러나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 야. 너희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밤늦게까지 공부 를 해야 하고 학원이나 연수기관에서 틈틈이 연 수를 받고 있단다.”
“아 그럼 나는 선생님 안 할래요.”
아이들은 이번에 발을 굴려가며 깔깔 되었다. 웃음소리가 줄어들자 제자리에서 다른 아이가 일어서서
“그래도 저는 선생님 할래요.”
모두들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유명한 사람도 모두 다 선생님이 있잖아요.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장관도 대통령도 되 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 그 말이 맞구나. 너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 라.”
“이번에는 평소에 발표를 잘 안하는 학생을 추천 해보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뒷줄에 혼자 앉아있는 아이에게 쏠렸다. 그리고 손가락질로 그를 가리켰다.
나오지 않으려는 아이를 자리로 가서 억지로 데리고 나왔다.
“너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니? 교 장선생님 앞에서 자신 있게 한번 얘기해보렴?”
“그 아이는 말을 잘 안해요.”
다른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겨우 입을 연 아이는
“나는 미화원이 될래요.”
“왜 하필 미화원이야?”
내 질문이 마땅찮다는 듯이 내 얼굴을 곁눈질 하더니 연방 아이들을 향해
“미화원이 없으면 너의집 쓰레기는 누가 치울 것 이냐?”
“아,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나는 맞장구를 쳤다.
“선생님들께서는 항상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 셨잖아요.”
그 아이 이야기는, 미화원은 우리가 새벽잠에 떨어져 있을 때도 눈이 오나 비가 올 때도 항상 동네 쓰레기를 치워 동네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모든 사람들이 손도 잘 되지 않으려는 더러운 물건을 다른 사람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으니 저런 사람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교장선생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남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이 사람보다 더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있느냐고 따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맞아.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최고다.”
마치 합창 소리처럼 들렸다.
참으로 세상은 많이 변한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도 오고 가노라면 절로 삶의 목표나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옛날 우리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께서,
“너희들 장래 희망이 뭐냐?”
하시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통령, 장군, 사장이 되겠다고 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새삼 느꼈다. 자기 생활 주변에서 자기의 갈 길을 정하고 또 꿈을 좇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 어린 제자들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은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신념대로 사는 인생, 평범속에서 비범을 발견하는 인생, 보람과 희열을 자기 나름대로 가늠하는 인생… 아니 이 변화 무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이미 터득한지도 모른다. 모든 아이들이 대통령을 꿈꾸던 시대는 이제 가고 없다. 다만 꿋꿋이 자기 신념대로 살아가면서 생활 속에서 보람과 희열을 느끼며 사는 인생이 참 인생이라고 제자들이 나를 가르쳤다.
고향의 느티나무
우리나라의 오래된 시골마을이라고 하면 으레 마을 어귀에 아름드리나무가 한 그루쯤은 서 있어 바쁜 농사철 잠깐 쉴 곳으로 나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물론 나무하면 우리나라에서 소나무가 제일 많지만 그래도 마을 어귀나 들 가운데 서 있는 나무는 주로 느티나무였다.
지금도 고향마을, 세 곳에는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마을 어귀에는 구새먹어 속이 텅 비어버린 600년 이상의 나이 많은 나무가 혼자 외롭게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마을 어귀의 오른쪽 산자락에는 400살이 넘은 한 쌍의 느티나무가 대장 나무를 보호하듯이 기세 좋게 뻗어 있다. 그리고 마을 중간에 500살은 실이 됨직한 느티나무 한 쌍이 역시 마을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다.
이곳은 내가 어릴 때 소꿉친구들과 뛰놀던 놀이터였으며, 마을에 무슨 사단이 일어나면 이 나무들에 금줄을 치고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던 당산나무 이기도 하였다. 또한 계절 따라 봄에는 새싹을 틔워 마을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농사에 지친 농부들이 낮잠을 즐기며 한 숨 돌리는 휴식처요, 가을에는 낙엽이 쌓이어 방석과 보료가 돼 주며, 겨울에는 흰 꽃을 피워 즐거움을 나누어 주었다.
느티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우리 민족의 나무다. 우리의 단군신화에 환웅이 하늘나라에서 3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웅녀가 신단수에 빌어 환웅과 혼인을 한 후 단군을 낳았다. 이 개국신화에 나오는 ‘신단수와 단군이’ 모두 박달나무 단(檀)자를 쓰고 있다. 그래서 조상들의 사랑을 받아온 박달나무가 신단수이냐 아니면 당산나무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는 느티나무가 신단수이냐 학자들 간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느티나무가 신단수든 아니든 우리민족에게 사랑을 받아온 나무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 곳곳에 천여 년을 헤아리는 노수 거목들이 많이 있고 이의 대부분이 은행나무 아니면 느티나무이다. 서양 사람들이 월계수를 신성시하듯이 우리나라에서는 느티나무를 신령한 나무로 받들어 오고 있어 여기에 얽힌 전설도 또한 많다.
전주와 남원 사이에 오수라는 마을이 있다. 오수는 ‘개오(獒), 나무수(樹)’로 개 나무란 뜻인데 여기에는 노인과 개와 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이 고을에는 개를 자식처럼 사랑하는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봄날 장터에 다녀오던 길에 오랜만에 마신 술에다 먼 길을 다녀오느라 피곤하여 길 옆 잔디밭에 앉았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때 산불이 나 봄바람을 타고 노인이 잠들어 있는 곳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위험을 느낀 개는 노인의 옷을 물고 흔들었지만 깊이 잠이 든 노인은 일어날 줄 몰랐다. 그러자 개는 근처의 물 웅덩이를 찾아 자신의 몸을 적셔, 불이 노인이 잠든 곳까지 오지 못하도록 불길에 뒹굴었다. 뒹굴기를 수백 번 거듭한 결과 불은 꺼졌으나 개는 탈진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잠이 깨어 사태를 알게 된 노인은 슬퍼하며 이 갸륵한 개를 고이 묻어주고 자신의 지팡이를 꽂아 주었다. 얼마 후 이 지팡이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터 훌륭한 나무로 자랐는데 사람들은 이 나무를 개나무, 즉 오수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퍼져나가 마을의 이름까지 오수가 되었다는 얘기다. 바로 이 나무가 느티나무인 것이다.
또 다른 얘기도 있다. 아주 오랜 옛날 만석이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만석이는 착하고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어머니가 원인 모를 깊은 병에 걸렸다. 사방에서 약을 구해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자 만석은 마지막에 산삼을 찾아 나섰다. 목욕재계 한 후 산에 올라 석 달이 넘게 산삼을 찾아 헤매었으나 산삼을 찾을 수가 없었다. 100일이 지나도 찾지 못하자 낙심하여 산을 내려오는데 만석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뒤돌아보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는 것이었다. 만석은 느티나무에 절을 하고 어머니를 살려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느티나무는 어머니를 살릴 약을 줄 테니 너의 두 눈을 달라고 하였다. 어머니를 살리고 싶은 일념에서 만석은 자기의 눈을 뽑아 느티나무에게 바쳤다. 만석의 효심에 감동한 느티나무는 스스로 잎을 떼어 만석에게 주고 만석이의 눈도 고쳐주었다. 그 후 이 잎을 달여 먹은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효자나무라 부르고 신령한 나무로 여겨 지금까지 보호해오고 있다는 광주 서석동의 효자나무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고향 마을의 느티나무도 물론 신령스러움이 있다.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의 얘기로는 우리 집 대청마루에서 바라보이는 산비탈에 서 있는 한 쌍의 느티나무는 나라에 혹은 마을에 이변이 생기기 전에 반드시 나무가 울어 경고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나무가 울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보름정도 운 것으로 아는데 울음소리가 마치 병을 부는 소리 같았다. 우웅…우웅 하는 소리로 세게 약하게 몇 번씩 반복하는데, 낮이 아니고 꼭 밤에 울었다. 이 소리가 나면 우리는 무서워 이불을 둘러싸고 숨을 죽였다.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3.1 만세 때도 해방되는 해에도 울었다고 한다. 어쨌든 고향마을의 느티나무들은 신령스런 존재이다.
그 후 내가 마산의 모 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당시 어느 교수가 사실여부를 확인한 결과 오래된 나무라 구새먹어 빈 공간이 생기고 군데군데 표면에 구멍이 생겨 구멍 속으로 바람이 드나들면서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부정을 탄 것인지 그 후 지금까지 잘 울지 않는다고 고향사람들은 말한다.
마을 앞 어귀의 느티나무는 십여 년전 대수술을 받았다. 반쪽은 구새먹어 내부를 긁어 내고 시멘트인지 뭔지 잘 모르지만 속을 채웠고, 죽은 가지는 잘라 내었다. 그리고 반년 이상 링거 주사를 맞아야 했다. 지금은 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주기적으로 돌보고 있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을의 느티나무를 사람처럼 대해 왔다. 나의 증조부로부터 4대가 이 나무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학생 때는 등하교시, 직장생활 이후로는 고향을 찾거나 떠날 때 이 나무 앞을 꼭 지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무 옆에는 마을회관이 있고 또 조그만 정자가 있어 마을 어른들이 항상 여기에서 소일하셨고, 거기에는 반드시 조부님도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부님께 인사도 드리고 나무에게도 꼭 조부님처럼 인사를 했고 또한 마음의 다짐도 하였다.
‘나도 어르신처럼 꿋꿋하게 살겠습니다!’ 라고 다짐하곤 했는데, 요즘 고향을 찾을 때는 인사말이 달라졌다. 링거를 맞고 있던 나무가 생각나 ‘어르신 건강하게 더욱 더 오래 오래 사세요.’로 바뀌었다.
고향하면 생각나는 게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마는 우리 마을 출신들은 아마 십중팔구 느티나무를 생각할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귀목 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던 느티나무, 어린시절이 나무 아래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지만 간혹 고향을 둘러보면 지금은 늙은 노인 몇 분들만 자리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이 나무는 세월 따라 시절 따라 영욕이 무상하다는 것을 진작 깨달았겠지만, 이 나무가 어릴 적 내 모습에서 간혹 백발이 섞여 가는 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일러 주는 듯 하여 나에게는 고향의 느티나무가 나의 영원한 ‘큰 바위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다.
고향의 느티나무여 영원 하라!
파김치의 맛
나는 밥상 위에 오르는 반찬 중에서 파김치를 제일 좋아한다. 배추김치는 생김치도 좋지만 약간 묵은 김치가 더 좋다. 묵은 김치의 시큼한 신맛이 혀끝의 미각을 더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김치는 생김치라야 제 맛이 난다. 입안이 얼얼하며 휘휘 감기는 산뜻한 맛을 보려면 싱싱한 파로 금방 담은 파김치라야 파의 톡 쏘는 맛과 약간 매우면서도 줄기와 잎의 씹히는 맛을 느끼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분교장 근무를 하게 되었다. 본교에서 십여 리나 떨어져 있는 두메산골로 천삼백여평의 다랑논을 사들여 그 중 면적이 가장 넓은 논에 교실 한 칸 덜렁 지어 놓은 신설 분교장이었다. 그 때만 해도 이런 오지에는 갈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이 학교를 지원해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제일 먼저 한 것이 교실 주변 조경이었고 다음은 운동장 만들기 그리고 생울타리 와 담장을 만들어 나갔다. 그 중에서 빠지지 않은 것이 쉰 평이 약간 넘게 텃밭을 만든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 마을에서는 종묘사의 종자를 사와서 배추나 무를 재배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토종의 씨를 받아 재배하기 때문에 배추가 속이 차지 않고 무도 뿌리의 크기가 아주 작았다. 나는 종묘사에서 구입한 배추와 무 씨앗을 텃밭에 뿌리고, 한쪽에는 파쪽을 구해 심었다. ‘월별 농사요령’이라는 책을 보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머슴과 함께 농사짓던 경험도 돌이켜 보면서 거름도 듬뿍 넣고, 비료도 적당히 주어 정성으로 돌봤더니 정말 ‘농작물은 농사꾼의 눈길에 의해 자란다.’는 말과 같이 엄청 큰 배추와 무로 자랐다. 마을 사람들은 전문 농사꾼이면서도 내가 지은 채소 농사를 구경하러 학교로 찾아오고 이구동성으로 선생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말로 감탄했다.
그 해 초겨울에는 내 손으로 기른 파로 김치를 담게 되었다. 고춧가루에 멸치젓갈, 당근채, 마늘, 생강, 굴, 조갯살 등 갖은 양념을 섞고 잘 저린 파를 넣어 버무린 뒤 마지막에는 깨소금과 내가 좋아하는 초피(흔히 산초로 알고 있으나. 산초와 초피는 잎 모양이나 가지에 가시가 있는 것이 비슷하지만, 산초는 8~9월에 흰 꽃이 피고 열매는 주로 기름을 짜서 사용하고, 초피는 늦봄에 황록색 꽃이 피고 열매는 가을에 붉게 익지만 풋것일 때 따서 말려 씨를 빼고 가루를 내어 향미료로 사용하고 있음)가루를 뿌려 마무리를 했다. 양이 많아 중간 크기의 장독이 가득 채워졌다. 그 해는 파김치로 식사 때마다 정말 밥맛을 느낄 수 있는 겨울을 보냈다.
몇해 전에 추석 때 성묘도 하고 숙모님도 뵈올 겸 고향을 찾았더니 숙모님께서는 뜻밖에도 내가 좋아하는 파김치를 내놓으셨다. 더운 밥 위에 얹어 먹는 파김치의 맛은 글자 그대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다. 더구나 파 하나 하나를 둘둘 말아서 담그셨기에 그 씹는 맛 또한 특이해 밥을 두 공기나 비웠다. 나는 나만 그런 줄 알고 둘러보니 동생들도 하나같이 김치 맛에 반해 밥을 더 많이 먹고 있었다.
그 후 숙모님은 명절날만 되면 조카들이 파김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시고 미리 준비해 놓고 우리들을 기다리셨다. 우리도 설, 추석 명절이 오면 차례를 빨리 지낸 후 고향으로 성묘도 하고 삼촌 제사도 모실 겸 길을 재촉하는데 차가 밀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향의 맛과 그 속에 깊이 배어 있는 숙모님이 담그신 파김치 맛을 미리 생각하고 군침 도는 입으로 고향을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 전 숙모님마저 파킨슨씨병으로 고생하시다 운명하시고 나니 고향이 텅 빈 것 같아 어째 발걸음이 뜸해지고 말았다.
김치는 익어 가면 익어갈수록 영양가가 풍부하고 살균력이 강하여 건강유지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음식임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입증되고 있다. 특히 조류독감이 유행하는 곳에서는 한국 사람은 김치를 먹기 때문에 예방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최근 한국김치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크게 달라졌고 수입을 늘리는 한편 모방한 김치를 만들어 도리어 역수출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 역시 십여 년 전부터 ‘기무치’를 만들어 수출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김치의 영양적 가치나 그 효력을 간파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 김치의 특유한 맛을 결코 낼 수 없었기에 지금은 그 사업이 지지부진한 것으로 안다.
김치 맛을 토로하면서 꼭 짚어 두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음식 맛에 대해 말할 때 음식의 맛은 재료와 양념을 잘 선택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먹을 사람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아 같이 버무려야 제 맛을 낸다고 일러주었다.
그렇다. 김치의 맛 아니 파김치의 맛도 그 속에 내 어머니의 손맛이, 숙모님의 정성이, 내 아내의 사랑이 함께 버무려져 있었기에 새콤하고 시큼하면서도 사각사각 씹히는 맛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음지와 양지
우리말에 비가 오면 나막신 장수가 돈을 벌고 날이 맑으면 짚신 장수가 돈을 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사람이 다치거나 아프면 병원이 치료해서 돈을 벌고 사람이 죽게 되면 장의사가 돈을 벌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음지와 양지가 있다. 한사람이 훈장을 가슴에 달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뒤따라야 하고, 누가 영전을 하게 되면 또 누구는 좌천을 당해야 한다. 상인이 이득을 챙기면 고객의 호주머니는 얄팍해진다. 대개 곡식은 햇볕을 받아야 잘 자라지만 버섯이나 곰팡이는 그늘 속에서 더 잘 자란다. 우리 학교의 건물은 오전에는 어둡고 별관은 너무 밝아서 탈이다. 어두운 교실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반면, 밝은 교실은 여름에 무덥고 겨울에는 춥다. 식물은 볕이 너무 강렬하면 시들고 그늘 속에서는 기형적으로 연약하게 자라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
부모는 집안의 햇볕이다. 볕이 골고루 비칠 때 치이는 놈 없이 잘 자라는 곡식처럼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애정이 골고루 자녀들에게 스며들 때 상하는 놈 없이 고르게 성장하게 된다. 막내 놈이 귀엽고 가엾다고 거기에만 눈길 주고 있으면 다른 놈은 섭섭하다 못해 박탈감에 반항적이 되고 반사회적인 인성이 싹트게 된다. 마찬가지로 장남에게만 관심을 보여도 안 된다.
아직도 아들은 왕자처럼 딸은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것이 우리의 오랜 관습이다. 전통적 봉건사상의 관념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어른과 아이, 공부 잘하는 놈과 못하는 놈에 대한 차별이 여전하다. 이러한 차별은 차별당한자로 하여금 복수심을 불러일으킨다.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담임선생님은 학급의 햇볕이다. 선생님의 사랑이 학생 모두에게 고르게 퍼질 때 학생들은 인정감에 만족해한다. 말썽 피운다고 미워하고 공부 못한다고 차별하면 그 아이가 갈 곳이 어디인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신음하면서 학교나 선생님을 부정하고 급우들을 증오하며 폭력이나 휘두르는 학생으로 전락할게 뻔하다. 왜 우리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르는 짓을 멈추지 않는지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햇볕이 너무 강렬하면 곡식이 시들 듯이 자녀나 제자에 대해 욕심이 지나쳐 과욕을 부리면 그들은 곧 시들어 버린다. 그렇다고 햇볕을 거두어 버리면 식물이 기형적으로 자라듯이 자녀나 제자도 사람의 바른 모습을 닮지 않고 기형적으로 자라게 된다. 가정이든 학교든 사람 교육은 무한히 어려운 것이다.
사회도 그렇다. 지도자는 사회의 햇볕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로 양지에서 사는 사람보다는 음지에 사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 음지에 햇볕이 비춰줘야 생기가 돌 텐데 아직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사회의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음지에 사는 사람들이 다 같이 햇볕을 쬘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이다. 돈을 많이 가진 자는 돈으로,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으로, 남을 위해 일하는 자는 봉사로 그들에게 골고루 햇볕을 쬐게 해야 한다.
정상적인 식물도 음지에서는 기형적으로 자라 듯 사람도 음지에 오래두면 마음도 몸도 모두 삐뚤어지게 된다. 삐뚤어진 시각을 가진 자가 많아지면 사회는 불안해진다. 사람이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최근 방송이나 신문에 오르내리는 흉악범을 보라. 그들은 음지에서 자라 기형적인 성장배경을 가졌기에 있는 자를 저주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복수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살인을 밥 먹듯 하고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태연하게 범행을 재연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소름끼쳐 한다.
이래서 음지에 햇볕이 필요하다. 햇볕을 받으면 정상적으로 자라게 되고 정상적으로 자라면 적어도 극한적이고 극단적이지는 않는다. 양지와 음지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비 오는 날이 계속되면 우산 장수가 잘 살 것이고 맑은 날이 계속되면 짚신장수가 잘 살게 될 것이다. 인간이 날씨를 조정할 수 있는가? 아픈 사람이 생기면 의사는 살려내어 돈을 벌고 사람이 죽어야 장의사가 돈을 번다. 인간이 생사를 조정할 수 있는가? 가진 자는 더욱 재산을 늘려나가지만 못 가진 자는 갈수록 가난에 찌든다. 정부가 개인의 빈부를 타개할 수 있는가? 다만 인간은 양지와 음지가 균형을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햇볕이 강렬하게 오래 지속되면 식물은 시들어 말라 죽어버리고 햇볕을 계속 쬐지 못하면 연약하게 자라다 결국 죽어버린다. 하늘은 그래서 낮에는 햇볕을 내려주고 밤에는 거두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세상은 평온하고 재미가 있어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튼실한 열매를 얻기 위해
자연의 섭리란 분명한 것이어서 봄에는 꽃피고 여름에는 열매를 맺어 가을에는 이를 거두어들이게 된다. 수확의 계절이란 말을 쓰기도 하고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이라고도 하거니와, 들판에 일렁이는 황금의 물결이 곡식으로 변해 들에서 사라져도 과수원의 사과나무는 빨갛게 익어 우리들의 미각을 자극하며 사랑을 받는다. 우리네 인간사는 뒤죽박죽 변덕도 심하고 앞뒤가 바뀌는 역전이 계속되지만 열매 맺어 수확에 이르는 자연의 법칙은 그대로 어김이 없다.
이제 다가오는 풍요로운 계절에 우리는 과연 무슨 열매로 모양을 갖출지 스스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곡식이란 참고 견디어 온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농사는 결코 우연으로 수확에 이르지 않는다. 풀을 베어 논바닥에 깔고 논을 갈아엎어 삭여두고 못자리를 만들어 볍씨를 뿌려 모를 튼튼히 가꾸어 쓰레질한 논에 모심기를 한다. 물대고 김매고 거름 주고 농약을 치고 태풍과 폭우에 마음졸이며 여름 내내 몸이 부서져라 고생하며 일한 끝에 겨우 얻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농사란 노동의 대가이지 복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FTA다 뭐다 휩쓸리지 않고 ‘땀의 양이 소출’이라는 신념으로 고생한 결과이다. 그럴 리는 없지만 도시의 직장인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외면하고 작은 노력에 큰 성과만을 노리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땀은 흘리지 않고 열매만 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일확천금의 로또 복권에 인생을 걸고 당장 부자가 되려고 한다. 이 얼마나 몰염치하고 외람된 생각인가. 직장 생활의 비인간적인 부조리도 그래서 생기고 도덕적인 타락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곡식이란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점점 여물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벼의 경우 모심기가 끝나면 땅내를 맡고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해서 포기를 불려나가는 분열 작업을 한다. 적당하게 포기가 분열되면 이번에는 꽃을 피우고 수정을 해서 열매가 맺어지고 따가운 햇볕과 따뜻한 물, 그리고 양분의 섭취로 낟알이 여물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벼를 수확하게 된다. 이를 가꾸는 농부는 아무리 급한 사정이 생겨도 덜 익은 열매를 따거나 농작물을 베거나 캐지 않는다. 곡식이나 과일이 완전히 익을 때까지 병충해도 막아주고 영양분도 공급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보살핀다.
그런데 도시의 직장인들은 기다림에 약해서 항상 이러한 단계를 무시하고 건너뛰기를 좋아한다. 즉 빠른 길만 택하려고 하는 그것이 문제다.
학교의 학생들도 복도를 걷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조용히 사뿐사뿐 걷는 아이는 드물다. 아무리 실내생활지도를 반복해도 교사들의 시선 범위를 벗어나면 무조건 뛰고 계단을 한꺼번에 두세 계단씩 뛰어 오르거나 내린다. 모두들 빨리 빨리 대충 대중의 문화에 잘 흡수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게 모두 빠른 길만 취하려는 습관 때문이다. 물론 능력이 탁월하다면 그런 방법도 있겠지만 그저 쉬운 쪽만 쫓으려 한다면 이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인생도 그렇고, 학문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다. 좋은 열매, 많은 수확을 얻으려면 적당한 과정과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처럼 인생의 결실도 정도를 밟아야 크게 성장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생도 냅다 지름길로 달려 언뜻 보면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이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빈 인생이 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또 한 가지는, 열매는 생명의 결집체요 보람이며 더 좋은 열매를 위한 희생물 즉 종자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두는 것이 좋겠다. 열매는 생명의 결집체인 동시에 완성된 가치 그것이다. 한 알의 열매가 땅에 심어져 썩어가면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이는 곧 열매가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도 땅에 심어져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곡식처럼 스스로를 희생하여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자기만 알고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려고 하니 큰 잘못이 아닌가?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면 바람직한 사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나 혼자만이 잘 살아 보세‘가 아니라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 모두 잘 살아 보세‘로 바뀔 때 이게 바로 바람직한 사회이다.
열매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열매가 농부의 노력과 정성 외에 자연(하늘)의 도움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농부가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적당한 햇볕과 온도 그리고 영양분이 있어야 하고, 태풍이나 폭우가 불거나 내리지 않아야 한다. 이게 바로 하늘 즉 자연의 도움이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알았기에 수확이 끝나면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께 감사함을 표했다.
그런데 오늘날 도시의 직장인들은 모두들 제 잘나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 좋은 열매 잘 익은 곡식은 결코 사람의 손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산물이 아니라 자연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고 겸손한 모습으로 하늘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열매란 내용물이 알차고 잘 익은 것도 있고, 속이 빈쭉정이도 있으며, 설익어서 반만 찬 것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교직에서 어떤 열매인가? 생각할수록 두려워진다. 속이 꽉 찬 알곡으로 판정되어 매상에 붙여질 것인가 풍로에 날려 버려질 것인가
이것은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내 행적에 따라 남에게 판정 받을 일이라 여기서는 유보해 두는 것이 좋겠다. 어쨌거나 꽃 피고 열매 맺는 자연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
세상살이 그리 순탄한 것만 아니니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땀 흘리는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고 더불어 자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겠다.
봄과 인생
벌써 봄이다. 그렇게 겁을 주며 기승을 부리던 동장군도 절후의 순서는 지킬 수밖에 없는지 제법 훈훈해진 날씨다. 올해에도 이렇게 길 잃지 않고 찾아 온 봄 앞에 나는 문득 봄 사람이고 싶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를 내걸고 죽은 듯이 침묵하는 나무 둥지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시간의 줄기를 발견하고 눈물이 나도록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오늘이 있기까지 참고 기다려온 순간들이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것은 그동안 소중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므로 인생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인간이 어떻게 삶을 꾸려가야 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해마다 봄은 찾아오고 또 여름, 가을, 겨울이 오지만 우리 인생은 이러한 세월의 흐름 속에 단 한번 왔다 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에게 주어진 단편적인 인생을 얼마나 가치 있게 완성해 나가는가의 문제는 내가 내 삶을 얼마나 소중하고 진실 되게 살아가는지에 달려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평범하면서도 가치 있게 사는 길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길이며 자연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이 봄에 가장 봄답게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한 포기의 풀꽃으로 살아가는것일까? 아니면 지금 화려한 꽃을 피우고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가을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을 선물하는 과일나무가 될 것인가?
풀꽃은 풀꽃대로, 과일나무는 과일나무대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이 봄에는 씨앗을 뿌려야하고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우리네 삶도 씨앗을 뿌리고 가지치기를 해야만 가치 있는 삶에 접근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시간의 주인공이어야 한다.
내가 시간의 노예가 되어 시간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내가 시간을 끌고 다녀야 한다. 인생은 시간의 선 위에 놓인 존재다. 한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시간의 선 위에 놓인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고 점검해 보고 한 순간이라도 자기를 위한 충분한 삶을 살고자 노력할 때 더 의미 있는 삶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항상 남을 의식하며 살아가느라 시간의 노예가 되어 허둥대고 있다.
산을 보라. 산의 나무들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자라기는 하지만 서로 의식해서 체면을 내세우거나 남을 깎아내리는 일에 혈안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는 학구의 학교에 근무하면서 학부모들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 학부모들이 남을 너무 의식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이가 글쓰기를 잘해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면 너도나도 글쓰기 학원에 보내려는 경향이 있다. 중간, 기말고사 날짜가 알려지면 그때부터 시험 치는 날까지 아이들은 완전 통제된다. 이때 부모들은 그 과제의 과정을 지도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아이의 점수를 높이는데 집중한다. 이런 현상은 같은 동의 다른 아이보다 내 아이가 잘해야 한다는 생각, 그래야 내 체면이 선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남을 의식하면서 사는 동안에 정작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게 되는 것이다.
문득, 축구선수들의 슛 장면이 생각난다. 후방에서 공을 잡아 패스를 주고받으며 일순간 상대방의 골문 앞에까지 쭉 밀고 가 골문 앞에서 정교한 패스를 주고받아 슛하려는 순간 상대수비에 밀려 공격이 막히면 다시 후방으로 끌고 나와 재공격을 감행한다.
이번에는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는 척 하다 수비가 중앙으로 몰리면 어느새 한쪽 사이드로 패스를 하고 다시 공을 잡은 선수는 코너 깊숙이 몰고 가다 골문 앞으로 공을 띄워준다. 어느새 우군 선수가 밀고 들어가면서 머리를 들이밀자 그 공은 머리에 맞아 골문으로 멋지게 들어간다. 골인이다.
이러한 작품이 만들어지려면 패스하는 선수와 헤딩슛을 날리는 선수와의 거리, 공의 속도, 바람의 방향 등 어쨌든 시간과 공간의 합일점에서 순간적으로 슛이 성공을 거둔다. 영원이라는 시간의 틀에서 순간이 만들어 내는 극치이다.
조금만 움직이면 손이 닿을 듯 한 거리에 자신의 어제가 있듯이 바로 이 순간 내 오늘의 삶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내일 또한 그 뒤에 성큼 다가와 있다. ‘사후약방문’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삶에 후회가 없으려면 바로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앙드레지드는 ‘행복해지는 비결은 희열을 얻으려고 한결같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 그 자체 속에서 희열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주어진 일속에서 열정과 성의를 다하여 살아가는 정신 자세가 곧 자기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는 말이다.
권투 경기에서 상대방이 공격거리까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나 상대방의 주먹을 얻어맞고 난 뒤에 휘두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인생살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상대방의 움직이는 속도와 방향을 알맞게 맞추어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KTX가 웬만한 역을 무시하고 달리는 것처럼 시간은 한 개인의 운명 앞에서 멈추지도 않고 딴 눈을 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초급행 열차라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 하면 소외되지 않고 승객 노릇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론에서 고민해야 한다. 곧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자기의 삶의 과정에 대한 성과를 판단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인생살이의 교훈을 자연에서 습득하고자 눈을 돌려 계절을 맞이할 때마다 그 깊은 자연의 섭리를 탐구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바람직한 삶의 문제는 우리가 삶에 대응하는 선택과 판별력 그리고 열성적인 노력에, 주어진 시간의 기회를 잘 포착해서 활용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봄이라는 계절을 맞이할 때는 봄다움을 선택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생동의 계절이요 희망의 계절인 이 봄날에 나는 한 그루의 봄 나무가 되고 싶다.
새로운 삶을, 아니 새로운 생명을 싹 틔우는 봄 나무가 되련다.그리하여 저 깊은 우리 영혼의 심연 속을 헤아려 더 충실한 나무로 자라기 위해 바로 이 순간 ‘봄의 삶’을 생각하련다.
도깨비의 심술이 그립다
내가 어릴 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도깨비 이야기였다.
밤에 도깨비 이야기를 들은 날은 화장실도 못 가고 얼마나 가슴 졸이며 참느라 혼이 났던지 지금 생각해도 등에 땀이 다 배인다.
초등학교 육학년 때가 도깨비 이야기로 가장 고민이 많았던 시절이다.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진학할 학생들을 상대로 특별 지도를 밤늦게까지 해주셨다.
우리 마을에서 진학 지도를 받은 학생은 나 혼자였고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0분 정도 밖에 안 걸리는 곳이었지만, 중간 지점에 후미지고 아주 으슥한 곳이 있었는데 하필 거기에는 정말 대낮에도 귀신이 나올 법한 오래된 비각이 한 채 웅크리고 있었다.
한 낮에도 아이들은 이 비각 앞을 지날 때는 빨리 뛰어서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니 밤늦은 시간에는 무서움이 오죽하겠는가.
나는 당시 그곳이 가까워지면 단거리 선수처럼 냅다 달렸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우리 할아버님은 곧장 도깨비 이야기를 내게 하셨다. 나는 귀를 막고 그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무서운 이야기는 더 잘 들렸다. 내 또래들은 육이오 때 피난을 다니면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흉악한 모습으로 죽은 얼굴들이 떠오르자 무서움은 더욱 심해져 아예 환영이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도깨비불과 도깨비 이야기는 무서움을 더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랑방에서도, 소먹이는 아이들이 모이는 곳에서도 도깨비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일이 많았다.
도깨비는 귀신처럼 사람에게 가해를 하지 않고 심술궂게 장난을 일삼으며 때로는 씨름까지 청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무쌍한 조화를 부리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방망이를 가지고 있다.
또 신통력이 있어서 큰 산을 뿌리째 뽑는 괴력이 있는가하면 너른 바다 위를 빠지지 않고 건너가는 요술을 부리기 때문에 그 힘과 능력이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도깨비의 형체는 보통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며 그래서 독각귀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리 하나에다 말라서 살이 없고 흑칠한 것처럼 광택이 나며 대부분 키가 커서 상반신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고, 키가 크니 옷을 해 입을 수가 없어 허리 아래는 백지를 둘러 치마로 삼고 있다. 하지만, 도깨비라고 다 키가 큰 것은 아니라고 한다.
도깨비는 대개의 경우 남성으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미녀로 나타나 남성을 홀리는 수가 있어 이 유혹에 남성들이 빠져들어 혼이 난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도깨비의 거처는 어둡고 습기가 많은 곳이며 활동하는 시간은 밤이며 주로 궂은 비가 내리는 날로 되어있다.
음양설에 의하면 도깨비는 귀신과 마찬가지로 음귀에 속한다. 음귀인 까닭에 음기가 서린 곳을 즐겨 허물어진 절, 성, 고옥, 황야, 동굴, 오래된 우물, 고목나무 밑, 절벽아래, 큰 바위 밑이나 계곡 같은 곳에 은거한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나 번화한 거리, 사통팔달의 대로, 불이 밝은 곳, 꽃피고 화려한 정원 같은 곳은 꺼려해 나타나지 않으며 음산한 곳을 즐겨한다. 대낮에는 음습한 곳에 숨어사는 도깨비도 야음이 되면 제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긴 도깨비불을 켜서 들고 달리며 동서남북으로 활보한다.
민담에 의하면 사람들이 도깨비를 만난 시간은 모두 어두운 밤으로 되어있다. 다만 대낮에 나타날 때는 궂은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심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은 상태일 때 즉 도깨비가 활동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을 때 한정된다. 또 도깨비는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도망을 간다고 한다.
도깨비의 본체는 오래된 비석이나 방망이, 신, 토우, 부지깽이, 빗자루 등으로 특히 사람의 혈액이 묻는 것이나 여자의 경혈이 묻은 것이 곧잘 도깨비로 화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귀중’이라고 해서 도깨비들이 떼 지어 집단을 이루고 있음을 설명한 바 있고 불사를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도깨비의 수가 많으니 종류도 많아서 달걀도깨비, 차일도깨비, 보자기도깨비, 바가지도깨비, 조리도깨비, 흑도깨비, 청도깨비 등 다양하며, 몸이 투명하여 식별하기 어렵고, 사람의 성씨는 김씨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옛날 한 농부가 늦가을에 게막으로 게를 잡으러 갔다. 나무로 발을 엮어 냇물을 가로막아 게를 게막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해 놓았다. 그날 밤은 게가 유난히 많이 잡혔다. 가지고 간 구럭은 가득 찼고 담을 그릇이 없어서 바지를 벗어 가랑이를 묶어 그 속에다 담았다. 그래도 게는 계속 내려 왔으나 그 이상 담을 그릇이 없어서 그냥 보기만 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게 구럭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게가 가득한 구럭치고는 너무나 가벼웠다. 농부는 수상히 여겨 구럭 속을 들여다보았더니 구럭 안에는 게가 아닌 쇠똥과 썩은 나무껍질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바지 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농부는 기가 막혔다. 이 때 누가
‘김서방 게 많이 잡았는가.’ 하는 게 아닌가. 농부는 웬 사람인가 싶어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니 키가 큰 도깨비가 킬킬대며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 민담에서도 농부로 하여금 쇠똥과 썩은 나무껍질을 게로 착각하도록 도깨비가 장난을 친 것이다. 그러니까 도깨비는 조화와 심술로 사람들을 속이고 약을 올리는 주인공인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느 마을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영감이 살고 있었다. 동리 사람들이 돈을 꿔 달라고 해도 들어주는 일이 없는 영감이다.
하루는 창 밖에서 누가 돈 오십냥만 꿔 달라고 청하자 이날따라 영감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단번에 오십냥을 꿔 주고는 당장 내일 저녁때까지 갚으라고 일렀다. 바로 도깨비가 돈을 꿔간 것이다.
다음날 저녁 도깨비는 창 너머로 돈 오십냥을 들여보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저녁이 되면 돈이 오십냥씩 들어왔다. 인색한 영감은 더 부자가 되고 이상한 일도 다 보았다고 기뻐했다. 그래서 하루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이때에 마침 도깨비가 지나가다가 이야기를 엿들었다. 도깨비는 잘 생각해보니 한번만 갚으면 되는 것을 건망증이 있어 날마다 오십냥씩 갚았기 때문에 자기는 손해를 보고 영감은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깨비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도깨비는 제가 준 돈으로 사들인 논과 밭에 떼 지어 몰려가 땅을 가져간다고 흙을 모두 파내고 돌만 남겨 놓았다.
다음날 영감은 들에 나가 자기의 논밭이 돌밭으로 변한걸 보고 화가 나서 논두렁에 서서,
‘흙을 파가고 돌만 남겨두면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고 야단을 쳤다.’
그랬더니 그 날 밤에 도깨비들이 다시 떼로 몰려와 바윗돌을 가득 가져다 놓았다. 영감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도깨비는 심술이 있어 사람이 원하는 일은 안하고 그 반대로 싫어하는 일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논두렁에 서서 혼자 말로 허 그것 참 누가 이런 좋은 일을 했나? 바위를 가져다 놓았으니 앞으로는 아무리 비가 많이와도 둑이 터질 염려가 없어 잘 되었구나 혹시 개똥이 나 쇠똥을 가져다 놓았더라면 더러워서 농사를 짓지 못할 뻔했다.고 중얼거렸다.
도깨비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는 바위와 돌을 들어내고 개똥과 쇠똥을 논밭에 가득 채워 놓았다. 그 후 영감은 거름이 많이 들어간 기름진 논밭에서 많은 수확을 거두어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도깨비의 심술궂은 성격은 이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남이 좋아하거나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심술을 부리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깨비에게도 제법 꿔간 돈을 갚는 윤리성도 있고 인격도 부여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진 도깨비도 사람을 골탕 먹이려다가 오히려 돕는 결과를 가져 온 셈이다.
실존이 아닌 도깨비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이처럼 전승되어 온 것은 어쩌면 민족적 공감이 반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자기가 이루지 못하는 불가능의 세계를 도깨비를 통해 가능케 만든 것은 민족의 이상과 동경을 반영시킨 것으로 해석한다면 너무 비약인지도 모르겠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이런 이야기 속의 우리 옛 삶의 모습이 흔적조차 없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도깨비보다 못한 인간들이 큰 소리 치며 판을 치는 이 세상이 정말 역겨울 뿐이다.
어릴 때 무서웠던 도깨비 이야기는 나이들면서 무서움보다는 다시 들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바뀌고, 그때로 돌아가 도깨비불을 보고 싶은 향수에 젖어 들게 한다.
하아뿌지(할아버지)의 손자사랑
우리말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있다. 조그만 티가 들어가도 눈물이 나오고 눈알이 아픈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니,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아마 너무 귀엽거나 예쁠 때 또는 소중함을 나타내려고 할 때, 약간 과장해서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나에게도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가 있다. 그건 바로 손자들이다. 구 년 전 시집간 딸애가 첫아기의 분만을 위해 친정으로 찾아왔다. 곧 산기가 있어 병원으로 가 그 다음날 출근 시간에 애기를 낳았다.
나에게 예쁜 손녀딸이 생긴 것이다.
퇴근을 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한참 후에야 손녀딸과 첫 대면을 할 수 있었다. 아이를 보는 순간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신기함 그리고 대가 이어진 묘한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한동안 아이의 자라는 과정에 우리 부부는 너무나 행복했다. 아무 탈 없이 정상적으로 태어난 것과 또 건강하게 자라고 있음에 삼신할머니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일 년 십 개월 후 또 외손자를 보았다. 사람 마음이란 간사해서 이번에는 처음의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나 처음 애와 마찬가지로 당사주를 보고 직접 내가 이름을 지었다.
손자들이 보고 싶어 매주 토요일이 빨리 오기를 설날 기다리는 아이처럼 손꼽았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고 놀렸다.
“예이 사람아, 외손자 방아공인걸 모르나? 친손자 생기면 달라진다네. 그렇게 좋아할 것 없어”
이런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요일쯤 미리 전화를 해서 올 것인지 확인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 주에 온다고 하면은 그 날부터 올 때까지 기다리는 재미로 사는데 못 온다고 하면 그때부터 괜히 집사람에게 트집이나 잡고 짜증을 부렸다. 세월이 가면서 두주에 한번 오던 아이들은 한 달에 한번정도 그러다가 지금은 두 달이 지나가기도 한다. 외손녀가 일곱살 때, 정말 친손자가 생겼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던지 예정일보다 무려 달포나 빨리 태어나려는 놈을, 병원에서 억제를 시켰지만 그래도 한 달이나 빨리 출생한 것이다. 우리는 몹시 걱정이 되었다. 예정일보다 이렇게 빨리 태어나면 혹시 무슨 이상이라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서울까지 조바심하며 달려갔다.
2004년 11월 13일 10시 10분 우리 집 장손이 고고의 성을 울리면서 우리들 곁으로 온 것이다.
염려한 것과는 달리 몸무게도 2.9㎏이고 모두 정상이어서 인큐베이터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나는, 큰놈을 얻었을 때의 감격이 되살아났다. 아니 친구들 말처럼 친손자라서 그런지 조금 다른 기분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손자를 안고서 알아 듣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네가 태어나서 정말 행복하구나 무럭무럭 자라거라.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하고 축원하였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다시 한 번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면서 이름을 무엇이라 해야 할지 작명에 골몰했다. 장손이니 반드시 항렬자를 따라야 하겠기에 빛날 ‘환’을 넣은 이름을 몇 가지 지어 아들에게 이메일로 보냈더니 아들과 며느리는 뒷자를 구슬(진주) ‘빈’자가 좋겠다고 하여 ‘빛나는 진주’, ‘빛나는 구슬’의 뜻을 가진 환빈이라고 하게 되었다. 환빈이는 우리에게 정말 손안의 진주요 구슬이다. 앞으로 잘 키워 모든 사람의 구슬이요 진주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예정보다 일찍 세상에 나왔으나 별 탈 없이 잘 자라고 있다. 다만 머리 모양이 한쪽 방향으로만 누워서 자란 탓인지 약간 비틀어진 것 외는 별 문제가 없다.
빈이의 얼굴을 본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니 싫지는 않지만 할애비의 못생긴 코는 제발 닮지 않기를 빌었다. 무릇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제 핏줄이 자기의 좋은 점만 닮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나는 며느리에게 종종 ‘낳은 자랑하지 말고 키운 자랑하라’는 말을 일러준다. 물론 자식을 생산하는 일도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긴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자식을 바르게 교육시키는 일이 아닌가.
손자를 보고 내려온 다음날도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자식 놈이 디카로 촬영해 이메일로 동영상을 보내왔다. 우리 부부는 손자의 동영상을 보면서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야 했다. 너무 멀리 있으니까 자주 볼 수도 없다. 퇴직시까지는 직장을 소홀히 할 수도 없으니 참을 수밖에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전에는 만나면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무서운지 울음을 터뜨려 나를 난처하게 만들더니 요즈음은 돌아올 때 떨어지지 않으려고 또 운다. 그리고 서랍이라는 서랍은 제다 열어젖히고 들어 있는 물건은 모두 꺼내 놓는다.
발달(성숙)에는 순서와 시기가 있다더니 외손자들이 거쳐 간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말을 배우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가족의 호칭은 물론 엄마라는 말을 먼저 익히고 다음에 아빠를 그 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 순으로 익혀 나간다.
그런데 할머니와 할아버지란 말은 엄마, 아빠라는 말보다는 훨씬 부르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할머니는 하미에서 할미로 그다음에 할머니로 진행이 된다.
할아버지를 부를 때는 하비에서 시작해 하부로 하부에서 다시 하뿌지로 그 다음에야 할아버지로 변한다.
내가 전화를 하거나 며느리가 하거나 간에 꼭 수화기는 빈이의 손을 한번 쯤 거쳐야 한다. 며칠 전 전화에서는 하뿌지였는데 이제는 ‘하’와 ‘뿌’지 사이에 아 소리가 약간 들어 있어 하아뿌지로 변해 조만간 할아버지로 발전할 것 같다.
대개 우리는 자녀를 통해 대리만족을 시도한다. 내가 못한 일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것 그 자체가 무슨 죄일까 마는 이것이 지나치면 나도 자녀도 다치게 된다는 점을 향상 염두에 두어야 함을 잊지 않겠다.
빈이의 발달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인생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그리고 단계를 거쳐야 한다. 한꺼번에 두 세 계단을 뛰어 넘으면 우선은 빠른 것 같지만 결코 빠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느린 것 같은 것이 결과적으로는 빠른 것이다. 또한 가족이라는 것도,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곧장 허물어지기 쉬운 조직임으로 가족 간의 사랑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오늘도 이 글을 쓰고 잠자리에 들기 전 모든 기를 모아 부산과 서울의 손자들에게 보낸다.
“환빈아, 아란아, 현서야 하아뿌지다.”
할머니의 삶
할머니는 나에게 고향이요 마음의 안식처이며 가장 든든한 후원자요 보호자였다. 어느 가정이나 다 그렇겠지만 유별나게 할머니 사랑을 내가 독차지하게 된 것은 할머니의 막내아들, 내게는 막내 삼촌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을 떠나 슬픔 속에서 헤매던 사오 개월 후,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할머니에게는 내가 손자인 동시에 아들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내 바로 밑의 동생이 두 살 터울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후로 나는 아예 할머니 젖을 물고 자랐다.
할머니께서는 이름 있는 날에는 꼭 절에 가셨는데 절에 갈 때는 나를 업고 십오 리 길을 걸어서 성전암까지 가셨다. 성전암은 여항산의 산자락 해발이 백여 미터의 높이에 위치한 조그만 암자로 신라 헌강왕 때 도선 국사가 창건한 절이니 천년이 지난 고찰이다.
할머니가 참배하는 곳은 주로 삼성각으로 손자들의 명을 길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찾는 곳이다. 어린 나이라 할머니의 기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데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할머니는 절에 열심히 다니시는 것 외에는 가택신을 모셔두고 있었다. 바가지에 쌀을 담아 창호지로 덮어서 방 오른쪽 천장 모서리에 매달아 두셨는데 이는 제석님을 모시는 방법이다. 제석님은 가주의 운명을 다스리는 신으로 신의 몸으로 표시된 것이 깨끗한 단지나 바가지 안에 쌀이나 콩을 담아서 다락이나 창고에 두기도 하고 천장과 벽의 모서리가 맞닿은 곳에 매달기도 한다. 매년 음력 이월 초하루에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새 곡식으로 갈아 넣는데, 이렇게 하면 주인의 운세가 길해서 나날이 발전하고 만사가 뜻대로 되며 번창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또 대들보 위에 흰 백지를 올려서 매달아 두었다. 이것은 성주님의 신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주는 가택신 중에서 가장 어른이고 다른 신을 통솔 하는 위치에 있어 시월의 말날(午)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 날은 할머니가 축원을 하고 소원을 빌며 이웃과 떡을 나누어 먹는 것을 보았다. 또 다른 집에서는 이날 무당을 불러 풍악에 맞추어 굿을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다음 터주신을 모셨는데 터주신은 지신을 말함이다. 집을 지을 때는 지신제를 지냈고, 정초에는 동네 사람들이 농악을 울리면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해 터주(지신)를 위안하고 복록을 누리려는 관습을 지켜왔다. 농악군들에게는 할머니가 술과 안주와 떡을 내서 대접하곤 하였다.
조왕신 또한 가정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가택신이다.
조왕은 아궁이를 맡고 있는 신으로 아궁이는 불을 때는 곳이니 이는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불을 때고 가난하면 불을 땔 수 없기 때문에 생활의 빈궁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재산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함부로 아궁이를 수리하지 않았고 아궁이에 걸터앉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대문에 수문신이 있고 뒷간(화장실)에는 측신이 있다고 우리 할머니는 굳게 믿으셨다.
할머니의 이런 활동은 가족들의 무병장수와 복록을 기원하는 것이었으므로 지금까지 나는 그게 미신이라고 생각 해 본 일이 없다.
할머니는 부처님 앞에서나, 가택신에게 축원을 할 때 제일 먼저 나를 내세우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과는 달리 장손이라고 해서 편애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른 손자들도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으므로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의 사랑을 항상 못 잊어 한다. 할머니의 휴머니즘은 이웃사람들에게도 베풀어져 몇 끼씩 끼니를 거른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할아버지 몰래 곡식을 퍼주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 그래도 우리 집은 머슴을 두고 밥술이나 떠먹을 수 있는 집안이었지만 대개 몇 끼씩 곡기를 끊어야 하는 가정이 많았다. 우리 집에 머슴을 살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할아버지는 인색하고 무서운 분이었지만 할머니는 부처 같은 분이라고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늘어놓는다.
내가 시범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2월 첫 임지인 합천의 봉산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이 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한지 한 열흘쯤 지난 토요일, 할머니가 큰 보퉁이를 이고 나를 찾아오셨다. 보퉁이 속에는 냄비 몇 개와 수저, 찬거리, 작은 이불 한 채 등 살림도구가 쏟아져 나왔다. 권빈에서 십오 리 길을 그 무거운 보퉁이를 이고 걸어서 오신 것이다. 그 때만 해도 고향에서 진주를 거쳐 학교까지 오려면 하루 종일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 문제는 잠깐 나를 보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 손자의 밥을 해주기 위해 작심하고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신 것이다.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하숙집을 구해 이미 하숙을 하고 있었고, 고향에는 일흔 한 살의 할아버님이 계셨는데 할머니가 나를 위해 이곳으로 오시면 할아버지의 불편함과 어머님의 고생이 불을 보듯 뻔 한 일인데 정말 큰일이었다.
반가워하기도 잠시 할머님을 어떻게 설득해서 마음을 고쳐먹게 할까 고민하다가 할머님께 털어놓았다.
“할머니 제가 정식으로 발령을 받은 게 아니라 임시교사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에 내일이라도 내 전임자가 오면 자리를 비켜주고 바로 고향으로 가야합니다. 그러니 제가 정식으로 교사 발령이 나면 그때 오십시오.” 사정 사정해도 좀체 가실 의향이 없으시더니 삼일이 지나니까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여 합천읍까지 바래다 드렸다. 버스 정류소에서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돌아서 가셨다.
나는 그 해 구월에 해임이 되었고, 이듬해 서열고시를 거쳐 정식으로 임용되어 간 학교가 십사 년간이나 근무한 여항초등학교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직하여 결혼하기 전까지 2년 간 결국 할머님이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그때가 정말 행복했었다.
할머님은 이십사 년 전 여든 한 살에 사랑하는 손자들을 두고 우리들 곁을 그림자처럼 사라져 가셨다. 만약 돌아가시기 전 두 달이나마 내가 모시지 못했다면 나는 평생을 두고 원통해 했을 것이다.
해마다 음력 구월 스물 하룻날 할머님이 돌아가신 날이 돌아온다. 우리 형제들은 이날 모이면 서로 세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할머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사드리고 할머님의 휴머니즘을 본받고자 다짐한다.
부처님 앞에서나 가택신을 모시고 지극정성을 다하시는 것, 그것은 자기일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오로지 사랑하는 손자들, 그 손자들의 앞날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자기 나름의 의식이요 믿음이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 할머니는 저승에서도 우리들이 잘되기를 매일같이 빌고 계실 것이다.
「師不孤 有多隣」을 되새기며...
해마다 오월이 오듯이 스승의 날 또한 오월과 함께 어김없이 찾아온다. 원래 스승의 날은 강경여고 RCY 단원들이 1958년부터 현직의 선생님과 병중에 계시거나 퇴직하신 선생님을 위문하는 봉사활동을 해오던 중 1963년 청소년 적십자 충남협의회에서 ‘은사의 날’로 정해 일제히 사은 행사를 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스승의 날을 제정한 취지는 ‘인간의 정신적 인격을 가꾸고 키워주는 스승의 높고 거룩한 은혜를 기리어 받들며 청소년들이 평소에 소홀했던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불러 일으켜 따듯한 애정과 깊은 신뢰로써 선생님과 학생의 올바른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또 사제의 윤리를 바로 잡고 참된 학풍을 일으키며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을 교육하는 숭고한 사명을 담당한 선생님들의 노고를 바로 인식하고 존경하는 기풍을 길러 혼탁한 사회를 정화하는 윤리운동에 도움이 되고자 스승의 날을 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제정취지문을 잘 음미해 보면 스승의 날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또 어떻게 보내야 할지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이다.
1973년 정부의 시정쇄신정책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1982년 부활되기도 한 말 많은 ‘스승의 날’! 스승의 날이 이렇게 도마 위에 오르게 된 것은 극소수의 교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해오는 학부모의 촌지에 무너져 버린데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학부모나 사회의 분위기도 이 문제를 결코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몇 해 전에 몇 개의 시․도 교육청에서 스승의 날 감사반을 학교로 내려 보내 교사의 가방이나 책상서랍 심지어 차의 트렁크까지 뒤진 일이 있었다. 그리고 교직을 폄하하고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신문에 대서특필하는 현실에 우리는 절망한다.
이제 몇 달 후면 정년으로 교단을 떠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스승의 날을 자유휴업일로 정하고자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받는다는 게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헤아리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스승의 날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교원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환부를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해야 함을 주저하지 말자고 권하면서 다시 한 번 되물어 본다.
나는 과연 스승인가? 교원의 업무는 고역도 될 수 있고 기쁨도 될 수 있다. 의무감에 못 이겨 맡겨진 하루의 일과를 기계적으로 반복 되풀이함으로써 생업의 수단을 삼는다면 이것은 분명 노역이요 고통이며 봉급날만 기다리는 짜증나는 지루한 직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교사가 이러한 기계적인 직업의식에서 벗어나 비젼을 가지고 학생의 성장을 도움으로써 그들의 잠재력을 일깨워 가능성을 개발해 나아갈 때, 그래서 한 인간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을 때 이는 희열이요, 보람이 될 것이다.
몇 년 전 초임학교의 제자들이 동기회를 한다고 초청이 왔다. 그 때 그 학교는 황강의 물속으로 사라졌지만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제자들이 육십 여명 모였다. 그들도 나이 이미 사십 중반에 접어들어 삼십 사오 년 만에 만나고 보니 이름과 얼굴을 맞히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은 매한가지라 초등학교 4학년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국어나 수학을 잘 가르쳐줘서 선생님이 고마왔다거나 잊을 수 없었다는 게 아니었다.
자기들과 어울려서 공을 차다가 교장선생님께 불려가 선생이 체신머리없이 아이들과 공을 찬다고 꾸중을 듣고도 또 그 다음날 같이 공을 차고 불려가고 하는 걸 보면서 ‘아, 우리 선생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는 그런 얘기며, 방과 후에는 소 먹이러 가야하는데 선생님이 세계 명작 동화 이야기보따리를 매일 풀어 놓는 바람에 부모님께 야단맞은 이야기, 벌을 받을 일이 있으면 선생님도 똑같이 벌을 함께 받던 일, 그리고 세상이 넓으니 하늘만 보지 말고 저 산을 넘어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자기들을 일깨워 주었다는 그런 일로 나를 좋아하고 잊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일로 많은 것을 깨달게 되었다. 단순히 지식만 잘 가르치면 훌륭한 교사는 될 수 있지만 제자들이 스승이라고 떠받들지는 않는다. 스승은 마음을 흔들어주는 아니 심금을 울리는 교사라야 스승이다. 심금을 울리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제자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단순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인격적인 감화로 사람이 사람다운 심성을 가지도록 타이르고 그의 가능성을 발굴해 인정해주는 그런 교사가 바로 스승이다. 스승은 아무나 될 수가 없다.
스승은 소명의식이 필요하다. 소명이란 맡은 일에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에 대한 열정과 성의를 뜻한다. 소명은 기계적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며 단순히 시간보내기가 아니다.
자기 일에 대한 정열과 성의가 있어야 하며 자기 몸과 마음을 쏟아 붓는 사랑과 봉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감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영감이 없을 때 우리는 상대방의 심금을 울릴 수 없다. 오천석 선생은 ‘비젼과 헌신을 속성으로 하는 소명감에 움직이지 않는 교육은 산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소명감이 있으면 교사는 스승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제 스승의 날이 있든 없든 우리는 우리의 갈 길로 가야한다. 강경여고의 학생들처럼 스승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제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우리를 기쁘게 할 때까지…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오 선생님의 ‘師不孤 有多隣’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기준은 자연이다.
도대체 인간은 누구이며 인생은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이 참이며 어느 것이 거짓인지, 삶의 뜻은 무엇이며 영원한 것은 존재하는가.
나는 아직은 열아홉 살 때처럼 이런 시답지 않은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자주 있다. 아마 사람마다 이에 대한 대답 또한 각각 다를 것이다.
인생이란 희비의 교차점에서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며, ‘저쪽 책’(저승세계에 있다는 인가 개개인의 운명을 기록한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참고 견디며 내일의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는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자포자기 할 수도 있으며, 살며 사랑하며 죽는 순간까지 끝없이 고뇌하고 끝없이 방황하고 한없이 갈망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답이야 다양하더라도 인생이 삶의 여정이며 생활의 연속이고 보면 먹고, 입고 또 쉴 수 있는 공간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먹는 일이 우선이다.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은 삶의 현실이요 또한 삶의 조건이다. 칼라일은 ‘사람은 일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명상하고, 느끼며, 꿈꾸기 위해서만은 아니다’라고 하여 인간을 일하기 위한 존재로 보았다. 그리고 고리끼는 ‘일이 즐겁다면 인생은 극락이다. 괴로움이라면 그것은 지옥이다’ 라고 즐겁게 일하는 것의 중요함을 역설했다.
위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일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니, 이왕 일을 할 바에야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일은 바로 자기 인생이고 그 결과가 그 인생을 좌우하니까 일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언젠가 현대의 주인공 정주영 회장의 어록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는 ‘한강의 기적 속에 기적은 없다. 다만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가 음미해 볼 만한 말이다. 이와 같이 인생에서 노동(일)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일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득 어떤 책의 내용이 떠오른다. 인간이 70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 일하는 시간이 20년, 잠자는 시간이 22년, 그리고 취미나 오락 등으로 보내는 시간이 8년, 목욕하고 옷 입는 시간이 5년 6개월, 독서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6년, 교육받는 시간이 3년, 먹는데 소요하는 시간이 5년 나머지는 6개월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나머지 6개월은 무엇을 하는 시간인가? 70년을 나누어 보면 하루에 3분 정도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신을 생각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와 다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힘든 사람에게는 일하는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고, 가난해도 일하기 싫어 유리걸식한다면 일하는 시간은 적을 것이다. 또한 잘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유산을 많이 받았다면 일하는 시간은 적은 대신 오락이나 취미 생활에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런데 먹는 것에 대한 소비 시간이 5년인 반면 신을 생각하는 시간은 6개월 밖에 안 된다니 인간이 좀 거만한 것이 아닐까? 신을 생각하는 시간이야말로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이요,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참으로 가치로운 시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인간은 제아무리 날뛰어도 인간이라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다. 하루에 단 3분씩만 신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래서 거만한 것이요,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시간을 3분정도 밖에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염치없는 짓이라서 그래서 거만하다는 것이다.
잠자는 시간은 22년이나 소요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70년 중 6개월밖에 가지지 못하다니 이게 거만한 것이 아니면 바보 같은 짓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 겸손은 자연 속에서 배울 수 있다. 따라서 인생의 가치기준도 자연에서 찾아야 하며 그래야만 인간이 자기의 삶을 영원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을 생각하는 시간, 도로변의 저 가로수는 왜 저기 서 있어야 하나, 밤하늘의 북두칠성은 왜 북쪽에서만 반짝일까, 숲속의 새들은 왜 저리도 아름답게 노래를 들려줄까 이러한 시간이야말로 사람의 심성을 아름답게 가꾸어주는 귀중한 시간이 아닌가.
오늘날 인간은 너무 자기도취에 빠져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생각하고 신을 찾는 것은 죽음을 초월한 신앙적인 시간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성의 시간이다.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가자면 일 속에서 잠시 틈을 내어 상념에 잠길 필요가 있다. 욕심을 쏟아 버리고 바람소리에도 의미를 찾아보고, 흘러가는 물 따라 마음을 쫓아 보고, 변화무쌍한 구름을 쳐다보며 인생을 생각하는 그런 시간 말이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 아닌가. 따라서 천성을 배워야 한다. 그게 바로 깨달음이 아닌가. 깨달음을 얻는 것이 바로 겸손한 인간이 되는 길이다. 겸손한 인간이야 말로 자연이 준 기준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 기준을 적용하려 한다. 자기 기준은 자칫 즐거운 것을 즐겁다 하지 않고, 슬픈걸 슬프게 생각하지 않으며, 옳은 것을 옳다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러나 올바른 사람은 결코 자기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언제나 너와 우리를 기준으로 삼는다. 너와 우리를 생각하는 기준이 자연이 가르치는 기준이다. 신이 가르치는 기준이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풍족한 가정이라 하더라도 자녀를 기를 때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부가 인생의 전부요 행복의 원천이라는 가치관을 심어주면 그 가정에서는 사회적으로 별 쓸 만한 인물을 길러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못살고 어려운 가정이라도 자녀들에게 자연이 제시한 기준 즉 너와 우리라는 가치관을 강조하게 되면 분명 그 가정의 자녀들은 사회에 유용한 인물로 자랄 것이다. 문제는 자기보다 너와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일 때 쓸모 있는 존재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영원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정신만은 육체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아버지의 가르침이나 할아버지가 강조한 사항이 후대에 결코 사라지지 않고 지침이 되어 살아 있음을 우리는 각 가정의 가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우리의 일생이 무한한 노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항상 자연을 생각하고 신에게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행복이란 이러한 사람을 찾아다닌다. 만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도도하고 거만한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행복은 결코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무엇인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가.
영원은 존재하는가.
이의 해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노력할 것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
십여 년전 모 교육청에 근무할 당시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사단이 생긴 것은 도 장학지도 수행 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가하기 위해, 출발 전 승용차를 예열시키려고 한발만 올린 상태에서 시동을 걸자, 갑자기 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문짝에 한쪽 다리가 끼이게 되어 정강이의 칼뼈 부분에 상처를 입고 만 일이다. 그러나 높은 분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 준비 때문에 휴가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다리의 부기가 빠져야 수술을 할 텐데 쉴 수가 없으니 부기가 빠지지 않아 의사 선생님이 나무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수술을 할 수 없으니까 항생제 주사만 맞게 되었고, 평소 혈압이 높았던 나에게 이게 화근이었다. 예정된 높은 분의 방문이 한달여 지체되자 항생제 주사를 계속 맞아야 했는데 항생제를 계속 사용하면 혈압이 더 오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게 잘못이었다.
하필이면 그해 오월 스승의 날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뇌졸중으로 혈관이 파열되어 뇌출혈로 의식을 잃자 동료들이 재빨리 병원으로 후송을 해 주었고 곧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으나 의사는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다고 수술하기를 권했지만 비슷한 증상으로 쓰러져 뇌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던 어머니의 투병생활을 지켜본 나로서는 수술해서 식물인간으로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수술을 거부했다.
수술을 거부한 후 내 성질을 잘 아는 아내가 부산의 한방병원으로 한번만 옮겨 보는 게 소원이라고 졸라 되어 할 수 없이 이튿날 모 한방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이 병원에서는 의사는 의사대로 한의사는 한의사대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특징으로 한의사는 주로 침을 놓고 부항을 뜨고 환으로 된 것과 첩약을 사용해 치료를 하고, 의사는 링거 주사에 안정제, 뇌압과 혈압강화제 등을 넣어 주사제로 주로 치료를 해 주었다.
3일째 되는 날 뒤틀린 입이 거의 제 모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왼쪽 발가락과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병문안을 온 친구들은 나를 놀리기도 하고 이상한 내 모습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열흘 후에는 지팡이를 짚고 화장실도 갈 수 있게 병세가 호전되자 이제 내가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병과 싸워 이기겠다는 투지가 끓어올랐다.
보름 후에 다리 부분을 수술하기 위해 한방병원을 퇴원하고 처음 응급치료를 받았던 병원으로 돌아 왔는데 의사는 마취도 없이 다리 부위의 살갗을 도려내고 고인 내용물을 끄집어내면서 조금만 늦었으면 골수염으로 변해 평생 고질병이 될 뻔 했다며 다행스럽다는 것이다. 상처에서는 꼭 간짜장 같이 생긴 뻑뻑한 액체가 맥주 컵에 한 컵 정도나 나왔다. 이때부터 물리치료를 받는 틈틈이 정강이의 칼뼈 부분의 상처를 식염수로 계속 피가 나도록 씻는 일을 반복했는데 뼈끝이라 별다를 치료 방법이 없고 이렇게 식염수로 하루에도 수회씩 씻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십 여일 후 퇴원을 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왼팔은 오그라진 채 펼 수가 없었고 왼발은 휘휘 내젓고 걷는 정도였으며 입은 제 위치로 돌아왔으나 혀가 구부러져 있어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퇴원하는 나를 보고 담당의사는 더 이상 큰 기대를 갖지 말라는 말로 좌절감을 안겨 주었지만 ‘어디 두고 보자 내가 반드시 너의 신념을 무너뜨려 주겠다.’고 결심했다.
퇴원을 해 집에 돌아와 재활 훈련 프로그램을 짜는 일을 먼저 시작한 후 그 다음날부터 관음사 뒷산을 무대로 재활훈련에 들어갔다. 새벽 3시 반에 기상하여 얼굴, 팔, 다리 부분의 마사지를 성한 오른팔로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 맨손체조와 팔, 다리를 중심으로 부분체조로 충분히 워밍업을 한 후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오른다.
산에 올라서는 혀 내밀기를 백번정도 반복한 후 모 문중 산소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웅변이나 연설도 하면서 구부러진 혀가 바로 돌아오도록 십여 분 간 발음 훈련을 실시한다. 그런 다음에 왼팔로 나뭇가지를 잡고 당겼다 놓았다 하는 운동을 오백 번에서 천 번 정도 실시하고 왼발로 나무 아랫부분의 가지를 밟는 운동을 역시 팔과 같은 수준으로 실시하였다.
산을 내려 올 때는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왔으며 집에서는 왼손으로 가위질을 반복하는데 주로 신문지를 오렸고, 볼트 너트 돌리기, 못을 집어서 병에 넣기 등으로 손가락 관절을 움직이는 신경이 자라도록 되풀이하였다. 그리고 다리의 칼뼈 부분 상처도 계속 식염수로 씻었다. 삼 개월쯤 지나니 팔이 펴지기 시작했고 발음도 많이 좋아졌으며, 왼발도 내젓는 반경이 줄어들었다.
사실 퇴원을 할 때, 뇌출혈로 인해 뇌손상을 입어 왼쪽 수족을 움직이는 신경이 끊어졌으므로 갓난 애기처럼 신경이 다시 자라나도록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매우 실망했지만, 영천의 모 한의원을 찾아갔더니 원장님이 하시는 말이 운동량과 수족의 회복은 정비례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아프다고 몸을 아끼면 신경이 자랄 수 없어 굳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 말에 고무되어 더욱 열심히 재활훈련에 임할 수 있었다.
다리의 상처도 육 개월이 지나니 다 아물었고 꿈쩍도 하지 않던 왼팔을 귀 뒤에까지 올릴 수 있게 되었으며, 왼발도 쩔뚝거리기는 하나 휘휘 내젓지는 않게 되었다.
엄청난 속도로 회복이 된 것이다. 60일간의 병가를 마치고 딸이 운전을 해 줘 정상적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재활훈련을 계속했는데 마침 여름철이어서 퇴근 후에도 반복할 수 있었다. 3년간 이 훈련을 계속하다가 4년째부터 기상시간을 한 시간 늦추어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2인실에서 같이 입원을 해 있던 환자의 부인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입원 삼일 째 되는 날 경북 구미에서 오신 60대 중반의 남자분이 발등에 심한 염증이 생겨 입원을 하게 되었고 그 부인이 환자 보호자로 간병을 하기 위해 같이 있게 되었다. 입원 첫날이었지만 남편 간병보다는 내 얼굴을 무안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것 참 이상하네, 꼭 죽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살아났을까?”
아주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 사람처럼 표정이 수시로 변하면서 하는 말에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매우 불쾌했다. 분명히 나보고 하는 말인데 꼭 죽게 되어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리냐. 그러나 그 부인은 내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죽을 운명인데 어떻게 된 일일까?”
본인에게 아주 어려운 과제인지 자문만 하고 자답이 없는 상태로 하루가 지나갔다. 이튿날도 이 아주머니는 자기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했는지 또 내 얼굴을 주시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남편분이 자기 아내를 보고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느냐고 야단을 치면서 나보고 하는 말이
“젊은 분 정말 미안합니다. 저놈의 할망구가 젊을 때부터 신이 집혀서 신 굿을 했는데도 저래서 난 감할 때가 많아요. 그러나 이웃사람들은 다 잘 맞 춘다고 합니다.” 하는 것이다. 잘 맞춘다는 말에 나는 더 기분이 나빴다. 그렇다면 나는 죽을 운명이란 말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오후 환자 보호자석에 앉아있던 그 아주머니가 갑자기 무릎을 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이제 알았다. 조상 덕이다. 후덕한 조상이 있 었구나, 조상덕에 살았네, 이제는 자기 명대로 살 겠다. 아이구 오래 살겠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변덕이 심해 아주머니의 그 말에 그동안 괘씸했던 마음이 점점 사라지는 걸 느끼면서, 이러니 이 세상 사람들이 입에 발린 말인 줄 알면서도 좋은 말이나 칭찬에는 약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 때는 바른 소리 한답시고 윗분들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듣기 싫어할 줄 뻔히 알면서도 말을 못 참고 뱉어 버려 열심히 도와주고 얻은 점수 입으로 다 까먹어 버리는 그래서 소위 말하는 실컷 일해 주고 뺨 얻어맞는 꼴로 이 세상을 살아왔으니, 그 분들이 살아온 기준에 비추어 보면 참 한심한 놈으로 치부했을 생각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이제 십일 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뇌손상으로 끊어진 신경이 정상적으로 복원 될 수는 없나보다. 얼굴이나 손바닥 등 왼쪽 피부의 미세한 감각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손가락과 팔의 움직임은 여전히 로봇처럼 자연스럽지 못하다.
더구나 왼쪽과 오른쪽 힘의 크기가 다를 뿐 아니라 몸의 중심을 유지하기 어려워 여간 긴장하지 않으면 잘 넘어진다. 저기압 현상이나 기온이 내려가면 팔, 다리 관절과 근육에 엄청난 통증이 되풀이된다. 「재물을 잃은 것은 인생의 일부를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인생의 절반을 잃는 것이지만, 건강을 잃는 것은 인생의 모두를 잃는 것이다.」 이 말이 내게는 칼이 되어 가슴에 와 박힌다.
다만 그 아주머니 말처럼 그 때 저승으로 가야할 운명이었다면 즉, 저쪽 책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면 지금 내 인생은 완전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음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 때 목숨을 구해준 진해교육청의 동료직원들. 그리고 병가와 불편한 몸으로 내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할 때 곁에서 도와준 동료 장학사님들의 깊은 사랑에 항상 감사드리고 그 분들의 하는 일이 성공적이길 부처님께 기원 드린다.
이름에 의미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자기를 나타내는 이름이 붙어있다. 생긴 모양을 따라 붙여진 이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유래를 따라 붙여진 이름도 있다. 또한 오랜 세월을 두고 처음의 이름이 점차 변해서 오늘날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있다.
나무라는 큰 이름 속에서는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 향나무 등의 이름이 있고, 산이라는 큰 이름 아래,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백두산 등 자기 이름이 있다. 강도 마찬가지다. 강이라는 이름에 따라 낙동강, 섬진강, 한강, 금강 등으로 이름이 정해져 있다.
그런가 하면 작은 이름에서 또 세분되어 이름이 붙여진 것도 수없이 많다. 그 예로 나무→참나무→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등으로 세분되기도 하고, 학용품→필기구→연필→미술연필(4B), 샤프연필, 몽당연필처럼 더 세분될 수도 있다. 이렇게 사물의 이름은 의사전달의 필요성에 따라 더 적합한 방법으로 세분되거나 뭉뚱그려진 이름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름의 유래 또한 재미있는 게 무수히 많다. ‘호’라는 말은 원래 중국 사람들이 북방의 이민족을 낮추어 부르는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 사람을 낮추어 ‘호’로 불렀다. 그래서 중국에서 온 밀을 호밀이라 하고 중국 사람이 만든 떡을 호떡이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호빵은 중국과 관계없이 뜨거우니까 호호 불어 가면서 먹는 빵이라 해서 호빵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측량 기사였던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름이 이렇게 붙여진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에게 측량 기술을 배운 제자가 가장 높은 산의 이름을 자기 선생님의 이름을 따 붙였기 때문이다.
꽃무지라는 곤충의 이름도 알고 보면 생활습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꽃무지는 우리나라에서 20여종이 있다고 한다. 이 곤충들은 꽃에 모여 꽃가루를 열심히 먹는데 마치 꽃 속에 묻혀 지내듯이 생활한다고 하여 꽃묻이에서 꽃무지로 이름이 변한 것이다.
이것 이외도 이름의 유래를 찾아보면 이름이란 것이 그저 아무것이나 찍어 붙인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창원에 사파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사파동이라는 지명은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해 내려와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이 마을이 품질 좋은 상남 쌀의 주산지여서 ‘쌀밭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살무정’으로 변하고 이는 다시 ‘살푸정’으로 변했으며 ‘살푸정’에서 오늘의 ‘사파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는 중국에서 목근, 순영, 순화, 번리초 등으로 불리어 왔으나 우리는 목근화란 이름으로 불렀다.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목근화에서 무긴화로 이는 다시 무깅화로 불리다가 무궁화로 발전할 것으로 여겨진다.
생긴 모양을 본 딴 이름은 주로 기암괴석 등에 붙여진 이름이 많다. 장군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군바위(장수), 거북이를 닮았다고 거북바위, 탕건처럼 생긴 탕건바위, 매를 닮은 매바위, 갓을 씌운 것 같은 갓바위, 삿갓바위, 붓바위, 대감바위 등 무수히 많다.
지명도 간간이 생긴 모양을 보고 붙인 이름이 있다. 지의 귀처럼 생겼다고 지귀동이 있는가 하면 거북처럼 모양을 하고 있어 구암동, 솥의 모양과 같다고 부곡이라는 이름도 있다.
특히 지명의 경우 과거에는 우리말 이름이었으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펴면서 우리 고유이름을 없애고 간단한 한자어로 바꾸어 사용한 것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곳곳에 흔히 있는 이름인 새미실(샘)은 천곡으로, 한골(깊은 골)을 대곡으로, 물안을 무안으로 물들을 수다로 한들(코들)을 대평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경우가 너무 많아 화가 난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옛 이름 복원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하지만 한번 변한 이름을 쉽게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의 이름도 해방 전후에는 일본식 이름이 많았었다. 여자 이름에 ‘자’자가 붙은 이름이나 남자 이름에 ‘부’자나 ‘랑’자가 붙은 이름이 대부분은 일본식 이름의 한자어 표기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요즈음 아이들의 이름을 훑어보면 새롬이, 다솜이, 튼튼이, 샛별이, 구슬이, 하늘이, 초롱이, 푸름이 등 우리말 이름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은 정말 다행한 일이라 생각된다.
내친 김에 학교 이름도 한번 살펴보자.
학교이름은 대개 그 지방의 지명을 따 붙여진 이름이다. 시․군의 소재지 학교는 대개 시․군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로 창원, 통영, 사천, 밀양, 양산, 의령, 함안, 창녕, 고성, 남해, 하동, 산청, 함양, 거창, 합천초등학교가 이에 속한다.
읍․면 소재지 학교는 읍․면의 소재지 지명을 대부분 학교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 재미 삼아 특이한 몇 개의 학교이름을 들춰 내보자. 만약 학교이름으로 학교규모를 정한다면 가장 작은 학교는 가랑잎초등학교가 될 것이고, 가장 큰 학교는 두억초등학교이다. (두 학교 모두 지금은 폐교된 학교임) 그 중간에 가방, 한평, 칠천, 구만초등학교가 있다.
교장이면서도 그 학교에 취임하면 교장대접을 해 주지 않는 학교가 있으니 거창의 마리초등학교와 밀양의 안인초등학교이다. 이 두 학교는 말이 교장이지 교장이냐, 아닌 교장이 교장이냐로 말장난을 한다.
외제를 사용할 수 없고 오로지 우리 것만 사용해야 하는 국산초등학교 있는가 하면 외국 사람은 다닐 수 없는 동포초등학교도 있다. 술 좋아하는 교장에게 가장 적당한 임지로는 주촌초등학교와 양주초등학교가 있고 좋은 학교로 가고 싶으면 영전초등학교를 거치는 것이 좋다. 또, 승진의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싶은 사람은 양보초등학교가 좋지 않겠는가.
남한에 이북초등학교가 있는가 하면, 우산 없이는 등교 못하는 장마초등학교와 우산초등학교, 항상 신발을 벗어들고 다녀야하는 개천초등학교, 아무리 잘해도 칼질 당하는 도마초등학교가 있다. 그러나 못하거나 잘하거나 간에 항상 도내에서 일등하는 도일초등학교 있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은 단계초등학교로 가야하고 시험 점수를 올리려면 적중초등학교가 제격이다.
옛 이름을 살려낸 미리벌초등학교, 안골포초등학교, 가람초등학교, 촉석초등학교, 샛별초등학교는 얼마나 멋있는 이름인가? 앞으로 신설학교의 교명은 우리 고유의 지명이나 아름다운 자연물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학교이름이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이름에 긍지를 느끼도록 학교특색을 가꾸어 나간다면 그 또한 교육적 의의가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요즘 와서 동명이교로 혼란을 가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편물이 그렇고 행정면에서도 공문이 엉뚱한 학교로 가는 경우도 간혹 있다.
내가 겪은 바로는 대산초등학교에 근무할 당시 흔히 함안대산으로 가야할 우편물이 본교로 오는 경우도 있었고, 신월초등학교에서도 마산신월로 가야할 공문이 본교로 간혹 오기도 하고 우리학교로 올 전화가 마산신월로 가는가 하면 그 반대현상도 가끔 있어 두 학교의 교장이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다. 동산초등학교에서는 양산동산과 남양초등학교에서는 사천남양과 이런저런 건으로 몇 번씩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도교육청에서도 교명 변경에 관해 몇 년 전 조사만 해 놓고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다. 개혁이, 특별한 것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편을 해소하는 것이 첫걸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기대를 해 보면서, 아울러 이름은 불려야 복을 받는 것이니, 상대방이나 사물의 이름을 많이 부르도록 권하고 싶다.
소 치던 그 시설
여남은 살 적 일이었던가 싶다. 학교를 마치면 동네 아이들과 소 치러 나서야 한다. 하루에 두 번씩 소 치러 나서는데 새벽에 동이 틀 무렵 덜 깬 잠자리에서 할아버지의 꾸지람을 들으며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 눈곱을 떼고는 억지로 소를 몰고 앞산으로 향한다. 아침이슬에 가랑이가 모두 젖어 발에 감기고 오슬오슬 소름이 돋아나는 추위를 참으며 등교하기 전까지 소를 돌보다가 산을 내려온다.
나설 때와는 달리 기분이 상쾌하고 즐겁다. 그러나 단잠에 빠져 있다가 억지로 일어나기를 매일 되풀이하는 아침 소치기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하기 싫은 일이다. 이와는 달리 학교를 마치고 오후에 소 치러 가는 길은 매일 즐거웠다.
소치는 장소는 자주 바뀌었는데 냇둑을 따라 소를 풀어놓는 날도 있고, 버드나무 숲에 풀어놓기도 했으며, 마을 건너편 야산으로 가기도 하였다. 소를 풀어놓고 교대로 소를 돌보는 사람을 정한 후 우리는 실컷 놀았다.
우리가 하는 놀이는 소치는 장소에 따라 달라서, 들에서는 멱 감기와 함께 냇바닥의 진흙을 건져 올려 요즘 말로 머드팩도 하고 만들기 놀이도 하였으며, 고기를 잡아 불에 구워 나누어 먹기도 했다.
산으로 장소를 옮기는 날에는 지금의 서바이벌게임처럼 전쟁놀이를 즐겼다. 전쟁 직후라 어른들의 흉내를 내었는데 만개잎사귀를 엮어서 철모 모양도 만들고 군복도 흉내 내어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어 전쟁게임에 몰두했다.
당시에는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마을마다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마을 마다 죽은 애기를 내다버리는 애기장 터(애기무덤이)가 있었는데 애기가 죽으면 독에다 넣어 야산에 가져다 짐승이 건드리지 못하게 그 주변에 돌을 쌓아 무덤처럼 만들어두었다. 우리는 그 돌무더기를 진지로 삼아 전쟁놀이를 즐겼던 것이다. 전쟁놀이는 대개 아군이 승리하고 적군이 포로로 붙잡히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승리하면 의기양양해서 군가도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소치는 아이들에게는 음력 칠월 초이렛날의 칠석날과 보름인 백중날을 몹시도 기다렸는데 이날은 ‘소고삐 매는 날’ 이라 해서 소치는 아이들의 잔칫날이다. 집집마다 전을 부쳐 내오거나 빵을 쪄서 가져오기도 하고 각자 추렴을 해서 과자도 사와서 조그만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미보다는 가장 스릴 있었던 일은 간식을 맛보기 어려웠던 시절에 간식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서리를 했던 일이다. 밀 서리, 보리 서리, 콩 서리, 감자 서리가 유행이었다.
서리도 잘 하려면 조직적이어야 한다. 주인이 오는지 망을 보는 조가 있고, 직접 채취하는 조가 있으며, 그동안 나무를 준비해 불을 피우는 조가 있어야 한다. 이 모두가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주인 몰래 기분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많이 한 것이 밀 서리였다.
나는 주로 나무를 주워와 불을 지피는 일을 맡았는데 들판이라 나무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홍수 때 시비가 밀려 내려와 냇가의 큰 덤불사이에 걸려 있는 것을 주워 모아 땔감으로 하거나 일찍 보리타작을 한 논에서 마른 보릿대를 주워와 불을 지폈다.
꺼질 듯 한 불을 피우기 위해서 연신 입김을 불어대면 재가 날아 온 얼굴에 옅은 그을음이 쌓인다. 매캐한 연기는 눈물을 나게 하고 눈물과 그을음이 합작해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밀 익는 구수한 내음에 시장기가 돌아 입안에 군침이 일고, 입맛을 다시다 보면 새까매진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제법 까실까실하게 익었음직한 무렵 불을 헤쳐 옅은 불기로 뜸을 들인다. 불기가 가시면 양손바닥으로 비벼서 껍질을 벗기고 후후 불어서 껍질을 날린 후 한 입 탁 털어 넣는다. 고참 순으로 비벼 먹다 보면 어떤 때는 차례가 돌아가지 않는 아이들이 있어 못내 서운해 한다. 그러면 그 다음번 서리 때는 대장이 꼭 그 아이를 챙겨 주는 것이 우리들의 세계였다.
간혹 먹는데 정신을 뺏겨 소를 보는 아이가 깜빡하는 사이에 소들이 남의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먹어치우게 되면 그 날은 끝장이다. 주인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도망을 치지만 주인에게 끌려간 소를 찾을 일이 난감하기 때문이다. 논밭의 주인은 물론 동네 분이라 사정하면 결국은 용서해주지만, 밭주인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집에 도착하면 이 일이 이미 알려져 부모님께 더 야단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소를 잃어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이는 근처에 다른 마을의 아이들이 소를 치고 있으면 황소들이 발정기에 있는 이웃 마을 암소의 암내를 맡고 그리로 달려가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이었다. 소란 놈도 사람을 닮게 되는지 이웃마을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은 시골아이들이라도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냥 제자리에 항상 서 있을 것만 같았던 시절이 벌써 오십 여년이나 흘렀지만 늘 곁인 듯 가깝게 느껴진다.
바담풍 훈장
나의 교직 생활을 되돌아보면 가장 뇌리에 깊숙이 남아있는 곳은 역시 초임 학교인 봉산초등학교와 그 다음 근무지인 여항초등학교이다. 초임학교는 초임학교라서 그렇다 치고 여항초등학교는 왜 이렇게 항상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그건 다름 아니라 십사 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보낸 학교라서 그렇고, 인생에서 황금기 같은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까지를 그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렇다. 또 학부모 모두가 사람 냄새가 물신 풍기는 그런 인정 어린 고장이기 때문이요, 오래 있다 보니 제자들이 많아서 더욱 그런 것이라 여겨진다.
한 학교에서 십사 년을 보냈다고 하면 더러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한 학교에 근무할 수가 있느냐는 인사제도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테고, 또 더러는 바보같이 사범학교를 나와 입시로 재미(?)보던 시절, 도시 학교를 두고 시골학교에 근무한 것이 자랑이냐고 쏘아붙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오래 있게 된 사연일랑 제쳐두고, 그곳의 교직 생활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시기였다고 내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다. 젊어서 그랬겠지만 시행착오는 많아도 열정하나로 잘해보고자 무던히도 애를 태웠던 시절이었다.
계묘년 보리농사가 흉년이 들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을 겨우 넘기고 난 이듬해 졸업반 담임을 맡게 되었다. 이 시골 아이들을 꼭 한번 서울구경을 시켜야 하겠는데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은 나도 서울 출입을 서너 번밖에 못해 본 처지이지만 세상이 넓다는 것을 이 시기에 꼭 알려야 할 사명감 같은 것도 생기고 해서 묘안이라는 것을 내 놓게 되었다. 쌀을 모으자. 그리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보자.
그 날 이후 학부모님의 협조로 절미쌀을 모으게 되었다. 목표는 일인당 세되로 하고 사월부터 한 달에 반 되씩 모으면 구월까지 세되가 될 때까지 모아 수학여행에 보태기로 했다. 그리고 보리 베기와 모내기 봉사활동도 함께 하기로 했는데 이름만 봉사활동이지 한 마지기당 이백원에서 삼백원까지 수고비를 받았던 것으로 지금 기억되지만, 하여간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 1인당 쌀 세되와 돈 800원으로 서울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만용인지 정신 나간 짓인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분이 드는 것은, 기차를 타기 위해 재를 넘어 삼십리길을 걸어서 가야했고, 열세시간이나 기차를 타야했던 것, 그리고 오며 가며 하룻밤씩 기차에서 숙박을 하는 것 등 지금 아이들로서는 어림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교보문고 옆의 육일여관이라는 곳에서 한 방에 10명씩 잠을 자게 한 일 등,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교사는 아동들에게 제일의 동일시 대상이다. 내가 모범을 보여야 아동이 본받게 된다. 말로써 백번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실지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제일 좋은 교육방법이다.
그런데 내가 내 제자들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못했다면,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못했다면 입이 열 개가 있다한들 무슨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는가? 그러니 교사 흉내만 내는 ‘바담풍’ 훈장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때는 중학교 입시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밤에도 과외공부를 했다. 보통 열시 반까지 남폿불 밑에서 입시 공부를 해야만 했다. 도회지처럼 과외 수업비가 별도로 있는 게 아니고 쌀이나 콩 같은 곡식이나 장작 같은 땔나무 등 자기 형편에 맞추어 양과 시기를 스스로 결정해 마당에 갖다 놓으면 그만이고 그것도 형편이 어려우면 아예 내 놓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왜 안내느냐 시비하는 법도 없었다.
과외지도는 물론 교육과정의 목표와 내용을 가르친 다음 진도가 끝나면 곧 암기 위주의 입시지도에 충실했는데 입시공부라는 것이 암기 과목은 무조건 외우는 것이고, 산수(수학)과목은 문제 풀기를 반복 연습하였으며 공식을 외우지 못하면 낙오가 되기 때문에 열심히 공식을 외우도록 했다.
심지어 음악 교과의 경우 악보상에 나와 있는 리듬을 외우기 쉽도록 하기 위해 음표의 길이를 숫자화 해서 외우도록 지도했는데 4분음표는 숫자 4로 8분음표는 8로 점 4분음표는 5.로 이런 식으로 하여 가사를 빼고 숫자로 가사창을 대신하여 노래 부르기를 지도하기도 했다. 물론 발성연습도 시키고 리듬도 쳐 가며 가사창도 부르고 이론적인 설명을 다 했지만 시험 문제와 부딪힐 때는 이론을 따져가면서 답을 찾기보다는 외워서 답을 찾는 게 쉬운 방법 이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세대나 바로 밑의 세대들이 조선 임금을 태․정․태․세․ 문․단․세…. 순으로 외우는 방법이 바로 전형적인 입시 지도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하면 아마 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골 학교라 문제지를 사 볼 형편도 아니어서 하루에 8절 원지를 최소 넉 장에서 아홉장까지 필경을 하고 등사를 해야 하는데 여간한 정열이 아니고서는 힘겹고 지겨운 일이었다.
외우는 방법 외에 수준별로 받아야 할 점수를 학생 개개인에게 부여한 소위 책임점수라는 것을 두어 시험을 친 후 채점 결과가 자기 점수 이하로 내려갈 경우 5점당 한 대씩 매를 때리기도 했다. 요즈음 사용되는 사치스러운 이름의 ‘사랑의 매’가 아니고 육학년 담임의 경우 마디가 많은 대나무 뿌리로 만든 지휘봉 겸 훈육의 회초리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이 회초리로 보통 손바닥을 많이 때렸던 것 같다.
나는 다른 선생님과 달리 발목을 잡고 발바닥을 때렸는데 이 방법이 건강에도 좋고 머리를 맑게 해 주어 입시지도에 효과적이라는 나름대로의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지압의 효과가 많이 알려졌을 무렵 어느 지압사에게 물어본 결과 발바닥을 때리면 확실히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게 되어 내가 과거에 쓴 방법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변명의 빌미가 생겼다.
내가 발바닥을 체벌 부위로 삼게 된 것은 지압의 효과를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전통혼례에서 동상례라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 때 신랑을 붙잡아 질베로 묶어서 시렁에 매달아 놓고 동네 청년들이 번갈아 가며 신랑을 다루었는데 그 때 신랑이 말을 잘 안 들을 경우 황태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는 풍습이 있었다. 흔히 동네어른들이 자기들끼리 하는 말로 저렇게 발바닥을 때리면 신랑의 정력이 좋아진다고 했다.
꼭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발바닥을 때리려면 우선 발목을 잡고 발바닥이 옆으로 보이도록 돌려야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가기 때문에 화도 풀리게 되어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고 발바닥을 맞으면 순간적으로 매우 아프기 때문에 벌의 효과도 높아 이 방법을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사십년이란 긴 세월의 교직생활에서 후회되는 일이 어찌 이 뿐이겠는가?
아무리 한 우물만 파 도사가 된다 해도 도사에게도 실수는 항상 따라 다니기 마련이다. 사십 여 년 전 교내 연구 수업으로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수업공개를 했던 날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수업이 거의 종결된 무렵 이번 시간 수업내용과는 상관없어도 좋으니 평소 과학에 대해 의문이 있는 학생들에게 질문한 기회를 제공했다. 한 학생이 점잖게 일어서서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사람이 달에 갈 수 있습니까?”
사실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우주인이 되어 지구 밖으로 날아간 게 1961년이었으니까 충분히 인간이 달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선생님을 의식해서 이성을 잃고 질문한 학생을 나무라는 투로,
“야! 이놈아 너는 왜 공부시간에 항상 그런 쓸데 없는 공상만 해?”
“사람이 어째 달에 갈 수 있겠니?”
아이는 무안해서 주저앉아 버렸고, 다른 선생님들도 어이없다는 듯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나는 겸연쩍어 또 뭐 다른 질문 없나 하고 물었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조심스러워 하며 선 뜻 질문하는 학생이 없었다. 그만하고 수업을 끝냈으면 좋으련만 끝내 일을 벌이고 말았다.
“반장이 대표해서 질문 좀 해 보아라.”
반장은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선생님 저 이번 시간에 공부한 증발에 대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뭐냐 말해보아라.”
“겨울철 냇가에 가면 냇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 오지 않습니까?”
“그래 겨울철에 냇가에 가면 김이 올라오지. 그런 데?”
“선생님 말씀은 물이 끓어야 김이 나고 그 김이 나는 것이 증발이라고 안했습니까? 그러면 냇가 에 김이 올라가는 것은 증발이 아닙니까?”
아이쿠, 야단났다. 허 그놈 참 실컷 빨래가 마르는 것도 증발이라고 했는데 저게 무슨 말이람, 중얼거리며 원망 섞인 눈초리로 반장을 쳐다보는 순간 참관하든 선생님들이 그만 한꺼번에 까르르 웃게 되고 열없어진 나도 덩달아 부끄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세월이 흘러 그로부터 5년 후 1969년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다.
고등학생이 된 그 제자가 연일 신문과 방송에서 떠들어대는 뉴스에 접하면서 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지금까지도 부끄러워 그때의 기분을 물어 보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암기식 입시교육을 철저히 한다는 이유로 여러 번 6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결코 자랑할 일이 못 된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교재연구가 충분치 않으면 엉터리 수업을 하게 되고 엉터리 수업은 제자들에게도 교사 자신에게도 너무나 큰 후유증이 되어 평생을 따라 다닌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귀띔하고 싶다.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그때의 그 제자들이 지금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남 못잖은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과 더러는 꽤나 알려진 인물도 있어 바담풍 훈장 아래서도 바람풍 제자가 나온다는 억지를 부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