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본질과 진실을 물어보는 일 / 말의 품격의 작가 이기주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반청지위총 내시지위명(反聽之謂聰 內視之謂明 ).” “들은 것을 거듭하여 되새기면 귀가 총명하다고 할 수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면 가히 눈이 밝다고 할 만하다”는 가르침이다.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응당 지켜야 할 예의와 자세를 일러주는 문장이다. ‘총명(聰明)’이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사람이라는 하나의 우주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의도를 짐작하려면 상대의 말을 되새겨 총명하게 듣고 심안(心眼)을 부릅떠 상대의 속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질문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다.
질문(質問)에서 질(質)은 ‘진실’, ‘바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질문은 ‘상대에게 사물과 현상의 본질과 진실을 물어본다’는 뜻이다. 말은 본디 침묵을 통해 깊어지는 것이지만, 때로는 침묵을 깨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심은 무엇인가를 질문을 통해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질문의 본질이다.
언젠가 TV에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임창동 씨가 운영하는 대안 학교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든 학교였다. 학생들은 문제아가 아니라 세상살이에 적응하는 데 남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아이들 같았다. 수업 분위기는 독특했다. 아이들은 교실에 앉아 있기보다 텃밭을 가꾸거나 자연과 호흡하는 법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임창동 작곡가가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도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수업 시간에 두 학생이 사소한 일로 다툼질했다. 그런데 임 작곡가는 아이들을 따끔하게 혼내지도, 그렇다고 억지로 화해를 종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두 학생을 지그시 바라보며 “네 기분은 어때?”, “친구는 어떤 기분일 것 같아?”, “지금 어떻게 하고 싶어?”라는 식으로 덤덤하게 질문했다. 그는 대화의 적재적소에 질문을 심어, 그 지점에서 솔직한 대답이 싹트기를 기대하는 듯했다.
그러자 세상을 향해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것 같던 아이들이 하나둘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작은 창으로 든 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사람처럼,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기며 한 아이가 입을 열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제가 잘못하면 무조건 회초리를 맞았어요. 이유를 묻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 감정과 생각을 털어놓기도 싫었어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저를, 제 마음을 존중해주는 것 같아요….”
임창동 작곡가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임 작곡가의 입에서 나온 말과 아이들의 귀로 스며든 말에는 낙차가 없었다. “싸우지 마”, “어서 화해해”처럼 자칫 명령조로 들릴 수 있는 문장을 아이들에게 하달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아이들의 정서적 저항만 불러일으키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들 마음에는 저마다 강이 흐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말이 우리의 귀로 들어오는 순간 말은 마음의 강물에 실려 감정의 밑바닥까지 떠내려온다. 마음속에서 명령과 질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명령이 한쪽의 생각을 다른 한쪽에 흘려보내는 ‘치우침의 언어’라면, 질문은 한쪽의 생각이 다른 쪽에 번지고 스며드는 ‘물듦의 언어’다.
질문 형식의 대화는 청자(聽者)로 하여금 존중받는 느낌이 들게 한다. 때에 따라 듣는 이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 길을 걷다가 머리와 가슴에서 궁금증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면 입술을 실룩거리며 질문을 토해냈다. 언젠가 한 번은 “눈은 왜 차가운 거죠?” 하고 물었더니 어머니가 이렇게 설명했다.
“눈? 눈은 수증기가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변해버린 거야.”
“정말요? 그런데 왜 변해요? 그냥 수증기나 물의 모습으로 떨어져도 되잖아요?”
“응, 그건 말이지. 지구에 오래 머물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물컹물컹한 상태로 땅에 닿으면 금방 사라지잖아.”
“아, 지구에 오래 머물고 싶어서….”
‘가르친다’는 뜻의 영어 단어 ‘educate’는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부모나 교사가 일방적으로 생각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잠재적 능력을 발현하도록 밖에서 돕는 게 진짜 가르침이다.
어머니도 그랬던 것 같다. 어머니는 엉뚱한 내 질문에 짜증 섞인 말을 내뱉거나 귀를 막지 않으셨다. 늘 자상한 목소리로 나와 허밍하듯 질문을 주고받으며 보편적 정의뿐만 아니라 시적인 정의까지 들려주었고, 질문을 통해 내 머리와 마음에서 상상력을 끌어냈던 것 같다.
평소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각자의 마음속에 저마다 다른 풍경의 비밀 정원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는 타인이 잘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추억과 상처, 이루지 못한 꿈이 처연하고 은밀하게 어우러져 있을 것만 같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 정원을 살짝 엿보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 동네 어귀 한 귀퉁이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빼꼼히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질문이라는 까치발을 들어보면 어떨까. 어차피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세상살이의 근본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출처] ‘말의 품격, 말과 사람의 품격에 대한 생각들(이기주, 황소북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