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는 지금 가치의 환각상태다>의 줄거리:
최근 행한 한 인터뷰에서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가상화폐에 대해 "비트코인은 특별한 가치가 전혀 없다"며 "비트코인은 근본적으로 환상"이라는 비관론과 함께, 비트코인보다는 주식에 투자하는 게 낫다는 견해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말씀합니다. 화폐라는 가치 자체가 환상이라고 말입니다. 인류는 지금 가치 환상, 가치 착각 속에서 환각상태와 같은 희로애락의 물결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가치착각의 환각상태가 깨져야 실제 행복이 시작 됩니다.
나는 지금 가치의 환각상태다
(다니엘 2:25~49)
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34.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44.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는 지금 가치의 환각상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는 지금 가치의 환각상태다’
질문으로 말씀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희로애락(喜怒哀樂) 중에 어떤 감정에 속해 계십니까?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의 감정의 상태는 신앙적으로 볼 때에 환각상태와도 같습니다. 마약을 하면 환각상태가 됩니다. 골방에 있으면서도 시원한 파도소리가 들리는 바다에 와있는 것처럼 느끼거나, 하늘 위를 날아가는 새와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각은 꼭 마약을 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환각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에 실패한 자녀가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 슬픔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음으로 인해 생겨난 정상적인 정신활동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이것이 가치라는 마약이 가져다 준 환각입니다.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세속적 대상들은 그 자체가 환상이고 착각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들 또한 올바를 수 없습니다.
가치에 의해 좋고 나쁨의 판단이 생깁니다. 이러한 판단에 의해 희로애락의 감정이 좌우됩니다. 그러나 이 가치가 애초에 환상이고 착각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생겨난 희로애락의 감정 또한 환각상태에 빠져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또 이러한 가치 판단에 의해 생겨난 생각들 또한 오류투성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환각상태에 빠져서 오류투성이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화폐환상(Money illus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폐에는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있습니다. 명목가치는 지폐에 인쇄된 금액대로의 가치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실질가치는 돈을 실제로 사용할 때에 얻어질 수 있는 가치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10년 전에 만 원으로 짜장면을 다섯 그릇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두 그릇 밖에 살 수 없다고 해봅니다. 그러면 만 원이라는 지폐의 명목가치는 똑같지만 실질가치는 매우 떨어진 것입니다. 물가상승에 따른 구매력의 변화가 실질가치에 적용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20년 전에 1,500원의 시급을 받던 사람이 지금은 5,000원을 받고 있다면 임금은 3배 이상 올랐지만 물가가 더 많이 올랐다면 오히려 임금은 떨어진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전보다 돈을 더 많이 받으니 돈을 많이 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화폐환상이고 화폐착각입니다. 또는 은행에서 지금 8,000만 원을 넣으면 10년 뒤에 1억을 주겠다는 상품을 내놓습니다. 넣어만 두면 2,000만 원이 더 생긴다고 좋아할 수 있겠지만, 10년간 물가상승률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실질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1억이라는 명목가치만 생각하는 것이 화폐환상이고 화폐착각입니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이 가상화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재차 제기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환상이고 쥐약이고 신기루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튤립이라고도 했습니다.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사기꾼들에 의해서 수많은 파산자를 양산시켰던 튤립공황 사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니엘서의 내용에 따르자면 화폐환상은 가상화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가치 전체가 착각이고 환상과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소중함 많음 넓음 강함 약함 아름다움 추함 등등의 가치들이 좋고 나쁨을 느끼게 해주는 기준들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세상의 가치들 때문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마약을 먹고 환각상태에 빠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가치를 가졌음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다면 환각상태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가치를 갖지 못했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있다면 역시 환각상태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착각이고 환상에 불과하다면 참된 가치는 무엇일까요?
참된 가치는 말 그대로 참으로 나의 마음을 채워서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는 대상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가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렇다면 참 가치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이 땅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참 가치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직 좋고 나쁨의 판단기준은 하나님을 가졌는지 못 가졌는지에 달렸습니다. 이 세상에는 좋고 나쁨의 판단기준으로 삼을 대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느냐 마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장사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면 이것은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닙니다. 좋고 나쁨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면 장사가 전혀 안 돼도 좋은 상태입니다. 반대로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장사가 아무리 잘 돼도 나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돈이 벌리기도 하고 안 벌리기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인해 기뻐하거나 슬퍼합니다만 이것은 결코 올바른 상태가 아닙니다. 돈으로 인해 생겨난 슬픔은 환각상태에 빠져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환각에 빠져서 기뻐할 일이 아닌데 기뻐하고 있고 슬퍼할 일이 아닌데 슬퍼하고 있습니다.
본문 26~30절까지는 다니엘이 왕에게 부름을 받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어제 보았던 것처럼 느부갓네살 왕은 나라의 뛰어난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불러 모은 후에 자신의 꾼 꿈을 맞추고 또한 해석까지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것을 해내지 못하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부당한 명령은 선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것이 선민들을 통해 알려지고 표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이러한 삶의 모습을 영사기에 비유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러한 영사기와 같이 되기 위해서는 1장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연합이 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깨끗함이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다니엘은 깨끗함을 위해 채식을 고집했고,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편식장이가 됨으로써만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편식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끊임없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끗함을 유지하던 다니엘은 은밀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가서 그 꿈의 내용을 맞추고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 꿈의 내용이 참 복잡합니다. 먼저 한 우상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32~33절을 보면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남이 꾼 꿈을 이렇게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46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도 너무나 놀라서 다니엘에게 절하며 총리의 자리에 앉힙니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있어서 해석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꿈의 궁극적 해석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기존의 세상 나라들을 다 파괴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꿈 해몽 사건은 BC.602년이고 예루살렘의 함락이 BC.586년에 일어났으니 아직 예루살렘이 건재하던 시기였습니다. 만약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통해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이 은밀한 것을 주장하시는 주권자로 인정했다면 예루살렘을 재차 침공해서 성전을 파괴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의 해석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복잡한 꿈의 내용을 완벽하게 묘사한 것에 매우 감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이해는 느부갓네살 왕의 이해에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꿈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학자들은 이 꿈을 하나님이 가지신 이 세상 나라들의 명멸에 대한 주권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금으로 된 머리는 바벨론 왕국을 말하고, 은으로 된 가슴과 팔은 이후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들어서게 될 메데와 바사(페르시아)를 말하고, 또 배와 넓적다리는 불과 10년 만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세워진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헬라 제국을 말하고, 그리고 쇠로 된 종아리와 쇠와 진흙으로 섞여있는 발은 로마 제국과 그 이후의 세상 나라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제국들이 손대지 아니한 돌에 의해 부서지고 망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손대지 아니한 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맞습니다만 개개인의 삶과 연관된 보다 구체적인 해석 또한 가능합니다.
이 제국들은 역사적으로 상당한 기간을 두고 흥망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로마 제국만 남아있던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예언으로만 이해하고자 한다면 해석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다니엘의 꿈 해몽을 보다 개인적인 영역에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통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지만 예수님이 오신 사건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가 신상을 부시듯이 이 땅의 나라들을 파괴시킴으로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바벨론을 멸망시키지도 않으셨고 메데나 바사를 멸망시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이 되셔서 세상 나라를 쳐서 부서뜨린다는 의미는 35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45절에서도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이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의 속성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에 부서지게 될 세상 나라의 핵심적인 가치들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부서지게 될 신상은 곧 세상의 가치체계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이 땅에 내려오게 된 하늘나라는 세상의 모든 가치체계를 부수면서 확장되어 나가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세상을 지배할 모든 나라들은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이라는 신상으로 표현된 가치체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치체계를 부수시고 파괴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시리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대로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면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서 나타난 신상이 파괴되듯이 마음에서 세상의 가치체계가 파괴되게 됩니다.
이 가치체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금이 머리로 나타나고 그보다 못한 은은 가슴과 두 팔로써 언급됩니다. 금과 은은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모든 가치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이 금과 은처럼 소중하고, 또 나인 성 과부와 같은 사람에게는 외아들이 금과 은처럼 소중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금과 은처럼 소중했습니다. 금과 은이 소중하지만 그 중에서도 금과 은의 서열이 존재하듯이 우리 마음에서도 소중함의 정도가 다릅니다.
또 놋으로 상징되는 것은 광대한 영토를 언급합니다. 알렉산더는 고작 10년 만에 지중해 연안과 중동 전체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합니다. 이것은 넓고 많고 큰 것으로 대표되는 숫자로 환산되는 가치들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들 이 수치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땅은 물론이고 돈이 그 대표적 대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쇠로 된 종아리와 진흙이 섞인 발이 나타납니다. 쇠로 된 종아리는 로마의 권세와 강함이라는 가치를 상징합니다. 타인을 정복하고 제압하며 경쟁에서 이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발에는 쇠에 진흙이 섞여있었습니다. 이것은 약함과 천함을 상징하는 가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 나라들은 이러한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을 좋게 여기고 그로부터 기쁨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또 세상의 가치가 없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그로부터 분노와 슬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 가치체계를 부숴버리시는 분으로써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모든 생각과 감정과 계획과 꿈이 환각과 환상과 착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 담고 사는 동안에는 환각과 환상과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기뻐할 필요가 없는데 기뻐했고 슬퍼할 필요가 없는데 슬퍼했습니다. 좋아할 이유가 없는데 좋아했고, 화를 낼 필요가 없는데 화를 내고 미워할 이유가 없는데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시는데 이러한 세상의 가치체계를 파괴할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세상 사람들의 인격 구조는 사진기와 같은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대상들을 마음에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인 대상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신상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소중함의 기준, 넓고 크고 많은 수치적 기준, 강함과 이김이 기준이 되어서 마음에 받아들인 것들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좋거나 나쁘다고 여겨지면 그에 따라 감정이 생깁니다. 생각을 통해 계획과 뜻이 생겨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애초에 마음에 들여놓는 대상과 판단하는 기준이 착각이고 환상과 환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생각과 행동도 허황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세상의 대상들을 마음에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세상의 가치체계를 가지고 판단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이 많으면 기뻐하고 손님이 없으면 슬퍼합니다. 그러한 감정이 생겨나는 이유는 마음속의 소중함, 수치적 기준 등의 판단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좋고 나쁨의 판단이 이루어지면 그에 따른 감정이 생겨나고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본래 마음을 채우기에 합당한 대상이 아니기에 착각과 환상과 환각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환각상태에 빠져있는 나는 부서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다보면 내 속에 세워져있는 가치체계의 신상이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면 또한 부활과 승천의 과정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삶이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까지 따라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에서는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십니다. 진정으로 좋고 나쁨을 결정짓는 유일한 가치가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왕의 음식을 거절하면서까지 깨끗함을 유지하려 했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왔지만 나라가 있고 없음은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서도 하나님과 연결만 된다면 좋을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것은 선민들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을 향해 바벨론에서 집도 짓고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살라고 하였습니다. 포로생활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함을 통해 선민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마음에 하나님을 담고 나면 세상에서는 좋고 나쁨의 판단이 사라지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가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다면 좋은 것이고, 하나님과 멀어졌고 끊어지게 되었다면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판단기준이 되면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은밀한 것이 표현되는 영사기의 삶이 됩니다. 하나님을 가졌다면 돈이 안 벌려도 슬퍼할 일이 아니며 돈이 잘 벌려도 기뻐할 일이 아니게 됩니다. 다만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오직 은밀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표현되는 대상일 뿐이지 결코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때문에 기쁜 자에게는 오직 중립적으로 은밀한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과정일 뿐 잘되고 잘 못된다는 개념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돈이 안 벌린다고 해서 잘 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못 벌게 하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뿐입니다. 기쁨과 슬픔은 하늘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졌으면 기쁜 것이고, 하나님을 못 가졌으면 슬픈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졌으면 영생을 누릴 것이고, 하나님을 못 가졌다면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해주십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가치체계를 부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사로잡고 있는 세상에서 배운 가치체계를 부수는 돌입니다.
다니엘이 해석한 느부갓네살 왕의 꿈은 단순히 제국들의 흥망을 내다보았던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바벨론이 망하고 다음에 메데와 바사가 일어났다가 망하고 다음에 헬라가 일어났다가 망하고 로마제국이 오고 로마제국 후에는 각 나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해몽의 요점은 아닙니다. 마지막 날까지 이 세상 사람들은 신상이 뜻하는 바대로 세상에서 배운 가치체계를 따라 좋고 나쁨을 판단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완전히 환각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가치들은 결국 인간세상이 만들어낸 약속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명목가치가 있을 뿐이지 실질가치는 전혀 없습니다. 진정으로 변함없는 기쁨과 만족을 주느냐에 대해서 세상의 대상들은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실질가치가 없는 세상의 대상들을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니 삶은 괴롭고 지칠 뿐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산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는 곳이 됩니다.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나님 때문에 좋고 나쁨의 문제가 해결된 뒤라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시는 것도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이셨고, 빌라도에 의해서 사형을 언도받으시는 것도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이셨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처럼 삶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은밀함 속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표현되는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에 세상의 가치체계는 무너지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기쁨을 결정하는 가치이심을 믿고, 이 세상은 은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우리를 향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곳임을 믿으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기 같은 기질이 나타나는 나를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죽은 자로 인정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영사기가 됩니다. 돌에 의해서 신상이 부서지듯이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이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이 세상의 가치체계의 신상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타작마당의 겨 같이 바람에 불려 간 곳 없게 해주시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굳건히 세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