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욕심내지 않는 생이건만......
2021. 5. 향기 이영란
어느 대나무의 고백
복효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지고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 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시 하나로 인생의 주름이 펴진다면야 세상의 시인들은 구태여 투잡, 쓰리잡을 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저기 우그러지고 뒤틀린 양은냄비를 바로 펴려면 그 두들겨 맞은 횟수만큼이나 편다고 다시 두드려야 할터이니, 차라리 우글우글한 채로 그럭저럭 살아가보는 것이 어떠할까. 안 그런 척 용을 쓰고, 화장을 하고, 표정관리로 다들 가리고 있을 뿐, 비슷하니까
주말 내내 오른쪽 눈 위가 씨끈거리고, 왼쪽 팔뚝은 우렸다. 기분도 엿 같았다. 어버이날이라고 사 내라고 협박을 견디다 못한 아들이 사준 핑크빛 카네이션 때문에 잠시 펴졌다가도 다시 엿으로 원상복귀했다. 엿은 달달하고 달콤한데, 이빨에 덮어씌운 땜질만 빠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먹으면 되는데, 왜 이런 기분에 불려나와서 쓰이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짜증나고 화나고 어이없고 열받는 감정에 훨씬 익숙하다. 한국인들의 감정을 나타내는 언어 중에서 긍정적인 뜻을 나타내는 말보다 부정적인 뜻의 말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나 역시 뼛속까지 한국인이어서 안 그런 척 하고 다니는 것 같아도 틈만 나면 나를 삼키는 감정은 역시나이다.
남들은 아이들을 훨씬 더 잘 다룰 것 같고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을 것 같다. 정리정돈을 잘하고, 아이디어가 많아 똑같은 걸 해도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서 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오늘(지난 주 금요일) 열 받은 나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아이들은 늘 그렇듯 이기적이고 말초의 욕망덩어리들이다. 내 몸이 부정적 에너지로 똘똘 뭉쳐져 있을 때 아이들은 세상 그런 웬수 덩어리들이 없다.
전날 밤 나는 남동생과 두 시간여 동안 전화통화를 했다. 어버이날에 모여 밥 먹을 일을 상의하다가 엄마와 남동생의 뿌리 깊은 갈등과 불신의 내용들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 내용들이 내 입장에서 볼 때는 그렇게 심각할 성질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열을 내는 동생에 대해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속으로 '네 일이나 잘하지, 애먼 엄마를 갖고 왜 그래?' 하는 반감이 솟아 올랐다. 하지만 독립된 성인인 동생에게 그런 감정을 함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 일이 내게 그렇게 독이 될 줄은 몰랐다. 다음날 아침 생리가 시작되고 있었고, 몸과 마음이 찌뿌둥한 상태로 출근을 했다. 금요일은 6시간을 아이들과 씨름해야 하는 날이다. 가히 전쟁터라 붙일 만한 시간이었다. 거의 일주일이 지난 지금, 여러 번의 작은 전쟁으로 뒤덮여 섬세한 부분까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끔찍한 순간순간의 연속이었다. 나는 나의 이성의 통제를 넘어선 감정의 상태(아~ 그럴듯해 보이는 이성은 내 감정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에 불과하다)를 가장 두려워하는데, 그 날이 그랬다. 언젠가부터 생리가 있을 즈음에는 내가 나를 극심하게 두려워해야하는 공포스런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짜증이 섞인 고성과 협박에 가까운 선생의 말들로 귀를 어지럽혀야 했다. 체육시간만 기다리는 아이들은 줄을 잘 못서서 다음다음 시간으로 연기당해야만 했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이 5교시였다. 질서정연하게 준비운동하기, 줄 맞추기를 지키지 않으면 당장 교실로 되돌아간다는 협박까지 야무치게 훈계했다.
그 날 활동 주제는 발야구형 게임인데, 1,2,3루를 돌아가는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고, 가까운 곳에 있는 콘을 돌아와야하는 게임이어서 공을 차고 콘을 돌아오는 모습을 간단히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굽이 있는 실내화를 신고, 가벼운 공을 발로 찬 후 콘을 도는 순간 나는 무언가가 나를 힘껏 밀어젖힘을 당한 사람처럼 휘처덩 넘어지고 말았는데, 그 넘어지는 모양새가 그렇게 꼴사나울 수가 없었다. 오른쪽 뺨이 체육관 바닥과 세게 닿았는데, 나는 순간 안경이 부서지는 게 아닌지 걱정부터 되었다. 나에게는 고가의 안경이었다. 안경테와 오른쪽 눈썹 위가 부딪혀서 찧었고, 왼팔은 몸 아래로 구겨져 들어갔다. 누가 나를 완력으로 밀쳐내어 넘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넘어지는 꼴이 어지간히 우스웠는지 아이들의 크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내가 겨우 몸을 추슬러 아이들에게 갔을 때도 두 명은 배를 잡고 깔깔대고 있었다. 한껏 성질을 내고 난 후에 자빠졌으니 애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고소했을까?
누구든 물론이지만, 화를 내고, 누구를 비난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직업은 그 일과 가장 가깝게 있는 사람이다. 서로 다른 관심사와 취향을 가진 아이들이 어느정도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기(氣)를 넘어서는 강력한 기(氣)가 필요한 직업인데, 나는 그 기가 강한 사람이라 생각지도 않는다. 내게 있(었던)는 아이들은 순종적이지 않다. 어쩌면 나의 방식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맨날 진흙탕에서 싸움질을 하는 기분이다.(실제 그렇게 싸움질은 해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진흙밭에서 미나리를 캐는 일은 괜찮을 것 같지만.) 옷을 차려입고, 한껏 화장을 하고, 아름다운 척 그럴듯해 보이는 직장인의 모습 안에는 얼마나 많은 주름진 시간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모른다.
대나무처럼 인생 막바지에 혹은 후반부에 피울 사리 같은 꽃을 맺을 일은 기대하지 않는다. 그 꽃은 1년동안 보이지도 않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피어나는 법이다. 그런 욕심을 낼만큼 염치 없지는 않다. 다만 나는 나의 하루가, 내 코 앞에 닥친 이 시간이 만족스럽기를 소망하지만, 늘 그럴 수 없음을 인정한다. 오늘(목)도 다른 아이들을 놀린 은혁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하도 손발을 가만히 두지 않아서 그만 발로 아이 발을 쥐어차 버렸다. 내내 마음이 찜찜하다. 계단에서 밀어서 크게 다칠 뻔 했다고 반 아이 엄마에게 전화가 와서 밀친 아이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야하는 숙제가 남아 있는 날이다. 나의 그럴듯한 위선적인 웃음 뒤에 숨은 삶의 속모양은 그렇고 그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