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선생유적지
2012년 3월
♣ 이이선생 신도비(李珥先生神道碑)
파주시 향토유적 제6호로 높이 223cm, 폭 109cm, 두께 39cm 규모의 대리석 비석으로
앞뒷면에 율곡 이이선생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1631년(인조 9) 4월에 건립되었고,
이항복(李恒福)이 비문을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 자운서원(紫雲書院) - 경기도기념물 제45호
자운서원은 1615년(광해군 7)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들에 의해 창건 되었다. 1650년(효종 1)에 '자운(紫雲'이란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그 뒤 1713년(숙종 39)에 그의 후학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과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 1632~1695) 두 분을 추가로 배향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1868년(고종 5) 대원군
(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 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들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
경내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인 문성사(文成祠)와 내삼문 담장
밖에 자운서원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문성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높은 대지위에 세워져 있으며 내부에는 율곡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가운데에 모시고
좌우로 김장생과 박세채 두 분의 위패를 모셨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율곡문화제 행사때
제향을 올리고 있다. 문성사 아래로는 강당 건물인 강인당(講仁堂)과 그 아래로
동재인 입지재(立志齋), 서재인 수양재(修養齋)가 위치하며 강인당 양쪽으로
노거수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있다.
老巨樹 느티나무
♣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자운서운묘정비는 율곡선생의 덕행을 추모하고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한
화강암 비로 1683년(숙종 9)에 건립되었다. 이 비문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예서체로 썼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율곡 약수터
♣ 율곡 이이 가족묘
여현문(如見門)
♣ 신사임당묘 / 이이선생묘 - 경기도기념물 제14호 . 제15호
자운산 기숡에 율곡선생묘와 신사임당묘를 비롯한 가족묘 13기가 자리잡고 있다.
중심묘역에는 맨 위에 율곡 이이와 부인 곡산노씨묘, 그 아래로 이이의 맏형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가 위치하고 있다. 그 아래로는 이이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가 자리하며
맨 아래쪽에는 이이의 맏아들 경림의 묘가 있다.
이이선생묘는 부인 곡산노씨묘와 위 아래로 인접해 있으며 봉분 정면에 상석과 오른쪽에 묘비가
위치해 있다. 그 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을 각각 세웠다. 신사임당묘는 남편 이원수와의 합장 봉분
으로 중앙에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위치하며 좌우로 키작은 문인석이 자리하고있다. 묘역은 전체적
으로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 평범한 묘제 형식을 띠고 있다.
이이의 맏아들 경림의 묘
이이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율곡 이이와 부인 곡산노씨묘
율곡의 묘비석 뒷면에 쓰인 글씨
율곡 이이와 부인 곡산노씨묘
재실
♣ 율곡기념관
율곡기념관은 1986년 건립된 팔각정 양식의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되어 있는데
2009년 새롭게 단장하여 율곡 선생관련자료 전시 및 체험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는 율곡과 신사임당의 서화 유품을 비롯해서 큰 누나인 매창(梅窓)과 막내 동생
이우(李瑀, 호는 옥산)의 작품등을 감상 할 수 있는 디지털 갤러리가 있다.
또한 영상관에는 율곡의 생애와 사상을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체험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2층에는 율곡의 연보 및 율곡의 일대기, 가계도, 율곡의 사상(철학.정치.
교육.경제.사회.국방.문학)을 살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 율곡 이이(栗谷 李珥) - 1536~1584
조선중기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
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 판관 의석(宜碩)의 증손이고 사헌부 감찰 원수(元秀)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하여 어릴때 이름을 현룡
(見龍)이라 하였으며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단, 그리고 셋째는 덕수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의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율곡리에서 유래된
것인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때 「화석정시(花石亭詩)」와 1545년 10세때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으며 1548년(명종3) 13세의 어린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했다.
1551년 16세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만에
하산하여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공부에 전념하였고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아홉 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에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대제학, 호조.병조.형조.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율곡선생의 학문은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의
거두인 이황(李滉)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주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율곡의 이러한 학문경향은 정치.경제.교육.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여 경세가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사창설치(社倉設置), 대동법(大同法)실시,
십만양병설 주장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 선견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84년(선조 17) 음력 1월 16일 4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예장 되었다. 저서로는 「학교모범」「성학집요」「격몽요결」「소학집주」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헌서원(紹賢書院),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1624년(인조 2)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배향되었다.
★ 신사임당(申師任堂) - 1504~1551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사임당(師任堂)은 당호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
어머니는 용인 이씨 사온(思溫)의 딸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平村)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죽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시가의 선조때부터 터전인 파주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때때로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렸으며
이런 와중에 셋째아들인 율곡 선생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의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일찍부터 나타나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하기도 했다. 그의 주된 그림소재는 풀벌레, 화조(花鳥), 매화(梅花), 난초(蘭草), 산수
(山水) 등으로 이런 화제(畵題)를 통해 나타난 그림은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였다.
한 예로 풀벌레를 그린 그림을 마당에서 여름볕에 말리려하자 닭이 다가와 산 풀벌레인줄 알고
잡아 먹으려다 종이가 뚫어질 뻔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 뿐만 아니라 글씨와 시 문장에도
주위의 격찬이 끊이지 않았으며 조선시대의 예술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 성장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그 재능을 발휘 할 수 있는 집안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명한 어머니의 가르침과 도량
넓은 남편을 만난 점 등은 그의 재능에 힘이 되었고 그러한 인간애는 자식사랑으로 이어졌다.
자녀들 가운데 그의 훈화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이는 셋째 아들 이(珥)로 훗날 이이는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또한 넷째 아들 우(瑀)와 큰 딸 매창(梅窓)을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어리도(紫魚里圖)」「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연로도(蓮鷺圖)」등이 있다.
글 내용 출처: 율곡선생유적지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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