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무언가를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우연히 찾아온다.
내가 4년동안 그토록 미쳐있었던 오디오 생활을 잠시 접었다가 그냥 아무생각없이 우연히 네이버 오디오카페에 들어갔고, 오랜동안 그토록 찾아헤매던 JBL L36 스피커를 판다는 글을 운명처럼 만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 JBL스피커가 30년된 아버님 유품이라는 조금은 엄숙한 주인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버님 유품이니 싸게 팔고 싶지 않다는 그의 진중한 표현에 감동받아 시세보다 훨씬 비싼가격에 이 스피커를 구입하게 되었다. 미친 오디오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JBL L36은 30년 전에 100만원정도에 판매되던 스피커였다. 비슷한 유닛구성의 JBL L65는 비슷한 중고가격임에도 현재 180만원정도에 거래된다. 하지만 그 밑에 급인 L36은 4~50만원에 시세가 형성되어 있다. 이 점이 정말 아쉽다. 내가 보는 드라마가 시청율이 낮으면 아니라고 항변이라도 하듯이, 나름 수천만원의 오디오 시스템을 수년간 들어와본 나로써 L36은 감히 L65와 동급이나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왜 JBL이라는 스피커 브랜드를 사람들이 좋아하는가? 오디오 카페에 가보면 사람 덩치보다 더 큰 JBL 괘짝 스피커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촌스런 파란색 괘짝 스티퍼 JBL은 원래 사람의 목소리를 그대로 재생해내는 스튜디오 모니터 스피커로 초기에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째즈와 록, 가요 등을 가장 오디오적 쾌감을 주도록 구현시킨다고 해서 국내 오디오파일들에게 유명해졌다. 왜 저렇게 못생기고 덩치큰 JBL스피커를 언젠가 한번은 들이고 싶은 로망으로 여길까? 못생겼는데 성능이 탁월한 반전적 매력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JBL L36에 맞추어 앰프와 DAC 그리고 CD 플레이어 그리고 튜너를 구입했다. 그러던중 스피커에서 띠~ 소리가 나는 험이 발생했다. 누구나 오디오 생활중에서 한번은 겪는다는 험이 나에게도 발생한 것이다. 잊을만하면 띠~ 하고 들리는 전자파음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몇일동안 온라인 오디오 카페에 문의도 해보고 전기파 해결에 좋다는 멀티탭, 파워케이블도 구입해보고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험은 기기들간의 전위차이로 발생하는데 주로 노트북의 전원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는중에 '접지' 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노트북 키패드를 터치하다보면 가끔 손바닥에 살짝 전류가 흐르는걸 느낄것이다. 이게 콘센트를 타고 노트북으로 들어온 전류이다. '접지'라는 것은 이렇게 콘센트를 타고 불필요한 전기가 흐르는것을 콘센트에서부터 차단하는 것이다. 이 개념을 알고 나서, 결국 노트북을 오디오와 다른 멀티탭으로 분리시키고, 앰프쪽 파워케이블을 절연테이프로 절연시키고 험을 고쳤다. 정말 1주일간 나만의 치열한 사투였다. 이를 지켜본 아내가 이렇게 말을 한다. "당신이 좋아서 하는 일 맞지?"
마란츠 빈티지 튜너를 들였다. FM 아나운서의 목서리가 스튜디오에서 직접 전달한다는 약간의 허풍스런 마케팅에 홀려 덜컥 구입했다. 정말 대박 기기이다. 30년 이상된 기기인데 상태가 정말 좋다. 더구나 불꺼진 상태에서 튜너에서 나오는 푸른색 불빛은 모든것을 용서해준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흐뭇해진다. 드디어 JBL L36스피커를 중심으로 모든 기기 세팅이 완성되었다. 3달정도가 걸렸지만 그 과정이 나름 즐거웠다. 우리 오디오 파일들이 항상 하는 거짓말이 있다. "이제 음악만 듣기로 했어요~"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오디오 장터에 슬쩍 발을 담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