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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장 6-8절
요한,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
태초부터 계신 말씀은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그것도 사람들의 빛으로서 생명이 있다는 것은 역으로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이요, 그런 측면에서 어둠에 머물고 있는 것이 모든 사람의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장 5절은 그 사실을 더욱 분명히 밝힙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한 마디로 인간은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린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라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담의 첫 범죄 이후 모든 인류는 태중에서부터 죄책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본성이 부패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부패한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선을 싫어하고, 선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어지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나오는 것은 온통 죄악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가? 성경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 누가 구원을 이룰 수 있는가? 창조주이시고,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친히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그것도 죽었던 영혼까지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구원을 이루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신 뒤 6절에서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데, 왜 뜬금없이 요한이라는 사람이 소개되고 있는가? 일단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세례 요한이 태어나게 될 것을 천사를 통해 알려주는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14절 이하 17절입니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여기서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한다는 것은 마치 구약의 나실인을 연상케 합니다. 나실인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구별하시되, 특별하게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구별됨은 그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 왜 모태로부터 구별함을 받았는가?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자로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그가 증거 할 모든 가르침의 권위가 하나님께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가르치게 될 그의 가르침과 증거가 참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요한에 대하여 누가복음 1장만이 아니라 이미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도 예언한 바가 있는데, 거기서는 엘리야가 올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말라기 4장 5절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러나 이때 엘리야는 조금 전 누가복음에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하게 될 세례 요한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기도 하시는데, 마태복음 17장 10절 이하 13절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그러니까 말라기 4장에서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말한 모든 내용은 마태복음 17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을 일컫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볼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는 분명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자로 있다고 말씀하시지만(눅1:16),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고 말씀하심과(마17:11) 동시에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다고 말씀하시는 부분도 있다는 것입니다(마17:12).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기 위해 왔고, 영적으로 어둠에 있는 그들을 회복하기 위해 왔지만, 사람들은 그가 구약에서 예언한 인물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동일하게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데, 왜 세례 요한의 이름이 언급되는가? 그리고 그가 언급되는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정작 그의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왜 사람들이 그를 임의로 대우하고 있는가? 이럴 거라면 굳이 세례 요한이 없어도 되지 않는가?
다시 오늘 본문으로 와서 7절과 8절을 보시면 세례 요한이 보냄을 받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보내심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으로 말미암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 ‘모든’이라고 할 때 누가복음은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특별한 대상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그런 의미는 분명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7장과 함께 이해하자면 이런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임의로 대우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례 요한인데, 왜 그를 보내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일단 요한복음 5장 33절과 3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에서는 그가 증언하러 왔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빛에 대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러 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증언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 34절은 어떻게 말합니까? 33절에서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말하지만, 그 증언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씀합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증언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오늘 본문처럼 말하는 구절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5장 34절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증언하기 위해 세례 요한을 세우셨지만, 세례 요한의 증언 때문에 빛이 증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착각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주체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도구를 사용하신다고 할 때 도구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할 때 도구가 있어야지만 일하시느냐? 도구 없이는 일 하실 수 없는가? 하나님은 얼마든지 도구를 사용하셔서 일하시기도 하시지만, 도구 없이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세례 요한을 세우셔야지 만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을 이루실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실 수 없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세례 요한이 있든, 세례 요한이 없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도구가 있어도 뜻하신 바를 이루실 수 있고, 도구가 없어도 뜻하신 바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바를 반드시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도구의 유무(有無)와 상관없이 뜻하신 바를 이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구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명확하기 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사도의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것이 감사하여 다른 사도보다 열심을 냈습니다. 우리는 이때의 열심이 내 것인 줄 착각합니다. 그리고 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전적 부정, 이것이 있어야지만 은혜라는 말의 진정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체라고 말할 때는 이 전적인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을 다할지라도, 아무리 최선을 다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체라는 말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 자신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죄의 주체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죄의 저자나 죄의 승인자가 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하나님의 뜻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죄에 대한 작정을 하시되, 죄의 저자나 죄의 승인자가 아닌 방식으로 죄를 뜻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뜻하셨을 때 그 목적은 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드러낼 목적을 가지고서 뜻하신 것입니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와서 강조하자면 하나님이 주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체란 사실은 도구가 없어야지만 돌릴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도구가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 도구가 어떤 열심을 낼지라도 주체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도구의 열심조차 전적으로 부정될 정도로 하나님만이 주체로 계시다는 겁니다.
당연히 이런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말한다든가, 공로에 대한 어떤 대가를 말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 누가복음 17장 10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생각해 보십시오. 명령대로 행한 것, 잘한 것입니까? 아니면 잘 하지 못한 것입니까? 잘한 것입니다. 특히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명령을 지켰다면 매우 잘한 것입니다.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이 아니라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도록,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즉 명령대로 행했을 때 명령대로 행한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요, 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은 종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칭찬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매우 인색한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17장의 경우 우리의 자세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성경의 또 다른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순종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칭찬해 마지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내용도 있습니다. 또한 그것에 대한 상급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상급을 주실 만큼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상급을 주신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공로로 여기시면 결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한 것인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혹 상급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공로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이때 상급은 공로에 대한 상급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상급이라고 개혁자들은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내용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 다시금 질문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왜 도구를 세우시는가? 앞에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 그렇기 때문에 도구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도구를 세우시는가? 세례 요한의 증언을 취하지 않으신다면 굳이 왜 세례 요한을 세워서 증언하게 하시는가? 요한복음 4장 36절에서 38절을 보겠습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여기 보면 두 부류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거두는 자들과 관련하여 말씀하실 때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뿌리는 자는 노력하였고 거두는 자들은 노력한 것에 참여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 들어가면 뿌리는 자는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거두는 자는 사도들입니다. 선지자들은 노력을 했고, 사도들은 그들이 노력한 것에 대하여 거저 참여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핀 내용으로 적용해 보면 노력을 하든, 노력한 것에 거저 참여하든 여전히 주체는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일하심에 선지자든, 사도든 참여하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한 부류는 노력하게 하셨고, 다른 한 부류는 노력한 것에 참여하도록 하시는 외형으로 있지만, 그들 모두는 사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도록 하는 자들일 뿐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세우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세우신 목적은 오늘 본문 7절과 8절입니다. 즉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빛에 대하여 증언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빛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가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1장 말씀대로 하자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도록 하기 위해 세움을 받았습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증언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증언 때문에 빛을 빛으로 인식하고 빛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증언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일에 그를 끌어들이시고 자신의 일에 참여하게 하실 목적으로 그를 세우셨습니다. 즉 하나님 홀로 일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하나님 홀로 일하시지만 노력하지 않고 거둘 수 있도록 거저 참여하게 하셔서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하나님 홀로 받으실만한 영광을 그도 함께 받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세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렇다면 세례 요한에 앞서 일한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경우 신약의 인물이지만 구약 선지자들과 함께 묶이기도 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세례 요한 이후 사도들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요한복음 4장을 통하여 그들이 거두는 자로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사람들은 어떤 자로 있는가?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것에 노력하지 않고 거두는 자로 거저 참여하게 하시는 자들로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노력하지 않았는가? 요한복음 4장에 의하면 노력하지 않고도 참여하는 자로 있다고 하지만, 전혀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노력했습니다. 노력도 자신에게 부어진 은혜를 생각해 볼 때 너무나도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고 생각해서 다른 사도들보다 더한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사실로 있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일하심에 거저 참여했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는 것은 바로 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것이 바로 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참여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홀로 받으시는 영광을 그들에게도 주시기 위해서인 겁니다. 그것이 상급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세례요한의 증거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 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십니다(요5:34).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세례 요한의 증거가 그리스도를 믿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홀로 일하신 그 영광을 그가 허락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일하실 수 있지만 그의 은총과 자비로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은혜의 상급을 부여하시기 위해 사람을 통해 일하시길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는 자라면 결코 무엇을 했다고 하여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니 혹 내가 한 일 때문에 그리스도가 가려지고 자신이 드러날까 하여 더욱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다름 아닌 세례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그가 빛이 아니라 빛을 증거 하러 온 자임을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스스로 그 사실을 분명히 말하는 자였습니다. 누가복음 3장 15절과 16절입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복음 1장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19절 이하를 보시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1:19-23)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자였습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신자라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양 도둑질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이 빛이 아닌데, 마치 빛인 것처럼 자신의 공로를 내세웁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가 했다고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말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 하는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소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빛을 증언하러 온 세례 요한처럼 빛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나타내는 자일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 자기 자신을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본을 보임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주 안에서 빛’(엡5:8)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빛은 아니지만 빛을 나타내고 드러내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빛의 자녀처럼 행하고 있는가?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우리가 빛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거저 참여하는 자로 있다는 것 때문에 소명을 게을리 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증거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빛이신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노력과 애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나 됨이 주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 은혜 안에 안주하는 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에 감사하여 선한 열심을 품고 나아가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런 자로 있었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구약의 많은 인물들이 그러한 자로 있었다고 증거 합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우리 입장에서 말하면 구약의 증인뿐 아니라 신약의 증인들까지 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길을 갔다면 우리도 그러한 길을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베푸신 주의 은혜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역시 주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인내함으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주 가운데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 봐야 합니다.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장차 올 영광을 위하여 잠시잠깐의 고난을 견디신 분이십니다.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성도의 삶도 그런 삶입니다. 지금은 고난이 있습니다. 지금은 힘든 일이 있고, 지금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견뎌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장된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동일한 영광을 받을 것으로 있습니다. 이 영광을 바라보면서 견디란 것입니다. 견디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주의 뜻을 따라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나됨이 주의 은혜인 줄 알고 주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 열심을 다 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하는 정직한 마음,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세우신 이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도 역시 그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자로 있어야 하고, 그 은혜를 아는 자로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사도들보다 더한 열심을 가졌다는 것이 마땅한 자세로 있어야 하고, 그 마땅한 자리에서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했다고 말하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나는 빛이 아니라 빛은 저분이십니다.”란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이 바로 이런 삶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고, 거기에 만족하고,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함께 주시는 것으로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더더욱 큰 감사가 넘쳐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