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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 : 요나의 기도(요나서 2:1~10)
* 본문요약
요나는 물고기 배 속이라는 깊은 절망의 늪 속에 던져지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음에 대한 감사의 형식을 갖고 있으나,
요나의 기도는 전반적으로 자기의 의만 강조하는 헛되고 위선적인 기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거짓되고 교만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에게 명하셔서 요나를 육지로 토하게 하십니다.
찬 양 : 330장(새 272) 고통의 멍에 버리려고
446장(새 391) 오 놀라운 구세주
* 본문해설
1. 요나의 위선적인 기도(1~3절)
1)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배 속(지옥의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애워쌌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 스올에서 부르짖었더니(2절) :
스올은 직역하면 지옥의 깊은 곳을 뜻합니다만
여기에서는 지옥과 다름없는 큰 고통 속에서 부르짖어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2. 사명을 깨닫지 못하는 기도(4~7절)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주님의 눈앞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 물이 나를 둘렀으며 영혼까지 하였사오며(물이 목까지 차올랐으며)
깊음이 나를 에워쌌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바닷속 깊은 곳에 있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땅이 그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히 가두어놓으려 하였사오니)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 스올과 깊음, 산의 뿌리(2, 3, 6절) :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이 물 위에 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깊음’이라는 것은 땅 아래의 물을 말합니다.
‘산의 뿌리’는 산 역시 물 위에 떠 있으므로,
물 위에 떠 있는 그 산의 맨 아랫부분을 ‘산의 뿌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깊음, 즉 산의 뿌리에까지 내리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2절의 ‘스올’과 같은 의미입니다.
-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7절) : 베흐트아테프
‘피곤할 때에’에 해당하는 ‘베흐트아테프’는
‘압도되었을 때, 덮였을 때’로 기운이 다하여 힘을 잃은 상태입니다.
여기에서의 뜻은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완전히 탈진된 상태,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3. 요나의 영적 우월감,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냄(8~10절)
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감사의 노래)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령하시니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 묵상 point
1. 고난의 한가운데에서 기도를 시작하는 요나
1) 탈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기도를 시작함(2, 5~7절)
그 거친 풍랑 속에서도 나를 바다에 던지라며
하나님을 향하여 그 오만한 콧대를 꼿꼿이 세우던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물이 목까지 차올랐고(5절),
바다 맨 밑바닥에 있는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6절),
바다풀이 머리를 감싸고 있는(5절) 그런 상태에서
이틀을 지낸 후에야 비로소 기도를 시작합니다.
요나는 자신이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산의 뿌리’는 물 위에 떠 있는 산의 그 아랫부분을 가리킵니다.
2절의 스올(지옥)이나 5절의 깊음도 같은 의미입니다.
2) 내가 고난의 한가운데에서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2, 7절)
요나는 고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부르며 찾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7절)는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그 힘을 다 잃고 완전히 탈진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이 목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이틀을 지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 고통의 상태가 되자 드디어
그 삭막한 마음을 가진 요나도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합니다.
● 묵상 :
➀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기도를 훈련시키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능력과 은혜와 사랑을 받는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사실 기도처럼 쉬운 일도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심지어 병상에 누운 상태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기도를 가장 하기 힘든 일로 여깁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루에 단 5분의 기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방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생각이 이 세상 것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훈련 시키기 위해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을 내리십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는 그 입에서 저절로 하나님의 이름이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➁ 고난을 통해서라도 강제로 기도를 시키시는 하나님
요나는 빛이 전혀 없는 좁은 공간,
죽음의 냄새가 나는 스올의 배 속에서 3일 밤낮을 지냅니다.
비탄과 절망의 시간, 그 밑바닥의 현장에서
요나는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어려움과 시련 속으로 몰아넣으셔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을 받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처럼 본의 아니게
당신을 어려움 속으로 넣으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고난이 오기 전에 평안할 때 기도합니다.
당신이 지혜로운 자라면 오늘의 기도 시간을 뒤로 미루지 않을 것입니다.
2. 요나의 위선적인 기도
1) 책임을 하나님께 돌림 : 하나님께서 나를 던지셨다(3절)
그런데 요나의 기도가 참으로 가관입니다.
3절에서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다 한가운데 깊음 속으로 던지셨다고 말합니다.
요나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던지셨다고 할 때
선원들이 던졌다고 할 때의 ‘툴’이라는 단어가 아닌
‘샬라’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샬라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보낸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을 괴롭힐 목적으로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고난의 현장에 보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하여 요나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했습니다’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저 고약한 영감같이 자기를 바다의 풍랑 속에 던지셨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자랑 : 쫓겨났을지라도 나는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4절)
요나는 주께서 자신을 쫓아내셔서 물이 자신의 영혼까지 둘렀고,
깊음이 자신을 에워쌌으며, 바다의 풀이 자신의 머리를 감쌌으며,
지금 자신이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땅의 빗장으로 요나를 오래도록 막으셨을지라도
자신은 다시 일어나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겠노라고 고백합니다.
얼핏 듣기에는 넘어지고 또 넘어질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감동적인 신앙인의 모습 같습니다만,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과시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고약한 영감이라 나를 쫓아내셨지만,
그래도 거룩한 믿음을 가진 자기는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의 의가 더 낫다는 자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 묵상 : 애통함과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가짜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니 기도는 분명 기도인데
그 기도에 자기의 죄에 대한 애통함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도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가짜 기도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의 의를 자랑이나 하는 기도는 듣기에는 꽤 거룩해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헛된 기도입니다.
3. 니느웨보다 예루살렘 성전만을 생각하는 요나
1) 나는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4, 7절)
요나의 기도에서 발견되는 더욱 치명적인 잘못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사명의 자리인 니느웨를 두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4절),
“내 기도가 주의 성전에 이르렀나이다”(7절).
하나님의 성전을 두고 기도했으니 얼핏 보기에는 꽤 거룩한 기도처럼 보입니다.
2) 그러나 그것은 사명을 감추기 위한 술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사명을 감추기 위한 교묘한 술책에 불과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의 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거룩한 곳인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계속 강조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성전을
이렇게도 사모하는 거룩한 자라는 것을 알아봐달라는 것입니다.
마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양치질을 하고 “엄마, 나 잘했지”하고 말하듯
요나는 자기가 거룩한 성전을 생각하고 있으니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해달라고 때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아무리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니느웨를 향한 사명을 감추기 위한 술책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한다고 말하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렇게 은근슬쩍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기득권자의 오만한 욕심 : 오직 나만 가져야 해
요나가 니느웨에 가는 것을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만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유대인의 영적인 오만함 때문입니다.
오직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나머지 이방인은 모두 개나 돼지로 여기는 유대인의 오만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니느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하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핍박을 받은 이유도 그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고,
유대인이 지금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 역시
예수님이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오만함 때문에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유대인들이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이스라엘은 주님을 믿는 이방인들이고,
유대인이 도리어 이방인이 된 것입니다.
● 묵상 : 거룩한 성전 이데올로기
➀ 하나님보다 성전을 더 의지하는 신앙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후에
누구든 자기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어 달라고 장황하게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솔로몬이 한 짓은
1,000명의 여자를 맞이한 것과 우상숭배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솔로몬은 자기가 지은 성전이 있으니
자기는 거룩한 자라 자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나 역시 성전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기는 거룩한 자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그 성전 안에 있으니,
그 성전에서 직분을 받은 자이니,
그 성전의 모임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자이니 거룩한 자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전이 아니라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모시지 않은 자는
아무리 성전 모임에 열심히 참여해도 모두 헛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➁ 교회 안의 우상숭배 : 내면적 신앙보다 겉치레(성전)에 더 치중하는 거짓된 신앙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내면적 신앙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더 치중하는 신앙이야말로
가장 조심해야 할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돌이나 나무로 된 우상에 절하는 자는
자기도 우상숭배인 줄 알고 있으니 나중에라도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데,
바리새인들처럼 남이 보기에 거룩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겉모습에만 치중할 때,
속은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스스로도 거룩한 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죽을 때까지 회개의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니
가장 위험한 우상숭배입니다.
4. 요나의 헛된 영적 우월감
1) 거짓 예배 :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8~9절)
요나는 거짓되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렸지만
자기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서원을 갚겠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저 우상이나 섬기는 니느웨 백성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예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없는 감사,
오직 나만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오만함이 가득한 자가 드리는 찬양,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자의 경배,
이 모든 것이 다 가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주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없는 자가 드리는 예배는
아무리 예전적으로 합당한 예배를 드렸을지라도 가짜입니다.
2) 거짓된 구원의 확신(9절)
이렇게 자기는 거룩한데
하나님이 저 고약한 영감처럼 자기를 바다에 던졌다고 불평했고,
사명을 버렸으면서도 하나님의 성전 운운하며 거룩한 척
자기의 의를 자랑이나 하는 요나가
자신을 가리켜 감사의 노래로 주께 제사를 드리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확실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거짓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 역시 구원의 확신으로 가득한 자였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극도로 미워하셨습니다.
그냥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무서운 진노를 그들에게 퍼부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거짓된 구원의 확신입니다.
3) 종교적 감정놀음 : 순종은 없고 예배만 있는 형식적인 교회에 대한 경고
도대체 무얼 믿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엉뚱한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의를 자랑할 정도로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자기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제사도 드렸고, 번제도 드렸고, 십일조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순종은 없고 예배만 있는 교회,
예배는 아주 정중하고 거룩하게 잘 드려지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도, 사랑도 없는 예배,
마음은 온통 딴 곳에 있으면서 입술로만 거룩한 자가 드리는 예배,
모두 하나님 앞에서 오물처럼 여겨지는 가짜 예배들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착각이 들게 하는 모든 종교행사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짓된 종교적 감정놀음들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묵상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마 5:4)
➀ 애통함이 없는 요나의 기도
요나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했다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의 기도를 했어야 했습니다.
내가 잠시 유대인의 오만함에 빠져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었노라고 가슴 아파하며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자기는 거룩한 자인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까닭도 없이 자기를 바다 한 가운데 던졌다고 했습니다.
➁ 애통함이 사라진 시대 : 편안하고 안락한 예배만 찾는 성도들
하나님을 향한 애통함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죄와 회개를 강조하는 설교를 듣기 싫어합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도 복을 주신다는 달콤한 설교만 듣기를 원합니다.
예배 시간 동안 편안하고 안락하게 앉아 있다가
은혜받았다고 느낄만한 감동을 받고 오기를 바라는 성도들,
이 모두가 다 애통함을 잃은 성도들입니다.
➂ 주님을 향한 애통함과 간절한 열망을 회복하십시오.
자기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를 주께서 받으십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세리와 창기들,
이들 모두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구원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천국에 가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애통함을 회복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을 회복하십시오.
* 기도제목
1. 우리가 비록 비탄과 절망의 그늘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2.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애통함과
주님을 사랑하는 간절한 열망을
내 안에 회복시켜 주옵소서.
3. 주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으로
주께 예배드리게 하시고,
주께서 명하신 명령에 순종할 때에도
똑같이 그 간절한 열망을 품으며
주께 순종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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