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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3장>
2 그러므로 감독은 비난받을 일이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하고 신중하며, 예의 바르고 대접하기에 힘쓰며, 가르치기를 잘하고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오직 잘 참고, 다투지 아니하며, 탐욕스럽지 아니하고
4 자기 집안을 잘 다스려서 온전한 위엄으로 자기 자녀들을 순종케 하는 사람이어야 하리라.
5 (사람이 자기 집안을 다스릴 줄 모르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
6 초신자여서도 아니되나니, 이는 그가 교만으로 높아져 마귀의 정죄함에로 빠질까 함이라.
7 또한 외부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할지니, 이는 그가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신중하고,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9 순수한 양심 안에 믿음의 신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느니라.
10 이런 사람들을 먼저 관찰해 보고, 그후에 비난받을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수행하게 할지니라.
11 그들의 아내들도 이와 같이 신중하고 중상하지 아니하며, 절제하고 모든 일에 신실해야 하리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자신의 자녀와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할지니라.
13 집사의 직분을 잘 섬긴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좋은 지위를 얻고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안에서 큰 담력을 얻느니라.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면서 이것들을 쓰노라.
15 그러나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네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니라.
16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성령으로 의롭게 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보이셨고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셨으며,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고 영광 가운데로 들려 올라가셨음이라.
2 그러므로 감독은 비난받을 일이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하고 신중하며, 예의 바르고 대접하기에 힘쓰며, 가르치기를 잘하고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오직 잘 참고, 다투지 아니하며, 탐욕스럽지 아니하고
4 자기 집안을 잘 다스려서 온전한 위엄으로 자기 자녀들을 순종케 하는 사람이어야 하리라.
5 (사람이 자기 집안을 다스릴 줄 모르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
6 초신자여서도 아니되나니, 이는 그가 교만으로 높아져 마귀의 정죄함에로 빠질까 함이라.
7 또한 외부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할지니, 이는 그가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1절, '감독'이라는 직분은 사도행전 20:28에서는 "감독자"(overseer), 지금은 '목사'(pastor)라고 하는 "감독"(bishop)의 자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다른 명칭으로 '장로'가 있는데(빌 1:1, 행 14:23, 딤전 5:17) 목사나 감독이 가진 통치권은 영적인 것이며(딤전 5:17, 히 13:17) 신약에는 '대주교'(archbishop)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감독'이셨고(bishop, 벧전 2:25) 대감독(ARCHbishop)은 아니엇습니다. 대주교보다 위에 있는 것이 교황이라면 교황은 신격의 제 2위인 분보다 자신이 두 계단 더 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감독의 직분(office)', 이것은 여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데 모든 감독들은 남자들입니다. 모든 사도들, 집사들은 남자들이며 여자들이 구령하는 사역을 하고 성경을 가르칠 수는 있지만 한 교회를 양육하는 담임 목사로는 부르심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여자 목사나 집사에 대한 허용의 규정이 없습니다.
2절, 감독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면 카톨릭 교황이나 주교는 교회의 공식적 직분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목사'라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감독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난받을 일이 없다"는 것은 직분을 맡기에 비난받을 게 없다는 것입니다(눅 1:6, 빌 3:6).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은 '현재 한 아내를 가진'이라는 뜻이며 '중혼' 상태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한 번만 결혼하라'는 의미가 아닌데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재혼한 남자는 목사의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한 아내'를 언급한 것이 '한 번 결혼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결혼이라는 개념의 핵심을 거부하는 게 됩니다. 결혼이란 육체와 육체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며(창 2:24, 마 19:5, 엡 5:31) 구원받은 남자나 구원받은 여자가 구원받지 못한 상대와 살고 있다 해도 이들은 결혼한 것입니다.
'절제하고 신중하며, 예의 바르고 대접하기에 힘쓰며'(2절), 이것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과 옷으로 사람들을 돕고 상담으로 돕는 것을 말합니다(벧전 4:9, 딤전 5:10, 롬 12:13).
'가르치기를 잘하고', 목사는 필수적으로 좋은 설교가와 성경 교사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기본적 자질이며 목회자는 이 일의 우선 순위를 교제나 사교에 미루면 안됩니다.
3절, '술을 즐기는 일'은 로마 카톨릭 사제들이라면 피할 수 없는데 그들은 발효된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믿고 상습적으로 마시기에 많은 사제들이 알콜 중독 상태에 있습니다. 감독은 술을 즐기는 사람이면 안되고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패주려고 돌아다녀서는 안됩니다. 감독은 돈에 욕심을 내서는 안되고(딤전 6:5,10) 여기서 다루는 목사의 조건은 "이상적인 자격 조건"입니다. 오늘날 딤전 3:1-7의 조건에 부합하는 목사는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조건인 돈과 물질에 대한 탐심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직 관대하고, 다투지 아니하며, 탐욕스럽지 아니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할 줄 안다면(딤전 6:8), 어떤 처지에 잇든 만족할 수 있다면(빌 4:11-12) 그 사람은 이 조건에 부합합니다.
4절, '자기 집안을 잘 다스려서', 목사가 자녀들을 순종케 하지 못한다면, 아내가 믿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잘 다스려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은 성경적으로 선하고 올바르게 다스리는데도 '종들'(아내, 자녀들)이 이유없이 그릇되게 살기를 원해서 반역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녀들을 순종케 하는', 아내가 남편을 버렸다면 남편은 그녀에 대해 어떤 면도 다스릴 부분이 없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목사에게 '이혼 문제'로 굴레를 씌워 공격하는 위선자들이 많이 있는데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 아내가 목사를 '버리는 것'(유기)은 목사의 죄가 아닙니다.
5절,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말합니다(갈 1:13). 카톨릭 사제들은 '다스릴 집안'이 없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돌볼 수 없습니다.
6절, '초신자들'은 프란시스코 교황 같은 사람을 말하는데 영적 분별력이나, 성경 지식, 구령하는 경험도 없고 구원의 증거도 없는 종교를 가장한 정치인입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자 목사들도 만만치 않은데 그들은 사역한지 5년, 10년, 20년 후에 갑자기 그제서야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고백한 후 하던 대로 사역을 지속합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정말 갓난아기여서 젖을 먹어야 하는(고전 3:1-2) 자들입니다. 갓난아기는 사역을 해서는 안되고 먼저 배워야 합니다.
7절, '좋은 평판'은 목사 주위의 사람들이 그 목사에 대해 비난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목사에게 거짓말하고 비방할 수 있습니다. 외부의 비방은 감내해야 합니다(벧전 2:19-22). 그러나 목사가 비성경적, 비상식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으로 비난받아서는 안됩니다.
6,7절의 '마귀의 정죄함'과 '마귀의 올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 마귀의 정죄함: 마귀는 교만함으로 정죄되었는데 이사야 14:10-17에 설명되었으며 죄의 뿌리는 시기심이고 마귀가 이브에게 그것을 제안했을 때(창 3장) 수락했습니다. 마귀의 정죄함은 자기 의를 드러내는 행위에 의한 구원입니다.
2. 마귀의 올무: 올무는 새를 잡는 그물이고9잠 7:23, 욥 18:10, 전 9:12) 아프리카에서 사자를 잡는 데 쓰는 커다란 줄로 만든 올무입니다(겔 12:13; 17:20, 렘 50:24).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신중하고,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9 순수한 양심 안에 믿음의 신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느니라.
10 이런 사람들을 먼저 관찰해 보고, 그후에 비난받을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수행하게 할지니라.
11 그들의 아내들도 이와 같이 신중하고 중상하지 아니하며, 절제하고 모든 일에 신실해야 하리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자신의 자녀와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할지니라.
13 집사의 직분을 잘 섬긴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좋은 지위를 얻고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안에서 큰 담력을 얻느니라.
8절, 집사에 대해 다루는 아홉 가지 조건들 가운데 여섯 가지는 '감독'과 일치합니다. 추가된 사항은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집사는 회중을 대표하고 회중의 선거에 의해 선출됩니다(행 6:3-5). 때로 목사를 대리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집사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입니다.
9절, 믿음의 신비는 일곱 신비들인데 그것들은 신약에 나와 있습니다(고전 15:51-52, 롬 11:25, 계 17:5, 골 1:26-27, 엡 5:21-32, 딤전 3:16, 살후 2:7). 목사는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이며(고전 4:1-2) 이 신비들을 전달합니다(딤후 2:2).
10절, 2절과 연관이 있고 집사는 먼저 관찰해 보고 "먼지 속을 뚫고 달리는 사람"이라는 '집사'의 원래 뜻 그대로 하는 사람인지 교회 내에서 권력과 돈에 관심있는 기회주의자인지 살펴야 합니다.
11-12절, '그들의 아내들'은 변개된 성경들에서 '여집사들'(deaconesses)로 되어 있는데 '아내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사우토스"는 '여집사'의 뜻으로 단 한번도 신약 성경에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집사'에 대해 한번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집사의 아내는 그저 '집사의 아내'이며 여집사가 아닙니다.
집사 직분의 자격을 여자에게도 적용하고자 한다면 이 구절은 '한 아내를 거느린 여자 집사' 즉 레즈비언이 되어야 합니다.
13절, '좋은 지위'란 영적으로 '높은 위치'(high standing)를 말하는데 이 좋은 지위는 섬김을 통해서(마 20:25-28) 얻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섬김으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면서 이것들을 쓰노라.
15 그러나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네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니라.
16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성령으로 의롭게 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보이셨고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셨으며,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고 영광 가운데로 들려 올라가셨음이라.
15절, '하나님의 집'은 건물로 지어진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닌데 마찬가지로 개신교단이나 카톨릭 체계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라고 할때마다 자기들의 종교 체제를 가리켜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집'에서 '집'이 말하는 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안>(household)을 가리킵니다(엡 2:19). 즉 중생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이 집은 두 개의 지위 곧 '기둥'이며 '터전'입니다. 신약 성경 전체는 교회시대가 시작된 사도행전 2장 이후에 기록되었으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교회시대 교리에 먼저 '터전'을 두어야 합니다. 또한 이 교리들은 진리를 지지하는 기둥으로서 교회 시대 끝까지 진리들을 견지하도록 붙들어 줍니다(빌 2:16).
16절, '경건의 신비', '논쟁의 여지없이'는 원어 지식과 상관없이 이 단어들이 논쟁의 여지없이 믿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는데 많은 변개된 성경들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로마 카톨릭이 추천하는 모든 성경 역본들은 '하나님은'이 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라는 중요한 진리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고는 이 사실을 확인할 데가 없습니다.
교부들이 이 구절에 대해 말한 것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이그나티우스(A.D.50-115)는 이 구절에 대해 세 번이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2. 히폴리투스(A.D. 170-236)는 이 구절에 대해 두 번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3. 32개의 성구집이 있는데 이 구절이 들어 있는 성구집 27개에는 모두 킹제임스 성경처럼 '하나님'이라 되어 있습니다.
4. 252개의 헬라어 필사본들 역시 모두 '하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20명의 교부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으로 인용했고 '그'로 인용한 교부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경건의 신비'에는 '믿음의 신비'(3절)처럼 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일곱 가지로 정리됩니다.
1. 논쟁의 여지없이, 2.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행 20:28), 3. 성령으로 의롭게 되셨으며, 4. 천사들에게세 보이셨고(엡 4:6-10, 눅 2장, 막 1:13, 골 2:15), 5.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셨으며(행 8:28장), 6.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고(롬 10장), 7. 영광 가운데로 들려 올라가셨음이라(행 1장, 눅 24: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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