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 장 온유한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5,6)
오늘 예수님께서 심영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이어서 또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러면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믿고 자기의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는 여러분이 자기의 믿는 예수님
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하신 이 말씀들에 대해서 뜻
을 다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말씀으로 믿음이 되기 위해 마음과 뜻을 다해 힘썼
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타나게 되어 있는, 예수님
이 말씀하신 이 온유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온유한 자의 확실한 믿음의 줏대가 되어 그 능력으로
살고 있으므로 인해 핍박도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온유를 예수님의 의도대로 깨달았습니까?
어떤 뜻으로 이해하여 받았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먼저 자신을 보시고 자기 자신에게 답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따른 것이 되었는가? 먼저 자신에게 질문에 답해보
자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다 할 때 분명히 알 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나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자기가 알고 있
는 지식이나 상식에다 맞춰 해석하여 행하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맞는 종교를 만드는 것이 되
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결국 자기 지식을 따르는 것이 되고,
자기 상식을 따르는 것이 되어서 그것은 자신에게 종교요, 자기 양심의 의을 세우는 것이요, 자기
가 자기를 우상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맞는 성경을 만드는 거짓 선지자나 거짓 그리
스도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심영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린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 하는 이 같은
'복이 있나니'의 조건들이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 어느 한 가지만 있어도 되는 것처럼 갈라놓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복이 있나니의 다른 것은 다 모르는데 심영이 가난한 것은 나타날 수 있다
든지 하는 것처럼 말씀을 각각 따로따로 잘라놓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심영이 가
난한 자라야 애통하는 자가 되고 심영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가 온유한 자가 될 수 있고, 계
속 복이 있나니가 필연으로 따르는 것을 말씀한 것인데, 심영이 가난한 것 따로, 온유한 것 따로
다 따로 떼어놓는다는 말입니다.
심영이 가난한 것! 마음이 가난한 자라는 말인가? 마음이 어떻게 가난해야 하는 거지? 에이 모르겠
다! 제쳐놓는 겁니다. 자기 상식으로는 심영이 가난한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어려우니까 그
냥 상관없는 것으로 지나쳐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자 하는 것은 자기와 굉장히 친숙한 단
어로 잘 아는 말이니 "그래 내가 얼마나 애통터지는 일이 많은가? 남편은 속을 썩이고 돈 없는 삶
에 지치고 사람한테 지치고 돈에 지치고 이래저래 애통터질 일 많은 나를 위로해주신다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 맘을 알아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하고 이제 그 하소연
으로 울며불며 애통하고 한풀이하듯 기도하는 겁니다.
온유한 자 하는 것도 우리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잖아요? '온유'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그것은
마음이 착하고 유순하고 뭐 부드럽고 따뜻하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온유한 자 하니까 지체할 것도 없이 "아,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은 유순하고 착한 사람은 복
을 받는다는 것이구나,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니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 되면 땅 주시는 복이
있구나,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야 당연하지"하며 아주 지당한 말씀으로 맞는 말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자기는 아직 그렇게 온유한 사람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니, 땅이 생기는 그
복을 받지 못했어도 자기의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맞는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
고 목마른 자 하니까 이 말씀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자기 상식으로는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에이 모르겠다, 이것은 모르는 것이니까 나와 상관없는 것이고"하고 넘겨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의 교회라고 하는 곳들이 얼마나 감각 없이 말씀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로, 말씀을 자기 좋을 대로 자기 편리한 대로 잘라놓고 자기 열심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종교인으로 행하는 것이어서, 그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
난받고 조롱받는 형편이 돼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사단으로 말미암아 있을 일임을 이미
성경에 다 예견된 영적 세계에 일이니 어찌할 수 없지만, 누구든지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는 자
면 성영님께서 바른 뜻으로 가르쳐 보이신 이 레마로 주신 생명의 말씀이 들릴 때에 반드시 그 영
이 반응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 마음에 동함이 일어나면 말씀 앞에서 자기 상식, 자기 지식 다 내
려놓고 말씀하신 분의 뜻을 잘 듣고 배워서 영혼에 능력을 갖추는 복 있는 기회가 돼야 한다는 것
분명히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영이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 다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심영이 가난한 자가 아니면
그 외에 어떤 것도 능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될 수 있는데 화평케 하는
자는 되지 못했어, 심영이 가난한 자는 되지 못했어"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
님이 말씀하시는 심영이 가난한 자가 아니면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자기 애통은 할 수 있을지언정,
자기 형편 때문에 하는 자기 애통은 될지언정,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애통은 알 수도 없을뿐더러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심영이 가난하여, 즉 영의 빈곤 때문에 갈등하고 고통하는 존재라
는 것,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아지는 자가 애통하는 것
이지 자기 영의 빈곤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데 애통이 된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인 것,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절실히 깨닫는 것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심영의 가난에 대해서 깨달아 알고 애통해
하는 자면 그 뒤에 온유한 자도 되고 그 뒤에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자기의 의
로 받아 사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왜 애통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자기가 누구인
가를 알았기 때문에 심영에 애통이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죄 용서해주신 은혜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 자기의 약함 때문에 애통한다는 거잖아요. 어느새 죄를 짓고 마는 자기를 보니
애통함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잖아요. 자기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니 그러므로 옛사람과 그
길에서 깨끗이 나와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 세상과 죄를 버려야 하는 것에서 때로는 무너지는 그것
이 애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게 되어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 무능하고 약한 자기를 보고 애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영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는 성영님이 주시는 예수님의 죄 용서의 은혜, 그 위로가 넘쳐 위
로를 경험하게 되니 영혼에 행복함이 몰려오는 거예요. 그 행복을 경험하는 자에게서, 온유의 능력
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분명히 믿는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당연히 소원합니다. 예수
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자기가 세상에 난 이유라는 것을 아는 것이기에 그것을 누구도 막지 못하고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필연으로 온유한 자인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신
온유는 예수님의 온유과 같은 온유를 말합니다. 마11:29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
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온유하신 분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또
한 우리 믿음은 이제 예수님이 명하신 뜻을 따라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반드시 배워 예수님을 따
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이 곧 우리의 온유와 겸손이 되어야 그것이 예수님 안에 들
어온 것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온유가 겸손이고 겸손이 곧 온유입니다. 온유한 자면 또한 겸손한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겸손을 아니 곧 온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는 우리가 생각하
는 그런 것, 성품이 유순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 착한 마음, 온화한 성품 이런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너희들 내게 와서 착한 마음 좀 배워라. 유순하고 부드러운 마음 좀 배워라.
따듯한 마음 좀 배우라고 하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여러분이
이미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성품이 아무리 좋아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하고는 관계없
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부드럽고 착해도 부드럽고 착한 것하고 관계없습니다. 성품이 좋다고 해서
마음이 착하다고 해서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들 하잖아요? "그 사람 성품이 참
좋아서, 그 사람 참 부지런해서, 그 사람 착한 사람이라서, 예수님 믿기만 하면 잘 믿을 텐데, 열
심히 잘 믿을 텐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믿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것과 전혀 관계 없습니다. 착하다고 부지런하다고
정직하다고 잘 믿는 것도 믿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온유도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는 뜻과 방향이 다릅니다. 인간도 마음이 착하거나 따뜻하여 온화한 성품을
가진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듯이,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온유한 사람을
보면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그를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존중하고 칭찬하듯
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모습, 바로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고 그 온유한 자로 사는
자를 사랑하시고 칭찬하여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배워야 하는 예수님의 온유는 바로 빌2:6-8에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
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
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것,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것이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온유
하심이요, 겸손이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여 십자가에다 자신을 내주신 것, 아버지의 소원이 곧 아들 자신의 소원이고 사람
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뜻이 곧 자기의 뜻이 되어 종과 같은 모양으로 오셔서, 죄인 된 사람처럼
십자가로 올라가 죽기까지 하신 그 완전한 복종, 완전한 순종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그것이
예수님의 온유요 겸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그 십자가를 우리의 멍에로 메고 예수님이
죽음에서 이기신 그 승리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 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
의 멍에를 메고 배우면 우리는 쉽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친히 믿음의 본을 보
이시고 이제 그 길을 예수님께 나와 배우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빌2:5-8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이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님의 온유요 겸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왔으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마음이 하나 되어서 예수님의 길을 나도 같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
해 지신 십자가의 멍에를 메고 배우니 바로 예수님의 온유가 곧 내 온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유혹해도 사람들이 별소리 다 해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믿음의 결단이 자기 안에서부터 세워지고 그
것이 능력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온유입니다. 우리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 같은 자기 위치를 분명히 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신앙의 확고한 줏대를 가지고 죄나 악은 적극적으로 피하고 말씀하신 일에는 타협하지 않고 행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입니다. 그것이 복 있는 자다. 그가 바로
행복 자다. 이제 세상에서 나와 세상을 뒤로 돌려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네가 행복 자다. 영적
인 부유함을 사모하고 가는 네가 복 있는 자로, 바로 땅을 기업으로 얻을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아주 행복하다고 자주 말하지 않습니까? 왜 행복합니까? 저는 누가 뭐라 해도 이 길
을 택한 행복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저럴 수 있냐? 별소리 다 들어도 아버지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것이면 사람에게 핍박받는 것, 비난받는 것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이 자
리에 있자니 행복하지 않은데도 일부러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억지로 가질 수 없
는 것, 성영님이 내 안에 말씀으로 주시는 충만한 영적 행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고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하늘의 것, 영적 행복이 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만 사
랑하겠다는, 그 온유한 자의 삶을 결단하니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더욱 아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유혹을 넉넉히 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삶으로 온 관심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는 목적이 하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찬송 드리는 것으로 집중되면 거절해야 할
것을 거절할 수 있게 되고, 미혹 되지 않는 것이요, 말씀이 있으니 속지 않는 것이요, 좌로나 우로
나 치우치지 않는 능력이 서게 되는 것이요 유순해야 할 것은 유순하고 따뜻해야 할 것은 따뜻하고
냉철해야 할 것에는 냉철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
의 삶도 다 온유와 겸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에게 신앙이 있으면, 예수님을 진짜 믿는 것이면
그 믿음이 나타나는 것 다른 말 할 것 없습니다. 온유한 자냐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고 사모하느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느냐? 등입니다. 그같이 온유한 자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 있는 자입니다.
마10:16에서......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했습니다. 바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이것이 온유의 의미입니다.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더라(창3:1)했는
데 이 말은 뱀이 속이는 것에 아주 지혜롭다. 그 속이는 지혜로 사람을 속여서 넘어지게 했다는 말
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비둘기 시각에 더러워 보이거나 낯설거나 위험하다고 느끼는 곳은 앉지
않습니다. 또 먹이도 아무것이나 먹지 않습니다. 비둘기의 본능이 알고 있는 먹이, 즉 곡식 종류와
같은 것 외에는 먹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그리고 위험을 느끼면 즉시로 피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뱀이 속이는 지혜를 가지고 속이러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서 속지 않는
지혜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뱀이 속이는 데에는 지혜가 있듯이, 너희는 속이는 것들을 속지 않는
지혜를 가지라 그 말입니다. 물리쳐야 할 것들은 깨끗이 물리치고 죄나 악은 철저히 돌이키고 피하
라는 겁니다. 악한 자와는 대적지 말고 피해버리고 복음을 거스르는 것들에서 깨끗이 하라는 말입
니다. 그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할 수 있는 것도 성경의 뜻과 말씀을 바르게 알 때
에 지혜도 순결도 있는 것이지, 말씀도 뜻도 모르면 다 뱀의 지혜에 100% 속는 것입니다. 속는데
거기에 무슨 순결이 있겠습니까? 더러운 것인지 가증한 것인지 먹어야 할 것인지 먹지 않아야 할
것인지 도무지 감각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바른 말씀을 듣기를 원치 않으니, 바른 말씀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치 않으니 뱀의 지혜에 다 속았다는 말입니다. 말뜻 아셨습니까?
그러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하셨으니 여러분은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까? 어떤 땅
입니까? 복 받아서 땅을 많이 사셨나요? 먼저 성경에서 보겠습니다. 시편37편입니다. 시간상 관계
되는 구절만 봅니다. 9에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했습니다. 11에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했습
니다. 누가 땅을 차지한다고요? 온유한 자, 바로 땅을 차지한 자의 누릴 행복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땅을 차지한 것의 그 증거, 이 세상에다 땅을 많이 사서 땅 차지한 부
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안에 천국이 저희 것이 되어 그 천국의 행복인 풍부한 화평함이
영혼에 즐거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한 그 즐거움으로 자기
안에 예수님의 그 평안의 행복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땅을 차지했는지, 땅을 기
업으로 받은 자인지 그것은 자기 안에 예수님 믿는 그 행복, 예수님의 그 평안, 그것이 자기 안
에서 주장하고 있으면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증거란 말입니다. 그 행복이 있기에 근심
이 들어오다 가도 힘을 잃고 물러가는 것입니다.
22에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그러면 누가 복을 받
은 자일까요?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겁니다. 29에 의인이 땅을 차지
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누가 땅을 차지해요? 의인이라는 겁니다. 의인! 예수님으로 말미암
아 구원받은 온유한 자, 예수님의 의로 사는 예수님의 사람들이 거기서 영원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34에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
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땅을 차지하게 하시는 것이 뭐라고요? 하나님을 바라 그 도를 지키는
것, 바로 온유입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그 도를 지키는 일이 온유입니다. 온유한 자에게 땅을 차지
하게 하실 때 거기에는 저주받은 악인이 없는 것을 보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며 영원히 산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가 되어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그곳에서 건지시고 축복의 가나안 땅으로
들이실 때,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거주민(악인)들을 쫓아내고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
은 비옥한 땅입니다. 삶을 풍성케 하고 화평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아주 좋은 땅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33:3,레20:4,민13:17). 가나안 땅은
천국에 대한 예표요 상징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적
부유, 즉 천국의 행복, 영원한 즐거움과 만족함이 넘치는 곳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 때마다 돌이키기를 촉구하지만, 돌이키지 않을 땐 이방 나
라에 붙여 노략질당하여 평안함이 깨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생살여탈권을 빼
앗기고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게 하여 고통받도록 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악을
행하면 하나님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로 우리 믿음을 어떻게 가
져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자가 누구냐? 과거를 보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드리는 온유한 자에 대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분이 여러분 중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참으로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잘 알아
듣고 믿음이 되도록 성심을 다해 말씀을 전해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믿기 원하면 오늘 말씀이
가르치는 온유한 자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 믿음이 되십시오.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정말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아멘입니까?
그래서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는 땅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히 거할 곳
바로 하늘 아버지의 나라를 말합니다. 계21:1에 사도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했습니
다. 아버지 나라에도 하늘이 있고 땅이 있다는 겁니다. 그 새 땅을 기업으로 받아 그곳에서 영원
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벧후3:10-13에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
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
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
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의에 거하는 것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영혼에 확실히 확보한 것이 되어 행복한 화평을 누리며 그 땅을 향해가고 있습니까? 온유
한 자면 여러분의 영혼이 그 행복감으로 차 있을 것이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와있는 믿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새 땅을 확보한 믿음이 되었다면 그것은 영적 능력이기 때문에 영도 혼도 육도
병들일 없는 것이요, 사는 동안에 필요한 것은 채워지는 이적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
님께서 보장하시는 이적을 경험하고 그 기쁨 그 평안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의
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온유한 자의 복을 자기가 생각하는 온유와 복에다 맞추고 이 세상에서
재산을 늘리고 땅을 늘려가는 것으로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다 쌓아놓은 재산을 믿는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온유에 대해서 말씀을 들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
한 자로 복이 있나니의 믿음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다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하셨습니다. 사람이 양식이
없어서 주리는 것과 물이 없어 목마름을 겪는다는 것은 가장 큰 괴로움이요 고통일 것입니다. 오직
먹을 것을 찾는 것에만 온 생각이 집중되어 다른 것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요. 또한, 목마를 땐
물을 찾듯이, 사막에서 갈증으로 지치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물입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 우리는 물을 마시지 못해 겪는 갈증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단지 짐작이나 해볼 뿐,
실제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음부에 있는 부자가 불꽃에 들어간 그 고통을 호소하며 물 한 방울만이라도 내 혀를 축여주면 시원
할 것 같다고 하는, 그 어마어마한 온몸이 타는 듯이 하는 갈증의 고통을 호소하며 몸부림하는 것
을 우리는 들어 보았습니다. 그까짓 물 한 방울이 시원케 하는 것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
나 타들어 가는 갈증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것을 물 한 방울이라도 하는 것으로 그 절박함을 드
러내 준 것임을 우리는 이해하는 것입니다. 영화 같은 데서 그런 장면을 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사막을 지나다가 방향을 잃고 헤매는 중에 마실 물이 없어 온 몸으로 갈증을 겪으니, 물을
찾기 위해 안간힘 쓰며 마지막 힘까지 다 쏟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 구사일생으로 물을 만나면 어
떻게 마십니까? 정신없이 마시잖아요? 그러나 물을 만나지 못하면 사막에 쓰러져 그대로 죽는 겁
니다. 그러니 배고픈 사람이 오로지 찾는 것, 목마른 사람이 오로지 찾는 것, 알아들을 수 있고
상상은 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하신 이 말씀을 여러분이 어떻게 듣습니까? 어떻게 받는 것입
니까? 여러분이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다면 뭘 찾으시겠어요? 갈증이 심히 난다면 뭘 찾으시겠어요?
잘 알고 있잖아요. 이것은 배고프면 먹으라고 목마르면 물 마시라고 누가 가르쳐주기 때문에 찾는
것 아니잖아요? 먹어야 하는 것, 마셔야 하는 것, 자기가 본능적으로 알고 먹고 마시는 겁니다. 갓
태어난 아이도 찾습니다. 정신병자도 본능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 찾습니다. 이같이 우리 영도 그렇
게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의 고통이 있다는 것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
에게 하늘 하나님께 들어갈 의가 없어서 영이 그 하나님(생명)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름에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기에 너희가 심영이 가난한 자로 예수님 앞에 나와 영이
주리고 목마른 빈곤을 깨닫고 배부름을 주시는 '의'이신 예수님께 말씀을 듣는 너희는 행복 자다.
의이신 예수님 앞에 왔으니, 영의 주린 것을 먹이시고 목마른 것을 마시우게 하시는 그 예수님께
왔으니, 너희는 행복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배부름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 해갈의
기쁨을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자기 속이 무엇인지 모를 갈증의
감각이 있고, 때로는 허기진 것 같은 증세가 있고 뭔지 모를 답답한 증세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
은 바로 자기 영이 생명의 주림과 목마름으로, 의의 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증세입니
다. 영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의와 생명이 없어 주리고 있다는 것, 갈증으로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영에 감각이 살아나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에게 복이 있
다. 의와 생명에 주리고 목마른 영의 갈급한 소원을 따라 예수님께 나와 말씀을 듣고 배부름의 기회
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영혼이 하나님의 의가 없어,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 주리고 목
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육체의 배를 주리면 배를 불리고자 하는 것처럼 네가 목마르면 해갈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너희 영이 주리고 목마른 가운데 있으니, 이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
미암아 배부른 만족을 얻으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우리 속이 알 수 없는 갈등이 있고, 슬픔이 있고, 고독이 있고, 불안이 있고, 두려움이
있는가? 바로 우리 안에 빛이신 예수님(의,생명)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이 죽음에 쌓여 있
기 때문에, 생명의 빛이 없는 연고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완전한 의가 되시는 분, 우리
에게 완전한 생명이 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착되듯이 붙어서 예수님의 의와 생명을 얻고
영혼의 배부름을 얻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6:35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리고
목마른 우리 영혼을 배부르게 하시는 생명의 떡이시고, 생수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영혼
에 주림이 있고 목마름이 있는 자는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을 찾는 것처럼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것
처럼 그렇게 사모하고 찾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모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 그렇게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배부르므로 만족함이 되시
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이신 예수님으로 참 만족을 얻으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의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 아버지의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아무도 빼앗지 못할 이 영적 행
복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못할 것이 뭐 있습니까? 제가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자랑하
는 것은 내 영혼에 이 행복이 크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 들어가면 엄청난 영광이 있기 때
문에 그렇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도 오직 예수님을 증거 하셨고 성영님도 오셔서 예수님을 증거 하
시고 저도 또한 이 강단에 서게 된 때부터 지금까지 누구보다 더 성경이 증거 하시는 예수님, 말씀
이 말씀하신 그 예수님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넓이와 크기와 높이와 깊이
에 대해서 말씀드려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의 믿는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듣고 배우셨습니다.
천국이 여러분의 천국이 되게 하려고 날마다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용서받으며 아버지의 긍휼히 여
기심을 받는 자가 되게 하려고, 성영님으로 위로받고 살게 하려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받
는 믿음이 되게 하려고, 영혼의 배부름의 만족함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고
참으로 그 간절한 소원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십
니다. 너희가 참으로 예수님을 사모하기를 배고픈 자처럼 목마른 자처럼 그렇게 사모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면, 배부름으로 만족을 얻듯 배부름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
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을 듣게 되었으니 오늘 듣게 된 말씀의
정도는 깨달은 것이 되었고 여러분의 말씀으로 받았으리라 믿으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도 말
씀을 깨달아 능력으로 세우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제 3 장 온유한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p47-p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