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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강 따라 걷기 제2구간
유회장님과 재회를 약속하며 헤어진 후, 평창강을 따라 계속 내려갔다. 조금 내려가자 왼쪽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정자 건너편으로 별로 높지는 않은 절벽이 평창강과 어우러져 그럴듯한 경치를 보여준다. 정자에 다가가 보니 바닥은 흙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기와가 아니고 플라스틱 같다. 정자라기보다는 지붕이 있는 쉼터라고 불러야 적당할 것 같다.
<그림12> 쉼터에서 본 금당산 절벽
쉼터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자 왼쪽에 다리(일송교)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덧개수터널을 지나 대화면으로 진입할 수 있다. 우리는 평창강을 따라 계속 직진하였다.
<그림13> 대화로 넘어가는 일송교
금당계곡로를 조금 더 내려가자 오른쪽에 ‘어름치 캠프학교’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이 나온다. 뒤로는 폐교 건물이 살짝 보인다. 폐교를 이용하여 여름에 캠프학교를 운영하는 모양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어름치는 잉어과의 물고기이다. 길이는 약 12~14cm까지 자라는데 한반도 고유종으로서 한강 임진강 금강에서만 분포가 보고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 근처 평창강에서 어름치가 사나 보다.
<그림14> 어름치 캠프학교
<그림15> 시멘트 다리
어름치 캠프학교에서 강쪽을 바라보면 시멘트로 만든 작은 다리가 보인다. 차가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매우 좁고, 큰물이 나면 쉽게 잠길 것 같은 낮은 다리이다. 다리를 건너면 마을이 있다고 한다. 은곡은 평창에 36년이나 살았기 때문에 이곳 지리를 잘 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걷고 있는 424번 도로가 지금처럼 2차선 차도가 된 것은 불과 10여년 전이라고 한다. 그전에는 차도 사람도 모두 앞에 보이는 시멘트 다리로 건너다녔다고 한다.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카카오맵을 검색해보니 시멘트 다리의 이름이 ‘개수1교’라고 표시되어 있다.
강물소리를 들으면서 길 따라 한참 내려가자 오른쪽에 작은 쉼터공원이 나타난다. 긴 의자 몇 개가 보이고 장승이 6개 서 있다. 장승 밑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어서 가까이 가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군요~~ 이제 마을 수호 업무를 마감하고 후임 장승에게 물려주려 합니다. 기력이 소진되어 힘이 없으니 다가오지 마세요~~ (위험주의) -봉황장승 올림-” 읽어보니 빙긋이 웃음이 나는 문구이었다.
<그림16> 봉황 장승
길은 왼쪽으로 구부러지면서 개수교 다리가 나타나는데 오른쪽 강가로 작은 흙길이 나 있다. 작은 길로 내려가면 강가로 걸을 수 있고 저 아래에서 다시 지방도로로 돌아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개수교 다리를 건너지 않고 흙길로 들어섰다. 작은 길은 400m 정도 계속되는데 걷기에 아주 편하다. 중간에 활터 과녁이 하나 나타났다. 과녁은 있는데 활을 쏘는 장소가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간이 활터인가 보다. 작은 길이 끝나는 지점에 근사한 바위가 우뚝 솟아있고 바위 위에는 소나무가 몇 그루 자란다. 이 바위가 봉황대이다. 커다란 바위 덩어리 위에 소나무는 어떻게 뿌리를 내렸을까? 신기하다.
<그림17> 봉황대
봉황대 바위 위의 소나무를 바라보자 얼마 전에 각시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나는 불행히도 60이 넘어 상처하고, 그 후 다행히도 젊고 예쁜 각시를 만나 재혼을 하였다. 나는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딸 가진 사람이 항상 부러웠다. 딸 키우는 재미가 그렇게 좋다는데 궁금했다. 그래서 뒤늦게 딸을 낳아 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임신이 되지를 않는다. 친구에게 고민을 이야기하자 밭을 바꿔보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한다. 각시가 들으면 펄쩍 뛸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각시가 기분이 가장 좋은 때를 골라서 친구의 조언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각시는 화를 내지 않고 다음과 같이 조용히 말하였다. “당신은 환경학 교수라면서 자연환경을 그렇게도 모르느냐. 등산하다 보면 커다란 바위 위에 자라는 소나무를 볼 수 있다. 씨가 좋으면 바위 위에서도 소나무가 자랄 수 있다. 밭이 문제가 아니라 씨가 문제다.” 아이고, 나는 우리 각시를 말로써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봉황대 옆에는 아담한 정자가 하나 서 있다. 현판에 봉황정이라고 한문 이름이 쓰여 있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원경펜션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나 보다. 답사 시작점을 출발한 지 2시간 15분이 지났다. 우리는 정자에서 쉬면서 각시가 아침에 싸준 군고구마 간식을 먹었다. 고구마가 달고 맛있었다. 봉황정에 앉아 봉황대를 바라보면서 내가 준비해 온 커피를 마시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사돈 논이라도 사주고 싶은 심정이다.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한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림 18> 봉황정
시인마뇽은 몸무게가 80kg인데도 잘 걷는다. 그는 빨리 걷지는 못하지만 오래 걷는다. 하루에 27km를 걸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와 함께 산행을 할 때에는 느리게 걷는 그를 앞세우고 나는 뒤따라간다. 시인마뇽은 5년 동안에 남한의 백두대간과 9정맥 합쳐서 2800km를 걸었어도 느리게 걷기 때문에 다리가 아직도 건강하다. 느린 것이 좋은 것이다.
고구마를 먹으면서 시인마뇽이 한마디 했다. “아프리카 속담에 있는데,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맞는 말이다. 멀리서 가는 길을 혼자 간다는 것은 매우 외롭고 지루할 것이다. 멀리 가려면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인원이 많을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 둘이나 넷보다는 세 명이 가장 적당한 인원수이다. 산행도 마찬가지이지만 단체로 여행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여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선택을 해야 하는데, 다수결로 결정해야 할 때가 생긴다. 이 때에 짝수로 의견이 갈리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홀수이면 간단히 해결된다. 오늘은 4명이 걷지만 다행하게도 다수결이 필요한 갈등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간식을 먹고서 봉황교를 건너 지방도로로 다시 돌아오자 봉화마을을 가리키는 커다란 봉황새 모양의 간판이 눈에 띈다. 봉황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길 동쪽에는 잘 지은 2층 건물인 ‘개수2리 다목적체험관’이 자리잡고 있다. 체험관 뒤쪽으로 ‘개수리 보건진료소’가 보인다.
<그림19> 봉황새 모양의 안내판
돌로 만든 봉황대 표시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봉황대라 불리우는 이곳은 “옛날에 어떤 사람이 묘자리를 보려고 이 근처의 땅을 팠는데 갑자기 봉황이 하늘로 솟아 날아 갔다”고 해서 이 바위를 그 때부터 봉황대라 불리우게 되었으며 일설에는 “그 높이가 너무 높아 봉황이 아니면 접근조차 못했다”고 해서 봉황대로 지어졌다는 등의 많은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런데 <평창군 지명지> 316쪽에는 봉황대 설명이 다음과 같이 보다 자세하게 나와 있다.
마을의 지세가 둥지에 든 봉황의 모양이라 봉황대라고 불렸다는 설과 봉황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라고 해서 봉황대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다. 이 바위는 길조바위라고 하여 숭배한다. 6m 가량의 절벽바위로 옛날에 어떤 사람이 묘자리를 .... 이하는 표시석 기록과 동일하다.
<그림20> 장미산 덕수산 등산안내도
봉황대 표시석 옆에는 장미산.덕수산 등산안내도가 서 있다. 두 산의 특징에 대하여 등산안내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차령산맥의 한 줄기로서 백두대간에 속한 오대산 두로봉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나온 가지 상에 있다. 산 아래로 남한강 최상류인 평창강이 흐르고 주위에 청태산, 금당산이 있다. 장미산은 산 모습이 노루꼬리처럼 생겼다 하여 생겨났으며, 덕수산은 사시장천(四時長天) 한 자리에서 마을을 지키며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이 충성스럽고 덕스럽게 보여 덕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장미산, 덕수산은 겉보기에는 밋밋한 산이지만 실제로 올라보면 자연의 보고라 할만큼 갖가지 기암괴석과 울창한 산림, 희귀한 동식물이 많고 때가 되면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등산 코스 중 하나이다.”
봉황교를 넘어 서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오른쪽 산허리에 봉황마을이 있다. 봉황마을 길은 더 이상 연결되지 않고 끊긴다.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장미산(979m)과 덕수산(1003m)이 봉황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마뇽과 석주와 함께 작년 10월 22일, 단풍철이 약간 지나서 두껍게 쌓인 낙엽을 밟으며 두 산을 등산한 적이 있다. 그 날의 산행기를 시인마뇽이 자신의 블로그에 기록했다. 관심있는 독자는 아래 주소에서 덕수산 산행기를 읽어 볼 수 있다.
(덕수산 산행기 http://blog.daum.net/mk490/11770609)
지방도로를 따라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왼편에 높이가 30m는 넘을 것 같은 절벽이 보인다. 절벽 끝은 삼각형의 꼭지점처럼 뾰족한데 소나무 한 그루가 근사하게 자리잡고 있다. 바위에는 온통 이끼가 덮여 있다. 이끼는 대기오염의 지표식물이다. 이끼는 대기오염이 없는 청정한 지역에서만 자란다. 뾰족한 바위에는 틀림없이 이름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근사한 바위에 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하나 지어주고 싶다. (답사 후에 <평창군지명지>를 찾아보니 이 바위를 선바우(立岩)라고 표기하고 있다. 봉황마을에 사는 오종근 선생에게 물어보니 동네 사람들은 장군바위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뾰족한 끝이 장군 투구처럼 생겨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그림 21> 선바우
선바우를 조금 지나 길이 구부러지는 곳에서 갈림길이 나타난다. 왼쪽으로 난 지방도로를 따라가지 않고 오른쪽에 나있는 작은 흙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길인데, 내가 전에 한번 가본 적이 있다. 메타세콰이어가 많은 숲을 돌아서 200m 쯤 걸으면 다시 포장도로로 나오게 되어 있다. 고즈넉한 흙길이어서 걷기에 매우 좋은 구간이다. 길 아래 오른쪽으로는 평창강이 흐른다. 강가에는 굵직한 돌들이 수없이 많은 돌밭이다. 돌밭은 꽤나 넓고 내가 보기에도 잘 생긴 돌들이 많이 보인다. 멋진 수석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나중에 다시 와서 좋은 수석을 한번 찾아봐야겠다. 흙길 끝부분에서 주차도 할 수 있고 텐트도 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모래밭도 약간 보이고. 여름에는 아이들 데리고 와서 물놀이 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이곳을 개수리 사람들은 물구비라고 부른다고 한다. 개수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가는 장소라고 한다.
<그림 22> 물구비
평창강과 나란히 지나가는 도로를 따라 계속 내려갔다. 평창강은 대표적인 사행천이다. 뱀처럼 구불구불 흐른다. 강에 바짝 붙어있는 금당계곡로도 구불구불 지나간다. 평창강 답사팀인 우리들도 물소리를 들으며 덩다라 구불구불 걸어간다. 남도 지방에는 지금 매화꽃이 피었다는데, 여기 평창은 위도가 낮고 고도는 높아서 아직은 겨울 끝자락이다.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같은 침엽수들은 뾰족한 잎 뭉치로 줄기를 가리고 있다. 그러나 자작나무, 벚나무, 오리나무 같은 활엽수들은 잎이 모두 떨어져서 벌거벗은 줄기와 앙상한 가지를 부끄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땅속에서 동면하면서 봄을 기다리고 있는 꽃씨는 조금만 지나면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꽃피는 봄에 다시 한 번 금당계곡길을 걸어보고 싶다. 그 때는 하늘과 산, 바위와 물, 그리고 새와 나무와 야생화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강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왼편에 ‘정이 넘치는 개수리’라고 쓰인 돌 비석이 서있다. 여기까지가 개수리이고 그 아래는 상안미리이다. 경계 표시 비석을 지나 한참 동안 강 따라 내려가자 오른 편 강가에 아주 커다란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금당계곡’이라는 네 글자가 한글로 새겨져 있고, 아래쪽에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15km)’라고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림 22> 금당계곡 비석
비석의 뒤쪽에는 김시철 선생이 쓴 ‘금당계곡’이라는 제목의 시가 새겨져 있다.
평창땅 좋다길래
바람 따라 이리 왔네.
이만 저만 세간먼지 찌들은 몸
며칠 좀 쉬었다가 갔으면 하네.
금당산 끼고 도는 철쭉꽃길 사오십리
개수구곡(介水口谷) 이끼 낀
태고적 바위산
종아리 들어낸 적송(赤松)들 유혹 또한 그러해
마음 비워놓고 그네들과 더불어
이 밤 한껏 취해볼 참이네.
바람 따라 찾아든 금당계곡
빈 가슴으로 맞이하는 밤맞이라
둥근 달도 물가에다 내걸고
못내 바람의 잔(盞)도 들이킬 것이네.
새벽을 쫑알대는 산새들 노래 속에
새날이 열리면
아무래도 나는 너를 못 잊어
좀 더 쉬었다가 갔으면 하네.
금당계곡,
예가 바로 신선이네.
<금당계곡>은 평창군 용평면 재산리에 살고 있는 원로 시인 하서 김시철 선생이 2004년에 출판한 10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2005년 3월 18일자 강원일보에서는 하서 선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월남, 부산에서 미군부대 검수원과 부두노동 등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김씨는 부산시장에서 우연히 구입했던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였다고 회상했다. 또 미당(未堂)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귀촉도' 등은 김씨로 하여금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1954년 잡지 <개척>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김시철 시인은 1956년 그의 첫 시집인 `林檎(임금)'을 내놓았다. 그에게 문인의 길을 열어준 김광석 선생의 권유로 그는 대중잡지가 아닌 문학잡지인 <자유문학>의 편집장을 맡게 됐다. 편집장직을 맡으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 김씨는 또 한 번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데, 염상섭 주요한 양주동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깊은 인연을 맺으며 한국 문단의 거장으로 점차 성장해갔다.
1980년대 내내 문인협회 부이사장직을 연임하고 1990년 국제PEN클럽 부회장에 이어 1994년 국제PEN클럽 회장직을 맡아 2번 연임하는 등 중앙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문인들의 인권보호와 문학도 양성에 힘써왔다. 이렇듯 한국문학의 산증인으로 문단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자유문학편집장, 문인협회부이사장, 국제PEN클럽회장 등을 지낸 당대 최고의 문학가가 이제는 스스로를 낮춘 촌로로 변신해 맘껏 강원도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강원일보 기사에서는 금당계곡의 입구를 알리는 비석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국 문단의 거장이었던 김시인의 공심산방(空心山房: 하서 선생의 재산리 집을 말함) 생활과 작품 활동에 감명을 받은 문인들은 너도 나도 공심산방을 방문하며 수려한 산세 등을 부러워하고 있다. 이중 몇몇은 평창에 공심산방과 같은 집을 짓기로 해 김시인이 이제는 평창을 홍보하고 강원도를 노래하는 진정한 강원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같은 김시인에게 고마움을 느낀 평창군 대화면 주민들은 금당계곡 입구에 높이 4m 폭2.5m 무게 10여 톤의 대형 바위를 표석으로 세워 시 <금당계곡>을 새겨 넣기도 했다.”
오후 5시 45분에 금당계곡 비석에 도착하여 평창강 따라 걷기 제2구간을 마쳤다. 이날 11km를 걷는데 4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