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경험하는 것은 인생을 사는 데 큰 힘이 된다.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밑거름이며 고난을 겪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빈한한 집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 가난은 겨울을 이기고 봄을 맞이하는 겨우살이풀처럼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나는 19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과외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전까지 과외를 통해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여의도에서 가정교사로 지낼 때 일이다. 예수를 믿던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전했다. 그리고 그 집의 온 가족들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냥 주일에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수요일, 금요일에도 나갈 만큼 열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주인 되시는 아주머니께서 내게 난처한 질문을 했다.
"안 선생, 교회는 새벽기도회를 며칠에 한 번씩 하는 거야?" "그런 거는 입장 곤란하게 왜 물어보세요? 제가 잘 가지도 못하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내 말을 잡아서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안 선생이 우리 집에 오고 나서 가끔 새벽에 사라지기에 내가 어디가는 건가 보니까 교회를 가더라고."
그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새벽기도를 나가기는 하지만 바쁜 날 때문에 날마다 새벽기도를 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힘이 닿는 대로 불규칙적인 새벽기도를 했는데 그것을 아주머니가 본 것이다. 초신자인 아주머니가 보기에 새벽기도회는 언제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새벽기도회는 날마다 있습니다. 제가 피곤해서 날마다 못 가서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러세요?" "내가 내일부터 새벽기도를 한 번 가보고 싶은데 혼자 가려니 좀 그러네, 안 선생이 나하고 좀 같이 잘 수 있겠나?"
아주머니는 새벽기도가 힘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잘해야 일주일 정도면 그만 두려니 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나갔다. 덕분에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너무 몸이 피곤할 때는 새벽에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지옥가자고 재촉하는 저승사자 소리만큼 힘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아주머니는 새벽잠이 없고 초저녁잠이 많으신 분이었다. 저녁 8시 반이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셨던 것이다. 그리고 새벽에는 여지없이 눈을 뜨니 새벽기도는 자동적인 코스가 된 것이다. 파김치가 된 날에도 나는 도살장 끌려가듯 아주머니와 함께 새벽기도형 인간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했다. 그리고 많이도 울었다. 나름대로 '쌓인 게' 많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 좀 도와주이소 나도 남들처럼 대학원도 가고 유학도 가고 공부도 더 하고 싶어요. 하나님, 우리 엄마가 저 부산 영도 촌구석에서 저래 혼자 고생하고 계시는데 나 빨리 성공하게 해주세요."
나를 서울로 유학 보내면서 졸업식 때 오신다고 약속하신 아버지는 내가 대학교 2학년을 채 마치기 전에 과로로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셨다. 그전부터 몸이 편찮으셨던 것을, 가족들이 걱정하고 병원비가 많이 들까봐 숨겨 오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의지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하나님, 그라니까 지 쪼매만 도와주이소! 예?"
새벽마다 나는 한결 같은 내용으로 부르짖었다.
"하나님! 하나님은 약자 편이신데, 나를 좀 도와주셔야지! 내가 어렸을 때, 주님 처음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너랑 함께 한다, 니 인생 내가 책임진다' 그랬으면 좀 밀어주는 분위기가 있어야 안 하겠습니까? 예수 믿은 지 10년도 훨씬 넘었는데 도대체 나를 신경 써주는 기미가 안 보이잖아요? 하나님, 나 좀 도와주시소. 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지 아버지가 목사님이고 장로님인 내 친구들은, 그 아버지들이 밀어주고 당겨주고 기도해주고 오만 거 다해 줄 거 아입니까? 나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밀어줄 아버지가 안 계십니다.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진짜 이렇게 기도했다. 새벽마다 못되게 아버지 친구들까지 걸고넘어지면서 기도했다. 내 형편이 나 스스로 너무 안타깝고 답답했기 때문에 하소연하는 탄식의 기도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새벽기도회에서 목사님 설교가 끝나고 기도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 마음에 이런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민아, 니는 맨날 기도할 때마다 불만이 와 그래 많노! 그라고 맨날 달라는 것이 또 우예 그래 많노! 그라지 말고 그전에 니가 가지고 있는 거를 먼저 하나님 앞에 한번 드려봐라. 그러면 이 하나님이 밀어주든지 댕겨주든지 화끈하게 한 번 할 거 아이가!"
나는 부산이 고향이라 기도를 부산 사투리로 했는데, 하나님도 내게 부산 사투리로 말씀하셨다. 물론 내 속에서 울려진 음성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하나님이 가진 것을 먼저 내놓으라는 음성을 듣고 확 열이 뻗쳐올랐다.
"하나님! 내 가난한 거 모르십니까? 나한테 뭐가 있다고 내놓으라 하십니까!"
그 뒤로 은혜가 되는 것이 없었다. 설교를 들어도 감동이 되지 않았다.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두 번 울면 적어도 한 번은 울었던 나였다. 그런데 예배의 감동도 없고 기도도 안 되었다. 이런 현상이 몇 달 지속되니 미칠 지경이 되었다.
"하나님! 내 가난한 거 하나님 모르세요?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데 도대체 하나님이 왜 이러십니까? 내 놓긴 뭘 내놓으란 말입니까?"
그래도 여전히 내놓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두 가지 결론을 냈다. 첫째는 내가 성악을 전공하고 있고, 젊음과 함께 남다른 열심과 부지런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뭐든지 하나 맡기만 하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둘째, 나는 인기가 많았다. 특히 키가 작다보니 젊은 여자들보다 할머니들이 무척 귀여워해주셨다.
'교회 어르신들 가운데 노환으로 집이나 병원에 누워 계시느라 주일에도 교회를 못나오는 분들이 계시다. 그래 좋다. 지금부터 그런 분들을 찾아가 몸으로 때우는 거다. 내가 남들보다 노래를 좀 잘하고 어르신들도 나를 좋아하니까, 이제부터 어르신들을 찾아가서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기도해드리고, 찬송도 불러드리면서 그분들의 기쁨조 노릇을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이상하게 그동안 불편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편안해졌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먼저 내놓으라고 하신 그 무엇이 바로 노래하는 일이며 찬양의 봉사였던 것이다.
가난한 시절의 부모의 자식에 대한 기대는 출세해서 편안하게 잘 사는 것이다. 아버지도 내게 그런 기대를 거셨다. 의사가 되어 돈도 벌고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원하셨다. 나 역시 아버지의 그런 기대에 부응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내가 너무 노래를 잘 불렀다는 것이다. 내가 음악계에 데뷔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교회 여름성경학교 때 개최한 독창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것이 첫 데뷔였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결국 나는 교회 행사 때마다 교회 어른들 앞에 불러 나가서 독무대로 주름을 잡았다.
아이들 사이에서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 어른 찬양대가 찬양을 하면서 고음을 내는 어린 목소리의 솔리스트가 필요할 때면 나를 부르곤 했다. 예를 들어 '거룩한 성'을 부르려고 할 때 어린이 솔리스트로 초빙을 받았다. 어른들이 인정할 만큼 나는 노래를 잘 불렀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음악으로 대성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중학생 때는 어린이 주일학교 찬양대 지휘자로, 고등학생 때는 중고등부 찬양대를 지휘했다. 그러니 이래저래 지휘를 한 경력으로 따지면 40년에 가깝다. 따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천부적인 은사가 나를 음악의 세계에 머물게 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서원을 따라 의사가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 가운데 있었다. 더구나 남자가 음악을 한다는 것은 '딴따라'라는 터부시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환영받는 일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어느 날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일이 생겼다. 의사가 될 생각을 한 나는 당연히 이과를 생각했다. 그렇지만 막상 선택을 할 때가 되자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10, 20년 후에 내가 의사 가운을 입고 환자를 수술하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이건 아니야'하는 생각을 했다. 내 안에 숨겨있던 다른 욕망, 즉 '내가 평생 노래만 하고 살 수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하고 지휘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전까지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 내 안에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노래하고 싶은 속마음을 발견한 나는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기 전에 내가 재능이 있는지 정확하게 테스트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성악가 한 분을 찾아갔다. 그분은 내가 처음 보는 악보를 꺼내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테스트를 받고 합격점을 얻었다.
"우아, 안민이 니 목소리 죽이네! 노래 잘한다. 니는 타고난 목소리가 좋고, 음악성이 뛰어나고, 악보 보는 실력도 뛰어나니, 나한테 레슨만 열심히 받으면 니가 원하는 대학은 어디든 갈 수 있겠다."
성악 선생은 노래를 가르쳐 달라는 내게 어머니를 모셔오라고 했다. 레슨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성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뒤에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허락대신 아버지의 주먹이 날아 왔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와 투쟁을 해야 했다.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 어머니도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께 성악을 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위협을 했다.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불효의 말을 했다. 황소 같은 고집을 부리는 자식에게 결국 부모님은 손을 들었다.
부모님은 성악을 위해 레슨을 받기 시작하면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부업을 하셨다. 어머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하셨고 아버지는 밤에도 야간 경비를 서는 일을 하셨다. 결국 나는 서울대 음악대학 성악과에 합격을 했다. 그렇게 성악의 길을 걸어서 결국 나는 스물다섯 살에 부산 고신대학교에 전임대우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주일에는 서울에 있는 경향교회를 섬기고 평일에는 부산에 고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신대학교에 간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다. 고신대학교를 섬기면서 수많은 교회에 가서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다. 1년에 150번에서 200번 가까이 곳곳에서 집회를 열어달라고 해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이상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에 방문교수로 미국에 간 적이 있었다. 재충전을 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미국에 갔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미국의 40여 개 주 120곳이 훨씬 넘는 곳에서 우리를 초청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 앞에서 음악회도 열고 복음도 전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2천 명 가량 모아놓고 아내와 함께 대중가요인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도 부르고, 아내와 함께 데이트하던 시절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면서 불렀던 사랑의 노래인 '사랑은 한순간의 꿈이라고'도 불렀다. 예수 믿는 사람이 거의 없는 자리에서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같은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받아드리지 못하지 않겠는가. 요즘 사람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가사로 된 대중가요 중에 그런 곡들을 선곡했다. 그리고 내 간증을 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도 당신이 믿는 그 예수님을 믿고 싶다"면서 그날 저녁에 950명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신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가 가는 곳마다 얼마나 놀랍게 우리를 사용하시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찬양을 세계를 다니면서 마음껏 하게 하시고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게 하시면서 수많은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나로서는 기대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고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