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전엔 "표구"라 하지 않았다
서울 낙원동에서 40년 넘게 전통 표구 작업을 해온 이효우(69) 낙원표구사 대표는 옛 사람들이 시나 편지를 쓰는 데 사용한 작은 종이인 시전지(詩箋紙) 수집가다. 전남 강진의 병풍을 제작하는 집안에서 자란 그는 10대 때 상경해 인사동 표구사에 들어가 일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국내 몇 안 되는 장황(裝潢·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 족자 등을 꾸미는 일) 장인이자 고서화 수리·복원 전문가인 그가 시전지 수집을 시작한 것은 20년 전, 조선 후기 문인 이복현의 편지지를 보고 반하면서부터다 (후략) - 2010.11.15 국민일보-
위 글에 보면 표구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집 주변에 있던 ‘표구집’이 하나 둘 사라져 요즈음엔 인사동이나 가야 구경 할 수 있게 되었다. 표구집이 동네마다 있었다는 것은 붓글씨건 그림이건 표구를 맡기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요즈음은 표구그림 보다 멋진 사진이나 현대적 감각으로 디자인된 그림들이 옛 그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림하면 따라 다니는 ‘표구’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표구(表具) : 그림의 뒷면이나 테두리에 종이 또는 천을 발라서 꾸미는 일 ”이라고 나와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은 일본말에서 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종 83권, 31년(1536)에 보면, “이용의 글씨가 있으면 매우 좋겠는데, 이 글씨는 오래 되어서 내장(內藏)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여염에서 구하여 미리 표구하였다가 주어야 하겠는데, 여염에서도 얻을 수 없고 줄 만한 다른 글씨가 없으면, 성종의 어필(御筆)을 주더라도 괜찮겠는가? “鎔書有之則甚善。 此書舊矣, 其於內藏, 亦不見之。 今可求於閭閻間, 預爲粧䌙而給之。 閭閻間亦不可得, 而無他書可給, 則雖以成廟御筆給之, 亦爲可乎? ”
왕조실록 국역본에는 ‘표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원문의 ‘장황(粧䌙)’을 번역한 말이다. 장(粧)자는 단장할 장이요, 황(䌙)자는 줄로 동일 황자다. 이로써 ‘표구’라는 말을 ‘장황’이라 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절요>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도 장황이 나오는데 청장관전서 제57권 앙엽기 4 (盎葉記四)의 도서집성(圖書集成)에 보면, “금상(今上)이 병신년(1776, 정조 1)에 사신 부사(副使) 서호수(徐浩修) 에게 명하여 이 도서집성을 비싼 값으로 사오게 한 다음 장황(裝潢)하여 개유와(皆有窩)에 쌓아 두었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런데 웃지 못 할 일은 도서집성 번역본에 장황에 대한 낱말설명으로 “장황(裝潢) : 책이나 서화첩(書畵帖)이 파손되지 않도록 잘 꾸며 만드는 일, 즉 오늘날의 표구(表具)와 같다. ”고 풀이해 놓았다. 장황을 잊고 살다보니 표구라는 일본말로 장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 ‘표구’에 대해 깊이 생각한 국어학자 한 사람만 있었어도 아니 국어사전 만드는 이 가운데 한 사람만 있었어도 우리말인양 버젓이 행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참에 ‘표구’를 대신 할 토박이말을 대국민 공모라도 해보면 어떨까? 슬기로운 국민들이 좋은 말을 많이 제시 해 줄 것 같다.
잠시 옆으로 샜다. 다시 원래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가 지금 말하는 표구(表具)에 대한 기록 중 이른 시기 자료로는 <삼천리 제12권 제7호, 1940.7.1> 자 ‘예술가의 생활초’ 라는 글에 나오는 표구이다. 이글은 탄금도제작기(彈琴圖製作記)를 쓴 화가 최목랑의 5월 19일자 일기로 여기에 ‘표구’가 보인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아침부터 그림틀(額)을 짜다. 전번 表具店에 물어보았드니 25圓을 내라고 한다. 이대로 내가 짜면 10圓내외로 될 것이기 한 時가 아가우나 내가 짜기로 한 것이다. 내일까지 鳳仙花는 완성하야 출품하기로 결심하다.” 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서 화가는 표구점에 맡길 돈 25원을 절약하기 위해 손수 액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벌써 이 무렵에는 ‘표구’라는 말이 한반도에 들어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장황(粧䌙)이란 한자말이 표구(表具)보다 어려워서였을까? 왜 ‘장황점’이라 안했는지 궁금하다. 일본국어대사전<大辞泉>에는 ‘ひょう‐ぐ【表具】: 紙・布などをはって、巻物・掛け物・帖・屏風・ふすまなどに仕立てること。表装’ 이라고 되어 있는데 번역하면 ‘효우구, 종이, 옷감 등을 붙여서 두루마리, 족자, 첩, 병풍, 장지문 등을 만드는 일, 표장’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표구 역사는 얼마나 될까?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100년 전통을 가진 교토 기타야마(山北光運堂) 표구점 누리집에 소개하는 표구 역사(表具の歴史)를 보면 ‘표구는 먼 아스카시대의 불교 전래와 함께 건너온 두루마리용 경전에서 유래한다. 이어 불화(佛画)에도 표구가 쓰였다’
여기서 아스카시대란 서기 592년부터 710년까지 118년간을 말하며 552년(538년 설도 있음)에 백제로부터 불상, 경전 등이 전해져 일본에 불교가 공인된 시기이다. 그러고 보면 표구와 불교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두루마리용 경전이나 불화 등도 표구를 하지 않고는 안 된다.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시기를 표구의 원년으로 잡는다면 표구의 시발점은 한반도가 한 발 빠르고 한 수 위다.
2010년 10월 12일부터 11월 2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고려 불화 대전-700년 만의 해후》라는 이름의 전시회가 열려 많은 사람으로부터 고려불화의 고갱이(진수)를 맛보게 하였다. 특히 일본 센소지(浅草寺)소장 수월관음도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췄는데 나는 이때 그림도 그림이지만 표구 부분을 유심히 관찰했었다. 한국, 일본,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총 44군데에 흩어져 있던 고려불화전은 세계로부터 찬사를 듬뿍 받고 있는 작품들로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웃나라인 일본에 이러한 수준의 불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고려불화는 독보적인 가치를 가진 불교신앙의 알맹이요, 예술품이다. 물론 표구 기술도 함께 말이다.
이러한 뛰어난 예술을 만들어 낸 겨레가 쓰던 ‘표구'라는 말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해다 쓰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다만 예전부터 쓰던 장황(粧䌙)은 좀 어려운 말임엔 틀림없다. 국립국어원은 “표구(表具) : 그림의 뒷면이나 테두리에 종이 또는 천을 발라서 꾸미는 일” 이라는 일본 사전 베끼기를 중단하고 ‘장황’이란 말을 소개해놓고 더불어 비단 폭을 붙여 잘 ‘표구?’한 고려불화 등도 소개해야 할 것이다.
100년 된 표구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교토의 자존심 앞에 1000여년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현실이 바로 표구(表具)라는 말이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이윤옥 (59yoon@hanmail.net)
첫댓글 표구가 쉬운 말임은 자주 사용해서 그런 것이라 여겨집니다. 장황도 오래 사용하였다면 당연히 쉬운 말일 것입니다. 미루어 생각하건데, 일본과의 차이점은 일본에는 표구가 많은 일반인들에게 익숙하게 활용되었고, 한국의 장황은 귀족문화나 종교적인 곳에 일부 사용해서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그런 것이 아닐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표구란 말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유익하고 좋은글 무척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부탁드려요. 우리가 우리말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것을 소장님의 글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