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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김씨
신라왕국은 총56왕 992년 간(BC 57년~AD 935년)을 유지하였으며, 이 중 신라김씨가 38왕 587년을 통치하였고, 박씨 10왕 232년, 석씨 8왕 173년을 통치하였다.
선산 김씨의 시조는 신라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과 고려(AD918~1392년) 태조(왕건) 의 낭랑공주와의 사이에서 탄생하신 여덟째 아들인 상서령 일선군 김추(金錘)이시다. 이외 에도 경순왕의 후손에서 파생된 김씨는 경산(11세손), 길안(9세손), 남원(9세손), 삼척(2자), 영광(8세손), 영월(3자 7세손), 옹진(3자 13세손), 원주(8세손), 진주(13세손), 춘양(11세손) 등 이 있다.
시조 김추와 선산김씨 4대 계파
시조 김추의 16세인 김문(金文)은 고려 말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을 지냈으며, 4형제 분을 두었는데 선산김씨 중서령공파, 판서공파, 좌의정공파 및 별장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중서령공파조(中書令公派祖) 김성원은 고려 공민왕대에 서운관정(書雲觀正)을 지내고 중서령(中書令, 종1품)이었는데, 그 아들인 고려 말 광주(廣州)목사를 지낸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는 고려사직의 운명이 다할 무렵(1380년??) 관직을 버리고 관향(貫鄕)인 선산 산 촌에 자리 잡고 은거하여 생을 마치고 사대(四代) 독신으로 외롭게 세계(世系)를 계승하였 다. 그 후 화의군의 현손(玄孫)인 이조참판 김광좌는 현 구미시 고아면 원호리와 문성동에 걸친 마을 “들성”에 정착하여 선산김씨(속칭 들성김씨) 600년의 세거지(世居地)로 명성을 드높였다. 그 동안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들성에는 200여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해평 배내(舟川), 구미 사창, 금릉 조마, 숭산 등지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인근 각지에 널리 퍼져 살고 있다.
판서공파조(判書公派祖) 김성부는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으로 호조판서에 올랐고 태조가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이어(移御)할 때 호종하였다가 3년 뒤 태조가 환도할 때(1402년 12월) 수행치 않고 함경북도 길주 땅에 은거하다가 생(生)을 마치 고 그의 아들인 조산대부(朝散大夫) 밀양교수(密陽敎授) 김경도는 함경남도 단천 고읍(古邑) 에 정착하여 지금의 단천군 하다면(端川郡 何多面) 금안동 150여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밖에 단천군 이중(利中), 광천(廣泉), 신숙(新宿) 등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인접한 이원(利原), 북청(北靑), 풍산(豊山), 성진(城津) 등지에 널리 퍼져 살고 있다.
좌의정파조(左議政派祖) 김성룡은 고려 말 산원동정을 지냈고 조선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어 벼슬은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에 이르고 화의부원군에 봉하여졌다. 그의 아들 탁 (逴)은 통정대부 병조참의, 증손 정신(鼎臣)은 통정대부, 안동 도호부사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경기도 이천을 중심으로 산거하고 있다.
별장공파조(別將公派祖) 김성여는 고려말 별장동정에 이르고 그 자손은 평안도에 세거 (世居)하며 그 아들 선(選), 손자 요신(堯臣), 순신(舜臣)이 있다는 기록은 있으나 행적은 알 지 못하고 있다.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4형제가 모두 경상도, 함경도, 경기도, 평안도로 흩어 져 살고 있다.
중서령공파
시조 일선군 김추의 18세 입향 시조이신 화의군(중서령공 김성원의 아들 김기)께서는 고려 말에 광주(廣州)목사를 지내셨는데 고려의 멸망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고자 선산 으로 낙향하시어 들성에 터전을 잡으셨다. 화의군의 5세는 광필, 광보, 광좌 3형제분이었으 며, 3남이신 참판공 광좌는 6형제분을 두셨다.
시조 22세 즉 화의군 5세 이조참판 광좌는 장남 취성(진락당공파 시조), 2남 취기(별제 공파 시조), 3남 취연(교위공파 시조), 4남 취련(찰방공파 시조), 5남 취문(문간공파 시조), 6 남 취빈(참봉공파 시조)을 두셨다.
별제공파
별제공파의 파조는 선산김씨 시조 일선군의 23세이신 별제공 취기(就器)이며, 그 아들 24세 좌승지공, 손자 25세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석지(錫祉), 증손 26세 호조참판 탄옹 공 경(교하현감, 함흥판관, 호조좌랑 역임)으로 이어진다. 탄옹공은 하량, 하동, 하영, 하주 및 하강 5형제(시조 일선군의 27세=화의군 10세)를 두셨는데, 탄옹공의 후손인 우리는 배내 를 중심으로 번창하였다. 탄옹공 경(1582-1637)은 정묘호란 시에 금오랑에 재수되었고 병자 년에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소무녕사원종에 3번이나 참여하였고 함흥판관을 역임하였고 증 직 호조참판이며 남강서원에 배향되었다. 2010년 여헌학연구회에서 편찬한 “여헌학단 II(장 인채 편저)”에 수록된 탄옹공 관련 내용의 일부를 뒤에 첨부하였다.
탄옹공의 장남 하량의 후손은 별재공파의 종손인 희교, 2남 하동의 후손은 알려져 있지 않고, 3남 하영의 후손은 광묵, 학묵, 태교, 시교이고, 4남 하주의 후손은 교진, 순교, 진묵, 양묵, 길묵, 홍묵이고, 5남 하강의 후손은 숙조, 영조, 문조, 광삼이다.
시조 27세 하강 - 28세 인섭 - 29세 봉수(계자, 언섭의 자, 하주의 자 언섭은 하영의 계 자가 되었음) - 30세 세횡까지 독자로 이어져 오다가 31세 윤경이 이인, 이운, 이연, 이관 4 형제를 두셨다. 장남 이인(연안이씨, 시조 32세)의 후손은 숙조씨 집안이고, 차남 이운(利運, 평산신씨, 호 반정 盤亭)의 후손은 사준, 광삼이다. 즉, 이운은 남기(골실댁), 화기(시조 33 세, 우리) 형제를 두셨으며 우리 고조부이신 화기(和炁)는 성원, 수원, 복원 3형제(시조 34 세)를 두셨다. 우리의 고조부이신 화기의 자는 순경(舜卿)이다. 우리(시조 37세) 친목 모임의 명칭은 고조부의 자인 순경을 따서 “선산김씨 별제공파 순경공 고손 친목회”로 함이 옳은것 같다.
성원(자 致賢, 호 죽헌, 1834-1876)은 상주 도시(道試)와 한성시(漢城試)에 급제하여 성 균관 수강생으로 천거되었으나 42세에 요절하시었다. 임금으로부터 규장전운(奎章全韻) 옥편 (玉篇)과 어정사부수권(御定四部手圈) 1질을 하사 받았다. 안동권씨와의 사이에서 딸만 셋 두었는데 사위는 옥산 장석호, 의성 김광진, 상산 김수협이고 계자는 복원의 장남 소동(召 東)이다. 수원(자 致可, 1838-1884)은 부림홍씨와의 사이에서 외동딸을 두었는데 사위는 신 천 강기식이고 계자는 복원의 4남 필동(必東)이다. 복원(자 致雷, 1844-1924)은 우리의 생 증조부인데 한산이씨에서는 후손이 없고 영천최씨(1873-1947)와 사이에서 3남2녀를 두었다. 증조부가 나이 차이가 30년이나 나는 영천최씨를 배필로 맞을 때의 일화가 있는데, 증조모 한산이씨가 돌아가신 후 그 이듬해 2월 친구인 군위 최대형씨의 딸이 있음을 알고 “딸을 우 리 주시게” 하니 친구는 당연히 자녀들 혼사라 여기고 탄옹공 후손과 정혼함을 기뻐하며 “신랑은 어찌 생겼는가?” 하고 물으니 증조부께서 “나와 똑 같이 생겼네.”하시니 최씨가 흔 쾌히 승낙하였다 한다. 혼인날 가마가 도착하여 최씨가 보니 사돈으로 알았던 친구이던 증 조부가 사위이어서 “이게 어찌된 일인가?”하니 “내가 나와 똑 같이 생겼다고 하지 않았던 가?” 하고 결혼에 성공하였다 한다. 그렇게 하여 3남2녀를 두시고 81세까지 장수하셨는데 그 증손이 바로 우리들이다.
복원 증조고께서는 말년에 눈이 멀어서(백내장?) 앞을 보지 못하시었는데 백씨 성원의 행적과 서울서 돌아가신 후 가매장하였던 유골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이장하는 과정을 교상 (성동어른, 사준 조부)씨에게 구술하여 “백씨 죽헌처사 추원기”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첨부 와 같다.
1추- - -17성원-18기(화의군)-19가명-20유찬-21제-22광좌- 23취기(별제공)-24공-25석지-26경(탄옹공)-27하강-28인섭-29봉수-30세횡(계:문강공)-31윤경(처사공)
일선군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화의군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윤경 이인 천기 성은 우동(국언) 1725-1775 1750-1792 1771-1842 1794-1832 1827-1915
36세 37세 19세 20세
수묵 용교1889 1852-1929 <상주>
38세
21세
숙조1914<이한> 연조1922<돌팥>
한조,태조
학조
성조,석조 병조,란조
승조
영조 민조1911<골실> 정조1915<갈현> 만조1926<진실> 오조1940 형조1935
진억1972, 진영 태희,병철 (풍천임씨) 수인 (성주도씨) 지영,준민 (남평문씨) (평산신씨) 원담
동휘,혜주 (진주강씨) 민지 (김해김씨)
(반남박씨) (밀양박씨) 민규
나현
은주,은성,영광 은숙,부조
(전주류씨) 훈조,진주 은미,은경,덕조
(전주이씨) (해주오씨) 설령,성조 하경
(전주이씨) 경태,도향 (풍양조씨) (봉화금씨)
39세 40세 22세 23세
사영 준갑, 사웅
시환, 사윤 사철
사준 1932 봉구 사영,사채,필구
사윤 사옥
광주이씨 풍양조씨
평산신씨
진주강씨 상산김씨
김해김씨 해주오씨
전주최씨 진성이씨
김녕김씨 합천이씨
영천이씨 평산신씨
연안이씨
(섬계공) 밀양박씨 <밀양>
한산이씨 1722-1758
옥산장씨
인교 낙용 장묵 헌교 원교 필교
이운 남기 익원 태동 평산신씨 1762-1827 1791-1844 1824-1888 1846-1905
1738-1779
호 반정
연안이씨 는 요절
경주노씨 에서 4형제
자 한경 풍양조씨
화기 성원 소동 1798-1861 1834-1875 1890-1958
일선
1939- <원당>
광산노씨 성희*1936 성묵*1938 영묵
성준
응용
진묵 경교(우동)
순묵 교상 1872-1946 1894-1969 양성이씨 동래정씨 1872-1961 1891-1977 <문수> <성동>
영교 1911-1995 나주정씨 1907-1981 <용호>
응묵 광삼1945 1914-1982 교인1948
자 안동권씨 남양홍씨 양성이씨
교연*1950 한성시급제 <도개> <문국> 교문1953
순경舜卿 도시급제 1891-1946 일선김씨
1915-1986
3남2녀
사위 부림
홍치영
수원 필동 김술노 1838-1884 1905-1989
부림홍씨 풍양조씨
복원 1844-1924 (고옹)
한산이씨 졸1888.4.19
재취 1889.2.13. 영천최씨 1873-1947
<신리>
경묵 1923-1998 경주노씨 1925-1945 영천이씨 1929-1993 <숭암>
교숙*1948
교원1953
선희*1956
해숙*1960
교환 1963-2011
교훈1967 희옥*1967 교열1972 교선*1957 교주*1979
(광주이씨) (창녕성씨) 교정*1969 정수*1971 준수1974
사위
옥산장석호
의성김광진
상산김수협 영천황보씨
1912-????
<번개> 1941-2002
광묵 1929-1984
이연
이관 미상
미상
일선김씨 부림홍씨
1905-???? <임천>
자동 1900-?
1925-1988 <수동>
순악* 1931-1968
우묵 1934-1981 의성김씨 1932- <사일>
순자*1940
성묵 1935-
전주이씨 밀양박씨 1910-???? 1943-
(필동)
수원 양자
풍양조씨 1944-
사위
신천강기식 <상주> 준호1979
(소동)
백동 1895-1971
희숙*1953 성원 양자
일묵 1925-2005
(인동장씨)
교욱 1945-1991
교록 1948-2014
교화*1951 교탁1954 교성1957 (밀양박씨)
교희*1956 영희*1959 교덕1961 교영1969 (인동장씨) 경숙*1965 교준1967 경*1970 경자*1973
온양방씨
탄옹 선생
여헌학단 2 (장인채 편저, 2010, 사단법인 여헌학연구회) 중 탄옹공과 관련된 부분의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1. 생애
선생은 선산 김씨로 휘는 경(맑을 경)이고 자는 정여이며 호는 탄옹이다. 선조 15년(1582)에 증 호조참판 석지 공의 아들로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평성리(들성) 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기이한 기질이 있는데다가 모부인의 엄하고 바른 훈육으로 의지가 굳고 말과 행동이 바르게 자랐다. 모부인 은 신천 강씨 극재 경선공의 따님인데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한 열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어른들을 따라 금오산으로 피란을 갔다. 여기서 조부 승지공과 부친 참판공이 전염병으로 함께 돌아가시고 양대의 장례 준비를 하던 모친마저 자결하고 나니 하늘이 무너지는 애통함을 억제할 길이 없었으나 우선 당장 해야 할 일은 장례 치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11세라는 어린 아 이로 집안의 도움을 얻고 이웃에 호소하여 난리 와중에서도 관곽을 갖추어 장례 를 마치니 모두들 그의 효성과 의지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난리 가운데서 경황없 이 치른 장례라 온전할 리가 없었다. 묘역이 기울고 불안하게 보여 항상 마음이 편지 못하였다. 그래서 21년 뒤인 광해 5년(1613)에 땅을 가리고 예법을 갖추어 이장하였다.
고아가 된 선생은 집안어른들의 보살핌으로 구김살 없이 자랐는데 의표가 단 정하고 의지가 굳세고 성품이 온화하며 도량이 넓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50년 지기인 재종형 양탄공(휘는 양)은 선생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온화하 면서 풀어지지 아니하고 엄하면서 거칠지 아니하며 주는 것은 반드시 굳이 사양 하고 요구하는 것은 응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오직 의에만 나아갈 뿐 이익은 따르 지 않았다.” 고 하였으니 선생의 일생 동안의 행적으로 볼 때 매우 적확한 평이라 하겠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인데다가 종증조부 진락당 구암 두 선생 이래 전수한 가학을 익혀 선비의 자질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선생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넓은 차원 높은 세계를 향하여 꿈을 펼쳤다. 그래서 정한강, 장여헌 두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의 대도를 듣고 그 문하에서 수학하는 현사들과 교유하면서 자신을 키워나갔다. 그 결과 광해9년(1617) 36세에 성균관 생원이 되어 선비로서 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인조 5년(1627)에 청나라 군사가 침입하자 의병을 일으켜 북진하려는 즈음에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인조께 서 특별히 의금부 도사를 제수하였다. 이해 9월에 역적 이인거를 잡아 소무공신에 책봉되었고 이듬해 정월에 역적 정효립을 잡아 영사공신에 책봉되었다. 인조 6년 (1628)에 교하현감으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어 청렴하다는 이름이 그 고을에 길이 남게 되었다. 인조 12년(1636)에 함흥판관으로 나갔다가 이내 사임하고 돌아왔다. 인조 14년(1638)에 청병이 갑자기 침입하자 아들 하량과 함께 혹한을 무릅쓰고 인 조대왕의 어가를 호종하였다. 이듬해인 인조 15년(1637)에 호조좌랑으로 발탁되었 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는데 일어나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이해 8월에 호종한 공로로 사헌부 장령으로 증직되고 3년 뒤인 인조 18년 (1640)에는 승정원 좌승지로 추서되었다가 다시 호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정조 16년(1792)에는 선생의 덕행을 추앙하는 유림의 공의에 의해서 욕담 양 탄 두선생과 함께 남강서원에 배향되었다.
2. 강씨부인의 정절
강씨 부인은 탄옹 선생의 어머니로 신천인 경선공의 따님이다. 부인은 천품이 현숙한 부덕을 갖춘 데다가 지조 또한 견고하여 부녀자의 본보기라 해도 그의 행 적으로 보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임진년(1592)에 왜구가 침입하지 남편과 함께 연로하신 시아버지를 모시고 11 살 난 아들(탄옹 선생)을 데리고 금오산 바위굴로 피신하였다. 8월 9일 시아버지 가 염병으로 운명하고 이틀 뒤인 11일에는 남편이 사망하였다. 부인은 세상이 뒤 집히는 난리 속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우 선 두 시신을 산기슭에 가매장하고 난리가 숙지면 고향으로 모시려고 준비하던 중 뜻 데로 되지 않아 12살 난 아들을 남겨 둔 채 자결하고 말았다. 이 사연을 여 헌 선생이 그의 남편 묘비에 소상하게 기록하였기에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성백 효 선생의 역문이다.
강씨부인은 성품과 행실이 정숙하고 깨끗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였다. 집안을 다스림 에 부지런하고 부인의 직분에 통달하였으며 시부모를 공손히 섬기고 남편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 며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고 기르기를 반드시 바르게 하니 이웃과 친족들이 덕이 있다고 칭찬하였 다.
부인은 마침내 도망하여 피난하는 가운데 망극한 애통을 거듭 만나 실로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두 초상을 제대로 장례하지 못하여 흙속에 얕게 묻혀 있었고 한 고아는 사생를 분별하기 어려 웠다. 이 두 가지 어려움이 있으므로 차마 대번에 자결하지 못하였으나 짧고 굵은 줄을 마련하여 항상 허리에 차고 다녀 갑자기 곤궁한 일을 당하면 반드시 자결할 뜻이 있는 듯하였다. 어려운 가 운데서도 항상 장례 치르는 일을 염려하여 남은 옷과 치마를 모두 팔아 명주와 삼베 등의 물건을 사서 광중에 쓰는 여러 도구를 장만하여 난리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다음 해인 계사년(1593) 여름, 왜구가 물러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부인은 장례도구를 받들 고 어린 고아를 이끌고 고향산천으로 돌아오니 이때는 명나라 군사가 본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장례일행은 방 중에 어렵게 길을 걸어 겨우 가까운 들에 이르렀으나 잘못하여 구덩이에 빠져 싣 고가던 장례도구를모두잃고슬피통곡하였으나어찌할방도가없었으며또명군이마을에가 득하여 장례를 지낼 길이 없었다.
부인은 남편을 잃고 과부로 사는 것을 수치로 여겨 문득 자진하기로 결심하고 어린 아들을 여러 조카들에게 부탁하였다. 친족들이 각기 군사들을 피해 가느라 경황이 없자 부인은 일부러 사 람들 뉘에 쳐져 있다가 마침내 차고 있던 굵은 줄로 목을 매어 과연 자결하니 이해 여름 6월 모 일이었다. 부인의 출생은 남편보다 4년 아래이고 별세는 1년 뒤에 하였다.
남편의 묘비에 부인의 행적을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하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이 다. 이 묘비가 아니었다면 강씨부인의 서릿발 같은 정절이 전해지지 못하였을 것 이다. 현대 여성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생사기로에 서 헤매는 난리판에 시아버지와 남편의 장구를 잃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죄책 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조선시대 여인의 모습이었다. 조선시대 여인 의 가치관은 자신보다 시부모와 남편이 우선이었고 난리 와중에서도 효와 정절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도덕적 당위였던 것이다.
“여헌학단 II”의 탄옹 선생 편은
1. 생애
2. 강씨부인의 정절
3. 한강 선생과 탄옹 선생
4. 여헌 선생과 탄옹 선생
5. 학문
6. 교유
7. 탄옹재
8. 탄옹 선생의 의리
9. 맺는 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 39쪽에 이른다.
형님 죽헌처사 추원기
머리말
이 책은 나의 종고조(휘 복원, 자 치부, 호 고목옹)가 남기신 글이다. 이 글 의 내용은 종고조가 만년에 앞을 못 보셨기에 부르는 것은 나의 아버지께서 받아 적으신 초고가 집안에 묻혀 있었는데 수동(일묵) 아제가 인효의 성으로 찾아서 발간하여 이 글속에 담겨진 뜻을 후세에 전하자는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니 글이 화려한 것은 아니나 연보를 닦듯이 조목을 정리하여 사 실을 기술하였는데 빈곤한 선비 집안의 처지에서 꾸밈없이 있는 그데로를 적었는 데 효제충신의 도를 실천하고 일가친척의 화목과 봉친에 정성을 다하는 것을 낙 으로 삼으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종고조께서는 탄옹공의 8대손으로 선친에게 학 문을 배워 유망이 높았으나 일생을 율신과 재행을 생활신조로 삼고 세상일에 초 연하셨으며 자수와 천리를 행동강령으로 삼으신 엄정한 유자요 야인이셨으나 불 행하게도 만년에 실명하시어 스스로 호를 고옹이라 하시기도 하였다.
이 책에 담겨있는 참뜻을 우리는 다 같이 이해하고 스스로 몸을 닦아 수제에 힘쓰고 지효고행으로 참다운 명문의 후예임을 자랑하는 생활을 권하고 싶어 감히 머리말에 붙인다.
1996년 병자 단양절 종현손 만조가 삼가 쓰다.
간행사
조부의 유집은 수차례의 재난으로 일실되고 보존치 못하여 자손으로서 죄스런 마음 금할 길 없던 중 일부이기는 하나 “백씨 추원기”가 발견되었다. 이 유고는 만년에 눈이 어두워 앞을 못 보셨던 까닭에 부르는 것을 삼종질 야암(교상)씨가 받아쓴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니 한문으로 되어 있어 해독하기 어려워 고심하던 중 선고(백동)의 명으로 경주인 미산 태섭 선생에게 번역을 의뢰하였으나 선고께 서 그 이듬해 돌아가시고 원고가 없어져 찾을 길이 없어 한탄하던 중 종제 영묵 군 집에서 나와 자손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 같아 발간하니 자손들은 할아버지 의 교훈을 잘 지켜 사람답게 살아가기 바라는 바이다.
이유고 발간을 주선해준 족손 만조의 수고에 감사하며 종제 영묵군이 출판경 비를 부담하여 주어서 치하하는 바이다.
1996년 병자 4월 불초손 일묵 읍서
선조 탄옹공(26세 경, 1582-1637), 판결사 해탄공(27세 하량, 1605-1687) 및 대 사헌 만오공(28세 원섭, 1640-1710)의 3대는 왕명을 받들었으며, 한서를 하사 받 았다. 증조부 섬계공(31세 윤경, 1725-1775)과 사포공(윤신) 형제분은 만오공의 3 손이신 주감공(30세 도진, 1707-1792)의 제자이시다.
여러 대를 살아오면서 가보처럼 전하여 오던 조상이 남기신 유고를 발간치 못 하고 재난 시에 다 태워버렸으니 자손의 도리를 못하여 불초를 면할 길 없으니 통탄한 심정 금할 길이 없다.
증조모는 전취 한산이씨는 밀양종조부(이인)을 낳으시고 돌아가신 후 후취인 평산 신씨께서 반정공 3형제분(이운, 이연, 이관)을 낳으셨다. 조모 전·후취 두분 중 초취인 연안이씨는 젊어서 돌아가시고 후취인 안강 노씨께서 선고 형제분(남 기, 화기)을 낳으셨다.
조부(이운)계실 적에 아버지(화기)와 같이 종사를 돌보심에 스스로 종물을 아 껴서 모은 돈으로 초가삼간을 마련하였고 종숙주(천기)께서는 사종제(성은)와 상 의하여 섬계공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아버지 형제분은 농사를 지어 가난을 면하면서 학문에 힘을 써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으며, 의방으로 자녀 교육에도 힘썼다. 1824년 사촌 익원이 태어나니 성품이 유순하고 총명이 출중하였고 장성해서도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일가친 척과 화목하고 종사는 거의 혼자서 맡아서 하였다. 1834년에 큰 형님 성원이 태어 나니 용모가 단정하고 성질이 강건하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장성해서는 더욱 부 지런하여 틈틈이 보리뿌리를 캐어다가 화목으로 때기 위하여 짚더미처럼 쌓았으 니 온 집안에서 앞으로 부귀할 것이라 칭찬하였다. 큰 형님에게 거는 기대가 컸으 므로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서로 상의하여 산두(도개면 가산리) 3종조 문하로 글 읽도록 보내어 주야로 열심히 공부하니 족숙 칠원영감(?)께서 크게 칭찬하셨다. 큰형님이 장성하여 안동 권우의 따님과 정혼하니 사돈집에서는 탄옹공의 후손이 라 하여 크게 기뻐하였다.
가운이 불행하여 1848년 4월 17일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마침 큰 형님(나 이 15세)은 도시(지방과거시험) 참석 차 부재중이어서 아버님이 몹시 섭섭해 하셨 으나 상주도시에 급제하여 돌아오니 기뻐하셨다. 1853년에 심한 흉년이 들어 생활 이 어려웠다. 아버지께서 “금년은 흉년이 들어 너의 공부에 다소 지장이 있을 것 이나 공부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진사 족숙(?)과 상의하시고 3일 만에 아버님이 큰 형님을 대리고 순흥 전부(영주군 순흥면에 가니 경향각지에서 온 유생들로 강당이 만원이라 아버님이 2일을 머무시고는 진사족숙에게 형님을 맡겨두 시고 떠나시면서 “자리가 좁아서 공부에 지장이 있을 것이 염려되나 일단 여기에 왔으니 공부에 전념하고 부모 보러 자주 오지 말 것이며 시간을 아껴서 공부에 전념하라.” 하셨다.
8월 초하룻날 공부에 필요한 용품을 사서 원당동으로 보내고 아버님이 원당으 로 가시어 3일을 머무신 뒤 전부에 들려 이틀 만에 방 한 칸을 얻어 친구와 합숙 하여 침식을 같이하니 둘 사이가 친형제와 다름없었다.
이듬해인 1854년 4월 10일에 형님이 집에 가기를 청하였다. 진사족숙이 금년 여름은 여기서 지내고 가라하시니 형님이 대답하기를 “어머님 제사가 며칠 남지 않았고 집에 있는 아우는 아직 나이가 어려 농사짓기에 어려움이 있으니 금년 농 사를 마치고 다시 와서 공부를 계속하겠습니다.” 하였다. 이튼 날 떠나는데 진사 족숙이 돈 5문을 형님에게 주시면서 농자금에 보태 쓰라 하셨고 용담형주께서는 5리까지 배웅하면서 돈 2문을 주더라. 15일에 집에 돌아와 부양 못한 불효를 용서 빌었더니 아버님이 “너의 허물이 아니라 나의 가난의 소치이다. 그러나 크게 될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이 사소한 가사 따위를 걱정하느냐” 하셨다.
6월 벼논을 멜 무렵에 재종질 국언(숙조씨 증조부)씨와 같이 해평 최씨와 괴 곡 박씨를 데리고 서당에 돌아오니 군실씨가 “서당은 어느 때 지었느냐?” 묻기에 형님이 답하기를 “증조부 섬계공께서 지었다.”하니 치호씨가 다시 당호를 묻기에 마을 뒤에 용못이 있으니 용연이라 함이 어떠냐하자 치호씨가 당 뒤에 대나무가 있으니 죽헌이라 하면서 형님의 호를 지어주니 형님이 “나에게 호가 가당하겠느 냐”하며 겸손해 하였다.
1865년 8월에 형님(32세)이 상경하여 한성시에 급제하니 아버님이 기뻐하시며 “여러 대 만에 급제소리를 들으니 기쁘고 이 아이가 장차 대성하리라”하셨다. 1861년 7월에 아버님 병환이 중하시어 식음을 폐하고 잠을 못 이루시어 형님이 의원에게 문약한 즉 노환으로 허약한 소치라 하면서 약 열첩을 지어주어 달여 드 렸으나 별 효험이 없기에 닭에 인삼 두냥 중을 넣어 삼계탕을 만들어 드렸더니 효험이 있었다. 9월 그믐날 아버님 병이 더 악화되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젊었을 때 열심히 공부하여 영광을 누리고 위로는 부모님의 한을 풀어드리며. 아래로 자 손의 영화를 기대하였더니 과복이라 조물이 시기하니 하는 수 없고 너의 형제 미 성으로 둔 채 이 세상을 하직하노라”하는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시니 10월 6일 이었다. 형님께서 아버님 상을 당하시어 초종장례와 대소상에 정성을 다 못하시어 평생에 여한이라 하셨다.
1864년 가을에 주서공의 억울함을 알리고자 신문고를 울린 적이 있는데 알아보니 희량의 모친이 주서공 부자 분을 모함하여 주서댁 사노가 주인댁의 억울함 을 못 참아 스스로 혀를 끊고 죽으니 그 아들은 아버지의 억울함에 격하여 차례 로 죽어가니 이 원통함을 나라에 호소하고 신원하기 위하여 신문고를 울렸다 한 다.
1865년 가을에 형님이 상경하여 항성시에 급제하시고 10월에 집에 돌아와 작은 형님(수원) 혼사를 율리 부림 홍씨댁으로 정하여 성례하고 이듬해에 다시 서울 로 가셨는데, 가시는 길에 우천(??)에 들리니 계당장께서 “귀 선조 탄옹공의 공적 은 사적에 있어 알겠지만 위로 3대는 대소과에 급제한 적이 있으나 그 후에는 여 러 대를 관직에 들지 못하다가 이제 그대가 관직에 오르니 기쁘다.”고 하시며 인 삼 5종과 붓 2자루를 주셨다. 조령을 넘어서니 때마침 홍수가 나서 강을 건널 수 가 없어서 과거 길에 들었던 선비들이 모두 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지라 이때 형님은 사촌에게 편지를 전하여 “선조 탄옹공께서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죽 음을 무릅쓰고 창의호종하여 국가에 큰 록훈을 세우신 일이 있는데 지금도 역시 전하께서는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염려하시니 어찌 신하된 도리로 홍수 따위를 겁을 내어 못가겠는가”하는 뜻을 알리고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하니 참봉숙 주께서 반가워하시면서 “영남선비들이 홍수로 거의 다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들었 는데 오직 그대만이 과거에 응하러 왔으니 과연 탄옹공의 뒤를 이을 인물이로다.” 하시며 기뻐하셨다.
과거 날을 며칠 앞두고 형님께서 걱정하시니 참봉숙주 말씀이 “과거에 급제하 고 못하고는 개인의 신운에 달렸으니 너무 심려 말라”하시며 위로하셨다. 주인 정 명섭씨 집에서 그해 겨울을 지내는데 12월 10일 통독시(외우는 시험)에 응시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려 하니 참봉숙주가 만류하시면서 “이조에 들어와서 봄가을로 삼 남과시(남쪽 지방을 위한 임시 과거)를 보였는데 양서인(평안도, 황해도)들이 반대 하여 폐지되었더니 지금 4-5인이 모여 의논하기를 삼남과시가 부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운현궁에 장계를 낸다하니 가능한 일이라 기다려 보게.”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형님이 예안의 이명로, 회덕의 송병원, 의성의 오병일 등과 협조하여 운 현궁에 장계를 올렸더니 운현궁의 원위장이 답하기를 “지금은 엄동설한이고 국법 도 지엄하니 어찌할 수 없고 불원 과시가 있을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것 이다. 할 수 없이 형님은 그 이듬해 정월에 집으로 돌아 오셨다.
1871년 2월 24일에 참봉숙주 부자분의 편지를 순흥 전주 하인이 가지고 왔기 에 읽어보니 즉시 상경하라는 내용이었다. 형님은 그 이튿날 서둘러 집을 떠나 3 월 6일에 서울에 도착하니(서울까지 10일정도?) 참봉숙주가 반기면서 “성력이 이 만하면 운수는 제대로 따를 것이다.”하였다. 1872년 가을에 기회가 있어 규장전운
1875년 봄(을해)에 또 서울로 가시니 왕이 영상이하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친 히 대성전에 거동하시어 시 한수를 읊으시고 그 시를 명륜당에 시판으로 편액하 고 시책을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10월에 형님이 집에 돌아오시어 큰딸을 신동 장씨댁으로 혼처를 정하여 12월 에 성례하고 이듬해 정월에 다시 상경하시어 3월에 사촌(익원)에게 편지를 보내어 전하시기를 “병자원종공신이신 탄옹 선조의 증직을 못 받아 불초를 면할 길이 없 으니 곧 있을 왕의 회갑날을 기하여 은전이 있을 것이라 이때를 이용하여 상소하 고 거기에 드는 비용은 문중에서 백냥 정도 모아서 이 일을 추진하자.” 하였다.
1877년 1월 3일 본군관리가 편지 한장을 전해주어 뜯어보니 천만뜻밖에도 형 님이 작년 10월 1일에 별세하였다는 부고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한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리오! 하늘도 무심하다 아우가 있어도 불민하여 형님이 병이 나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도 몰랐다가 3개월이 지난 지금에야 부음을 접하니 철천지한이 천지에 가득하였다. 가족이 모여 3일 만에 성복을 지내고 돈 석냥을 구하여 서울로 떠나려하니 질녀 형제가 나의 옷깃을 잡고 통곡하니 이웃 사람들도 따라 슬퍼하더라. 낙동 장터까지 가니 산두(도개) 4종형제가 나와 우연 히 만나서 비보를 듣고 1문을 부조하고 모산(?)에 이르니 유희칠 족형이 또 위로 금을 주더라. 이튿날 정명성씨 집에서 위로금 1문을 받고 고생고생하면서 문경세 재를 넘어 서울로 길을 떠나니, 하루 노자가 평균 4돈 5푼이 드는구나. 서울에 도 착하여 형님의 친구인 예안의 이명로씨와 칠곡의 강사현씨를 만나 형님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으니 형님 병환 중의 약값이 20냥이고 치료비가 20냥, 장례비가 40 냥인데 그 중 관대를 팔아 20냥, 행구를 팔아 30냥에 여사(선비들 숙소)에서 여러 선비들이 모은 부조 30냥으로 모든 비용을 충당하였다는 것이다.
이튿날 시장에 나가 사기 그릇 한 개를 사서 그 안에 “선산김성원지묘”라고 써 서 들고 이명로씨의 안내를 받아 동문 밖의 묘소를 찾아가서 지석대신에 사기그 릇을 묘 앞에 깊이 파묻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정건섭씨에게 들리니 낙삼(?) 척 형이 와 계셨다. 내게 정건섭씨에게 편지 전하는 것을 보고 나의 안색을 살피다가 하는 말이 “오백리 원로에 형제간의 정의가 지중하여 이 같이 찾아오니 감탄할 일이라” 하면서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형님의 유해를 고향으로 모시는 큰일은 어려워 명년으로 미루고 서울 온 김에 여러 대신들 집이나 찾아가 인사나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기에 나도 그 말이 옳다싶어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먼저 한판서댁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승지댁을 방문하니 청지기가 하도 거만하여 좀 꾸짖고 안으로 들어가 승지영감을 뵈니 말씀하시기를 “당신의 백씨 가 과거 운은 없었으나 열성은 대단한 분이었다.”고 칭찬하고 불행하게도 일찍 돌 아가시니 어찌하겠는가 하더라. 그 이튿날은 도동태를 방문하였으며, 다음날은 장 동 최우상댁을 방문하고 이어 채승지댁을 방문하였더니 채승지는 나를 위로하고 서책 12권과 현자 한 개를 선물로 주시기에 받아가지고 정건섭씨댁으로 갔다. 마 침 낙삼 척형이 외출에서 돌아와서 내일은 떠나야 하지 않겠나 하니 건섭씨가 말 을 받아 “이왕 온김에 며칠 더 쉬었다가 가라”하였다. 그날 밤은 건섭씨 댁에서 머물렀는데 밤부터 눈이 내려 다음날까지 내려서 석자나 쌓였더라. 여비로 남은 돈을 챙겨보니 겨우 4냥 1문이라 이 돈으로 그 이튿날 서울을 출발하여 눈길을 헤치면서 천신만고 끝에 집에 도착하니 십이월 구일이라 집에서는 질녀들과 종씨 가 모여 많이 걱정하면서 기다리고 있더라.
1878(무인)년 봄이 되어 반장(유해를 고향으로 모시는 일)을 계획하니 걱정이 태산이라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애통한 탓도 있었지만 반장에 대한 모든 채비 가 걱정이었다. 그때 마침 김치오(金致五)씨 조손이 찾아와서 나를 위로하고 반장 경비에 보태어 써라 하고 10문을 주더라. 여기에 힘을 얻어 떠날 준비를 차리니 종형(익원)이 3문을 주셨다. 3월 13일에 떠나려하니 문산(?) 형주가 찾아와서 나를 위로하면서 부탁하는 말이 과천가서 국언씨 댁을 찾으라 하셨다. 집을 떠나 서울 을 향하여 가는데 도중에 말도 못할 고생을 겪었다. 여비가 모자라는 터라 도중에 서 친구집을 찾고 친척집을 찾았으며 때로는 길가에 노숙도 하면서 과천에 도착 하니 3월 18일이라 허기져서 점심을 먹으니 식대가 네돈 오푼이더라.
이선전 집을 찾으니 거기가 3종질 국언의 기식하는 주인집이라 국언을 만나 도중의 고생담을 털어놓았더니 주인이 이 말을 듣고 한입으로 비참하다면서 술과 회를 사가지고 와서 같이 마시면서 위로해 주더라. 밤이 늦어 주인은 돌아가고 국 언이 말하기를 돈 10문은 어디서 구해 왔느냐 하기에 치오씨가 주더라 하니 치오 씨가 누구냐 묻기에 원촌 김주지의 손자라 하니 국언 역시 고마운 분이라 칭찬하 면서 “3종숙주의 장례는 경향이 다르기는 하나 여기서도 예는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관대를 사용하기로 하고 4문을 주고 하룻밤을 묵은 후 국언씨와 같 이 서울에 도착하여 평소 형님과 교분이 두텁던 분들을 만나고 이명로(李明魯)씨 를 따라 동대문 밖에 나가 형님 묘소를 찾으니 그 사이 환경이 많이 달라져서 분 별하기가 어려워 당황하였다. 땅을 치며 통곡하니 명로씨가 나를 위로하면서 안심 을 시켜주었다. 형님의 묘소를 찾지 못하면 강물에 투신이라도 한다는 심정으로 묘소를 찾기 시작하였다. 이 때 문림 이교리와 인동 장참판이 찾아와 함께 동대문 밖으로 나갔다. 벌써 경주의 이모씨와 의성의 김모씨는 반장을 해 갔다고 하니 마 음이 더 조급하였다. 나는 지난해 묻어둔 묘의 표석인 사기그릇을 찾기 시작하였 다. 한 묘 옆을 파보니 표석이 없었고 또 한 묘 옆을 파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다 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표석을 찾기 위하여 묘 옆을 파보았으나 실패를 거듭하니 실신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않고 다음날 또 한 묘 옆을 파보니 천만 다행하게도 내가 묻어둔 사기그릇이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재배하고 통 곡하니 성지기 오명이 다가와 위로해 주더라. 다음 날은 모두 인사차 와서 나에게 많은 위로를 하면서 부조기에 나름대로의 액수를 정성껏 적어 주었다. 선산 이교리 능화(李能和)씨, 인동 장참판 석용(張錫龍)씨, 예산 이승지 휘준(李輝俊)씨, 상 주 정승지 우묵(鄭佑默)씨. 하회 류진사 삼목(柳三穆)씨, 모산 류참봉 낙삼(柳洛三) 씨, 매원 이교리 원실(李元實)씨 등이 상의하여 통문을 내니 예산의 이승지와 문 림의 이교리가 각각 2문, 하회의 류진사가 8문을 부조하였는데 그는 거부 류지영 (柳志榮)씨의 자제이다. 부조금은 모두 800냥이 넘는 거금이 들어와서 마음에 여 유가 생겼다. 유진사는 내가 대담하게도 사흘간이나 남의 묘 옆을 파헤쳐 기필코 형님 묘를 찾아내니 그 정력과 성의가 가상하다고 거듭 칭찬하였다.
시간을 내어 예안 이승지댁에 인사차 들리니 곶감을 내어 놓고 권하면서 “형 님의 반장은 천리 먼 길인데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여 가능한 일이나 그대의 성 력 없이는 어려운 일인데 장하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또 놀랍게도 나에게 형님 을 대신하여 과시에 급제하여 원한을 설원해 보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 형님의 유해를 고향에 안장하는 일이 우선이라 그 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 이라 거절하였다.
3월 22일에 드디어 파묘를 하고 시신을 수습하여 출발하려는데 3종질 국언과 족대부 성길씨가 형님과 고생을 같이 하신 예안의 이명로씨, 칠곡의 강사현씨 등 을 데리고 찾아와 이번 운구에 동행하겠다고 나서서 일행이 많이 불었다. 서울을 출발하여 강점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으니 식대가 2냥인데 그 중 1냥은 국언씨가 부담하고 강을 건너니 좌우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더라. 이날 사평까 지 와서 1박하였다. 이튿날 10여리를 걸어 안양을 지나 장암현까지 오니 때는 바 로 논메기 철이라 논 메던 동민 10여명이 남의 동네 뒷산으로 운구 못한다고 서 기가 등등하여 폐담을 늘어놓고 있을 때 어떤 신사한 분이 우리 행차의 연유를 묻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자신을 송참의 모라로 소개하면서 자기 재종제 병 원군을 통하여 형님의 성화를 들었더니 지금 공을 만나니 그 형에 그 아우라고 위로하고 부채 한 자루와 양초 3개를 부조로 주더라. 거기서 하루를 유하고 다음 날 창수에 도착하니 홍수가 나서 도강이 어려웠으나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길이기 에 위험을 무릅쓰고 상여를 어께에 메고 강을 건너니 그 광경과 고생이 어떠하였 으리오.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강을 건너 29일에 섬곡에 다다르니 한 가마가 지나 가며 작은 창을 열고 2문을 전해주기에 알아보니 경주 최도사의 장남이더라. 낙동 강 진두에 오니 벌써 날이 저물었다. 갈 길이 바쁜 고로 무리하여 모산까지 오니 희철형이 마침 와 있기에 반가웠다. 내일 도강할 준비를 의논하였다. 다음날 모산 을 떠나 산두 주막에 도착하여 산지기를 불러서 장례준비에 대한 지시를 하고 안 보촌을 떠나가는 도중에 해운 일가를 만나 장례에 대한 의논을 하니 20문을 부조 하더라.
아침에 점평에 들어서니 집까지 10리 밖에 남지 않았는데 오는 줄을 모르는지 마중 나온 사람이 없다. 돌고개 재 밑에 이르니 하인이 오고 원촌 주막에 이르니 종형과 문산 형주가 와서 대성통곡을 하더라. 목계에 이르니 주평 이원일 동지가 와서 조문하고 돈 한냥 반과 쌀 3되를 부조하더라. 이 동지가 같이 운구를 도와서 마을 어귀에 이르니 집사람과 질녀들이 마중낭하 운구를 같이 메시고 집에 안치 하였다. 대송에 계시는 작은 형님께 통지하고 묘지는 윤주경에게 묻기로 하고 산 은 원촌 낙봉안산으로 결정하였다. 오후에는 명곡 선비 산소와 안산 선고 산소를 차례로 성묘하였는데 선고 산소의 이장은 정한 데로 4월 10일에 거행하고 형님은 12일에 안장키로 하였다. 당일에는 종형과 문산 형주, 재종질 국언씨, 3종질 기동 씨, 숭암 노씨 유천어른 등이 산상까지 와서 성의껏 협력해 주어 장례절차가 원만 히 끝나게 되어 감사하기 이를 때 없었다.
1888(무자)년에 부인 한산이씨 병세가 위중하니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청한한 가정에 시집 온지 40년이 되어도 일점혈육이 없고 시부모님께 받은 은혜 는 보답하지도 못한 체 눈을 감으니 한이 많으나 인력으로는 못하는 일이니 어찌 하리오. 군자께서는 부디 좋은 배필을 맞아 만자천손하소서.”하고 나의 손을 잡은 체 운명하였다. 4월 25일에 뒷산에 안장하고 다음해 2월 13일 의흥 율리 영천 최 씨 댁에 재혼하여 이듬해인 1890(경인)년 11월 15일에 생남(방우, 소동)하고 1895 (을미)년 5월 29일에 2남(백동)을 출산하니 손자를 기다리시다가 돌아가신 선비 생각이 간절하더라. 1900(경자)년 9월13일에 4남(자동)이 태어나고 내 나이 60이 되던 해인 1905(을사)년 12월 24일에 5남(필동)이 태어났다.
1909(기유)년 7월 13일에 도개 홍진사댁의 딸을 며느리로 정하여 성례하고 1915(을묘)년 5월 5일에 장손이 출생하니 사랑스러워 이름을 마웅(응묵)이라 하였다.
그해 7월13일에 재종 영감 국언씨가 환우 위독한 중에 나를 불러 이르시기를 증조부 섬계공을 천봉함이 어떠냐하시면서 “앞으로 모든 일은 집의 아이(수묵)와 상의하여 봉사토록 하라” 하시고 12월 12일에 별세하셨다. 유명에 따라 1916(병 진)년 1월 13일에 내가 현백(수묵)과 상의하여 소동과 같이 각각 20문씩 염출하여 계를 모아 일심계라 이름 지었다.
일심계의 취지는 효제 충신을 자손들에게 성실히 가르쳐 실행토록 할 것이며, 조상의 제례는 성의를 다하고, 일가친척 간에는 화목으로 단결하며, 가족의 건강 은 항상 깊은 관심으로 살피고, 부모를 모시는 데에는 채소와 죽이라도 정성을 다 할 쇼 것이며, 효도하는 것을 낙으로 생각하고, 옛 조상이 남기신 교훈은 자손들의 생활의 신조로 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후기 : 작성한 연대는 대략 1920년 전후로 추정되며, 번역과정에서 일부 내용 이 누락되었으나 전체적인 내용에는 큰 변화가 없는 듯하다. 또 2013년 7월에 발 간된 번역본을 한글파일로 만들면서 서기연도를 추가하고 어려운 단어는 쉬운 것으로 고쳤으며 문맥도 일부 수정하였다.
2013.12. 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