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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03
로마서 3장 20절
성경이 말하는 위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죄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심으로 더 이상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주신 그 은총을 거두지 않는 것, 다시 말해 견인의 은총까지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시작하실 뿐만 아니라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소망을 주시고 또 준비까지도 하시는데, 이 위로를 얻고 누리기 위하여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도 알아야 합니다. 셋째 그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문 이하는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 설명하는데, 오늘부터 살피려고 하는 것이 첫 번째 부분인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 지식을 위하여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죄의 원인은 무엇이며 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나아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무엇인지를 설명하게 됩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알 수 있으며(3문), 그 율법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면서 거기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만(4문) 본성적으로 순종할 수 없는 게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합니다(5문). 그럼 왜 우리가 본성적으로 율법에 순종할 수 없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6문). 본성적으로 율법에 순종할 수 없게 된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습니다(7문).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죄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에(8문) 우리는 본성적으로 율법에 대하여 순종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혹 본성적으로 율법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에 순종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가 그런 자리에 이르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9문).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시는데(10문),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11문). 여기까지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첫 번째 부분인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제 몇 주에 걸쳐 하나씩 살펴볼 텐데, 먼저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래서 비참함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 교회가 가르쳐온 교의, 다시 말해 성경은 율법과 복음이라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래서 비참함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문이 그 내용입니다.
3문. 그대의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에서 압니다(롬3:20).
이때 율법은 도덕법으로써의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주신 삶의 규범이요 규칙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너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삶의 규범이요 규칙입니다. 이런 율법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할 때 하나님처럼 완전한 자로 만드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자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비참함 가운데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차차 살피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창세기 1장 표현대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죄인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범죄의 가능성 아래, 변화에 종속된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놔두셨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장 2항). 불변하신 하나님과 달리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삶의 규범이요 규칙인 율법을 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 나라마다 법이 있지만 그 법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법들은 사람이 기준이 되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처럼 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화가 있는 존재입니다. 이런 사람이 법을 만든다고 할 때 어떻게 모든 나라의 법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불완전한 사람, 변화가 있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할 때 그 법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기준이 있어서 이렇다, 저렇다고 할 수는 있지만 변화가 있다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코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변화 자체가 없으십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 계시를 통해 변화가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어떤 변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지 않는지를 알리시는 방식으로 그렇게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시 말해 완전하고 불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법 또한 완전하고 불변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법을 모든 사람의 공통의 법으로, 절대적인 규범이요 규칙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불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율법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이 율법에 비춰보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우리가 죄인이요, 죄인으로서 비참함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3장 20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는가? 왜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가? 나아가 죄인으로서 비참함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이어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문을 보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4문.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가르치십니다(마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신6:5, 레19:18, 막12:30, 눅10:27)
율법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의식법도 있고 재판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율법은 의식법과 재판법이 아니라, 도덕법에 대한 것입니다. 맨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 주신 법입니다. 때문에 시대가 변하고 장소가 다르다고 해서 구속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법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이 있습니다.
도덕법으로써의 율법은 십계명을 통해서 잘 나타나 있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죄와 비참함, 죄와 비참함에서의 구원, 그 구원에 대한 감사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고 할 때 십계명에 대한 설명은 마지막 감사 부분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살필 것입니다. 여기서는 왜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가, 왜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도덕법으로써의 율법은 십계명을 통해 잘 나타나고,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관련해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고 있으며,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는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하여 점도 없이, 흠도 없이, 완전하게 지키고 있습니까? 하나님 사랑과 관련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주 너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에게 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신자는 이런 명령에 응답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불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 사랑과 관련하여 요구하시는 바를 점도 없이, 흠도 없이, 완전하게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정직하게 말하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 조차 첫 범죄 이후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해 탓하되 누구에게까지 탓을 돌립니까? 창조주 하나님에게까지 돌린 것이 사람의 본성으로 있습니다. 이러한데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의 의미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면(이하 우르시누스의 해설 참조), 주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의 무한한 선하심을 정당하게 인정하며, 그를 우리의 최고선으로 여기고 높이 우러르며, 최고로 그를 사랑하며, 오직 그의 안에서만 즐거워하고 그에게만 신뢰를 두며, 다른 모든 것보다 그의 영광을 사모하여, 그를 불쾌하시게 하는 생각이나 성향이나 욕망이 우리에게 조금도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실제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극진히 아끼는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거나 극심한 재난을 당할지언정 그분과의 교제로부터 분리되거나 아무리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그를 거스르는 일은 결코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말미암아 오직 그분만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모든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여기에 네 마음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애착과 욕망과 성향들을 의미한다고 우르시누스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전체를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무엇보다도 오직 그만을 사랑할 것을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곧 우리 마음이 일부는 그에게로 가 있고, 또 일부는 다른 존재에게로 가 있어서는 안 되고, 온 마음이 전적으로 그에게로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다른 어떤 것을 그분보다 더 선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어떠한 것도 그와 동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경이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입니다(왕하20:3, 사38:3 참조).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습니까? 그에게 우리의 전인을 굴복시켜 드리고 있습니까?
이어 네 목숨도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르시누스는 목숨이란 우리의 존재 중에서 의지를 담당하는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즉 너의 모든 의지와 목적을 다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네 뜻도 다하라고도 말씀합니다. 우르시누스는 이 뜻을 깨달음 혹은 지각하는 작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네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만큼 그를 사랑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진정으로 온전히 알도록 네 모든 생각을 기울이고, 그리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부분적으로만 알 뿐입니다.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 보는 것처럼, 주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온전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어떻게 완전한 사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불완전하게밖에는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런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네 힘도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르시누스는 이것이 겉과 속의 모든 행위들과 활동들을 다 포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만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어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이웃과 부모, 친족들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최고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사랑한다든가 그와 동등하게 사랑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근거해서만 사랑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율법을 거스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불신자의 이웃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이웃 사랑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이웃 사랑은 어떠합니까? 앞에서 하나님 사랑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하고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있어서 그러한데, 이웃 사랑 역시 어떻게 우리가 완전하고 온전하게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점도 없이, 흠도 없이 이웃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야고보서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혹 누군가 이웃 사랑을 완전히 지킨다 할지라도 하나님 사랑에 있어 부족함이 있다면 율법을 지키는 데 부족함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완전하고 온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고 온전한 분이 어떻게 불완전하고 온전하지 못한 것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율법 앞에서 완전하지 못하다, 온전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며, 때문에 참으로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7장 12절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는 전혀 하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절대적인 기준으로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율법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는가? 율법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우리의 불결함이 드러납니다. 율법이 의롭기 때문에 그 앞에서 우리의 불의함이 드러납니다. 율법이 선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우리의 악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13절에서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선한 것, 즉 율법이 사망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으로 말미암아 죄가 죄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7장 26절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신명기 27장 15절 이하 25절이 그 내용입니다. 15절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16절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7절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8절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5절까지의 말씀을 다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전체 말씀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문,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요약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 이웃에 대해서는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저주 외에는 받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고 말씀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율법 앞에서조차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그의 마음이 강퍅하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0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결국 우리가 신자로서 하나님을 참되시다, 진실하시다고 인정한다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셨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할 뿐이다. 비록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지만, 그런 율법이기에 우리의 불결함이, 우리의 불의함이, 우리의 악함이 드러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문은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5문.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절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롬3:10,20,23, 요일1:8,10).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창6:5, 8:21, 렘17:9, 롬7:23, 8:7, 엡2:3, 딛3:3).
물론 불신자와는 달리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불신자와는 달리 하나님 사랑에 근거해서 이웃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명하고 있는바 모든 것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느냐? 이웃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느냐? 성경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실제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더라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미워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향은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가정 안에서부터 드러나는데, 우리가 잘 아는 가인과 아벨 사건입니다. 오늘날 가정 안에서의 폭력, 그리고 폭력이 지나쳐 살인에 이르기까지 하는 일들을 종종 듣지만 그래도 우리 안에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최초의 살인이 다름 아닌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창세기 6장 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런 표현은 창세기 8장 21절에서도 표현됩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런데 이 두 구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노아와 관련된 8명을 제외하고는 다 심판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홍수 심판입니다. 왜 이런 심판이 있는가?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심판하셨다고 해서 그 죄가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의 경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지만(창6:8-9), 그렇다고 해서 죄의 본성이 없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본성에 대하여 어떻게 말합니까? 예레미야 17장 9절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모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무엇이냐? 사람의 마음이란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사람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비참함 가운데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우리의 본성이 부패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율법을 통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또한 우리의 본성이 부패했다는 사실을, 그로 인해 우리가 비참함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신자도 사실은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로마서 7장 21절 이하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위로, 그것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유일한 위로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율법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근거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실 때 우리의 본성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본성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온전히, 완전히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3장 20절에 이어 나오는 말씀을 보시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지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고 말하면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롬3:21). 그것이 무엇인가? 로마서 3장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자 되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롬3:23-24).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 우리는 로마서 3장 20절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 그것도 절대적인 규범이요 규칙인 율법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 그래서 비참함 가운데 있다는 사실, 우리의 본성 자체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지만 복음의 위로가 참된 위로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