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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죽음과 함께 등극한 순조는 한때 세도정치에 맞서 개혁을 추진했지만, 아들인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점차 힘을 잃고 만다. 순조의 죽음 이후 손자이자 효명세자(익종)의 아들인 헌종이 8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당연스럽게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그의 친정인 안동 김씨가 득세를 하면서 강력한 세도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남인을 비롯한 상대 당파를 억누르기 위해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고, 천주교에 대한 겅력한 조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로 인해 다수의 희생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종하던 성리학(性理學)의 이념에 반하기에 사악한 가르침이라는 뜻의 ‘사학(邪學)’이라는 명분으로 천주교도에 대한 처형과 투옥이 이뤄졌고, 전국 각지에 당시의 조치로 인한 숨진 이들과 관련된 ‘천주교 순교지’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순조가 14살이 되자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었지만, 왕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 하에서 조용히 자신의 정책을 펼 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안동 김씨를 제어하기 위해 풍양 조씨와 반남 박씨 집안의 인물들을 적극 기용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잠시 왕비의 친정인 풍양 조씨 일파들이 세력을 잡는 듯했지만, 순조가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개혁 정치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순조가 왕위를 이를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통인 철종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혈통으로, 당시 철종은 당쟁의 화로부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평소 정치와 전혀 상관없이 지내던 철종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19살의 나이에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다시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집안인 안동 김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이하여, 그 영향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에서는 세도정권이 지속되었지만, 당시 민중들의 삶은 연이은 흉년과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인해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전국 각자에서 학정에 맞선 민중들의 항거가 일어났고, 19세기 내내 지속된 민중항쟁으로 이 시기를 역사학자들은 ‘농민항쟁의 시대(민란의 시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아울러 당시의 조선은 강력하게 밀고 들어온 일본과 서양 세력의 움직임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철종 역시 왕위를 이을 아들을 두지 못하고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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