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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1. 1. 21, 스페인 마드리드 |
국적 | 스페인 |
요약 스페인의 오페라 가수.
도밍고(Plácido Domingo)
좋은 체격과 수려한 외모, 풍부하고 힘있는 소리, 연극적 재능 등으로 20세기 후반의 가장 인기있는 테너 가수이다. 도밍고의 부모는 스페인의 경가극 형식인 사르수엘라의 유명한 연기자들이었다. 멕시코에서 성장했고 그곳 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1961년 멕시코 시에서 오페라 데뷔를 했고 이후 댈러스와 텍사스 지방을 옮겨다니면서 그 지방 오페라단에서 노래불렀다. 1962~65년 텔아비브에 있는 히브리 국립 오페라단의 전속가수가 되었고, 1965년에는 뉴욕 시 오페라, 1968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데뷔했다(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는 데뷔 공연에 이어 정식 가수가 됨). 1969년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에서 데뷔했다.
다방면의 작품에 출연한 도밍고는 공연뿐 아니라 많은 음반을 취입했고, 몇 편의 오페라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팝송을 부르는 모험도 감행했다.
1983년 자서전 〈나의 40년 My First Forty Years〉이 출판되었다.요약 테이블
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하이 C의 제왕, 그를 위한 변명
청아한 미성과 빼어난 고음, 수더분한 인간미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 테너. 그러나 지나친 대중적 인기 탓에 오페라 가수로서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
목차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이탈리아의 성악가였다.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The three tenors(3대 테너)라 불렸다.
ⓒ Getty Images/멀티비츠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만큼 열광적인 환호와 사랑을 받은 테너는 결코 없었으리라. 카루소조차 누리지 못한 인종과 계층, 취향을 초월한 불가사의한 인기를 누렸다. 오페라 가수의 인기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이례적 기록이다. 반면 파바로티처럼 질시와 비난, 심지어 중상과 멸시에 시달린 성악가도 없다. 그러나 그 부정적인 얘기의 대부분은 커리어의 만년에 흘러나왔으며 음악적 성취와는 무관한 것도 많다.
여하튼 여러 관점에서 오페라계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끝내 은퇴를 미루다가 2007년 9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사실 은퇴 발언을 한 적도 있었다. 2004년 3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토스카〉를 마지막 오페라 무대라 선언했고, 동년 12월 기자회견에서 전 세계를 돌며 고별 투어를 가질 것이고 만 70세 생일인 2005년 10월 이전에 완전히 은퇴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노래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오페라 가수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나는 행운아였습니다. 은퇴 공연은 무척 감회 깊은 투어가 될 것 같습니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음악으로, 일로 사귀게 된 수많은 친구들을 다시 만날 것이고, 그곳 청중 앞에서 마지막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은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고별 투어의 마지막 행선지와 일자를 밝히지 않은 채 은근슬쩍 70회 생일이 지난 후에도 공연을 계속한 것이다. 2006년 3월의 브라질 방문을 앞두고는 극심한 허리 통증으로 장기 입원에 들어가면서 3개월간의 일정을 취소했다. 그런데도 그 이후의 스케줄은 유효하다고 발표했다. 7월에는 췌장암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이런 지경이니 완전한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파바로티가 온갖 영욕을 뒤로한 채 무대를 떠나게 되면 사람들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의 노추(老醜)를 잊고 전성기의 음반을 들으면서 가장 훌륭한 순간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는 재평가하리라. 파바로티야말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매력을 일깨워준 진정 위대한 테너였다고. 마리아 칼라스에 견줄 만한 거대한 존재였으나 너무 탄탄대로를 달렸기에 시샘을 받았을 뿐이라고.
서정성과 장대함을 겸비한 전대미문의 초대형 테너
파바로티의 음성에 잘 어울리고 자신 스스로도 좋아하던 배역으로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를 꼽을 수 있다. 어수룩하지만 정말 순수한 성품과 한결같은 뚝심을 지닌 시골 총각 네모리노. 그것은 바로 파바로티 자신의 이미지로 세계인에게 각인되었으며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중요한 인기 비결이 되었다. 스스럼없는 인간미, 언제나 활짝 웃는 선량한 미소, 가족 중심적인 이탈리아식 사고, 심지어 최악이라고 할 만한 육중한 체구조차도 그에게 친근감을 더하는 매력으로 작용했다.
파바로티는 1935년 10월 12일 이탈리아 중북부의 모데나(Modena)에서 태어났다. 동향의 동갑내기 친구로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가 있었고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다. 파바로티는 "프레니가 이사를 가는 바람에 떨어져 지낸 적도 있지만 둘이 함께 많은 것을 경험했다. 다만 연애는 따로 했다."고 웃으며 회고했다. 파바로티의 부친은 위대한 테너들의 음반을 방대하게 모은 오페라광이자 아마추어 테너였다. 파바로티가 1975년에 녹음한 《루이자 밀러》 음반(데카)에 아주 잠깐 부친의 노래가 나온다. 궁금하다면 페르난도 파바로티(Fernando Pavarotti)란 이름을 찾아보시라.
이런 음악적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파바로티는 음악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그저 성가대에서 노래하고 마리오 란자의 영화에 감흥을 받아 높은 음을 따라 부르며 평범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19세에 사범 학교를 졸업하면서 초등학교 교사 자격이 생기자 오히려 그때부터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성악가의 길을 택했다. 첫 스승은 고향의 아리고 폴라(Arrigo Pola), 두 번째 스승은 만토바의 에토레 캄포갈리아니였는데 그는 미렐라 프레니의 스승이기도 했다.
26세가 되는 1961년, 레지오 에밀리아의 작은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그곳 극장에서 《라 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데뷔했다. 성악 공부를 하다 만난 첫 아내 아두아(Adua)와 결혼한 것도 이때였다. 이듬해 툴리오 세라핀이 지휘하는 《리골레토》에 발탁된 행운은 진정한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이를 계기로 1963년 코벤트 가든, 1965년 라 스칼라, 1968년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하면서 점차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것이다. 특히 1966년 런던에서 《연대의 딸》 중 8번의 하이 C가 등장하는 아리아 〈친구들이여, 오늘은 즐거운 날〉을 120년 만에 악보대로, 게다가 마지막 음까지 모두 9번의 하이 C를 불러냄으로써 공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연대의 딸》은 1972년 메트로폴리탄 공연에서도 미국 음악계를 뒤흔든 대사건으로 기록되면서 파바로티에게 '하이 C의 제왕'이라는 영광스런 별명을 안겨주었다.
그의 청아한 음색과 고음을 쉽게 넘나드는 솜씨는 애초부터 성공의 열쇠를 보장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름대로 파바로티도 힘든 수련 과정을 거쳐야 했다. 특히 가장 큰 계기는 소프라노 조운 서덜랜드, 그녀의 남편인 지휘자 리처드 보닝과의 만남이었다. 파바로티는 1965년 시즌을 이들과 함께 보내면서 서덜랜드로부터 새로운 발성법을 터득했다고 고백한다. 심하게는 일주일에 8번의 공연을 소화하면서도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서덜랜드에게 감탄해 그녀로부터 노래에 필요한 근육, 특히 횡경막을 단련하는 훈련을 전수받았단다. 리처드 보닝의 유머러스한 회상에 따르면 자신이 보는 앞에서도 노래하는 서덜랜드의 배를 만져보면서 발성이나 호흡법을 이해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그런 노력의 가장 큰 결실은 성량의 확대로 나타났다. 그 이전까지 아름다운 레제로 테너였던 파바로티는 서덜랜드의 방식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면서 서정성과 장대함을 겸비한 전대미문의 초대형 테너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서덜랜드와의 협력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리처드 보닝의 지휘로 데카에서 출반된 도니체티, 벨리니 그리고 베르디 중기 오페라 음반들은 1950년대 마리아 칼라스와 주세페 디 스테파노 콤비의 성과에 못지않은 벨칸토 오페라의 결정판이자 오페라 음반사에 길이 남을 파바로티의 공헌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파바로티는 벨칸토 오페라에 머무르지 않고 점차 레퍼토리의 폭을 확장했다. 프랑스 오페라에서의 평판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고, 독일 오페라는 아예 부르지도 않았지만 이탈리아 낭만 오페라만큼은 모두 자신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파바로티는 본질적으로 리릭 테너지만 성량이 대단히 우렁차고 남성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어딘지 가냘픈 그 이전의 리리코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특히 앞서 밝혔듯 벨칸토 오페라에서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는데, 작곡가가 요구한 엄청난 고음, 심지어 《청교도》 중 아르투로의 아리아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대에게 사랑을〉처럼 하이 C를 뛰어넘는 음마저도 악보대로, 거기에 고난도의 기교까지 고스란히 얹어 불러냈으니 찬탄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파바로티의 음악성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단연 가사의 소화 능력이다. 딕션이 명료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처럼 가사의 운율을 리드미컬하게 읽어내는 가수는 없었다. 이 점에 대해 파바로티는 자신의 우상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디 스테파노와 비교하자면 파바로티는 가사의 극적 의미를 해석하는 신중한 면에서 뒤떨어지지만 음악적, 시적 리듬을 재현해내는 천부적 능력에서는 오히려 우위에 있다. 로시니의 오페라 《윌리엄 텔》을 들어보라. 이 작품은 너무 테너를 혹사시키기 때문에 파바로티조차 리카르도 샤이(Riccardo Chailly, 1853∼) 지휘로 딱 한 번 녹음하고 무대 공연은 끝내 사절했다고 하는데, 그가 얼마나 맛깔스럽게, 꼭꼭 씹어 숙성시킨 다음에 내뱉는 것인가를 들려주는 최고의 모범 사례일 것이다.
파바로티가 악보를 읽지 못한다는 루머가 나돈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파바로티가 들려준 뛰어난 음악성을 감안하면 이것이 사실일 리 없다고 확신한다. 다만 스승 에토레 캄포갈리아니가 악보대로가 아니라 음악적 감흥에 따라 노래하라는 신조를 지녔다고 하니 다른 가수보다 시창 능력이 떨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음악성까지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캄포갈리아니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파바로티의 최대 실수는 은퇴 시기를 놓쳤다는 것
사람들은 라이벌 도밍고보다 파바로티의 쇠퇴기가 훨씬 먼저 도래했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이른바 '스리 테너' 중 그가 가장 연상(도밍고보다 6년, 카레라스보다 11년)임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성악가의 목청이 가장 뛰어난 것은 35세에서 40세, 노련함까지 종합하면 40세에서 45세가 전성기고 그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쇠퇴기에 돌입한다. 이를 파바로티에게 적용하면 가장 싱싱한 소리는 1970년대 전반, 싱싱함과 원숙함이 잘 조화된 시기는 1970년대 후반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1980년대에도 비교적 좋은 소리를 유지한 것을 보면 일반적인 다른 가수들보다 오랫동안 전성기를 유지한 셈이다. 다만 도밍고가 기적에 가까울 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잘 유지했기에 불리한 비교를 당할 뿐이다.
파바로티는 1990년 로마에서의 첫 '스리 테너 콘서트' 이후 오페라 무대의 활동을 크게 줄였으며 야외 공연장이나 초대형 경기장의 대규모 리사이틀, 팝가수와 함께하는 콘서트에 주력해왔다. 특히 만년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던 일련의 '파바로티와 친구들(Pavarotti and Friends)' 시리즈는 오페라 가수로서 쌓은 성가를 깎아내리는 부작용마저 있었다. '스리 테너 콘서트'나 '파바로티와 친구들'에 그다지 호의적인 태도를 갖지 않지만 그 순기능적인 면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리 테너 콘서트'는 오페라에 문외한이었던 전 세계인에게 테너 예술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클래식 저변 확대에 기여했으며, '파바로티와 친구들'의 경우는 그 수익금을 난민이나 빈민 구호 등 좋은 목적에 사용했다. 게다가 베냐미노 질리, 티토 스키파, 리하르트 타우버, 심지어 바그너 헬덴테너인 라우리츠 멜히요르까지 경음악을 불렀던 과거 사례를 생각한다면 파바로티만 특별히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돈 많은 팝아티스트가 기부금을 내놓는 경우는 많아도 클래식 음악가가 이처럼 대규모로 지속적인 공익 활동을 벌인 것은 파바로티가 최초나 다름없었다. 여하튼 클래식팬들이 파바로티에게 등을 돌리는 사이에도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은 늘어만 갔다.
오히려 파바로티에게 진정한 위기는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1996년 슬하에 세 딸을 둔 조강지처 아두아와 헤어지고 막내딸보다도 젊은 비서 출신의 니콜레타 만토바니(Nicoletta Mantovani)와 결혼을 발표함으로써 도덕적 타격을 입은 것이다. 사생활의 영역이므로 보호받아 마땅하겠지만 오래도록 이탈리아식 가족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진 파바로티의 이미지 때문에 비난이 쏟아진 셈이다. 이때부터 팬들은 파바로티로부터 네모리노의 이미지를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제왕 자리도 플라시도 도밍고에게 넘어갔다. 일부 클래식팬들은 파바로티를 오페라 스타라는 고급 이미지로 대중을 공략하며 떼돈을 버는 스타라고 폄하했다.
만약 파바로티가 첫 스리 콘서트 이전에 은퇴했다면(이미 당시 55세였으므로) 그는 좋은 모습만 남긴 최고의 테너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스리 테너 콘서트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육중한 체구에 비해 너무 약한 무릎 관절 때문에 잘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오페라 무대에 계속 모습을 드러내더니, 팝가수를 친구 삼아 대중적 인기에 영합했기에 그의 이미지는 퇴색했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파바로티 입장에서는 팬들의 부름이 있었고, 자신이 이루어야 할 미션이 있었기에 이에 충실히 응했을 뿐인 것을.
니콜레타와의 사이에서 2003년 초 늦둥이 딸을 얻은 파바로티는 은퇴 후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라 했지만 결국 병상에 누워서야 그럴 기회를 얻었다. 고향이자 죽음을 맞은 고향 모데나의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만 명이 참석했고 최근 몇 년간 세상을 떠난 다른 위대한 명가수들의 장례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재 열기도 대단했다.
사람들은 끝까지 파바로티를 현역 가수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과거의 대가수가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노래하던 친구 같은 존재가 사라졌다고 느꼈으리라. 예컨대 현역 영화배우가 죽은 것과 과거의 명배우가 죽은 것은 사회적 반향이 다르지 않겠는가?
파바로티 자신이 은퇴를 미룬 이유는 동료이자 최대의 라이벌인 플라시도 도밍고의 여전한 활동이 그를 자극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수로서 생명이 유난히 긴데다가 오페라 행정가로 또 지휘자로 맹활약한 도밍고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는 자명하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질투야말로 자기발전의 원동력이라고.요약 테이블
호세 카레라스
다른 표기 언어 José Carreras
분류 | 연주자>성악가>남자 성악가 |
출생 | 1946년 12월 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
유형 | 테너 |
수상 | 1971년 베르디 국제음악콩쿠르 1위 |
데뷔 | 1968년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
요약 스페인에서 태어난 호세 카레라스는 8살부터 무대에 올라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루악스의 권유에 못 이겨 오디션에 참가하였다가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987년 백혈병에 시달리면서도 ‘쓰리 테너’ 공연을 함께하며 백혈병에서 완전히 회복한 카레라스는 현재, 자신이 세운 백혈병 재단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의 사람들에게 인도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목차
호세 카레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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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다
194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호세 카레라스는 전설적인 ‘쓰리 테너(Three Tenors)’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족들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6살 때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카루소에 대한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나오는 모든 아리아들을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는 8살부터 성악 레슨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스페인 국영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베르디 〈리골레토〉에 나오는 “La donna è mobile”를 불렀다. 이것은 그가 대중 앞에서 한 최초의 공연이었다. 그는 11살에 마뉴엘 드 파야의 오페라에 나오는 보이 소프라노 역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데뷔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역은 소년들이 부르기에는 너무 어려워서 성인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카레라스는 어린 나이에 이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한다.
변성기를 지난 이후 그는 프란치스코 푸이그(Jaime Francisco Puig)와 후안 루악스(Juan Ruax)와 성악 공부를 하였는데, 카레라스는 루악스를 자신의 ‘예술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였다. 카레라스는 루악스의 권유에 못 이겨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 오디션을 통해 벨리니 〈노르마〉의 플라비오 역을 맡게 됨으로써,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수많은 연주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 중에 그 당시 유명했던 몽세라 카바예(Montserrat Caballe)를 알게 되었다. 카바예는 카레라스의 목소리에 반해서 그를 자신의 제작사로 영입하는데, 곧이어 카바예의 상대역으로 도니체티의 〈루크레치아 보르기아〉에 제나로 역으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세계무대에 본격적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공연과 비난, 뒤늦게 알게 된 병
이후 카레라스는 1972년에 미국에, 1974년 영국 코벤트 가든에 데뷔하였으며, 뒤이어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카라얀(Herbert von Karajan)과 협연하였으며, 빈 국립 오페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세계 유명 오페라단에 줄줄이 데뷔하게 되었다. 그는 28살의 나이에 이미 유럽과 미국의 일류 오페라단에서 24개의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이런 바쁜 일정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비평가들은 종종 그의 목소리가 긴장되었다고 지적하였는데, 그가 너무 많은 출연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피로함은 사실은 백혈병이 원인이었는데, 카레라스 자신도 1987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자신이 이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쓰리 테너에 힘입어 백혈병을 이겨 내다
백혈병과 투병하는 동안 그는 ‘쓰리 테너’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원래 카레라스는 도밍고(Plácido Domingo),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와 함께 세계 오페라단의 왕좌를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이 기간을 통해 그들은 진정한 우정을 쌓게 되었다. 그들은 카레라스가 투병하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아끼지 않고 후원을 해주었으며, 실제로 그들의 첫 번째 연주회는 당시 성립된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José Carreras Leukaemia Foundation)을 위한 기금모음 행사였다. 이 행사는 수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았으며, 세계적으로 방송됨으로써 엄청난 금전적인 수입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이 연주실황을 담은 음반과 영상물은 날게 달린 듯이 팔려 나갔다.
카레라스는 수많은 오페라 음반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실내악, 크로스오버 등 다양한 장르의 음반을 남겼다. 그의 백혈병 투병기를 담고 있는 자서전적인 영상물인 〈A Life Story〉는 미국의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008년 백혈병에서 완전히 회복한 카레라스는 현재 자신이 세운 백혈병 재단을 운영하며, 수많은 자선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그는 이 재단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의 사람들에게 인도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