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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대학교 체육부의 태동과 활동, 1970-1973 |
김용수‧ 박기동(강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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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anging History of |
Kim, Yong-Soo․Park, Ki-Dong(Kangwon National U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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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본 연구는 강원대학교 창립 초기 체육부의 태동 과정을 질적 연구 방법인 구술사를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태동과 활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변천사에 나타난 체육사적 의미와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사적 체제 정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meaning in the history of .
Ⅰ. 서론
1947년 춘천 농과대학이 개교된 이후 운동부로서 배구부, 축구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정식 체육부로서의 활동이라기보다는 동호인끼리 모여 방과 후에 운동을 하여 강원 도민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정도였다.
1949년 제1회 전국학도호국단 체육대회가 10월 11일부터 5일간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는데, 강원도에서는 춘천 농과대학교 축구팀이 대학부로서 처음으로 전국규모대회에 참가했다(강원도체육회, 2004: 69)는 기록이 보인다.
1950년 경인간 역전경주대회에서 춘천 사범 팀이 6위, 춘천 농과대학교 팀이 7위를 차지하면서 강원 육상의 저력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1963년 10월 4일 전주에서 개최된 제4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춘천 농과대학교의 정구 팀이 3위로 입상한 바 있다(강원도체육회, 2004: 70). 그 후 몇 년 동안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1968년 교명이 춘천 농과대학교에서 강원대학교로 바뀌고 1969년 12월 24일 교육인적자원부(전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체육교육과가 설립되면서 실질적인 운동부가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상황을 한상준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림 1. 1972년 학생증
자료 출처: 전찬오 소장
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가 설립된 지도 40년이 흘렀다. 그 당시 활동했던 교수는 작고하거나 정년하였고, 조교로 활동하던 정철정이 현직에 근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원대학교 설립 초기 운동부에 대한 선행연구는 전무한 상태이고, 관련 자료로는 『강원대학 체육교육학과 20년사』가 전부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1970년도 초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체육부 활동의 의미가 역사적으로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기록은 현재나 미래의 체육․스포츠 발전에 매우가 가치 있다고 생각되어 본 연구를 시도하였다.
본 연구는 강원대학교 창립 초기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태동과 활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변천사에 나타난 체육사적 의미와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역사적 체제 정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태동 시기의 활동의 특성과 변천 과정에 대한 당시 신문 기사와 잡지, 정기 간행물, 문헌 자료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강원연감』, 『강원도체육사』, 『강원대학대학교 35년사』『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 20사』에서 그 시기의 상황을 확인할 정도였다. 따라서 자료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고, 그 때의 상황을 보다 심도 있게 파악하고자 체육부의 태동 과정을 질적 연구 방법인 구술사 방법을 통해 재조명하였으며, 당시 활동한 주요 인물의 인터뷰를 통한 심층 면담으로 신뢰도를 높였다.
Ⅱ. 강원대학교 체육부 태동 시기의 활동
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는 1970년 1월 말 순경 최초로 신입생 입학시험을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체육 이론, 체육실기와 면접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 이러한 입학시험 절차를 통하여 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는 성적 순 30명이 1070년 3월에 체육교육과 1기생으로 출발하였다.
사진 1. 1970년 1기생
자료 출처: 전찬오 소장
체육부의 태동과 활동은 1970년 3월 체육과 1학년생들인 김철, 전찬오, 김남훈, 임태식 등을 주축으로 한 강원대학 체육부 최초의 필드하키 팀이 구성되면서 본격적인 강원대학 체육부 활동이 시작되었다. 필드하키 팀은 그 해 서울에서 열린 춘계리그대회에서 3위, 부여에서 열린 제13회 종별 선수권 대회에서 2위로 입상하였다.
사진 2. 격려하는 000학장과 한상준 지도교수
자료 출처: 전찬오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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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필드 하키부 활동 상황을 김철을 통해서 들어보기로 한다.
체육과 1기 김철, 전찬오, 김남훈, 임태식, 윤귀희, 임태식, 김유근 등이 고등학교 때 하키 선수 생활을 한 사람들이라 팀 구성은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골키퍼였지요. 그래서 운동 기능이 좋고 배창이 있는 권오동이를 꼬셔서,… 잘했어요. 대학부터 했는데도(김철 인터뷰, 2010년 5월 11일).
예산은
1971년 필드 하키부는, 염기영, 최공섭, 김용수, 김세환, 이상욱, 박기동, 김득우, 윤병하 등이 입학하면서 팀이 보강되어 그해 춘계리그대회에서 우승, 서울에서 열전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3위에 입상했다.
사진 3. 1971년 춘계리그전 경기 전 마음 다짐
자료 출처: 김용수 소장
그 당시 필드 하키부 활동을 김철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대개 춘천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연습했어요. 춘천고둥학교 우제민 코치 선생님이 지도해줬어요. 거의 제자들이라…연습 상대는 춘천고등학교 선수였지요. …후배들과 1971년부터 우리 팀이 이기는 횟수가 늘어났어요. …뭐! 빳다요. 있었지요. 평상시에는 대학 소운동장에서 숏 게임 위주로 했는데, 선배들이 군기 잡는 다며…좀 그러다 없어졌어요. 2기 선수가 더 나이가 많았거든요(김철 인터뷰, 2010년 5월 11일)
1972년 필드 하키부는 최종길, 김병민 등이 보강되면서 서울에서 열린 춘계리그대회 3위, 광주에서 열린 제15회 종결 선수권 대회 우승을 하였다.
사진 4. 1972년 춘계리그전 경기 장면
자료 출처: 전찬오 소장
1972년 광주에서 열린 제15회 종별 선수권대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이상욱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김남훈이는 축구부로 가고, 염기영은 노장으로 춘천중학교 코치를 했고…딱 11명이 출전했지요.그래서 지도교수인 한상준 선생님이 바케스로 물떠와 물수건 대령하고, 전반전이 끝나고 주전자로 우리들의 목을 추겨주셨지요. 필드 하키 팀에 정성은…대단했어요. 그런 연유로, 정신력으로 우승했지요(이상욱 인터뷰, 2010년 8월 7일).
사진 5. 광주 종별선수권대회 우승 후
자료 출처: 김용수 소장
1973년 필드 하키부는 이두재, 장영금, 홍완표 등이 보강되면서, 서울애서 열린 춘계리그대회 우승, 부여에서 열린 제 16회 종별 선수권대회 우승, 부산에서 열린 전국 체육대회에서 3위로 입상하였다.
필드 하키 경기는 시합 중 선수들 간 잦은 싸음으로 경기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현강은 스틱을 사용하였고, 때리기(히트), 공중으로 패스하기(스콥), 빠른 공의 움직임으로 인한 심판 판정 불만, 경기장 시설 미비 등으로 인하여 경기가 과열되었고, 때로는 심판을 폭행하는 사례도 종종 일어났다.
필드 하키부 선수 출신이 1970-1972년 까지 3년 동안 입학시험에 다수 합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춘천고등학교가 1967년 제48회 전국체육대회 우승, 1968년 제49회 전국체육대회 준우승, 1969년 제50회 전국체육대회에서 강릉고등학교 우승, 균명고등학교 준우승, 1970년 제51회 전국체육대회 춘천고등학교 우승,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춘천고등학교가 우승할 당시 활약한 주전 선수들로서, 가정 사정 등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졸업 후 도민체육대회, 전국체육대회에 일반부로 활동했다 이러한 우수한 기능과 체력 요건이 입학시험의 실기 부문에서 유리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같이 필드 하키부는 고등학교 시절 우수 선수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선수들의 의지, 팀 워크, 특히 교수 한상준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로 각종 전국대회에서 입상하면서 대학부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필드 하키부 활동에 이어, 1970년 4월 체육교육과 재학생 중에서 유도 유단자인 김경로, 김광준, 김문동 등이 주축이 되어 유도부를 구성하여, 그 해 6.25 기념 유도 대회에 출전하여 일반부에서 3위로 입상하였다.
그 당시 활동한 김경로의 증언을 들어보자.
맞아요. 그 해 김경로, 김광준, 김문돈 주축이되어 6.25 기념대회에 출전했지요. 3등했어요. 그리는 별 입상 기록은 없고, 나름대로 호신을 겸해 운동했지요(김경로 인터뷰, 2010년 5월 11일). …꽤 열심히 했어요. 나도 3학년 때 경기 대학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출전했던 적이 있어요 단체 팀 인원이 부족해서… 체중 500g 오버로 공주사대 선수한테 실격 패 했어요(신현관 인터뷰, 2010년 5월 26일).
예산은
이와 같이 유도부는 1970년에서 1973년까지 체육교육과 학생들 중에서 유단자를 중심으로 건신을 목적으로 활동하면서 전국체육대회 강원도 대표로 활동하였으나 전국대회애서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펜싱부는 1970년 고등학교 시절 선수 생활을 했던 행정학과 김신흥, 김길정 등를 중심으로 제51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여 3위로 입상하였다.
“그랬어요. 맞아요. …우리들이 입학하기 전에 행정학과 김신흥, 김길정…1968년, 1969년에 춘천고등학교와 원주고등학교 펜싱부가 전국체육대회 강원도 대표로 출전했어요 …성적은 없을거예요. 그 사람들이 강원대학교 행정학과 등에 입학하면서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여 단체전에서 3위 했지요.”(김두경 인터뷰, 2010년 7월 2일)라고 말하고 있다.
1971년 오경석, 김두경, 채봉현, 이기형, 김현식 등이 입학하면서 몇 년 동안 우리나라 대학 펜싱의 강자로 군림하였다.
그때의 상황을 김두경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처음 지도자 없는 운동부 활동을 쉽지 않았지요. 수업과 훈련을 병행하기는… 우리 5명을 함께 방을 얻어 자취를 했어요. 어설픈 식사였지만 건강관리에서도 꽤 신경 썼어요. 오후 수업이 끝나면 5명의 우리 펜싱 선수들을 학도 호국단 콘서트 체육관에서 연습했어요.… 땀을 흘리고 그 옆 우물에서 샤워를 끝내고 어둠이 깔리는 임학관 앞 오솔길 … 만발한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귀가하는 그 기분은 정말 … 운동 후의 즐거움과 피로를 풀어주는 영양제 였지요(김두경 인터뷰. 2010년 3월 10일).
펜싱부는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남F, 남E, 남S 1위로 입상하여 대학 펜싱을 평정하였다.
1972년 입상 실적을 살펴보면 00에서 열린제53회 전국체육대회 1의 입상을 비롯하여 각종 전국대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1973년은 정상재, 이문섭, 김진중(임학과) 등이 입학면서 더욱더 빛을 발하게 되었다.
사진 6. 00000000 우승 후
자료 출처: 정상재 소장
그 당시 상황을 정상재를 통해서 들어보기로 한다.
이러한 펜싱부 활동에는 하키부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시절 각종대회에 입상 실적이 우수한 선수들로, 입학시험의 실기 부문 기능 점수가 우수 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같이 펜싱부는 전국 각종 대회를 석권함으로서 강원대학교는 물론 향토를 빛냈다. 특히 김두경, 신동석이 국가대표로 활동하면서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태권도부는 1970년 축산학과 김헌규가 제51회 전국체육대회 라이트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71년 김헌규, 오수일, 행정학과 이종노가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여 김헌규는 금메달, 이종노가 동메달에 입상하였으며, 1972년 제53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여 김헌규가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72년 김헌규, 이종노, 오수일, 허남원, 법학과 김중열로 구성하여 대령령기 전국 태권도대회에 단체전에 출전한 바 있다. 그 후 1973년 제54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여 김헌규 금메달, 오수일 동메달, 김중열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 당시 상황을 오수일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축산학과 김헌규 선수가 입학해서, 그 당시 제51회 전국체육대회 라이트급에 나가서 우승했어요. 전국체전 선발전인 도민체육대회에서 우승해야 출전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나갔지요. 그 때는 일반부와 대학부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어요. 도 대표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김헌규 이 양반이 전국체전 5연패를 했어요 대단한 거지요. 독보적인 존재였지요. 1974년까지… 학교에서는 지원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도민체전에서 대표가 되어 전국체전에 나가는 것이 유일한 시합이었지요. 그 때는 일반부와 대학부가 분리되어 있지 않아 예전전도 치열했지요. 1971년 오수일, 행정학과 이종노가 제52회 전국체전에 출전하여 김헌규 금메달, 이종노가 동메달에 입상했어요. 강원대학이라고 등판에 새기고 나갔어요. 그러다 1972년 허남원, 김중열이 입학하면서 김헌규, 오수일, 이종노, 허남원, 김중열로…단체 팀을 만들 수 있었지요. 처음 대통령기 단체 팀에 나갔어요. 서울 한성여고에서 시합했는데…해병대 팀한테 졌어요. 1973년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여 고기 라이트급에서 금메달, 내가 동메달 땄지요. 중기 라이트 급에서 중열이가 은메달 했어요. …고기급읍은 3단 이상이고 중기급은 1단, 2단 이었어요. 구분해서 시합했어요(오수일 인터뷰, 1010년 5월 26일)
이와 같이 태권도부는 박헌규를 중심으로 오수일, 이종노 등이 강원도 대학․일반부를 통틀어 강자로서 학교 및 강원도를 위해 공헌하였으나 아쉬운 점은 학교 예산 부족으로 전국대회 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던 부분으로 남아 있다.
역도부는 1970년 제51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장성복이 출전하여 금메달에 입상하였다. 예산은
그 때의 상황을 장성복에게 들어보기로 한다.
1971년은
1972년은
1973년은
빙상부는 1970년 박남환은 제1회 회장기 쟁탈 전국남여 빙상 경기대회 등에서 입상하였으며, 1971년 박남환을 중심으로 김승모, 황봉근 등을 주축으로 창단하여 각종 대회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강원대학의 명예를 빛냈다.
16세 최연소 빙상 국가 대표로 발탁되어 활약했던 박남환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빙상은 동계 스포츠이지만 그 훈련은 하계에도 고강도 훈련을 받아야 했다. 1971년 창단 이후에 최초의 여름 합숙훈련을 실시하고자 하는 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여러 차례의 물색을 하던 중 당시 사범대학 B동의 강의실로 3주간의 자주 강화 트레이닝을 하게 되었다. 대학의 강의실로 합숙소를 차린 것은 다소 불편함이 있었으나 학교 시설에서의 합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자주 강화 트레이닝 당시 고등학교의 최강을 차지하고 있던 춘천고등학교 빙상부도 함께 참가하였다. 자주 강화 훈련계획에는 경희대학 빙상 선수들과의 합동 훈련도 있었다. 우리 빙상부원들은 오전 10시에 학교에서 싸이클링으로 서울에 가서 경희대 빙상부원들과 합동훈련을 마치고 오후에는 다시 싸이클링으로 본교 합숙소로 돌아온 것이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100km가 넘는 경춘가도를 당일에 왕복하면서 합동훈련을 했던 것이다. 한상준 지도교수는 무리한 이러한 일정에 대하여 걱정을 하셨으며, 지금 돌이켜 보면 무모한 만큼의 훈련이었다. 이 하계훈련은 당시 강원대학 빙상부의 기초며 저력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 20년사, 1989: ).
그러나 이러한 훈련으로, 그 당시 학점 문제 제기와 훈련 도중 사고로 이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1970년 빙상부의 활성화 정책으로,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는 여러 가지 애로가 있었다. 당시 빙상부의 선수들은 국가대표로 발탁되면 1년에 10여 개월의 장기 합숙훈련에 들어갔고, 한 달에 25일간의 합숙훈련과 5~6일간의 휴가를 받았다. 이러한 장기 합숙훈련과 국제경기에 참석하여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고 학교에 돌아온 박남환은 유급이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어져 강원체육학에 최초로 특기자 유효 결석계의 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때에 박남환은 특기○○ 유효 결석 대상의 최초의 학생이 되었다. 이 특기자 유효 결석계의 제도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지도교수의 각별한 관심과 빙상부들의 강화훈련으로 다져진 강원대학교 빙상부는 남자부의 종합우승이 예상되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국내정상의 장거리계의 호프로써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주었던 황봉근이 싸이클링 중에 교통사고로 인하여 2년 여간 빙상활동을 못하게 되었다. 그때 중앙연맹의 선수등록을 얼마 안 남겨놓은 빙상부는 지도교수와 상담하여 빙상실기에 기능이 뛰어난 하키부 권오동과 김득우를 그리고 축구부 박장평 지도교수와 협의하여 신현관을 빙상선수로 등록하여 단체전 경기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교수님들의 배려와 동문들의 협조로서 남자단체 종합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종합우승을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고 박남환은 회상하고 있다(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 20년사, 1989: 000). 그 때의 상황을 신현관을 통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황봉근이가 다쳐서, 세 사람 밖에 없었는데, 71년은 박남환, 황봉근, 김승모, 그래서 종합 우승 놓쳤어요. 1972년, 1973년 2년 출전했지요. 계주 멤버가 없어서 열차타고 나녔어요. 봉근이 대신 뛴 거지요. 다리가 부러져서 박남환, 김승모, 권오동, 신현관 이렇게 태능에서 시합했어요. 권오동이는 500m, 1000m, 난 1500m, 3000m 출전했어요.상대 선수에게 한 바퀴 잡혔어요. 그래서 단체 종합 준우승했어요. 종합 우승할 수 있었는데, 계주에서 오동이와 내가 엎어졌어요.……개인 운동이라 연습도 따로 하더라고요. 그들 나름대로 프로그램대로, 스케이팅 연습은 그렇더라고요.……학점 때문에 망이 좀 있었어요. 나도 기억나요. 그래서 졸업이 늦은 것 같아요. 1기에서 3명이 졸업 못했는데, 나승인, 윤귀희 ....가 졸업 못했어요(신현관 인터뷰, 2010년 5월 26일). . 예산은
이와 같이 1972년, 1973년은
이상에서 살펴보면 1070년에는 하키부, 유도부, 펜싱부, 그리고 역도의 장성복, 빙상의 박남환, 태권도의 김헌규 등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활동했던 선수 생활 기능을 학교와 강원도를 위해 나름대로 발휘하던 시기였다.
또한 1970년 제51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야구부가 3위로 입상한 기록이 보인다.
한편, 1970년 조정부 활동은 전국대회는 출전 기록에 미치지 못했으나 조정 선수 출신 김영선을 중심으로 김경노, 신현관, 김광준, 우광수, 김건국 등이 활동하였다.
우리끼리 공지천에서 레크리에이션으로, 5명이 한 팀이예요. 영선이가 조정 선수 출신이라 1970년부터…전국대회는 안되고 김경노, 신현관, 김광준, 그리고 우광수 인가 김건국인가 콕스…키잡이 했어요(신현관 인터뷰, 2010년 5월 26일). .
1971년
1972년
1973년
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는 1971년 1월 말 순경 두 번째 신입생 입학시험을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체육 이론, 체육실기와 면접이 그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입학시험 절차를 통하여 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는 성적 순 40명이 1971년 3월에 체육교육과 2기생으로 출발하였다.
1971년은 하키부, 펜싱부, 검도부, 빙상부 등의 선수들이 보강되면서 새롭게 구성되어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해이다.
검도부는 1971년 신형광을 중심으로 이세웅, 그리고 임학과 김연배, 농공과의 유계식 등으로 구성하여 검도부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때의 상황을 신형광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선 고등학교 때 죽도 자루라도 쥐어 볼 사람을 모으자. 7명이 되어야 경기에 출전할 것 아니야! 이리하여 체육교육과 동료 이세응과 협의하여 입학과의 김영배, 농공과의 유계식, 김동근, 수학교육과의 김경림, 영어교육과의 아해동 선수등을 모아보니 고등학교 선후배를 선수 구성을 가능하지마, 딱내가 쌓이고 쌓여 썩는 냄새가 나는 호구를 뒤집어 쓰고 한릉탕같이 열을 불어대는 콘세트 막사에서 꽥꽥소리를 지르며, 그래도 우리끼린 위계질서를 지켜가며 열심히 운동을 하였다. () 방학중엔 군대항고(반합)에다 밥해먹으며 운동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숲속에 있는 콘세트 막사가 마치 모기 창고 안알 윗물의 모기는 그렇게 많은지, 모기와의 투쟁으로 밥 잠을 설치던 것이 하루 이틀이더냐! 그렇게 모기에 많이 물려도 죄역이나 학질에 걸리지 않고 아픈몸 하나 없이 운동하는 것 보면 검도부는 모두 야행마 체질이었던가 보다. 그것도 도(道)를 수련하는 한 과정이었던가 (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 20년사, 1989: 116-117).
검도부는 서울에서 열린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3위로 입상하였다.
1972년은
1973년은
이와 같이 검도부는
탁구부는 1971년 고대식을 중심으로 김준재, 강원대학교 교내 체육대회에서 우승한 농화학과 윤태성, 수학교육과 조남신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그해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한 바 있다. 고대식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71년 강원대학체육대회에서 체육과를 제외한 탁구 부문에서 우승한 농화학과 69학번 윤태성, 준우승한 수학교육과 70학번 조남신, 체육과 김준재를 규합하여 순수 아마츄어로 탁구부를 만들었지요. 박장평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하고 주로 명동의 중앙 탁구장에서 연습했어요. 고대식, 김준재, 윤태성, 조남신 4명이 전국체전에 출전했어요. 그당시 서울 여상 이에리사 선수의 지창용 코치님이 원주 분이라 서울 여상에서 이에리사 선수와 같이 연습한 적도 있어요. 대학에서의 후원은 연습 비용과 유니폼, 그리고 출전비 등을 지원 해 줬어요. 박교수님이 신경 많이 썼어요(2010년 5월 11일, 고대식 인터뷰).
1972년도 역시 고대식을 중심으로 타학과 아마츄어 3명으로 활동하였으며, 1973년도부터 탁구선수 출신 최철순의 입학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으나 전국대회의 벽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1973년은
이와 같이 탁구부는
이상에서 살펴보면, 1971년은 하키부와 펜싱부, 검도부, 태권도부, 빙상부가 전국대회에 입상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탁구부와 조정부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 정구부가 대학부에서 3위 입상하였으며, 1973년 제5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대학부 정구에서 3위한 기록이 보인다.
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는 1972년 1월 말 순경 두 번째 신입생 입학시험을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체육 이론, 체육실기와 면접이 그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입학시험 절차를 통하여 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는 성적 순 40명이 1972년 3월에 체육교육과 3기생으로 출발하였다.
1972년은 체조부, 축구부, 핸드볼부, 육상부 등에서 활동이 시작된 해이다.
체조부는 1972년 신정섭, 이주홍 신입생 이호천을 중심으로 제53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여 5위 로 입상한 바 있다
그 때 2학년 신정섭, 이주홍, 1학년 이호천과 함께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했지요. 여건이 그래서 좋은 성적은 못내고, 아마츄어 수준이었지요(이호천 인터뷰, 2010년 5월 11일)
육상부는 1972년 김진묵이 투포환선수로 제53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였으며, 1973년 김종수, 유연형, 김학수 등이 입학하면서 육상부 활동이 시작되었다.
맞아요. 1972년에는 제 혼자였지요. 그러다 1973년 김종수, 유연형, 김학수가 입학하면서 외롭지는 않았지요(김진묵 인터튜, 2010년 5월 11일). 육상부라고는 김진묵, 김종수, 김학수였지요 전국체전에도 출전했어요. 입상은 못했지만(유연형 인터뷰, 2010년 5월 11일).
축구부는 1972년 신현관을 중심으로 과거 선수 생활을 하였거나 흥미가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강원 도민체육대회에서 관동대학교에 패해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훈련하기 시작하여 전국체육대회 강원도 예선전에서 관동대학을 꺾고 강원도 대학 대표로 출전하여 부산에서 열린 제5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바 있다. 그 때의 상황을 신현관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72년 4월 한상준 교수님이 나를 불러서 축구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해서 시작되었지요. 그냥 동아리로 활동했다고 봐 야지요. 선수 구성은…초, 중학교에서 선수 생활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수성되었지요. 처음 14명이 출발했어요. 명단은 여기 있어요. 타과 학생이 한명 있었어요. 경영학과 인가 이상훈이라고 그해 도민체전에 출전했어요. 대학부로 관동대학에 져서 전국체전에 못 나갔어요. 그 다음 해인 1973년 관동대학에 이겨 전국체전에 출전했지요. 1회 전은 부전 승, 2회전에 해군사관학교에 비겨 추첨 승 했지요. 준결승에 한양대학교에 4:0에 져서 3위했어요. 부산에서 열린 전국체전이지요. 부산상고에서…전국체전에 나간다고 그 14명이 대회 나간다고 ROTC 회관 옆 콘세트에서 한 달 정도 합숫했어요. 연습은 큰 운동장에서 하고…축구를 즐기면서 했지요(신현관 인터뷰, 2010년 5월 26일).
이와 같이 축구부는
이상에서 살펴보면, 1972년은
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는 1973년 1월 말 순경 네 번째 신입생 입학시험을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체육 이론, 체육실기와 면접이 그 주요 내용이다. 1973년 입학고사부터는 특별 전형에 의해 우수 선수를 입학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입학시험 절차를 통하여 강원대학교 체육교육과는 성적 순 25명과 특기생 15명으로, 40명이 1973년 3월 체육교육과 4기생으로 출발하였다.
체육교육과는 1학에서 4학년까지로 처음 구성되었고, 이에 강원대학의 체육부 활동은 한층 강화되었고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1973년에 기존에 활동하던 체육부와 특기생을 중심으로 유도, 조정, 탁구 육상, 핸드볼, 역도, 배드민턴, 빙상, 조정부 등이 잇달아 부별 활동을 활성화하면서 명실공이 강원도 내 유일한 대학 스포츠 팀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굳혔다.
1973년 동계스포츠 종목인 스키부는 강찬용이 입학하면서 출전하여 ........입상하였다.
그 때, 혼자였지요.
체육교육과는 1971년부터 체육교육과 체육대회를 실시하였다.
사진
강원대학교 교내 체육대회에 체육교육과 학생들은 1972년까지 심판으로 참가하였으나 1973년부터 1, 2, 학년까지만 참석하고 3, 4학년은 심판과 경기 운영에만 관여하도록 총학생회에서 결정하였다.
이런 얘기하면 뭐 하지만 …출전한 후배들이 잘못하면, 소운동장 샤워실에서…기압받고…그런 생각이 나요((신현관 인터뷰, 2010년 5월 26일).
Ⅲ. 결론
본 연구는 강원대학교 창립 초기 체육부의 태동 과정을 질적 연구 방법인 구술사를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태동과 활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변천사에 나타난 체육사적 의미와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사적 체제 정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강원대학교 체육부의 태동 시기의 활동의 특성과 변천 과정에 대한 당시 신문 기사와 잡지, 정기 간행물, 문헌 자료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따라서 자료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고, 그 때의 상황을 보다 심도 있게 파악하고자 구술사 방법을 통해 재조명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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