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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형제 동방 문과 급제
3형제가 한 시험에 동시에 합격한 경우는 문과에서 3번 출현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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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당(安瑭)후손-3형제 안처겸(安處謙) 안처함(安處諴) 안처근(安處謹)
안처겸(安處謙)
1486(성종 17)∼1521(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백허(伯虛), 호는 겸재(謙齋). 아버지는 좌의정 당(瑭)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경원부사 영희(永禧)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학유를 거쳐 1517년 8월 장의(掌議)로 있으면서 정몽주(鄭夢周)의 문묘배향과 소격서(昭格署)의 폐지 등을 건의하였다.
1519년 아우 처함(處諴)·처근(處謹)과 함께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었다.
1521년 상복을 벗고 처가에 있으면서 이웃에 사는 시산군(詩山君) 이정숙(李正叔)·권전(權磌) 등과 더불어 담론하다가 세상을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그 중 군주 측근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고 사림을 위로해야 한다는 등의 언사가 있었다.
이때 송사련(宋祀連)도 함께 담론하였는데 그는 남곤(南袞)·심정(沈貞)에게 아부하여 상을 얻고 자기의 처남인 정상(鄭鏛)을 시켜, 간신은 곧 남곤·심정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며, 그 당여의 증거물로 안처겸의 모친상시의 조문록 및 역군명부(役軍名簿)를 가지고 고변하게 하였다.
이로써, 대신을 살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아우 처근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뒤에 신원되었다.
安處謙 -海東雜錄[一]○權鼈 本朝[一]
順興人。字伯虛。貞愍公之長子也。癸酉進士。與權礩請從祀鄭文忠。革昭格署。釋奠儀物獻議更定。鉶羹大羹陽燧明水各得其制。至今遵用。登第授學諭。遭母喪。辛巳服闋。與同里詩山正權礩等語曰。衮貞專擅威福。必除去此輩。可以扶國勢。宋祀連與其妻甥鄭瑺告謀害大臣推官鍛鍊構捏。故入大罪。 雜記
안처겸(安處謙) -해동잡록 1 본조(本朝)
○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자는 백허(伯虛)이며 정민공(貞愍公)의 장자이다. 계유년에 진사를 하였다. 권질(權礩)과 더불어 정문충(鄭文忠 포은(圃隱))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했고,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였으며, 석전 의물(釋奠儀物)을 헌의(獻議)하여 다시 정하고 형갱(鉶羹 5미(味)를 조화시켜 형기(鉶器)에 담은 국)ㆍ대갱(大羹 양념을 치지 않은 육즙(肉汁))ㆍ양수(陽燧 태양열을 받아 불을 일으키기 위한 동제(銅製)의 거울)ㆍ명수(明水 맑은 물)가 각각 그 제도를 얻어서 지금까지 준용하고 있다. 급제하여 학유(學諭)로 제수되었다. 어머니 상(喪)을 만나서 신사년에 탈상했다. 한 동네에 사는 시산정(詩山正)과 권질(權礩) 등과 더불어 말하기를, “남곤과 심정이 권위와 복록을 제 맘대로 하니, 반드시 이 무리를 제거하여야 국세를 바로잡을 수 있다.” 하였던 바, 송사련(宋祀連)과 그의 처 생질 정상(鄭瑺)이 대신을 해칠 것을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추관(推官)이 거짓으로 꾸며 죄안(罪案)을 성립시켰다. 그래서 대죄(大罪 사형)에 들어가게 하였다. 《잡기(雜記)》
안처겸 전(安處謙傳)
진사 안처겸은 병오생이고 자(字)는 백허(伯虛)이다. 임금 곁에 있는 간인(奸人)들을 숙청하려고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서 베임을 당했다. 순흥(順興)이 본관이고 의정(議政) 안당(安瑭)의 아들이다.
보유 : 계유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일찍이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정 문충공(鄭文忠公 포은)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한 것과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도록 청한 것은 모두 공이 장의(掌議)로 있을 때에 건의한 것이었다. 이때 석전(釋奠)의 의물(儀物)에 옛 제도가 아닌 것이 많았다. 《예경(禮經)》에 의거하여 헌의(獻議)해서 개정(改定)했다. 그런 다음에 형갱(鉶羹 양념을 넣은 국)ㆍ대갱(大羹 양념을 넣지 않은 국)ㆍ양수(陽燧)ㆍ명수(明水)를 각각 그 제도대로 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제도대로 준용(遵用)한다. 천목에는 재기(才器)가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번 주의(注擬)하였으나 조용(調用)되지 못 하였는데, 6월에 비로소 성균관에 분차(分差)되었다. 이달 그믐에 모친상을 당하고 신사년에 복을 마쳤다. 이때에 권간(權奸)의 독수(毒手)가 사림을 해침이 해마다 심각하였다.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었고 사화 사건에 생각이 미치면 말을 따라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장인의 집에 있을 때에 우연히 시산 정(詩山正)ㆍ권전(權磌)과 상종하였는데, 이들도 또한 강직하고 강개한 사람이었다. 세상일을 분하게 여기면서 회포를 풀다가 저촉되는 줄도 모르고 말하는 중에 혹 ‘권간을 제거하여 사림을 위로한다’ 는 말도 있었다. 서로 함께 말하다가 드디어 한담(閑談)으로 되었다. 송사련(宋祀連) 등도 또한 서로 조언하면서 희롱하였는데, 도리어 해칠 마음을 품고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에게 아부하여 중상(重賞)을 요구할 양으로 드디어 처질(妻姪) 정위(鄭瑋)와 함께 공들의 한담을 빌려서 대신을 모해하려 한다고 고하였다. 추관(推官)이 두드려 만들어서[鍛鍊] 화를 얽었던 까닭으로 드디어 큰 죄에 빠져들었다. 그 뒤 경자년에 중묘께서 노(孥)된 것은 특별히 용서하였다. 공의 장인 옥당수(玉堂守)의 집이 제생원(濟生院)에 있었는데 권전(權磌)ㆍ시산(詩山)의 집과 서로 가까웠다. 묘지(墓誌)에, “공은 호준(豪俊)하고 강직하며 의를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였다. 시사(時事)를 걱정하여 분하게 여기다가 드디어 큰 허물에 빠졌다. 대개 분하게 여기는 심정이 격동하여서 참지 못하고 바른말을 하다가 재얼(災孼)이 되어서 화를 낳게 하였으니 어찌 통탄함을 금할 수 있으랴.” 하였다. 청강 거사(淸江居士)가 지었다. 아들 안로(安璐)ㆍ안율(安 )ㆍ안서(安 ), 사위 허제(許悌), 손자 안응달(安應達)ㆍ안응길(安應吉)ㆍ안응초(安應初)ㆍ안응덕(安應德)ㆍ안응건(安應建)ㆍ안응진(安應進)이 있다.
安處謙傳
進士安處謙丙午生。字伯虛。謀淸君側事覺被誅。順興人。議政塘之子。
補。中癸酉進士。嘗遊國庠。從祀鄭文忠公。革昭格署等書。皆公掌議時所建。是時也。釋奠儀物。多非古制。據禮經獻議更定。然後鉶羹大羹陽燧明水。各得其制。至今遵用。薦目。有才器。累擬未調。六月始分差成均館。是月晦。丁其母憂。辛巳服闋。是時權奸之毒害士林。隨歲刻深。常懷憂懼。念及此事。未嘗不言隨涕零。及在外舅家。偶與詩山正權磌相從。亦剛直慷慨之人。憤世開懷。忘其觸冒。或有去權奸慰士林之語。相與和答。遂爲閑語。而宋祀連輩亦相助言爲戲。反懷賊心。阿附衮貞。要其重賞。乃與妻甥鄭瑋。藉其閒語。告以謀大臣。推官鍛鍊搆禍。故入大罪。其後庚子中廟特宥坐孥。 公之外舅玉堂守家在濟生院洞與權磌詩山相近 墓誌有曰。公豪俊亢直。好義嫉惡。憂時憤惋。遂陷大辜。蓋由忿怨情激。不忍危言之。謀孼以生禍也。可勝痛哉。 淸江居士所述 子璐 婿許悌孫應達應吉應初應德應建應進。
안처함(安處諴)
1488(성종 19)∼1543(중종 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윤숙(允叔). 좌의정 당(瑭)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경원부사 영희(永禧)의 딸이다. 처겸(處謙)의 아우이며 처근(處謹)의 형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수찬·이조좌랑을 지냈으며 1521년(중종 16) 그의 형 처겸이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대신을 모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할 때 이에 연좌되었으나, 그 이전에 송사련(宋祀連)으로 부터 그의 형이 남곤·심정을 헐뜯는 말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에게 고한 뒤 함께 처가인 용인으로 낙향하여 죽음은 면하였다.
청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사면되었다.
安處諴-海東雜錄[一]○權鼈 本朝[一]
順興人。字久叔。處謙之弟也。天資渾厚。無疾言遽色。信於然諾。少與諸友語曰。三十後監試。四十後東堂。決不可赴。至戊寅三十一也。父翁命赴司馬。對曰。君子一言。千年不改。少與友言。今不可改。與兄同登薦科。爲弘文修撰。聞兄語觸時宰。言于貞愍。貞愍欲其消沮。率歸外鄕。變作。公以先告貞愍免罪。而亦緣坐。定屬于淸州。壬午蒙放。閑住二十二年而終。
안처함(安處諴)-해동잡록 1 본조(本朝)
○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자는 구숙(久叔)이며 처겸(處謙)의 아우이다. 자질이 혼후(渾厚)하여 말을 급하게 하거나 표정을 발끈하는 일이 없으며, 서로 약속한 바에는 신의가 두터웠다. 젊어서 친구들과 더불어 말하기를, “30세 후의 감시(監試)와 40세 후의 동당시(東堂試)는 결코 응하지 않겠다.” 하였다. 무인년에 31세가 되었다. 아버지가 사마시(司馬試)에 응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군자(君子)의 한 마디 말은 천 년을 두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니, 젊어서 친구들과 한 말을 지금에 와서 고친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형과 같이 천과(薦科)에 올라서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 형이 당시 재상을 비방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정민공(貞愍公)에게 말하였다. 정민공은 그 말썽을 없애버리고자, 가족을 거느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화변(禍變)이 일어나자 공은 먼저 정민공에게 고했다고 해서 죄를 면했으나, 역시 연좌되어 청주(淸州)로 귀양갔다가 임오년에 풀려나 22년을 한가히 살다 죽었다.
안처함 전(安處諴傳)-己卯錄補遺追錄
유학(幼學) 안처함은 무신생이고 자(字)는 윤숙(允叔)이며 수찬으로 있었다. 형 안처겸(安處謙)의 모의를 부친 안당(安塘)에게 알려 이로 인해 발각되어, 이 공로로 죄는 면했으나 역시 정속(定屬 적몰된 집 사람을 종으로 삼음)되었다. 순흥(順興)이 본관이고 서울에서 살았다.
보유 : 공이 젊었을 때 여러 벗과 말하기를, “30살이 된 뒤에 감시(監試)를 보고 40살이 된 뒤에 동당(東堂 식년 과거)을 보겠으며 그 전에는 결코 과장(科場)에 가지 않겠다.” 하였다. 무인년에 공의 나이가 31이었는데 그의 부옹(父翁)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라고 명하니, 답하기를, “군자의 한 말은 천년이 지나도 고치지 않는 것입니다. 소년 때에 벗에게 한 말이 있으니 지금은 시장(試場)에 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부옹도 또한 강권(强勸)할 수 없었다. 천목에는 단정 후중하고 조수(操守)와 실천에 법이 있으며, 성품이 견확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재행이 있다는 것이었다. 발탁되어서 홍문관 저작(著作)ㆍ박사ㆍ수찬을 역임하였다. 모친상을 만나 복을 마치고 나서, 신사년에 겨울 송사련(宋祀連)에게서 형이 여러 벗과 당시 재상에게 저촉되는 말을 했다는 것을 듣고 부옹에게 고하였다. 부옹은 그 말을 소멸시켜 없애려고 가족을 거느리고 외향(外鄕)으로 돌아갔다. 송사련이 상을 바라고 무고하여 큰 죄에 빠뜨렸는데, 공도 연좌되어서 청도(淸道)에 정속되었다. 임오년 가을에 천둥치는 변이 있었는데, 남곤(南袞)이 공은 부옹에게 알린 공로가 있다는 것으로써 석방하기를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편리한 대로 한가하게 22년을 살다가 죽었다.
행장(行狀)에는, 타고난 자질이 혼후(渾厚)하고 침잠 장중(沈潛莊重)하여 말을 빨리 하거나 장난스러운 낯빛이 없었다. 집안[環堵]이 쓸쓸하게 가난하였으나 남을 구휼하는 데에 급하였고, 응낙한 것은 신(信)을 지키고 만약 불급(不及)할 형편이면 분주하게 남에게 꾸는 수고로움도 꺼리지 않았다. 초포 노인(樵圃老人)이 초고하였다. 아들은 안윤(安玧). 사위 조희맹(趙希孟), 외손 권인경(權仁經), 권의경(權義經)이 있다.
安處諴傳
幼學安處諴戊申生。字允叔。爲修撰。以兄處謙之謀。告其父瑭。因此事覺。以功免罪。亦被定屬。順興人。居于京。
補。公少與諸友言。三十後監試。四十後東堂。決不可赴。至戊寅。是時年三十一歲也。其父翁命赴司馬試。對曰。君子一言。千年不改。少與朋有言。今不敢赴試。父翁亦不得勉焉。薦目。端正厚重。操履有方。性堅篤志學。有才行。擢拜弘文著作博士修撰。而丁母憂。旣服闋。辛巳冬。因宋祀連聞兄與諸友語觸時宰。以其語告于其父翁。父翁欲其消沮。率歸外鄕。祀連希賞搆告。誣陷大罪。公被坐定屬于淸道。壬午秋雷之變。南衮論功請放。任便閒住二十二年而卒。行狀云。天資渾厚。沈潛莊重。無疾言戲色。環堵蕭然。而周人之急。信於然諾。而若或不逮。奔走乞貸。而不憚勞也。 樵圃老人稿 子玧婿趙希孟外孫權仁經義經。
안처근(安處謹)
1490(성종 21)∼1521(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정부(靜夫).
좌의정 당(瑭)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이(李)氏)로 경원부사 영희(永禧)의 딸이다. 처겸(處謙)·처함(處諴)의 아우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519년(중종 1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홍문관정자를 거쳐 박사에 올랐으며, 그해에 형인 처겸·처함과 함께 삼형제가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다.
1521년 형인 처겸이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대신을 모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될 때 이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문장은 삼형제 중 가장 뛰어났다는 평을 받았다.
安處謹-海東雜錄[一]○權鼈 本朝[一]
順興人。字靜夫。處謙之弟也。資稟安詳。與朋友交。愈久愈敬。世稱三珠白眉勝諸兄。登薦科。爲弘文博士。辛巳杖殞。
안처근(安處謹)-해동잡록 1 본조(本朝)
○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자는 정부(靜夫)이며 처겸(處謙)의 아우이다. 자질이 고요하고 자상하며 벗과 더불어 사귐에 오래될수록 더욱 존경을 받았다. 세상에서 일컫기를, 세 형제 중의 백미로서 형보다 낫다고 했다. 천과(薦科)에 올라 홍문박사(弘文博士)가 되었다. 신사년에 매맞아 죽었다.
안처근 전(安處謹傳)-己卯錄補遺追錄
생원 안처근은 경술생이고 자(字)는 정부(靜夫)이다. 벼슬이 홍문관 박사였는데 그의 형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좌되어 베임을 당했다. 순흥(順興)이 본관이고 의정 당(瑭)의 아들이다.
보유 : 공은 기묘년에 생원이 되었다. 천목은 단아(端雅)하고 명민(明敏)하며, 추향(趨向)하는 것이 바르고, 학행과 지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곧 홍문관 정자(正字)로 제수되었다가 박사(博士)로 승진되었다. 6월에 모친상을 당하고 복(服)을 벗고 나서, 신사년 겨울에 송사련(宋祀連)의 무함을 당해 신문을 받으면서 곤장 50여 대를 맞고 죽었는데 역시 법대로 처리되었다. 경자년에 특별히 처와 자식이 연좌된[孥] 것은 용서받았다. 행장에는, “자질이 장일안상(莊一安詳)하며 평상시에도 태만하거나 방사(放肆)한 언동이 없었다. 벗과 사귐에는 오랠수록 더욱 공경하였다. 세상에서, ‘구슬[珠]이 셋인데 백미로 여러 형보다 낫다.’ 하였다. 정진(鄭震)이 지었다. 사위 정진(鄭震)주부ㆍ우필성(禹弼成)찰방, 외손 정응선(鄭膺善)ㆍ정명선(鄭明善)ㆍ정종선(鄭從善)ㆍ우치근(禹致勤)ㆍ우치검(禹致儉)ㆍ우치적(禹致績)이 있다.
安處謹傳 |
안돈후(安敦厚)후손-4형제:부사(府使)안장(安璋), 정랑(正郞)안총(安璁), 좌의정(左議政)안당(安瑭)
여(女) 2 : 의정(議政)김응기(金應箕)妻, 송련妻
안장(安璋)--->1안처형(安處亨),2안처정(安處貞)--->1안황,2안련,3안필,2-1안옥,2-2안연,안수(安琇),
안총(安璁)홀--->无后
안당(安瑭)--->1 안처겸(安處謙), 2 안처함(安處諴), 3 안처근(安處謹) <3형제>
1 안처겸(安處謙)--->1 안로(安璐), 2 안율(安瑮)률, 3 안서(安 ), 허제妻 <3男1女>
2 안처함(安處諴)--->안윤(安玧), 권수妻, 조희맹妻 <1男2女>
3 안처근(安處謹)--->안전, 안산, 정진妻, 우필성妻 <2男2女>
1-1 안로(安璐)--->1 안응달(安應達), 2 안응건(安應建), 3 안응진(安應進), 김진천妻, 김녕妻 <3男2女>
1-2 안율(安瑮)--->1 안응길(安應吉), 女, 女 <1男2女>
1-3 안서(安 )--->1 안응복(安應福), 안응덕(安應德), 女, 女 <2男2女>
2-1 안윤(安玧)--->1 안수기(安守基), 女 <1男1女>
처겸은 종실인 옥당부수 수장의 딸을 취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로, 율, 서요, 딸은 사인 허제에게 시집갔다. 처함은 종친부 전첨 윤수륜의 딸을 취하여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윤이오, 장녀는 충위의 권수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사인 조희맹에게 시집갔다. 처근은 사헌부감찰 안방형의 딸을 취하여 2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돈령부직장 정진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사인 우필성에게 시집갔다. 손자인 로는 선무랑 유숙번의 딸을 선취하여 1남을 낳으니 응달이오, 선전관 윤수희의 딸을 후취하여 2남을 낳으니 응건 응진이다. 율은 종실인 창원부수 천수의 딸을 취하여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응길이다. 서는 종실인 청원감 현손의 딸을 취하여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응복 응덕이다. 윤은 종실 희천수 호의 딸을 취하여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기이다. 내외손을 증현까지 합하면 현손자가 50여인이나 된다.
-栗谷先生 左議政貞愍安公神道碑銘
1派12世-찬성공파
안당(安瑭)
좌의정(左議政) 순흥군(順興君) 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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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配)
전의인(全義人) 이(李)씨 첨지(僉知) 부정(副正) 부사(府使) 이영희(李永禧)女
이(李)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出仕方法 男 : 3 女 : 總 : 號 諡 號 이(李)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이 ◆ 배우자 : ◆ 자 녀 :
姓 名
이 (李)
性 別
여 (女)
本 貫
전의 (全義)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死 亡 日
最終官職
無出仕
出 仕 日
子 女
異 名
字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기본
文化柳氏嘉靖譜
326
인적관계
文化柳氏嘉靖譜
638
기본
文科榜目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인적관계
父 : 李永禧
李
안당(安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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