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맥(歷脈)(4)- 고구려와 백제(십제)의 건국
1. 고구려의 건국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칸(高豆莫汗)은 어느 날 사냥 길에 나서게 되어 개울에서
목욕하던 하백(河伯:하천관리 장관격)의 딸 유화(流花)를 만나 하룻밤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고구려의 시조 고주무, 이두 문으로는
고주몽(高朱蒙)이시다. (주무는 활을 잘 쏘는 데서 붙인 이름)
유화(流花)는 바람을 피운 죄로 그의 아버지 화백(河伯)으로부터 아기와 함께
상자 속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지는 신세가 된다.
떠내려가다 발견되어진 곳이 졸본부여 제후국인 동부여(東夫餘)였다.
동부여는 고두막칸이 졸본부여를 세울 때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우루천황의 신분을
낮춰 가시리(지금의 훈춘)땅의 왕으로 봉했던 곳으로 옥저(沃沮)라고도 한다.
동부여(沃沮) 금와 왕의 목장 관리인이 된 고주무는 그 기상이 남다르고 무예가
출중하였다. 이를 시기한 금와왕의 태자 대소는 고주무를 죽일려 하니 주무는
그의 일행 마리, 오이, 협보를 데리고 한달 동안 도망쳐 가우리족과 비류족이
많아 사는 구려하(句麗河=僚河요하)에 도착하게 된다.(이곳은 옛날 고진 동명왕이
가우리候로 봉해졌던 곳임)
그의 아버지 고두막칸 천황이 사는 백악산 아사달에는 이미 이복형인
고무서(高無胥)가 왕위를 이어 받은 상태라 갈수도 없었다.
고두막칸은 백악산 아사달에 본부인을 둔 상태에서 유화부인을 첩으로
만났으며 하룻밤 인연 후 칼을 뿌러 트려 한쪽을 유화에게 맡겼다.
요하(僚河)에 도착한 고주무는 그의 아버지 고두막칸의 부러진 칼을 증표로
그가 천제(天帝)의 아들임을 밝히니 고무서(졸본부여)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받던 가우리,
비류족들은 자연스럽게 고주무를 새 지도자로 추대하게 되니 이때가 B.C.58년,
나라이름을 가우리(高句麗)로 독립선포하고 연호를 다물(多勿)이라하였다.
옛조선 실지회복을 위한 비상한 결의가 연호(다물)로 표현되었다.
고주몽이 가우리를 일으켜 영토를 크게 확장한데는 둘째부인 소서노(召西奴)
라는 여인의 공이 컸으며, 소서노는 후에 백제건국에도 크게 기여한
우리민족의 여걸이시다.
소서노는 졸본부여 변방 비류족 왕인 송양 왕의 딸로서 이미 결혼하여 구이(
仇怡;크치비류)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진(眞)씨 남편과는 사별한 상태였다.
한(漢)족으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과 졸본부여로 부터의 냉대에 한이 많은
송양 왕은 딸과 함께 영토를 가우리 신왕 고주몽에게 바치니 고구려 대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막강해진 고주무는 그의 이복형(고무서)이 다스리던 졸본부여와 흉노족을 정벌하여
대망의 부여족 대 통일을 이룬 가우리(고구려)를 건설케 된다. 후에는 자기가 어릴적
부터 장성할 때 까지 살았던 대소의 동부여(옥저)까지 흡수하여 대제국 가우리는
만주전역과 산동지역을 석권하여 수도를 만주 백악산 아사달에
다시 정하게 된다.(B.C.50년)
한편 고주몽은 소서노를 만나기 이전 금와왕 태자 대소에게 쫓겨 동부여를
탈출 할때 활에 맞은 그를 간호해준 여인을 정식 부인으로 맞아 그사이에
누리(屢璃)라는 아들이 이미 있었다.
그 후 고주몽은 소서노와의 사이에 의붓아들 구이(仇怡:비류 라고도함)와 친아들 온조(溫祖)
를 두게 되었으니 정실자식 누리(僂璃)는 주무를 이어 고구려 2대왕(유리왕)이 되고 밀려난 구이(=비류)와 온조는 그의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百濟:비류가 시조)와 십제(十濟:온조가 시조)를 세우게 된다.
결국 고구려는 졸본부여 고두막칸의 서자 고주몽에 의해 세워지고, 백제는
고주몽의 이붓아들 비류와 서자 온조에 의해 세워짐을 보면 훌륭한 서자(庶子)들이
많았음이 우리역사의 아이러니다.
2. 백제,십제의 건국
B.C.50년 고주몽은 단군조선의 쥬신족 계열을 완전평정하고 부여족에 의한
고구려를 세운후 고주몽과 첫째부인 사이의 큰아들 누리왕자가 고구려의
2대왕(유리왕)으로 세습함에 할수없이 고주몽의 둘째부인 소서노(召西奴)는 비류(眞씨),
온조(高씨)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곰나루(웅진熊津=공주)에서 비류 왕자를
초대황제로 하는 백제(百濟)를 세우게 된다 (B.C.18년, 고구려건국40년후)
뒤이어 온조는 오리골(지금의 하남)에 백제의 동생나라 십제(十濟)를
세우게 된다.(B.C.7년) (註;지금 발굴되는 하남,풍납동 일대의 유적은 초기 백제가
아닌 초기 십제 때의 유물이라 봄이 정확할 것임)
따라서 백제의 시조는 진(眞)씨 비류왕 이시고, 십제의 시조는 고(高)씨 온조왕 이시다.
이처럼 소서노라는 여인은 고구려,백제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 여걸이시다.
비류백제 10년후 십제를 세운 온조는 신하들의 간계에 빠져 그의 어머니 소서노를 본의
아니게 죽이게 되니, 비류와 온조는 피나는 싸움을 벌이지만 오해임이 밝혀져 변함없는
형제국으로 400년간 지속후 백제 왕통이 일본으로 망명함에 따라 십제가 백제를
계승하게 된다.
십제는 백제의 외각 방위군 같은 역활을 하였다.
이와같이 고구려, 백제는 씨가 다른 부자(父子)지간의 나라지만(高씨와 眞씨)
고구려와 십제는 친부자 지간의 고(高)씨 부여계 국가이다.
眞씨 백제의 왕통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고, 백제의 역사는 高씨 온조의 십제에 의하여
계승되게 되니 우리는 백제의 시조를 온조왕이라고 배우게 된다.
(이과정은 다음 백제천황의 일본망명에서 서술 예정)
이러한 역사로 인하여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일본의 정체성
문제는 몇백 년을 두고 기회만 되면 우리나라를 힘의 논리로 지배 코저 하였는데
이는 곧 그들의 태생 열등감에서 오는 몸부림 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신라건국 및 경주 정착과정이 이어집니다.
峨 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