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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레미야 2장
28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하나님은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우상은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신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 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여러 모로 불편하다. 우상에게는 말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말을 들어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나님께 하는 예배는 듣는 예배지만, 우상에게 하는 예배는 말하는 예배이다. 어느 것이 더 편리한가? 당연히 말하는 예배가 더 편리하다.
간혹 어떤 목사님들이 말하길 하나님의 말씀만 전했더니 신도들이 불편해하고 싫어해서 힘들었는데, 그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설교를 했더니 신도들과의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목회가 편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 설교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싶어서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말은 결국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들려 주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듣는 예배가 아니라 말하는 예배이다. 목사의 입을 빌어서 자신들의 말을 하는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 목사는 신도들이 듣기 싫은 말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해야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이시고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 신이다.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신들은 어디 있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교리를 만들어 내는 데 익숙하다. 우리가 신천지 교회가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서 성도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에 경끼를 하면서 경계하고 막으려 하지만, 지금의 한국 교회와 신천지 교회는 같은 길 위에 있다. 그들을 꾸짖을 자격이 교회들에게는 없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은 아닐 지라도, 겨묻은 개가 똥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자기들의 말을 하는 자세로 일관해 왔다.
29
너희가 나에게 대항함은 어찌 됨이냐 너희가 다 내게 잘못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자유로워 지고 싶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만하다.
여자들도 남편과 함께 살다 보면 남편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집에서 한끼도 안먹는 남편- ..... ... 사랑스런 영식 님
집에서 한끼만 먹는 남편.... . . - --- 귀여운 일식이
집에서 두끼를 먹는 남편........ .. ...그냥 두식이
집에서 세끼를 다먹는 남편.... .. ... 삼시쉐끼(이게 삼식이?)
세끼를 다 먹고 간식도 먹는 남편...... 간나쉐끼
세끼먹고 간식먹고 야식도 먹으면....... 종간나 쉐끼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짐이나 수갑처럼 여겼다.
(시편 2: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30
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린 것이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부부가 이혼만은 피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어르고 달래서 어떻게 하든 언약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싫어하고 끊임없이 죽였다.
예레미야의 시대에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을 한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었다. 그 사람은 키럇여아림 사람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였다.
(예레미야 26장)
여호야킴 왕은 그의 말을 듣고 군인들과 장교들과 함께 우리야를 죽이려고 찾았다. 우리야는 그것을 알아채고 겁이 나서 이집트로 도망쳤다.
여호야킴 왕은 악볼의 아들 엘나단에게 몇 사람 딸려서 이집트로 보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우리야를 붙잡아 여호야킴 왕에게 데리고 왔다. 왕은 그를 칼로 쳐죽여 서민 공동묘지에 그 시체를 묻었다.
우리야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겁이 난 우리야는 이집트로 피신했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까지 사람들을 보내서 우리야를 체포하여 끌고와서 쳐 죽였다.
31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렇게 듣기 싫은 말씀인가? 하나님 말씀 들으며 사는 것이 광야에서 사는 것처럼, 희망이 없는 캄캄한 땅에서 사는 것처럼 힘든 일인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 대신 우상을 발명해 내었다. 인간이 발명해 낸 것들 중에서 전기나 원자력의 발견보다 훨씬 더 위대한 발명은 신을 만들어 낸 것일 것이다. 전기도 우리에게 엄청난 편리함을 주고 원자력도 인간에게 큰 혜택을 주지만 우상은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편리함을 제공한다.
사람들이 발명한 우상 숭배를 두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넘치는 예배와 풍요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여러 모로 불편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만 예배해야 하고,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방식 대로만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성미에 차지 않고 오히려 짐이 되었다. 더구나 하나님은 떡만 드시고 뒷 전에 물러나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공의를 실현하며 살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많이 불편해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 우상을 발명한 것이다. 우상을 발명하고 나니 생활이 얼마나 편리해 지고 성미에 맞는지 몰랐다.
오늘 날의 예배가 얼마나 화려하고 멋진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화려한 예배 장소에서 자신들의 기호에 맞추어 화려한 의식의 예배를 진행한다. 자신들이 듣고 싶어하는 설교를 하는 목사를 강단에 세우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거짓말을 주고 받는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한다.
수능 시험을 칠 때(예전에는 대학만 졸업하면 취직이 잘 되었기 때문에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시험장에 몰려온 부모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기도하고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부처님에게 기도하고, 무당에게 다니는 사람들은 부적을 붙여놓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어떤 사람은 수능 시험장에 엿도 붙이고 예수님께 기도도 했다. 그들이 기도하는 대상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그 기도의 내용은 자기 자녀만 이 대학에 붙고 다른 자녀들은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과연 서로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인가? 사실 이들은 같은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했던 기도를 또하고 또하고 하는 중언부언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중언부언 기도라는 것이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의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기도는 반복해서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중언부언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주장만 끊임없이 말하는 것을 말한다.
예배한 숫자와 헌금 낸 액수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 십일조를 내면 몇 배로 뻥튀기 되어서 돌아온다고 말하는 목사들도 많았다.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목회자들은 가난한 과부의 마지막 남은 동전 두 렙돈까지 헌금을 내라고 강요함으로써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 화려한 예배당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사람들은 예배당을 짓는 일에 광분해왔다. 돈만 있으면 예배당을 건축하려고 했다. 돈이 없어도 은행 빚을 얻어서라도 예배당을 건축하려고 했다.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큰 예배당을 지어 놓을 수록 많은 사람들이 몰리므로 빚을 금방 갚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렇게 예배당을 지었다고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건 우상을 섬길 신전을 만든 것이다.
2)화려한 예배의식
열왕기 상 18장에는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싸움이 기록되어 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기지를 기도하는 바알 선지자들의 예배의 모습은 오늘날 대형 예배당을 지어놓고 그 안에서 화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다. 바알의 이름을 불러...그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큰 소리로 부르고,...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더라... 이것처럼 화려한 예배가 어디 있는가? 그들의 예배는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때까지 이어졌다.
엘리야와 싸웠던 바알 선지자들처럼 오늘 날 교회 안에서는 주여 주여 외치며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박수를 치면서 부흥회를 하고 금식을 하고 화려하고 큰 신전을 세우고 화끈한 예식을 행한다. 그들이 우상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욕망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화려한 예배, 감동적인 찬양단, 많은 횟수의 예배가 있었던 적이 있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단은 KBS 노래 자랑 무대로 바뀌었고, 회중석은 극장식 의자가 놓여졌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을 보러 온 것이다. 거기에 맞추어 각종 영상과 음향 장비가 설치되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예배를 싫어하게 되었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만들어낸 찬양 예배는 춤추고 뛰어 논다. 설교 듣는 시간은 생략하거나 간략하게 줄인다. 세상 가수들의 콘서트와 교회의 찬양 예배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화끈하게 예배를 즐긴 사람들은 마지막에는 서로에게 축복 노래를 불러주면서 마무리 짓는다.
작은 교회들도 큰 교회들이 하는 그런 것들을 하고는 싶지만, 인력와 재력의 부족으로 따라기지 못해서 안달은 한다. 작은 교회가 큰 교회가 하는 우상 숭배를 따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작은 교회에 다니다가 "목사님, 이제 큰 교회에 가서 좀 배워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은근 슬쩍 큰 교회로 가는 사람들이 다시 작은 교회로 오는 경우는 없다. 큰 교회가 가진 인재와 재력과 프로그램은 신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예배 의식은 점점 과격해진다. 자극도 점점 커져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왠만한 것에는 감동을 받지 못한다. 감동을 받기 위해서는 그동안에 받았던 자극보다 더 큰 자극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만 해도 감동을 받았지만, 지금은 온갖 악기를 다 동원하고 온갖 음향 효과를 동원하고 온갖 기교를 다 동원해서 노래를 불러도 식상하게 여긴다.
예레미야의 시대에 사람들의 예배가 그랬다. 악한 왕 므낫세는 자기 아들을 불로 태워 하나님께 바쳤다. 그 정도까지 해야 뭔가 예배를 한 것 같이 느껴지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역대하33:6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고 말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는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한 시간 동안 각자의 생각은 집에도 다녀오고 부산도 다녀오고 미국도 다녀온다. 한 시간 동안 정신이 수 십 번, 수 백 번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데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고?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당 밖, 자신의 삶에 적용되고 실현 되어야 자신이 사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맞아 죽은 이유는 거의 한 가지이다. '너희들이 예배하고 있는 이 예배는 하나님께 하는 예배가 아니고, 너희들이 예배하고 있는 이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상을 발명해 놓고 화려한 예배당과 화려한 예배 의식을 동원해서 요구하는 것은 우상에게 돈, 명예, 권력을 달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마귀와의 세 번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우상 숭배와 하나님 신앙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서로 극한 대립을 하는 예수님과 마귀의 대화였다.
마귀는 돈, 명예,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말을 하나 하나 반박하시면서 그런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된다고 하셨다.
돈, 명예, 권력의 추구
돈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명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는 것은 당시 정치가 헤롯에 의하여 건설되고 있었던 화려한 성전의 용도가 명예와 권력에 대한 추구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권력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옛날부터 사람들은 마귀의 말을 더 좋아하고 예수님의 말씀 같은 종류의 말을 싫어했다.
32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과 결혼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잊으면 안되었다. 매일 매일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그들을 대적하는 여리고성을 지진으로 무너뜨리셨다. 신부가 자기가 결혼할 때 받은 반지나 목걸이의 모양을 잊을 수 있는가? 자기가 입었던 웨딩드레스의 모양을 잊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패물과 같은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잠시만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날을 셀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33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농사를 짓게 되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보다 먼저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알을 섬기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게 되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르게 한다고, 그들은 그 땅에 살던 사람들보다 더 바알을 섬기게 되었다. 오히려 제자가 스승을 가르치게 되듯,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바알 신앙을 가르쳐준 원주민에게 바알 신앙을 가르쳐 줄만큼 미쳐 버렸다. 창녀보다 더 남자를 잘 꼬시는 여자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알을 섬기며 살던 사람들보다 더 바알을 잘 섬겨서, 오히려 창녀에게 남자를 꼬시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여자처럼 되어 버렸다.
34
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이다. 공의는 우리 사회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옛날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원하신 것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왕을 세웠다. 왕이 하는 일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 아니라 세력을 만들어서 부익부 빈익빈을 만드는 것이었다. 권력에 붙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서 더 부자가 된다. 왕은 부자들의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서 군대를 만들고 전쟁을 한다. 그것이 왕이 하는 일이었다.
율법에는 도둑이 담을 뚫고 들어올 때는 그를 죽여도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도둑이 아닌데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왜 죽였겠는가? 가난한 사람의 돈을 빼앗기 위해서 가난한 자를 죽인 것이다. 억울한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서 억울한 사람을 죽인 것이다. 하나님을 공의를 원하셨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선택했다. 그것이 바알 신앙이다.
35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그들은 제사를 드렸고,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자기들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셔서 죄를 묻겠다고 말씀하신다.
36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 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
37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처벌하시기 시작하자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자기를 도울 다른 곳을 찾아 다녔다. 남쪽 이집트에 기웃거리기도 했고 북쪽 앗수르에게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앗수르도 이집트도 기댈만한 나라가 되지 못했고, 동쪽 바벨론이 이집트와 앗수르를 무너뜨려 버렸다.
그들을 의지해 봤지만 결국 머리만 상하고 머리에 붕대를 감고 빈 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기댈 곳은 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를 우리 삶에 실현하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맺음)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우상을 섬기고 있는가? 선지자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바알을 섬기고 있다고 말한다. 신앙의 대상의 이름이 (예수님, 부처님, 옥황상제님,....)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앙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의와 공의를 우리의 삶에 실현할 것을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