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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回 犬戎主大鬧鎬京 周平王東遷洛邑
제3회: 견융왕은 호경을 침략하고 주평왕은 동쪽 낙읍으로 도읍을 옮기다.
話說申侯進表之後,有人在鎬京探信,聞知幽王命虢公為將,不日領兵伐申,星夜奔回,報知申侯。申侯大驚曰:「國小兵微,安能抵敵王師?」大夫呂章進曰:「天子無道,廢嫡立庶,忠良去位,萬民皆怨,此孤立之勢也。今西戎兵力方強,與申國接壤,主公速致書戎主,借兵向鎬,以救王后,必要天子傳位於故太子,此伊周之業也。語云:「先發制人,機不可失。」申侯曰:「此言甚當。」遂備下金繒一車,遣人賷書與犬戎借兵,許以破鎬之日,府庫金帛,任憑搬取。
한편, 신후는 유왕에게 표를 올린 후, 사람을 호경에 보내 반응을 살피게 했다. 신후의 심복은 유왕이 괵석보를 대장으로 삼아 곧 군사를 이끌고 신국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고, 밤낮으로 달려 돌아와서 신후에게 보고했다. 신후가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군사가 적으니, 왕의 군사들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하니, 대부 여장(呂章)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천자가 무도하여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태자로 세웠으며,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이 직위를 버려서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있으며, 왕실은 고립되어 있습니다. 지금 서융(西戎)은 강력한 군사를 보유하고 우리 신국과 인접해 있습니다. 주공께서 속히 견융의 왕에게 편지를 써서 군사를 빌려 함께 호경으로 진격하여 왕비를 구하고 천자의 자리를 태자에게 전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이윤(伊尹)과 주공에 필적할 공적이 될 것입니다. 옛말에 ‘먼저 발하여 남을 제압하되 기회를 잃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하니, 신후가 말하기를, “그 말이 매우 합당하다.” 하고, 즉시 황금과 비단을 가득 실은 수레와 함께 사자에게 편지를 주어 견융에 가서 군사를 빌려 오게 하고, 호경을 깨트리는 날에 창고의 황금과 비단을 맘대로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戎主曰:「中國天子失政,申侯國舅,召我以誅無道,扶立東宮,此我志也。」遂發戎兵一萬五千,分為三隊,右先鋒孛丁,左先鋒滿也速,戎主自將中軍。槍刀塞路,旌旆蔽空,申侯亦起本國之兵相助,浩浩蕩蕩,殺奔鎬京而來,出其不意,將王城圍繞三匝,水息不通。幽王聞變,大驚曰:「機不密,禍先發。我兵未起,戎兵先動,此事如何?」虢石父奏曰:「吾王速遣人於驪山舉起烽煙,諸侯救兵必至,內外夾攻,可取必勝。」幽王從其言,遣人舉烽。諸侯之兵,無片甲來者。蓋因前被烽火所戲,是時又以為詐,所以皆不起兵也。
견융 왕이 말하기를, “중국의 천자가 실정하고 국구(國舅)인 신후가 나를 불러 무도한 왕을 죽이고, 동궁을 도와 천자로 세우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 뜻과 맞는다.” 고 하고, 곧 융병 1만5천 명을 동원하여 세 부대로 나누어 패정(孛丁)을 우선봉, 만야속(滿也速)을 좌선봉으로 임명하고, 견융 왕 자신은 중군을 거느렸다. 창칼이 길을 막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다. 신후 역시 본국의 병사를 일으켜서 거침없는 기세로 호경을 향해 쳐들어갔다. 뜻하지 않은 때에 공격하여 왕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고 물과 식량을 끊었다. 유왕이 변란이 난 것을 듣고,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기밀이 누설되어 화가 먼저 당도했다. 우리가 기병하기 전에 견융의 군사가 먼저 쳐들어왔으니 이 일을 어찌 해야 하는가?” 하니, 괵석보가 아뢰기를, “대왕께서는 속히 사람을 여산에 보내 봉화를 올리도록 명하십시오. 제후들의 구원병이 틀림없이 올 것이니, 그때 안팎으로 협공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했다. 유왕이 그 말을 따라 사람을 보내 봉화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제후들의 구원병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대개 그것은 전에 봉화를 보고 달려와서 놀림을 받았던 제후들이 이때에도 또 자기들을 희롱하기 위하여 올리는 봉화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구원병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幽王見救兵不至,犬戎日夜攻城,即謂石父曰:「賊勢未知強弱,卿可試之。朕當簡閱壯勇,以繼其後。」虢公本非能戰之將,只得勉強應命,率領兵車二百乘,開門殺出。申侯在陣上望見石父出城,指謂戎主曰:「此欺君誤國之賊,不可走了。」戎主聞之曰:「誰為我擒之?」孛丁曰:「小將願往。」舞刀拍馬,直取石父。鬥不上十合,石父被孛丁一刀斬於車下。戎主與滿也速一齊殺將前進,喊聲大舉,亂殺入城。逢屋放火,逢人舉刀,連申侯也阻當他不住,只得任其所為,城中大亂。
유왕이 구원병은 오지 않고 견융의 군사들이 밤낮으로 성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괵석보에게 말하기를, “적세가 강한지 약한지 아직 모르니, 경이 한번 시험해 보기 바란다. 짐이 젊은 용사들을 뽑아 경의 뒤를 따르겠다.” 하니, 괵석보는 원래 싸움에 능한 장수가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이 왕의 명을 따라, 전차 200대를 이끌고 성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괵석보가 성을 나오는 것을 진에서 바라본 신후가 괵석부를 가리키며 견융의 왕에게 말하기를, “저놈이 임금을 속여 나라를 그르친 도적입니다. 달아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했다. 견융의 왕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누가 나를 위해 저놈을 잡아오겠느냐?” 하니, 패정이 말하기를, “소장이 가기를 원합니다.” 하고, 칼을 휘두르며 말을 박차고 나가 곧바로 괵석보를 취했다. 싸운 지 십여 합도 안 되어, 괵석보는 패정의 칼을 맞고 목이 잘려, 전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견융의 왕과 만야속이 일제히 앞으로 쇄도하여 함성을 크게 지르고 어지러이 베면서 성으로 들어갔다.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칼을 휘둘렀다. 신후는 그들을 말리다 못해, 견융의 군사들이 하는 대로 맡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성안은 크게 어지러웠다.
幽王未及閱軍,見勢頭不好,以小車載褒姒和伯服,開後宰門出走。司徒鄭伯友自後趕上,大叫:「吾王勿驚,臣當保駕。」出了北門,迤邐望驪山而去。途中又遇尹球來到,言:「犬戎焚燒宮室,搶掠庫藏,祭公已死於亂軍之中矣。」幽王心膽俱裂。鄭伯友再令舉烽,烽煙透入九霄,救兵依舊不到。犬戎兵追至驪山之下,將驪宮團團圍住,口中只叫:「休走了昏君!」幽王與褒姒唬做一堆,相對而泣。鄭伯友進曰:「事急矣!臣拼微命保駕,殺出重圍,竟投臣國,以圖後舉。」
유왕이 열병(閱兵)할 겨를도 없이 형세가 위급해진 것을 보고, 포사와 백복을 작은 수레에 태우고 궁궐의 뒷문을 열고 달아났다. 사도 정백 우가 뒤따라 나오면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왕께서는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폐하의 어가를 호위하겠습니다.” 했다. 그들은 북문을 나가서 구불구불 여산을 향해 갔다. 도중에서 도망쳐 오는 윤구를 만났다. 윤구가 말하기를, “견융이 궁궐을 불사르고 창고를 약탈했습니다. 제공(祭公)은 난군 중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했다. 유왕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여산에 당도한 정백 희우(姬友)가 다시 봉화를 올리라고 군사들에게 명령하자, 봉화의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그러나 구원병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견융의 군사들이 여산 아래에 쫓아와서 여산의 별궁을 포위하고 큰소리로 외치기를, “혼암한 임금은 달아나지 말라.” 했다. 유왕과 포사가 놀라서 서로 붙들고 울었다. 정백 우가 나아가 말하기를, “일이 급합니다. 신이 보잘것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어가를 보호하겠습니다. 우선 포위를 탈출하여 잠시 신의 나라에 가셔서 훗날의 일을 도모하십시오.” 했다.
幽王曰:「朕不聽叔父之言,以至於此。朕今日夫妻父子之命,俱付之叔父矣。」當下鄭伯教人至驪宮前,放起一把火來,以惑戎兵。自引幽王從宮後衝出。鄭伯手持長矛,當先開路。尹球保著褒后母子,緊隨幽王之後。行不多步,早有犬戎兵攔住,(乃是小將古里赤。)鄭伯咬牙大怒,便接住交戰。戰不數合,一矛刺古里赤於馬下。戎兵見鄭伯驍勇,一時驚散。約行半里,背後喊聲又起,先鋒孛丁引大兵追來。鄭伯叫尹球保駕先行,親自斷後,且戰且走。卻被犬戎鐵騎橫衝,分為兩截。
유왕이 말하기를, “짐이 숙부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짐의 부처와 부자의 목숨이 모두 숙부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니,
정백이 즉시 사람을 여산 별궁 앞으로 보내어 불을 놓아 견융의 군사를 유인하게 했다. 그 틈에 정백 우는 유왕을 이끌고 여산 별궁 뒤를 무찌르고 나갔다. 정백은 손에 긴 창을 잡고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윤구가 포사 모자를 보호하면서 곧바로 유왕의 뒤를 따랐다. 일행이 얼마 가지 못했을 때 어느새 견융의 군사들이 가로막았다. (바로 소장 고리적(古里赤)이었다) 정백이 이를 갈며 크게 노하여 바로 맞붙어 싸웠다. 싸운 지 수 합이 되지 않아 정백이 한 창으로 고리적을 찔러 말에서 떨어뜨렸다. 견융의 군사들이 정백의 빼어난 용맹을 보고 놀라서 일시에 흩어졌다. 그 틈을 타서 일행이 약 반 리 정도 갔을 때 뒤쪽에서 함성이 또 일어났다. 견융의 선봉 패정이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했다. 정백이 윤구를 불러 어가를 보호하여 먼저 가게 하고, 자기는 뒤를 끊으면서 싸우고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견융의 철기병이 가로질러서 그들 일행을 둘로 잘랐다.
鄭伯困在垓心,全無懼怯,這根矛神出鬼沒,但當先者無不著手。犬戎主教四面放箭,箭如雨點,不分玉石,可憐一國賢侯,今日死於萬鏃之下。左先鋒滿也速,早把幽王車仗擄住。犬戎主看見袞袍玉帶,知是幽王,就車中一刀砍死,並殺伯服。褒姒美貌饒死,以輕車載之,帶歸氈帳取樂。尹球躲在車箱之內,亦被戎兵牽出斬之。統計幽王在位共一十一年。因賣桑木弓箕草袋的男子,拾取清水河邊妖女,逃於褒國,(此女即褒姒也。)蠱惑君心,欺凌嫡母,害得幽王今日身亡國破。
정백이 철기병에게 포위되었으나 전혀 두려운 기색도 없이 창을 잡고 휘두르는 용력이 신출귀몰하자 앞에선 견융의 군사들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견융의 왕이 사면에서 활을 쏘라고 지시하자,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져 옥석을 가리지 않았으니, 가련하게도 주나라의 어진 제후가 그날 수없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좌선봉 만야속이 어느새 유왕의 어가를 붙잡았다. 견융의 왕이 곤룡포와 옥대를 보고 유왕인 줄 알아보고, 어가로 나아가 한 칼로 유왕을 베어 죽이고 아울러 백복을 죽였다. 포사는 미모로 죽음을 면하여 경차의 장막 안에 싣고 돌아가 즐기려고 했다. 윤구는 어가 안에서 숨어 있다가 견융의 군사에게 발각되어 밖으로 끌려 나와 참수당했다. 유왕은 모두 11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다. 뽕나무 활과 풀로 엮은 화살통을 팔려고 했던 남자가 청수하 강변의 요녀를 수습하여 포국으로 도망가서 키웠고 (이 요녀가 곧 포사이다) 포사가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적실의 왕후를 기만하고 능멸하여, 오늘날 유왕은 몸이 죽고 나라가 깨지게 되었다.
昔童謠所云:「月將升,日將沒;檿孤箕箙,實亡周國。」正應其兆,天數已定於宣王之時矣。東屏先生有詩曰:「多方圖笑掖庭中,烽火光搖粉黛紅。自絕諸侯猶似可,忍教國祚喪羌戎。」又隴西居士詠史詩曰:「驪山一笑犬戎嗔,弧矢童謠已驗真。十八年來猶報應,挽回造化是何人?」又有一絕,單道尹球等無一善終,可為奸臣之戒。詩云:「巧話讒言媚暗君,滿圖富貴百年身。一朝駢首同誅戮,落得千秋罵佞臣。」又有一絕,詠鄭伯友之忠。詩曰:「石父捐軀尹氏亡,鄭桓今日死勤王。三人總為周家死,白骨風前那個香?」
옛 동요에 이르기를, “달은 뜨고 해가 지니, 산뽕나무 활과 기초 풀로 만든 화살통으로 주나라가 망하는구나!” 했다. 그 징조가 바로 응했지만, 하늘의 운수는 이미 선왕 때에 정해진 것이었다. 동병선생(東屏先生)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갖은 방법을 써서 궁궐 속의 웃음을 보려더니, 봉홧불에 그 화장한 얼굴이 붉게 흔들리네. 스스로 제후들을 속였으니 누구를 탓할까마는, 어찌 나라를 오랑캐에게 잃게 하였는가?” 또 농서거사(隴西居士)가 역사를 노래한 시에 이르기를, “여산의 한 웃음소리에 견융이 화가 났고, 활과 화살을 노래한 동요가 이미 징조를 나타내자, 18년 만에 드디어 보복을 받는구나! 조화를 다시 바로잡을 사람은 누구인가?” 했다. 또 윤구 등 생을 좋지 않게 마친 간신들을 경계하기 위한 시에 이르기를, “교묘한 아첨으로 어리석은 왕을 미혹하여, 부귀를 평생 누리려고 온갖 짓을 다 했건만, 하루아침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임을 당하여, 천추에 간신이라는 욕을 먹게 되었구나.” 했다. 또 다른 한 수의 시는 정백 희우(姬友)의 충절을 노래하여 이르기를, “괵석보와 윤구도 다 죽었으나, 정환공은 그날 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세 사람은 모두가 주나라 왕실을 위해 죽었지만, 비바람 속에서 어느 백골이 향기로울까?” 했다.
且說申侯在城內,見宮中火起,忙引本國之兵入宮,一路撲滅。先將申后放出冷宮。巡到瓊臺,不見幽王褒姒蹤跡。有人指說:「已出北門去矣。」料走驪山,慌忙追趕。於路上正迎著戎主,車馬相湊,各問勞苦。說及昏君已殺,申侯大驚曰:「孤初心止欲糾正王慝,不意遂及於此。後世不忠於君者,必以孤為口實矣!」亟令從人收殮其屍,備禮葬之。戎主笑曰:「國舅所謂婦人之仁也!」卻說申侯回到京師,安排筵席,款待戎主。庫中寶玉,搬取一空,又斂聚金繒十車為贈,指望他滿欲而歸。
한편, 성안에 있던 신후는 궁궐 안에서 화기가 치솟는 것을 보고 바삐 신국의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 안으로 들어가서 불을 끄게 하고, 냉궁에 갇혀있던 신비를 구출했다. 경대를 둘러본 신후는 유왕과 포사의 종적을 찾지 못했는데, 어떤 사람이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미 북문으로 나갔습니다.” 했다. 유왕의 일행이 여산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한 신후는 황급하게 뒤를 쫓다가 도중에 여산에서 되돌아오는 견융 임금의 거마와 마주치자 각기 그 노고를 위로하고 물었다. 유왕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신후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나는 원래 왕의 사악한 행동을 고쳐주려고만 했거늘, 뜻하지 않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후세에 임금에게 불충한 자들은 반드시 내 이름을 들먹이며 구실을 삼을 것이다.” 했다. 신후가 급히 따르는 사람들에게 명을 내려 유왕의 시신을 거두어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게 했다. 견융의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국구가 한 일은 소위 아녀자의 인자함이오.” 했다. 한편, 신후가 호경으로 돌아와 잔치를 열고, 견융의 왕을 대접하고, 부고(府庫)의 보물들을 모두 꺼내 바치고, 다시 금은과 비단 열 수레를 거두어 주고, 그가 만족하여 돌아가기를 바랐다.
誰想戎主把殺幽王一件,自以為不世之功,人馬盤踞京城,終日飲酒作樂,絕無還軍歸國之意。百姓皆歸怨申侯。申侯無可奈何,乃寫密書三封,發人往三路諸侯處,約會勤王。那三路諸侯,北路晉侯姬仇,東路衛侯姬和,西路秦君嬴開。又遣人到鄭國,將鄭伯死難之事,報知世子掘突,教他起兵復仇。不在話下。 單說世子掘突,年方二十三歲,生得身長八尺,英毅非常。一聞父親戰死,不勝哀憤,遂素袍縞帶,帥車三百乘,星夜奔馳而來。早有探馬報知犬戎主,預作準備。掘突一到,便欲進兵。
견융의 왕이 유왕을 잡아 죽인 일을 세상에 다시없는 큰 전공으로 생각하고 군사들과 함께 호경에 머물며 매일 종일토록 음주 가무를 즐기면서, 좀처럼 자기 나라로 돌아갈 뜻이 없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주나라 백성들은 모두가 신후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신후가 어찌할 수가 없어서 밀서 세 통을 써서 삼로(三路) 제후에게 보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왕실을 구원하라고 요청했다. 그 삼로 제후란 북로는 진후(晉侯) 희구(姬仇), 동로는 위후(衛侯) 희화(姬和), 서로는 진군(陝君) 영개(嬴開)였다. 또한 정나라에도 사람을 보내어, 정백이 전사한 일을 세자 굴돌(掘突)에게 알리고, 그 나라 군사를 이끌고 원수를 갚으라고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한편, 정백의 세자 굴돌은 나이 23세로 신장이 팔 척이고 그 풍모가 아주 영특하고 굳세었다. 부친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굴돌은 애통함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바로 흰 도포를 입고 흰 띠를 두르고 전차 3백 승을 이끌고 밤을 도와 호경을 향해 진군했다. 어느새 정찰 기마병이 견융의 왕에게 보고하자 견융의 왕은 군사들에게 미리 준비를 시켰다. 굴돌은 왕성에 도착하자 곧바로 공격을 시작하려고 했다.
公子成諫曰:「我兵兼程而進,疲勞未息,宜深溝固壘,待諸侯兵集,然後合攻。此萬全之策也。」掘突曰:「君父之仇,禮不反兵。況犬戎志驕意滿,我以銳擊惰,往無不克。若待諸侯兵集,豈不慢了軍心?」遂麾軍直逼城下。城上偃旗息鼓,全無動靜。掘突大罵:「犬羊之賊,何不出城決一死戰?」城上並不答應。掘突喝教左右打點攻城。忽聞叢林深處,巨鑼聲響,一枝軍從後殺來。乃犬戎主定計,預先埋伏在外者。掘突大驚,慌忙挺槍來戰。城上巨鑼聲又起,城門大開,又有一枝軍殺出。
공자(公子) 성(成)이 간하기를, “우리 군사는 쉴새 없이 달려와서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땅히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굳게 지키면서, 제후들의 군사가 모이기를 기다린 뒤에 힘을 합하여 공격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하니, 굴돌이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는 데는 군사를 돌이키지 않는 것이 예(禮)다. 더욱이 견융의 군사들이 교만한 생각이 가슴에 가득 들어찬 때에 내가 날카로운 기세로 태만해진 그들을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만일 제후들의 군사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린다면 어찌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해이해지지 않겠는가?” 하고, 곧 군사들을 휘몰아 왕성 밑에까지 달려갔다. 성 위에는 깃발도 세워지지 않았고 북소리도 나지 않아 전혀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굴돌이 크게 욕하기를, “개돼지 같은 도적들아! 어찌하여 성 밖으로 나와 죽음을 걸고 싸우려 하지 않느냐?” 하니, 성 위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굴돌이 좌우에게 소리쳐서 성을 공격하라고 했다. 갑자기 우거진 숲속 깊은 곳에서 큰 징소리가 울리더니 한 떼의 군사가 뒤로부터 쇄도해 왔다. 그들은 곧 견융의 왕이 계책을 세워 미리 성 밖에 매복시킨 군사들이었다. 굴돌이 크게 놀라서 황망히 창을 잡고 싸웠다. 성 위에서 큰 징소리가 다시 울리더니 성문이 활짝 열리고 또 한 무리의 군사들이 튀어나왔다.
掘突前有孛丁,後有滿也速,兩下夾攻,抵當不住,大敗而走。戎兵追趕三十餘里方回。掘突收拾殘兵,謂公子成曰:「孤不聽卿言,以至失利。今計將何出?」公子成曰:「此去濮陽不遠,衛侯老誠經事,何不投之?鄭衛合兵,可以得志。」掘突依言,吩咐望濮陽一路而進。約行二日,塵頭起處,望見無數兵車,如牆而至。中間坐著一位諸侯,錦袍金帶,蒼顏白髮,飄飄然有神仙之態。那位諸侯,正是衛武公姬和,時已八十餘歲矣。掘突停車高叫曰:「我鄭世子掘突也。犬戎兵犯京師,吾父死於戰場;我兵又敗,特來求救。」
굴돌의 앞에는 패정이, 뒤에는 만야속이 양쪽에서 협공했다. 굴돌은 당해내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견융의 군사들이 30여 리를 추격하다가 되돌아갔다. 굴돌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공자 성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싸움에서 패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공자 성이 말하기를, “여기서 위(衛)나라의 복양(濮陽)이 멀지 않습니다. 위후는 나이가 많고 성실하며 경험도 풍부한 분입니다. 왜 그곳으로 가지 않습니까? 우리 정나라와 위나라가 합세하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했다. 굴돌이 그 말에 따라 군사들에게 복양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분부했다. 행군한 지 이틀째 되는 날, 멀리 먼지가 일어나는 곳에 무수한 군사와 전차가 오고 있었다. 그 중간에 앉은 한 사람의 제후가 비단 도포에 황금 띠를 두르고 늙은 얼굴 흰 머리에 득의양양하게 신선의 자태가 있었다. 그 제후는 바로 위무공 희화였다. 그때 나이가 이미 팔십여 세였다. 굴돌이 수레를 멈추고 소리를 높여 외치기를, “나는 정나라 세자 굴돌입니다. 견융의 군사가 경사(서울)를 범하여 나의 아버지가 전장에서 죽었습니다, 우리 군사도 또한 패했으므로, 특별히 와서 구원을 청합니다.” 했다.
武公拱手答曰:「世子放心。孤傾國勤王,聞秦晉之兵,不久亦當至矣。何懮犬羊哉?」掘突讓衛侯先行,撥轉車轅,重回鎬京,離二十里,分兩處下寨。教人打聽秦晉二國起兵消息。探子報道:「西角上金鼓大鳴,車聲轟地,繡旗上大書『秦』字。」武公曰:「秦爵雖附庸,然習於戎俗,其兵勇悍善戰,犬戎之所畏也。」言未畢,北路探子又報:「晉兵亦至,已於北門立寨。」武公大喜曰:「二國兵來,大事濟矣!」即遣人與秦晉二君相聞。
위무공이 두 손을 모아 읍을 하면서 말하기를, “세자는 안심하기 바랍니다. 나는 우리 위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왕성을 구하러 왔습니다. 들으니, 진(秦)과 진(晉)의 군사들도 머지않아 이곳에 당도할 것입니다. 어찌 견융의 무리를 걱정하겠습니까?” 했다. 굴돌은 위무공에게 먼저 지나가게 하고, 수레를 돌려 위군의 뒤를 따라 다시 호경으로 향했다. 그들은 호경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두 곳에 나누어서 영채를 세웠다. 사람을 시켜 진(秦), 진(晉) 두 나라가 군사를 일으킨 소식을 자세히 알아 오게 했다. 정탐하러 보낸 사람이 보고하기를, “서쪽에서 징소리와 북소리가 크게 나고, 전차 소리가 땅을 진동시키며, 비단 깃발에 크게 쓴 글자가 ‘진(秦)’ 자였습니다.” 하니, 위무공이 말하기를, “진(秦)의 작위가 비록 부용(附庸)이나 오랑캐의 풍속에 익숙하고, 그 병사들은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여 견융들도 두려워합니다.” 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북쪽 길로 갔던 탐지병이 또 보고하기를, “진(晉)나라 군사도 당도하여 이미 북문에 영채를 세웠습니다.” 하니, 위무공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두 나라 군대가 왔으니 대사가 해결되었소.” 했다. 곧 사람을 보내어 진(秦)과 진(晉) 두 나라 군주를 초청했다.
須臾之間,二君皆到武公營中,互相勞苦。二君見掘突渾身素縞,問:「此位何人?」武公曰:「此鄭世子也。」遂將鄭伯死難,與幽王被殺之事,述了一遍。二君歎息不已。武公曰:「老夫年邁無識,止為臣子,義不容辭,勉力來此。掃蕩腥羶,全仗上國。今計將安出?」秦襄公曰:「犬戎之志,在於剽掠子女金帛而已。彼謂我兵初至,必不堤防。今夜三更,宜分兵東南北三路攻打。獨缺西門,放他一條走路。卻教鄭世子伏兵彼處,候其出奔,從後掩擊,必獲全勝。」武公曰:「此計甚善!」
얼마 후에 두 나라 군주들이 위무공의 진영에 당도하여 서로 노고를 위로했다. 두 나라 군주가 소복을 입고 있는 굴돌을 보고 묻기를,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니, 위무공이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정나라의 세자 굴돌입니다.” 하고, 이어서 정백 우가 전사한 것과 유왕이 피살된 일을 말해 주자, 두 나라 군주들이 탄식해 마지않았다. 위무공이 말하기를, “늙은이가 나이만 많이 먹고 아는 것은 없지만 오로지 신하가 되어 의(義)로움을 사양할 수 없기에 힘을 다하여 이곳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오랑캐를 소탕하고자 하니 모든 일은 상국(上國)의 처사에 따르겠습니다. 이제 계책을 어떻게 정할까요?” 하니, 진양공(秦襄公)이 말하기를, “견융의 목적은 여자와 금과 비단을 노략질하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우리 군사들이 이제 막 온 것을 알고, 틀림없이 방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밤 삼경(三更)에 군사들을 동쪽 남쪽 북쪽 세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하고, 서문만은 비워서 그들이 달아날 길을 열어 놓은 후에, 정세자를 매복시켜 그들이 도망쳐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뒤에서 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했다. 위무공이 말하기를, “이 계책이 대단히 훌륭하오.” 했다.
話分兩頭。再說申侯在城中聞知四國兵到,心中大喜。遂與小周公咺密議:「只等攻城,這裏開門接應。」卻勸戎主先將寶貨金繒,差右先鋒孛丁分兵押送回國,以削其勢;又教左先鋒滿也速盡數領兵出城迎敵。犬戎主認作好話,一一聽從。卻說滿也速營於東門之外,正與衛兵對壘,約會明日交戰。不期三更之後,被衛兵劫入大寨。滿也速提刀上馬,急來迎敵。其奈戎兵四散亂竄,雙拳兩臂,撐持不住,只得一同奔走。三路諸候,吶喊攻城。忽然城門大開,三路軍馬一擁而入,毫無撐禦。此乃申侯之計也。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도성 안에 있던 신후는 네 나라의 군사들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 대단히 기뻐했다. 즉시 소주공(小周公) 훤(咺)과 몰래 의논하기를, “네 나라의 군사들이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우리도 성문을 열고 내응하기로 합시다.” 했다. 그리고 견융의 왕에게는 우선봉 패정을 시켜 금은보화와 비단을 본국으로 가져가도록 권하여, 그 군세를 약화시키고, 좌선봉 만야속에게는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가 적을 맞아 싸우도록 조언했다. 견융의 왕은 신후의 말을 호의로 받아 들여 그대로 따랐다. 한편, 만야속은 동문 밖에 진을 치고 위나라 군사와 대치하여 다음 날 교전하기로 약속했다. 뜻밖에 삼경이 지난 후에 위나라 군사들이 만야속의 대채를 습격했다. 만야속은 칼을 들고 말에 올라 황급히 적을 막았다. 견융의 군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혼자 힘만으로는 당할 수가 없었던 만야속은 어쩔 수 없이 같이 도망쳤다. 세 갈래의 제후들이 함성을 지르며 왕성을 공격했다. 갑자기 성문이 크게 열리자 세 갈래의 군마가 한꺼번에 아무 저항 없이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모두 신후의 계략이었다.
戎主在夢中驚覺,跨著劃馬,逕出西城,隨身不數百人。又遇鄭世子掘突攔住廝戰。正在危急,卻得滿也速收拾敗兵來到,混戰一場,方得脫身。掘突不敢窮追,入城與諸侯相見,恰好天色大明。褒姒不及隨行,自縊而亡。胡曾先生有詩歎云:錦繡圍中稱國母,腥羶隊裏作番婆,到頭不免投繯苦,爭似為妃快樂多! 申侯大排筵席,管待四路諸侯。只見首席衛武公推箸而起,謂諸侯曰:「今日君亡國破,豈臣子飲酒之時耶?」眾人齊聲拱立曰:「某等願受教訓。」
견융 왕이 꿈속에서 놀라 깨어나 말을 타고 서쪽의 성문을 빠져나갔다. 따르는 군사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또 길을 가로막은 정세자 굴돌을 만나 죽기로 싸워 위급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만야속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당도하여 한바탕 혼전을 벌이는 사이에 견융 왕이 간신히 몸을 빼어내 도망칠 수 있었다. 굴돌이 감히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고, 성안으로 들어와 제후들과 만났다. 마침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포사는 견융 왕을 따라가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호증(胡曾)선생이 시를 지어 탄식하기를, “수놓은 비단옷을 몸에 휘감고 국모라고 일컫더니, 피비린내 나는 싸움 속에서 다시 오랑캐 계집이 되었다. 마침내 비단으로 목매어 죽었으니, 왕비가 되려고 다툰 것은 쾌락을 즐기기 위함이었건만!” 했다. 신후가 잔치를 크게 벌여 네 나라 제후를 환대했다. 윗자리에 앉은 위무공이 젓가락을 내던지며 일어나서 제후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천자는 죽고 나라는 망했는데, 어찌 신하로서 술을 마실 때이리오?” 하니,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일어나 두 손을 모으며 말하기를, “저희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했다.
武公曰:「國不可一日無君,今故太子在申,宜奉之以即王位。諸君以為何如?」襄公曰:「君侯此言,文、武、成、康之靈也。」世子掘突曰:「小子身無寸功,迎立一事,願效微勞,以成先司徒之志。」武公大喜,舉爵勞之。遂於席上草成表章,備下法駕。各國皆欲以兵相助。掘突曰:「原非赴敵,安用多徒?只用本兵足矣。」申侯曰:「下國有車三百乘,願為引導。」次日,掘突遂往申國,迎太子宜臼為王。卻說宜臼在申,終日納悶,不知國舅此去,凶吉如何。
위무공이 말하기를, “나라에는 하루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옛 태자가 신국에 있으니 마땅히 받들어 왕위에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제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하니, 진양공(秦襄公)이 말하기를, “군후의 말씀은 문왕, 무왕, 성왕, 강왕의 신령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했다. 정나라 세자 굴돌이 말하기를, “소자가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으니 이번에 태자를 모셔오는 일을 맡게 해주시면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어 사도였던 선친의 뜻을 이루겠습니다.” 했다. 위무공이 크게 기뻐하며 술잔을 들어 좌중을 위로하고, 그 자리에서 표장을 지어 어가를 준비하게 했다. 각국에서 병사를 내어 태자를 모셔오는 일을 도우려고 하자 굴돌이 말하기를, “적군과 싸우러 나가는 것도 아닌데 구태여 많은 사람이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거느린 병사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니, 신후가 말하기를, “신나라에 수레 300대가 있으니 태자를 모셔올 때 쓰도록 하시오.” 했다. 다음 날, 굴돌이 태자 의구를 왕으로 맞이하기 위해 신국을 향해 행군했다. 한편 신국에 머물던 의구는 매일 번민에 싸여 있었는데, 국구가 이번에 출정하여 길흉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忽報鄭世子賷著國舅申侯同諸侯連名表章,奉迎還京,心下倒吃了一驚。展開看時,乃知幽王已被犬戎所殺,父子之情,不覺放聲大哭。掘突奏曰:「太子當以社稷為重,望早正大位,以安人心。」宜臼曰:「孤今負不孝之名於天下矣!事已如此,只索起程。」不一日,到了鎬京。周公先驅入城,掃除宮殿。國舅申侯引著衛、晉、秦三國諸侯,同鄭世子及一班在朝文武,出郭三十里迎接,卜定吉日進城。宜臼見宮室殘毀,淒然淚下。當下先見了申侯,稟命過了。然後服袞冕告廟,即王位,是為平王。
그때 갑자기 정세자 굴돌이 도착하여 신후와 제후들이 연명한 표장을 가지고 와서 태자를 영접하여 호경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태자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 크게 놀랐다. 표장을 펴보고 유왕이 이미 견융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구는 부자지간의 정으로 인하여 자기도 모르게 목을 놓아 큰 소리로 울었다. 굴돌이 아뢰기를, “태자께서는 마땅히 사직의 중함을 깨달으셔서 빨리 왕위에 올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하니, 의구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 천하에 불효자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일이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서둘러 떠나도록 하겠소.” 했다. 하루가 되지 않아 그들은 호경에 도착했다. 소주공(小周公) 훤이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서 궁궐을 청소했다. 국구 신후가 위, 진(晉), 진(秦) 등 삼국의 제후와 일반 문무백관을 이끌고 성문 밖 30리까지 마중 나가서 태자와 정세자 일행을 영접했다. 점을 쳐서 길일을 택하여 태자를 모시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의구는 황폐해진 궁전의 모습을 보고 처연해져 눈물을 흘렸다. 이어서 태자는 먼저 신후를 만나 제반사를 분부한 후,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 종묘에 나아가 선조들에게 고한 후에 왕위에 올랐다. 이가 평왕(平王)이다.
平王升殿,眾諸侯百官朝賀已畢。平王宣申伯上殿,謂曰:「朕以廢棄之人,獲承宗祧,皆舅氏之力也。」進爵為申公。申伯辭曰:「賞罰不明,國政不清,鎬京亡而復存,乃眾諸侯勤王之功。臣不能禁戢犬戎,獲罪先王,臣當萬死!敢領賞乎?」堅辭三次。平王令復侯爵。衛武公又奏曰:「褒姒母子恃寵亂倫,虢石父尹球等欺君誤國,雖則身死,均當追貶。」平王一一准奏。衛侯和進爵為公。晉侯仇加封河內附庸之地。鄭伯友死於王事,賜諡為桓。世子掘突襲爵為伯,加封祊田千頃。
평왕이 전당에 오르자, 제후들과 문무백관들이 축하의 인사를 올렸다. 평왕은 신후를 전당으로 오르게 하고 말하기를, “짐은 폐위되어 버림받은 나에게 왕위를 잇도록 한 것은 다 국구이신 신후의 힘입니다.” 하고, 벼슬을 올려 공작으로 삼았다. 신후가 사양하며 아뢰기를, “상벌이 분명하지 못하면 나라의 정사가 바르게 서지 않습니다. 호경이 망했다가 다시 존속하게 된 것은 제후들이 왕을 도운 공 때문입니다. 신이 견융을 복종시키지 못하고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오히려 만 번 죽어 마땅한데 어찌 감히 상을 받겠습니까?” 하고, 세 번에 걸쳐 공작의 작위를 완강히 사양하자 평왕은 다시 후작으로 복직시켰다. 위무공이 다시 아뢰기를, “포사 모자는 선왕의 총애를 믿고 윤리를 어지럽혔고, 괵석보와 윤구 등은 임금을 속여 나라를 그르치게 하였으니, 그들의 몸은 비록 죽었다고 하지만 마땅히 그 죄를 추궁해 벼슬을 깎아야 합니다.” 하니, 평왕이 하나하나 시행하도록 허락했다. 위무공 희화는 작위를 공작으로 하고, 진(晉)의 문후(文侯) 희구(姬仇)에게는 하내(河內)의 부용(附庸 ; 작은 나라)의 땅을 더해 주고, 정백 우는 왕을 구하기 위해 싸우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 공을 기리어 환(桓)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세자 굴돌은 그 작위를 이어 백작이 되어 팽전(祊田)의 천경(千頃)을 더하게 하였다.
秦君原是附庸,加封秦伯,列於諸侯。小周公咺拜太宰之職。申后號為太后。褒姒與伯服,俱廢為庶人。虢石父、尹球、祭公,姑念其先世有功,兼死於王事,止削其本身爵號,仍許子孫襲位。又出安民榜,撫慰京師被害百姓。大宴群臣,盡歡而散。有詩為證:「百官此日逢恩主,萬姓今朝喜太平。自是累朝功德厚,山河再整望中興。」次日,諸侯謝恩,平王再封衛侯為司徒,鄭伯掘突為卿士,留朝與太宰咺一同輔政。惟申晉二君,以本國迫近戎狄,拜辭而歸。申侯見鄭世子掘突英毅非常,以女妻之,是為武姜。此話擱過不提。
진(秦)의 양공(襄公)은 원래 부용국의 영주였으나, 작위를 올려 백작으로 하고 제후의 대열에 서게 했다. 소주공 훤은 태재(太宰)의 직에 임명했고, 신비는 태후가 되었다. 포사와 백복은 모두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괵석보, 윤구, 제공 등은 그들의 조상들이 나라에 끼친 공훈과 왕을 모시고 전란 중에 죽은 것을 참작하여, 단지 본인들의 작위를 삭탈하고, 자손들로 하여금 옛날의 작위를 잇도록 허락했다. 또한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방을 붙여 포고하게 하는 동시에 전란 중 피해를 입은 호경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위문했다.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열어 모두 즐기게 한 후에 흩어졌다. 이를 증험한 시에 이르기를, “이날에 이르러서야 백관들이 은혜로운 임금을 만났고, 만백성이 오늘에야 태평성대가 왔다고 기뻐했다. 이것은 주나라가 여러 대에 걸쳐 쌓은 공덕 때문이니, 이로써 주나라는 재정비되어 중흥을 바라보게 되었다.” 고 했다. 다음 날, 제후들은 은혜에 감사를 표했다. 평왕은 다시 위무공을 사도(司徒)에, 정백 굴돌을 경사(卿士)에 임명하여, 왕도에 남아 태재인 소주공 훤과 함께 왕실의 정사를 보좌하게 했다. 오직 신후와 진(晉)의 문후 두 사람은 본국이 융적(戎狄)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평왕에게 사은 숙배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신후가 정세자 굴돌이 매우 영특하고 의젓함을 보고 그의 다른 딸로 아내로 삼게 했다. 신후의 딸은 무강(武姜)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는 여기서 더하지 않겠다.
卻說犬戎自到鎬京擾亂一番,識熟了中國的道路,雖則被諸侯驅逐出城,其鋒未曾挫折,又自謂勞而無功,心懷怨恨。遂大起戎兵,侵占周疆,岐豐之地,半為戎有。漸漸逼近鎬京,連月烽火不絕。又宮闕自焚燒之後,十不存五,頹牆敗棟,光景甚是淒涼。平王一來府庫空虛,無力建造宮室,二來怕犬戎早晚入寇,遂萌遷都洛邑之念。一日,朝罷,謂群臣曰:「昔王祖成王,既定鎬京,又營洛邑,此何意也?」
한편, 견융은 호경에서 한바탕 요란을 떨어서 중국의 도로를 익숙하게 알았고, 비록 제후들에게 쫓겨 왕성에서 도망쳤지만, 그 예봉은 꺾이지 않았다. 또 견융의 왕은 스스로 공이 없음을 위로하며 마음속에 원한을 품었다. 그 후 크게 견융의 군사를 일으켜 주나라 변경을 침략하여 기풍(岐豊)의 땅 반이 견융의 소유가 되었다. 견융이 점차로 호경을 향하여 압박해 오니, 날마다 봉화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타나 남은 궁궐도 열에서 다섯도 남지 않았고, 담장은 무너지고 기둥은 부러져 그 모습이 매우 처량했다. 평왕이 생각하기를, 첫째는 호경의 창고가 모두 비어 궁궐을 지을 만한 여력이 없었고, 둘째는 견융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낙읍(洛邑)으로 천도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평왕이 조회를 끝내고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옛날 성왕(成王) 때 호경에 도읍을 정하고 또 낙읍을 경영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겠소?” 했다.
群臣齊聲奏曰:「洛邑為天下之中,四方入貢,道里適均,所以成王命召公相宅,周公興築,號曰東都,宮室制度,與鎬京同。每朝會之年,天子行幸東都,接見諸侯,此乃便民之政也。」平王曰:「今犬戎逼近鎬京,禍且不測,朕欲遷都於洛何如?」太宰咺奏曰:「今宮闕焚毀,營建不易,勞民傷財,百姓嗟怨。西戎乘釁而起,何以禦之?遷都於洛,實為至便。」兩班文武,俱以犬戎為慮,齊聲曰:「太宰之言是也。」惟司徒衛武公低頭長歎。平王曰:「老司徒何獨無言?」
여러 신하가 일제히 한 소리로 아뢰기를, “낙읍은 천하의 중심이며 사방에서 조공을 드리러 오기 쉽고,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왕께서 소공(召公)에게 명하여 터를 잡게 하시고, 주공에게 명하여 성을 쌓아 동도(東都)라 했습니다. 궁실의 제도가 이곳 호경과 같아서 천자가 매번 천하의 제후들과 조회를 할 때는, 동도로 순행하여 제후들을 접견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을 편하게 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하니, 평왕이 말하기를, “지금 견융이 호경을 핍박하여 화가 언제 닥쳐올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짐이 낙읍으로 천도를 할까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했다. 태재 훤이 아뢰기를, “지금 궁궐은 불에 타고 부서져서 다시 복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시 세운다면 백성들을 혹사하고 국가재정을 탕진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됩니다. 견융이 그 틈을 타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면 어떻게 막겠습니까? 낙읍으로의 천도는 사실 지극히 타당한 방편입니다.” 했다. 문무 양반들은 모두 견융을 염려하여 한 소리로 말하기를, “태재의 말이 옳습니다.” 했다. 오직 사도 위무공만이 머리를 숙이고 길게 탄식했다. 평왕이 말하기를, “노 사도께서는 어찌하여 홀로 말이 없습니까?” 했다.
武公乃奏曰:「老臣年逾九十,蒙君王不棄老耄,備位六卿。若知而不言,是不忠於君也;若違眾而言,是不和於友也。然寧得罪於友,不敢得罪於君。夫鎬京左有殽函,右有隴蜀,披山帶河,沃野千里,天下形勝,莫過於此。洛邑雖天下之中,其勢平衍,四面受敵之地。所以先王雖並建兩都,然宅西京,以振天下之要,留東都以備一時之巡。吾王若棄鎬京而遷洛,恐王室自是衰弱矣!」平王曰:「犬戎侵奪岐豐,勢甚猖獗。且宮闕殘毀,無以壯觀。朕之東遷,實非得已。」
위무공이 아뢰기를, “노신의 나이는 이미 구십이 넘었습니다. 대왕께서 나이 먹은 몸을 버리지 않으시고 육경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만약 알고도 말하지 않으면 임금에게 불충이 되고, 또한 여러 대신들의 의견과 다른 말을 한다면 동료들과 불화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비록 동료들로부터 죄를 얻을지언정, 감히 임금에게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무릇 호경의 왼쪽에는 효산과 함곡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농(隴)과 촉(蜀)이 있어 산을 의지하고 강을 끼고 있으며 기름진 평야가 천 리에 이릅니다. 천하에 이보다 좋은 지형이 없습니다. 낙읍이 비록 천하의 중심이 되는 곳이지만, 지형은 평탄하여 사면으로부터 적의 침입을 받기 쉽습니다. 그래서 선대의 왕께서 비록 도읍을 두 곳에 두었지만, 서도인 호경에 머물러 천하에 위엄을 진동시켰고 동도는 천자께서 순시할 때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곳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대왕께서 만약 호경을 버리고 낙읍으로 천도한다면, 아마도 왕실은 자연히 쇠락할 것입니다.” 하니, 평왕이 말하기를, “견융이 기풍(岐豊)을 침략하여 그 형세가 미쳐 날뛰고, 또 궁궐은 파괴되어 폐허로 변해 볼 것이 없습니다. 짐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함은 진실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했다.
武公奏曰:「犬戎豺狼之性,不當引入臥闥。申公借兵失策,開門揖盜,使其焚燒宮闕,戮及先王,此不共之仇也。王今勵志自強,節用愛民,練兵訓武,效先王之北伐南征,俘彼戎主,以獻七廟,尚可湔雪前恥。若隱忍避仇,棄此適彼,我退一尺,敵進一尺,恐蠶食之憂,不止於岐豐而已。昔堯舜在位,茅茨土階,禹居卑宮,不以為陋。京師壯觀,豈在宮室?惟吾王熟思之!」
위무공이 아뢰기를, “견융은 승냥이 같은 성질인데, 왕성에 끌어들인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신공이 군사를 빌린 것이 실책이었고, 성문을 열고 도적을 맞이하여 궁궐을 태우게 하고, 선왕을 죽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대왕께서는 오늘부터라도 뜻을 굳게 하여 스스로 국세를 강하게 만들고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한편 병사들에게 무술을 연마하게 하여. 선왕의 북벌남정(北伐南征)을 본받아 저 견융의 왕을 사로잡아 일곱 사당에 바치고 전날에 당한 수모를 갚아야만 합니다. 만약 원한을 참고 원수를 피해 호경을 버리고 낙읍으로 도읍을 옮겨 간다면, 우리가 한 자를 후퇴하고, 적들은 한 자를 다가와서 우리의 강역을 잠식당하는 근심이 될 것입니다. 어찌 기풍(岐豊)의 땅에 한하는 문제이겠습니까? 옛날에 요임금과 순임금께서는 제위에 계실 때, 띠로서 지붕을 이으시고 흙으로 계단을 만드셨습니다. 우임금께서는 누추한 궁궐에서 사셨지만 누추하다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읍의 장엄함이 어찌 궁궐에만 달려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했다.
太宰咺又奏曰:「老司徒乃安常之論,非通變之言也。先王怠政滅倫,自招寇賊,其事已不足深咎。今王掃除煨燼,僅正名號,而府庫空虛,兵力單弱。百姓畏懼犬戎,如畏豺虎。一旦戎騎長驅,民心瓦解,誤國之罪,誰能任之?」武公又奏曰:「申公既能召戎,定能退戎。王遣人問之,必有良策。」正商議間,國舅申公遣人賷告急表文來到。平王展開看之,大意謂:犬戎侵擾不已,將有亡國之禍。伏乞我王憐念瓜葛,發兵救援。平王曰:「舅氏自顧不暇,安能顧朕?東遷之事,朕今決矣。」乃命太史擇日東行。
태재 훤이 다시 아뢰기를, “노 사도의 말씀은 태평 시대의 논의이며 변통의 말이 아닙니다. 선왕께서는 정사에 태만하고 윤리를 저버려, 오랑캐의 침입을 자초했습니다. 그 일은 이미 깊이 허물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왕께서 타버린 잿더미를 청소하여, 위엄과 명목을 바로 잡고자 해도 나라의 창고가 텅텅 비고, 군사는 쇠약하며 백성들은 견융을 마치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기병이 침입해 온다면 민심이 와해되어 나라를 그르친 죄를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위무공이 또 아뢰기를, “신공이 견융을 능히 부를 수 있었으니, 물러가게 하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시면, 반드시 좋은 계책이 있을 것입니다.” 했다. 한창 상의하고 있는데, 국구 신공이 사람을 보내어 위급함을 알리는 표문을 보내 왔다. 평왕이 표문을 펼쳐 읽어보니, 대략 이르기를, “견융이 침략을 그치지 않으니, 장차 망국의 재앙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왕께서는 외로운 외척을 어여삐 생각하여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 주십시오.” 했다. 평왕이 말하기를, “국구도 자기를 돌볼 여지가 없는데, 어찌 짐을 돌볼 여력이 있겠는가? 동쪽으로의 천도를 짐은 이미 결심했소.” 하고, 곧 태사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천도할 날짜를 잡게 했다.
衛武公曰:「臣職在司徒,若主上一行,民生離散,臣之咎難辭矣。」遂先期出榜示諭百姓:如願隨駕東遷者,作速準備,一齊起程。祝史作文,先將遷都緣由,祭告宗廟。至期,大宗伯抱著七廟神主,登車先導。秦伯嬴開聞平王東遷,親自領兵護駕。百姓攜老扶幼,相從者不計其數。當時宣王大祭之夜,夢見美貌女子,大笑三聲,大哭三聲,不慌不忙,將七廟神主,捆著一束,冉冉望東而去。
위무공이 말하기를, “신의 벼슬이 사도에까지 이르렀으니, 만약 왕께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이 흩어질 것이니 신도 허물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고, 먼저 방을 내붙여 백성에게 알리기를, 만약 어가를 따라 동쪽 도읍으로 옮겨가고자 하는 자는 빨리 준비하여 일제히 출발하라고 했다. 축사(祝史 ; 축문을 맡은 관리)는 천도하게 된 연유를 글로 짓고, 종묘에 고하게 제사를 지냈다. 천도하는 날이 되어, 대종백이 일곱 사당의 신주를 안고 수레에 올라 앞을 인도했다. 진백(秦伯) 영개(嬴開)가 평왕이 낙읍으로 동천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군사를 끌고 와서 어가를 호위했다. 백성들은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손잡고서 행렬을 따라오는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지난날, 선왕(宣王)이 대제(大祭)를 지내던 날 밤에, 꿈속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는데, 그 여자가 크게 세 번 웃고, 크게 세 번 곡한 후,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일곱 사당의 신주들을 한 묶음으로 묶어서, 가슴에 안고 유유히 동쪽으로 가버린 꿈을 꾼 적이 있었다.
大笑三聲,應褒姒驪山烽火戲諸侯事。大哭三聲者,幽王、褒姒、伯服三命俱絕。神主捆束往東,正應今日東遷,此夢無一不驗。又太史伯陽父辭云:「哭又笑,笑又哭,羊被鬼吞,馬逢犬逐。慎之慎之!檿弧箕箙。」羊被鬼吞者,宣王四十六年遇鬼而亡,乃己未年。馬逢犬逐,犬戎入寇,幽王十一年庚午也。自此西周遂亡,天數有定如此,亦見伯陽父之神占矣。
크게 세 번 웃은 것은 포사가 여산에서 봉화로 제후들을 희롱한 일을 뜻하고, 크게 세 번 곡한 것은 유왕, 포사, 백복이 모두 전란 중에 죽은 일을 의미했다. 신주를 묶어서 동쪽으로 가버린 것은, 지금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는것을 뜻하니 그 꿈이 하나도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태사 백양보가 점을 쳤을 때 괘사(卦辭)에 이르기를,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도다. 염소는 귀신에게 잡아먹히고 말은 개에게 쫓기도다. 삼가고 삼갈지니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풀로 엮은 화살통이로다.” 라고 한 것도, 양이 귀신에게 잡아먹혔다는 것은 선왕 46년 기미년(己未年)에 선왕이 귀신을 만나 죽은 일을 말하고, 말이 개에게 쫓긴다는 것은 유왕 11년 경오년(庚午年)에 견융이 쳐들어온 일을 말했다. 이때에 이르러 서주가 망하고, 하늘이 정한 수명을 다하니 역시 백양보의 점은 신통하다고 하겠다.
東遷後事如何,且看下回分解。
도읍을 동쪽 낙읍으로 옮긴 후의 일은 어떠했던가. 또한 다음 회의 이야기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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