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애(姜淳愛) - 뜻길에 서서 - 3. 뜻길에 서서
1 1960년 5월 29일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 선생님께 인사를 올리니 “염려 말고 하늘에 맡기고 가라”라고 하시며 “머지 않아 자유로이 왕래 할 날이 올거야. 가면 가족부터 전도하고 4개소에 먼저 개척교회를 세우고 1년 전에 밀항해 간 최봉춘 선교사도 잘 도와 주라”라고 하셨다.
2 내가 일본에 갈 수 있는 것은 친척과 장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하늘이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친척 질부와 4살된 그의 장남을 데리고 부산에 갔다. 부산에서 1주일 동안 기다리니 전보가 와서 선생님께 “뜻이기에 갑니다” 하는 서신을 올리고 오후 5시경 조그마한 어선을 놀이배처럼 가장해서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3 인원은 53명이었는데 생선창고에 모조리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도저히 못 들어갈 것 같아 갑관 위에서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 쓰고 엎드렸다. 새벽녘쯤 되자 저쪽 편에서 어선 1척이 와서 주먹밥 두 광주리를 주고는 우리를 섬에 내려 놓고 내일 밤에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가버렸다.
4 하룻밤을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야곱과 같이 돌베개를 베고 잤다. 그 다음날 하루 종일 굶으면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9시쯤 되어서 해안으로 내려가자 배가 오는 소리가 들려서 좋아라 하고 달려가 보니 일본 경비선이었다.
5 형사가 내리더니 우리를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경찰서로 끝려가 문초를 받고 유치장에서 미결수로 재판을 받고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이틀째가 되는 날에 아들이 면회를 왔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아들도 밀항자이기 때문에 다른 현(嫌)을 다닐 수 없었다. 아들은 벌써 나의 마음을 알고 “어머니 등록이 그제 되었어요” 하였다.
6 그때 나는 책상을 치고 울면서 “그것 보아라.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라고 소리쳤다. 형무소 소장은 어리둥절했다. 6년 간 안되던 등록이 내가 유치장에 있을 때 됐다는 사실을 보아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7 아들은 학생이기 때문에 이틀 후에 동경으로 가서 수속을 해놓고 나를 관광시키고 난 후 자비(自費)로 귀국하게 하겠다는 입국관리상의 서류를 만들어 가지고 변호사를 통해서 나는 3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 나게 되었다. 쇠고랑을 찰 적마다 선생님의 노정을 생각하며 도리어 감사했고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8 동경에 가서는 아파트를 마련하여 최봉춘(崔奉春) 선교사님을 모시고 처녀 식구 2명과 함께 생활하였다. 식구들은 날마다 늘어났다. 최 선교사님은 이제까지 원리가 한국산이라는 것을 얘기 못하고 있다가 어느 기회에 터놓고 말하니 “진리는 아무 곳에서 와도 좋다. 생명을 걸고 나가겠다”라고 식구들이 합심하므로 백배 힘을 얻었다고 한다.
9 나는 그동안 계시 받은 내용을 서면으로 원리책과 함께 일본 천황에게 보냈고 동경(東京), 경도(京都), 명고옥(名古屋) 등 4개소에 개척 나가도록 협조했다. 그리고 원리책 300권을 만들어 놓고 나니 체류기간이 연장되지 않아 귀국하게 되었다.
10 내가 귀국할 때는 5·16 혁명이 일어난 직후여서 밀항자로 낙인찍혀 체포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또 자유당 시절에 부인회장으로 활동했다는 조건도 있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형사는 대기하고 있었다. 즉시 치안국으로 연행되어 의자에 앉아서 밤을 새웠다.
11 다음날 아침에 신문을 받고 있을 때에 어떤 분이 찾아 와서 “내 입장이 곤란하여 용산서로 옮겨 줄 테니 거기 가서 잘 말하라”라고 한 즉시 용산서로 이송되었다. 한 방에는 15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모두 아편 중독자들이었다. 다음날 그분이 또 와서 간부에게 말하고 가니 대우가 달라졌다. 그리고 3일 만에 석방되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