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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계보에 웬 여자들이?
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
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살
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
시야를 낳고 9.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히스기야
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
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2.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
은 스룹바벨을 낳고 13.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
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마태복음1:1-17)
오늘 본문 내용은 예수님의 족보인데 예수님께서 신앙의 계보를 통해 오신 것을 기록한 내용입니
다. 예수님은 신앙의 계보를 통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족보와 세계는 좀 다릅니다. 족보는 모든 자손이 다 들어가는 것이지만, 세계
라고 하는 것은 직계, 그러니까 부모에게 자손이 여럿이 있어도 하나님의 메시아 언약의 뜻을 가
진 신앙의 사람, 그 언약을 따르는 사람 한 사람만 올라간 것을 말합니다. 세계를 다른 말로 '계
보'라고도 합니다. 제가 말씀드릴 때 편하게 족보라고 표현할 것이니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고
듣기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특이하게도 네 명의 여자가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가 있습니
다. 그것도 한 여자는 시아버지를 홀린 음탕한 여자라 말하고, 한 여자는 이방인의 천박한 기생
이고, 한 여자는 개로 취급받던 이방 여자이고, 한 여자는 왕을 유혹하여 간통한 여자라고 말하
는, 말하자면 다 질이 나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네 명의 여자가 어찌 예수님의 계보에 올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이 왜 신앙의 계보 속에 들어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는가를 살펴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부터 족보가 시작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주
시겠다는 언약을 맺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자의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이
예수님 족보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의 시작,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역사적인 일이라는 것, 인간 역사에 기록된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족보를 기록함으로 전해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나신 것까지의 족보를 기록
하고 이제 17절에서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라고 구분지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계보에 대해서 열네 대, 열네 대, 열네 대, 이렇게 삼등분으로 나눠 설명함으로써 시대를 구분하
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으로 오셨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족장 시대이고 사사 시대입니다. 또 다윗부터 바벨론까지는 왕정 시대,
즉 왕이 다스리던 시대이고 선지자의 시대입니다.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바로 선지자의 시대입니
다. 바벨론에서 그리스도까지는 포로 시대,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어 있었던 그런 시대가 있었잖아
요. 그래서 바벨론에서 그리스도까지는 포로 시대,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암흑시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시대, 말씀을 전해 주는 선지자가 없는 영적 어두움의 시대라는 말입
니다. 왕도 없고, 말씀을 받아 전해 주는 선지자도 예언자도 없어 가장 큰 어려움에 처했던 시기
였다. 암흑기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선지자가 나타나는 대로 잡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그 족보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브
라함에게 독자(독생자, 생명의 씨) 이삭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씨를 주신 것으로써 곧 그
복음이 어디서부터 나타났는가? 어디서부터 나타났어요? 아브라함부터 복음의 시작이 되었어요. 복
음을 시초로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
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주시고 이후 믿음을 시험하시려고 창세기 22장에 네 아
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
제로 드리라고 하셨어요. 아브라함이 그 즉시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산으로 가서, 이삭을
결박하여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불러 멈추게 하심으로써, 이삭이 죽을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
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
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것은, 아브라
함이 아들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였지만, 그 아들일지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더 위에
두지 않는다는 그 믿음을 하나님께 행함으로 보인 것으로써 아브라함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알게 되
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그 행위는 곧 자기 목숨을 하나님께 드린 것
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이삭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놓은 것과 같은 것
이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증하였고 아브라함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 내주는 것으로, 자신이 자기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
고 경외한다는 것을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자기 믿음을 확증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행함은 곧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
시리라는 것을 아브라함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를 그같
이 번제물로 내놓으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표로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
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경외하므로 자기의 독자를 하나님께 내놓은 순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의 믿음을 보신 것이 되어,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독생자를 아브라함에게 내주시겠다고 언약하신 것
이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
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
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
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씨'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독생자가 세상에 구주로 오실 것은 만세 전에 이미 삼위의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
고, 그 뜻이 하늘에서는 이루어졌지만, 그것을 사람도 받아들여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믿
음으로 아멘이 된 그 사람의 믿음이 함께, 사람을 육(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이시는,
하나님의 그 일에 동역함으로써, 사람을 유혹하여 죄짓게 한 사단은 멸하고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
에 돕는 배필의 역할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그 믿음을 보여드려야 했다는 말
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 관계요, 돕는 배필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번제로 내드린 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
습니다. 22절에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하신 것은 아
브라함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곧 하나님께서도 나도 내 독자를 너와 네 후손에게 아끼지 않고
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절대적 순종을 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목숨을 내놓
으시겠다는 것을 맹세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맹세는 목숨, 즉 피를 걸고 하는 것이 맹세입니다.
생명을 내놓으실 것을 맹세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독생자의 언약은 아브라함부터입니다. 바로
독생자가 오시는 데는 사람이 그 말씀의 언약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했기에, 아브라함이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자기 독자를 내놓았으므로, 하나님께서도 나도 너를 사랑하여 내 목
숨을 내놓겠다고 맹세로 약속하신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태어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주로 보내신 씨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씨로 말미암아'하신 씨는 이삭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갈3:16에서 예수님을 말한다고 했습니
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의 씨라고 말할 때 그 씨는 이삭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삭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삭은 예수님을 씨로 주신 것의 증표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씨'라고 한 것은
이삭이 아니라 곧 누구를 말씀한 것이라고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씨를 아브라
함 가정에 심으셨습니다. 이제 그 씨가 나서 자라고 그다음 이삭이 되고 그다음 이삭에 충실한 곡
식이 되어 그 첫 열매가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
리니 '천하 만민이 죄에서 구원받아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을 얻으리니'하는 말
입니다.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을 독자라도 아끼지 아
니하고 준행하였으니, 나도 그같이 내 독자를 번제가 되게 하는 것에 아끼지 아니하고 준행할 것이
라는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을 때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
의 자손, 아브라함의 씨라고 말할 때는 누구로 봐야 한다고요? 예수님! 예수님으로 보아야 예수님
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을 자들까지를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
약의 일, 언약의 속뜻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갈라디아서 말씀, 특히 갈라디아서 3장을 이
해하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갈3:18에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
라고 했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 언제 약속하셨느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 그때 약속하셨
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 뭐냐, '씨'입니다. 씨! 자손입니다. 그 자손이 바
로 예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이 이스라엘에만 미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이
방인에게까지 미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3:6-9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또 하나
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
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는 것이 복이요, 예수
님의 그 복음을 받은 것이 복이요, 복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복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돈 많아서 부족한 것 하나 없이 갖추고 사는 것, 명예 얻는 것, 무
병장수하는 것 등등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하신
약속을 곧 인간이 생각하는 복에다 연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복 주신다는 것으로 연
결하여 열심히 그 복을 받기 위해 불확실한 믿음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복의 크기를 깨달아 알고 그 복을
소유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
생각하면 행색이 초라하고, 생각하면 그렇잖아요? 삼 년 반 동안 제자들하고 다니면서 행색은 볼
것 없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으니, 제자들은 남의 밭에 이삭이나 잘라 먹
고 비난이나 받고,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이나 하고 다니시니, 예수님 생각하면 왠지 가난
해져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예수님에 대해 별 흥미를 갖지 않습니다. 예수님하고 친해지려
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말씀만 붙잡습니다. 구약의 말씀만 붙잡고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하
셨으니 입을 넓게 열어서 세상에서 잘돼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해주시라고 열심히 복을 구
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지경을 넓혀주신다'하셨으니 꿈을 크게 가지고 10평 있는 사람은
100평으로, 100평 있는 사람은 한 1,000평으로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하라, 이런 식으로 말씀을
변개하고 왜곡하여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것을 채우겠다고 세상 것으로 지경을 넓
혀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의 종자들의 속임입니다. '입을 넓게 열라'
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 곧 천국으로 들어가 땅을 받을 믿음의 자격을 갖추라는
말입니다. 하늘의 것을 마음에 품고 입을 열어 구하라고, 그것을 구하고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람
은 땅에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해 놓으셨으니 그러므로 네
입을 넓게 열라, 즉 하늘의 것을 구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라는 말
들을 많이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
이요, 죄지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내주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
께서 분명히 사람을 사랑하셔서 지으시고, 예수님을 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한 사람을
놓고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면, 자신이 예수님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 사
랑하신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었기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관계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관계가 돼 있지 않았음에도 자기가 혼자 도취하여 하나님
이 날 사랑한다고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랑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아니면
무엇을 사랑할 건더기가 있습니까? 사랑하실 만한 것이 뭐가 있어요? 어떤 점이 사랑스러울까요?
예수님은 뒷전에 두고 돈에 집착하는 것이 더 예뻐서요? 세상 따르는 것이 예뻐서요? 예수님 사
랑하는 것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더 기특해서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것들이
예뻐서요?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면 소망도 가망도 없는 존재입니다. 정말 예수님 아니면 소망 없
어요. 가망 없어요. 아무것도 기대해 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사랑
할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착각에서 나와 이 같은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 나
도 네게 내 사랑하는 독자를 내주겠다고 하는 그 사랑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이신 것으로써, 그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 그러므로 그 독생자 예수님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
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려고 성경을
주셨고,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
의 사건이에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의 사건은 아브라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요, 예수님을 믿는 나와 연
결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 믿음을 어떻게 나타냈는가? 하나님께 이삭을
제물로 드리던 그 행함, 그것이 믿음이니, 그 믿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같
은 그 믿음 있는 자를 믿음의 후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노아의 이야
기, 모세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는 인간 이야기로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
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 눅24:27에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
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눅24:44에 내가 너
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
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시편도 선지자
도 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라고, 이것이 이루어지리라 한 말이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성경에서 인간 삶의 도리를 찾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삶의 도리 이야기
일 수도 있지만, 도리만 찾고 도리에서만 끝나면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생명이 없어요. 혼인에
대한 이야기도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이요, 믿는 자, 곧 나는 예
수님의 신부로서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내 안에 오셔서 함께 계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
의 뜻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곧 윤리가 되고 도덕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생명의 뜻이 인간의 도리가 되고, 인간의 교훈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구약 출20:6에, 신5:10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
라 하신 말씀도 말입니다. 그것을 인간이 생각하는 그 세상 복을 말하는 것인 줄로 알고, 다시 말
해 뭐 잘 먹고 잘사는 복이 자손 대대 천대까지 이루게 하신다는 것으로 알고, 남의 집 기도해 줄
때도 그것을 열심히 주워섬기며 빌어 주지 않습니까? '이 가정에 자손 천대까지 복이 이르게 해
주세요. 자손 대대 복을 주셔서 잘살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휼륭한 인물이 나서 하나
님께 영광 돌리게 해 주세요' 이런 식의 기도들을 하잖아요? 말씀 전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간 자기 관점에서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입니
까? 그것을 너무나 원하고 있는데, 그 같은 복을 원해서 믿는다고 한 것이니,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사람은 자기 입 맛에 맞는 그런 말을 하는 곳으로 꼬여 들게 돼 있
습니다. 모여들게 돼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바라는, 지금 제일 소망하는 것에 맞춰 주는데 듣지
않으려고 피할 이유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것이 곧 복이니, 그 은혜
를 하나님의 복으로 아는 것은 맞지만, 그 복을 세상과 육의 것으로 왜곡하는 것은 저주라는 것
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히 저주 가운데로 떨어지게 된 인간 영혼의 처지, 인간 영혼이 처한 곤란으로 인하여 그 저주
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구주 예수님을 보내시는, 천대의 복을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의도
는 전혀 무시하고, 그런 세상 것이나 인본의 것에다 맞추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인 양 육의 것들에
맞춰 전하면, 입을 넓게 열어 세상 것이나 구하고 자기 지경 넓히는 것으로 예수님 이름을 부르면,
그것은 더 큰 저주로 큰 심판의 자리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18:7에 그것을 엄히
경계시킨 것이 아닙니까? 실족게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다, 실족게 하는 일들
이 있으나 실족게 하면 화가 있다. 실족하므로 심판에 들게 되고, 실족게 하는 것으로 심판받는다
는 말입니다. 왜 실족게 합니까? 믿는 것을 세상 것으로 또는 혼의 것으로 맞춰 주니 그 영혼이 실
족하는 겁니다. 영혼은 실족게 하고 정신은 개발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것에
목적을 두게 하여 영혼을 실족게 하는 일들로 세상에 화가 있다. 그것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소망을 두게 하여 영혼을 실족게 하면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천대의 복을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 혈통, 그 신앙 혈통이 존
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혈통이 천대까지 이르게 하는 것, 신앙 혈통이 끝나면 예수님이 오
실 수가 없는 것 아니에요? 그러므로 신앙 혈통이 끊어지는 것은 저주이니,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
것이니 신앙이 존속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요, 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 오신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까지를 천대의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
다. 다시 말해 천국까지 이어지는 것까지를 말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이 전부 다 참으로 믿음의 복을 받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
손으로서, 하나님 앞에 있는 영적인 족보, 예수님의 족보인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천대의 복이라는 것은 천국까지 이어지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복을 말한다는 것
이해됐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1절 첫마디부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하고 나온 것 아
닙니까? 누가 누굴 낳고 누가 누굴 낳고 하는 것이 계속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나실 때까
지 신앙 혈통이 이어지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 믿음이 끊이지 않고 마침내 하늘 아버지께로 들어가
는 것, 이것을 천대라고 하고 그 천대까지 이어지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스
라엘 역사는 오직 남자나 여자나 예수님이 태어나야 하는 그 사명을 안고 진행되어 왔습니다. 오늘
족보 속에 여자들도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인간 상식, 인본의 상식으로는 여자는 족보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인구수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족보가 아닌 계보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다말이라는 여자와 5절에 라합과 룻이라는 여자와 6절에 우리야의 아내라는 여자가 족보에
올랐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상식은 영적인 것이기에 여자가 족보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의 일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인간 머리의 상식으로는 여자가 가르치는 자
리에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 상식은 신앙의 여자를 생물학적으로 보지 않고,
그런 것을 뛰어넘어 여자의 신앙에 있습니다. 그 신앙을 들어서 사용하시고, 그래서 신앙을 여자
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이 행한 일들이나 삶을 본다면 비난받아 마땅한 모습들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자는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자식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을 인간의 눈으로 보면 윤리와 도덕을 버린 천박
한 여자, 수치도 모르는 인격 없는 여자로 보일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다말은
남편과 남편의 형제에게서 혈통 이을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다에게서 왕이신 메시아가
나신다고 했으니 기어코 신앙 혈통을 잇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서라도 시아버지 유다에
게서 후손을 낳아야 했습니다. 신앙을 가진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행함이고, 신앙은 세상 기준
에다 두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 행함입니다. 그래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 되었습니다. 다말이 음란
한 여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 혈통을 잇기 위해서 행한 다말의 간절한 신앙의 행위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낳아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본능, 영적인 소망이 이 여자의 영혼으로 흘러왔기에, 그 사명을 행하려는 것으
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는가 하면, 인간 윤리 도덕을
잘 행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고 생명 얻게 되는 것이 아
니라, 인간의 의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그 믿음에 있
음을 알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다음, 라합이라는 여자가 족보에 올라 있습니다. 라합은 기생으로 이방인 여자입니다. 기생이라
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나간 아주 타락한, 천박한, 하나님께는 부정케 된, 영혼이 사단에
잡혀 사단을 위하고 종노릇하며 사는 인간에게 처해진 영혼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 이같이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살고자 하여 그 죽음의 위기에서 살길
을 주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면 받으시고, 이스라엘의 복을 주신다는 것을 보인 예표입니다. 그러므
로 기생 라합은 인간에게 처한 이 죽음의 위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방인의 죄인으로
서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여 삶을 얻은 여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 이스라엘을 영접하여 믿음
으로 구원받은 여자예요. 여호수아 2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해 들어갈 때 여
리고를 지나가야 하게 되었는데, 난공불락과 같은 여리고 성이 딱 가로막고 있어서 지나갈 수가
없으니 먼저 두 사람을 그곳에 정탐으로 보냈는데, 그들이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땅을 탐지하러 온 이 사실을 여리고 왕이 듣고 기생 라합에게 기별하여 그 두 사람을
끌어내라고 했습니다. 이때 라합이 그들을 숨겨 놓고 이미 떠났다고 그들을 따돌려 보냈습니다. 기
생 라합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역사를 풍성(風聲)으로 다 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
리고 성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다 듣고서 가나안 땅을 이
스라엘에 주신 줄을 알고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정탐꾼에게 자초지종 다 일러 주었습니다.
이방인의 기생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행하신 일에 온 마음과 귀를 두고 그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멸하시기 전에 그를 구원해 내시려고, 그
같이 정탐꾼을 라합에게로 보내신 것입니다. 정탐꾼이 라합에게로 간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입니다. 라합이 하나님을 말하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이 얼마나 확실한 고백입니까. 그래서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소식
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여자였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게 되었고, 부모 형제 모두를 멸망 가운데서
건짐 받게 하고, 자신은 예수님이 나실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인들
의 멸망 중에서 구원받는 자가 기생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 형제에 딸린 자들뿐이었습니다.
그다음, 룻이라는 여자가 올라 있습니다. 룻도 이방 여자로서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받아들여 순종하여 섬김으로써 예수님의 계보에 오른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시어머니를 그가 어떻게 따랐는지는 여러분이 룻기를 좀 보고 이해해 보기 바랍니
다. 참 기특하고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시어머니를 지극히 공경하여 따른 것은 곧 시어머니가 섬기
는 하나님을 그처럼 섬기고 따르는 것과 같은 것으로,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같이 공경하여 순종한
것임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돌아오는 이방인이,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이는 데 뜻을 두었다는 말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나와 구원 얻을 길, 생명의 길로 안내해 주는 성경을 상징합니다.
그다음, 6절에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했는데 우리아의 아내는 이름이 '밧세바'입
니다. 말하자면 다윗 왕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간통했습니다. 아무튼 다윗 왕의 첩이 되어 솔
로몬을 낳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른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과 밧세바의 이 사건을 표면
으로 보면 불륜(不倫)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밧세바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없
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다는 것은 신앙이 있는 자, 즉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신앙만이 이 족보
에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밧세바가 왕의 후손을 낳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왕의 자손(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여자의 후손)을 낳고자 하는 그 간절한 소망이 그 영혼에 흐르고
있어서 다윗의 눈에 띄게 행동을 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각은 유혹
이고 간통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밧세바는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닌, 왕의 후손을 낳고자 하는 소원,
그 신앙 때문에 그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표면인, 외모를 보
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내면, 그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가를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보인 바 되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자가 되었다는 것
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전후 시대를 족장 시대라고 합니다. 족장 시대라는 것은 엄격한 가부장제 아래,
가장은 제사장 역할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라 권위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장자
에게는 아버지의 그 권위가 그대로 계승됨으로써 장자의 권한(權限) 또한 절대적인 위치로 입지를
굳힌 이스라엘이 가진 전통이요 역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장자의 이해를 성경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장자라는 것은 아버지가 첫 번째 낳은 아들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브라함의 장자는
누구입니까?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첫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을 낳고' 한
것이 아니고 누구를 낳았다고 했습니까? '이삭을 낳고'했습니다. 또한, 이삭도 누가 장자에요? 에
서가 장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야곱을 낳고'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
고 했는데, 야곱의 실제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이후에도 계속 살펴보면 실제 장자가 아닌 사람들
이 족보에 올라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혈통은 첫아들을 장자라고 하지만, 하나
님은 그것을 장자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의 뜻을 받은 신앙이 있는 자를 장자라고 하셨습니
다. 그래서 족보에서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는 것, 그것은 하나님 언약의 뜻을 받은 신앙을 인간
의 전통과 윤리 도덕보다 위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통을 초월하고 인간 윤리 도덕을 초
월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더라는 말입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언약의 소망을 가진 영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방인이 되었든, 기생이 되었든, 장자가 아니든, 여자가 되었든 관계없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
하여 섬기기 원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신앙 때문에 간통이라는 오명을 받아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후손을 낳고자 하는, 그 후손의 언약 안에 들기 원하는, 영혼이 가진 소망을 따라 행한 그 신앙의
행위, 하나님께서는 그 내면의 신앙을 보신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신앙을
가진 자, 인간 전통이나 윤리 도덕이 영혼에 가진 소망을 막을 수 없고 그것을 초월한,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로 흘렀다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장
자라 할지라도, 에서가 장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으면 장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는
관계 없습니다. 라합이 이방인의 기생이었다 할지라도, 룻이 개 취급당하는 이방인이라도 하나님께
서는 신앙으로 따라오는 그들을 통해서 뜻을 이루어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신앙의
사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장자요, 예수님의 족보에 기
록된 예수님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이, 언약을 받은
백성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신앙의 혈통으로 이어져 성취되게 하셨다는 것을 이같이 족보를 통해서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다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나고 못나고 돈이 있고 없고
학벌이 있고 없고를 떠나, 도덕적이고 인품이 좋고 성품이 좋고 이런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기 혈통 자랑을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느냐 하
는 그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따르느냐 그것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인
간의 혈통 전통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는 필요 없는 쓰레기입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냐, 인격적으로 관계를 이뤄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누구에게서 난 자들이라고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그 이름을 믿
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혈통이나 육정으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혈통이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
바로 예수님의 혈통, 그 혈통에 들어간 자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혈통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에게서 난 하나님의 자녀라고, 그러므로 예수님께 속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어 그 혈통에 들어간, 자기의 혈통
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 믿음이 되었어요? 만일 그 믿음이 되지 않았
다면 이제는 사람의 혈통이 아닌 하나님께로서 난 자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혈통에 대한 믿음을
성영님으로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벗어나 자기 뜻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 명예 때문에 출세 때문에 인간관계 때문에 말씀을 제한시켜 놓은 이들은 말씀의 영적
복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15:1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자신은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그 농부다. 그러니 농부가 자기의 심은 나무를 때마다 보살피고 흙도
다지고 거름 주고 잘 가꾸지 않습니까? 이같이 아버지는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나무의 가지가 되어 있을 때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내 안에의 관계가 되었을 때만, 하나님의 관심이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온갖 정성을 들였더니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온갖 정성 들였더니 하나
님의 관심받는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 없이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하는 온 수고를 했어도, 하루 스물네 시간을 기도했어도 소용없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
다. 믿는 것을 예수님과 관계 두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하는 것들은 다 헛소
리라는 말입니다. 요15:26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영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영님
은 예수님을 증거하시려고 오셨는데, 그래서 성영님이 임하시면 무슨 정성 들이러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구주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자 하는 마음부터 생긴다는 것입니다. 성영님의 소원이신 예수
님을 알기 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영님이 계시면 예수님을 확실히 믿는 것부
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비한 언어인 방언도 예수님 알기 원하는 성영님의 소원을 따라 기도
하게 하시려고 방언을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 원하는 사람은 성영님이 누구
시며 무엇을 하시는지를 알고 성영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도와주심을 구하며 예수님을 확실히 아는
것부터 하여 예수님을 아는 확실한 믿음, 예수님과 관계를 이룬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러므로 지금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느냐, 예수님과 함께하여 예수님으로 살고 있느냐? 자
신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너희 구주다'하신 분 아닙니다. 수천 년을 걸쳐 사람과
언약하시고, 또 언약하신 메시아에 대해 사람들이 듣도록 외치게 하여 확신을 주시고 또 외치고
외치며, 인간은 잊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고 그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면
서, 외치게 하시더니 마침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인간 역사도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족
보를 기록함으로써 사실임이 입증되고, 또한 예수님이 오신 경로를 확인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
면 이같이 성경의 전 역사 속에 기록되신 분, 성경의 전 역사가 말하는 분, 그 구주이신 예수님을
여러분은 얼마나 관심을 두고 관계를 이루셨습니까?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저는 정말 생
각해 보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 깊은 수준의 말씀을 듣게 되면 관심을 둘까, 까짓것 성경이 말하
는 예수님 다 모른다고 구원받는 데 지장이 있겠느냐! 내 관심은 그저 돈 좀 많아서, 세상에 근심
걱정 없이 살면서 사람들이 하는 것, 사람들이 하고 사는 것, 나도 좀 하고 살고 싶은 것뿐이다
한다면 이 말씀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저는 누구를 가르치려고, 예수님을 알려고 예수님의 능력을 갖추려고 달려왔던 것 아닙니
다. 누구를 가르치려고 했던 것 아니에요. 이 지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을 살리시려는 하나
님의 간절하심, 영생 복락을 주시려는 이 생명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
면 내가 바로 알아서 내 영혼의 양식이 되어 생명을 얻고 간직할 수 있을까 하고, 하나님의 자녀라
는 이름을 가졌으니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아버지를 참으로 기쁘시게 할까 하는 그
고민을 하며 마음의 사모함으로 지금까지 애쓰며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를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세우시고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으로 여러분이 세상을
따르던 것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따르는 그 믿음이 되기를 소원하고, 믿음의 길을 가기에 힘 다하기
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죽음 앞에 섭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는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영원의 것뿐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죽음 그 뒤에 반드시 가는 곳이 있다, 지옥도 있고 천국도 있다고 분명히 말씀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 섰을 때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옥의 것이냐? 천국의
것이냐? 지옥의 것이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요, 천국의 것이면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너무나 중요한 물음입니다. 제가 그동
안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고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
마음에 채워져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것 밖에 나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고 배웠다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해 나이 먹어 늙었을 때, 죽음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마음속에 세상 것으로만 차 있으면 육체를 위해 산 인생으로, 먹
고 입고 쓰는 것만 차 있으면, 죽음 앞에서도 세상 것만 말하다가, 먹고 사는 그것만 말하다가
죽더라는 말입니다.
자손에 대한 걱정도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너희들 잘 사는 것 좀 보고 죽어야 할 텐데,
못 사는 너희들 때문에 눈도 편히 못 감을 것 같다' 그것만 말하다가 죽더라 그 말입니다. 그 마
음속에 온갖 잡동사니로 채운 사람은 그 속에서 또 세상 온갖 잡동사니만 쏟아져 나오는 것밖에
없더란 말입니다. 세상 쓰레기 같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으니 그에게서 그런 쓰레기만 나오더란 말
이에요. 육의 본능에만 충실하여 살던 그것으로 늙으니, 맛있다 맛없다, 안 먹었다 먹었다, 배고
파 밥 줘, 이런 온갖 망령 난 행동밖에 없더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늙어서 망령 났다는 말들을 하
지요? 금방 먹었어도 안 먹었다고 배고프다고 밥 찾는 겁니다. 물론 그런 것은 귀신에게 본능이
지배받고 있는 것을 보이는 것이지만, 죽음이 가까운 때 그 영혼에 생명이 온전히 비어있어 나오
는 현상입니다. 믿는다고 열심을 다해 기도하고 예배 생활 일평생 했어도 육의 본능에 충성된 신
앙생활을 했으니 그것만 들어 있으니, 늙어 세상 떠날 날이 가까웠어도 그것밖에 들은 것이 없으
니 그것만 찾는 겁니다. 심었으니 심은 대로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사람 속에 예수님이 계시면 늙어서 기운이 다해 정신이 몽롱해져도 뭐가 나오겠습
니까? 자연적으로, 자동으로 예수님이 나오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속에 뭐가 있느
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늙어서 정신이 흐려져 간다 할지라도 그의 속에 들어 있는 것밖에 나오는
것이 없더라는 그것을 제가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내고 살고 있습니까? 나이 먹어 늙어서 하늘 아버지께 갈 때가 가까울 때 여러분은 무엇을 내다가
가실 것입니까? 무엇을 내기 원하는가 말입니다. 세상에 유치한 그런 음식이나 찾고, 잘하니 못하
니, 너 때문이니, 좋으니 나쁘니, 뭐 맨 이런 것이나 따지다가, 이런 것이나 내고 있다가 갈 것인
가 말입니다.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믿음 생활이 좀 힘들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표적에 맞힌 믿음
이 돼서 예수님을 사랑해서 따르는 참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물론이거니와 혹 죽음을 눈앞
에 두었더라도 '나는 예수님 때문에 참으로 행복했으니, 이 행복이 너희들의 것이 되기를 바라니
너희도 예수님 잘 믿다 오라'고, 자기 안에 예수님만 계셔서 그것을 내고 가는 여러분이기를 또한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족보에 대한 이해와 함께, 또 족보에 여자들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 말
씀을 드린 정도는 이해하신 줄로 믿고 여기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에 관한 이해를 도와주신 성영님께 감사하고, 모든 영광을 삼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예수님의 계보에 웬 여자들이? 소책자.p1-p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