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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4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
설교 제목: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무거운가?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마태복음 6:22~23
설교 복습을 위한 질문 자료
https://forms.gle/3prbNUoYZvSzyKHG8
설교 목적:
온통 요란한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것의 가치가 상대화되고 어느 것 하나 의지하고 기준을 삼을 것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고넬료의 고백을 기억하면서 한 해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넬료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자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나의 말씀을 기다리지만, 너는 나의 말씀을 얼마나 무겁게 생각하느냐?’ 이것이 이번 주일 설교의 핵심이다.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 우리는 세상의 격랑에 휩쓸려 떠내려 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으면 우리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나가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눈이 성한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등불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밝게 비출 것이다. 우리는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설교 개요:
1. 하나님 말씀의 무게
2. 고라니가 살려면
3. 눈은 몸의 등불이다
4. 바보들의 행진
5. 거센 물살을 건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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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말씀의 무게
지난 금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 주님 앞에 섰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려고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기도시간에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일에 필요한 말씀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무겁게 생각하느냐? 너는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네가 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면 너의 생각이냐? 너의 성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말씀이 얼마나 유익하겠느냐? 그 순간 제 마음에서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 말씀이 과연 얼마나 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자신을 반성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했던 믿음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믿음의 말이 너무 좋아서 금년에 우리 교회의 표어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한 말은 좀더 있습니다. 거기에 고넬료의 마음가짐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사도행전 10:33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것이 고넬료가 하나님 앞에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사실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2024년도를 맞이하여 우리는 하늘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듣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우리가 듣는 즉시 우리의 머리 위로 날아가 버린다면 우리가 들은 이 모든 말씀은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자세로 서 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고 힘을 다하여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받아 시들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야 할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서 전심을 다하여 지켜야 할까요?
2. 고라니가 살려면
최근 두어 달 동안에 저는 두 차례 고라니 사냥에 참가했습니다. 고라니 사냥은 해가 진 후에 시작됩니다. 시골에서 해가 지면 온 천지가 어둑캄캄해집니다. 그때 자동차를 타고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밭이나 과수원이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난 길을 올라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밝은 빛을 내는 손전등을 비춥니다. 나무 아래나 밭고랑, 그리고 수풀을 비추면서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고라니를 발견합니다. 눈썰미 좋은 사람은 고라니가 불빛을 보고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그때 전등에서 나온 빛이 고라니를 비춥니다. 고라니는 그 불빛을 보고 가만히 있습니다. 마치 구경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죽게 된 것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사냥꾼은 차속에서 공기총을 꺼냅니다. 손전등을 든 조수는 공기총 앞에서 고라니를 비춥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그 때 ‘탁!’하고 공기총의 둔탁한 격발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고라니는 그 자리에 쓰러집니다.
이렇게 고라니 사냥을 할 때면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왜 고라니는 도망가지 않을까? 자기를 죽이려는 사냥꾼이 그 불빛을 비출 때 고라니는 왜 그것을 구경하고 앉아 있을까? 그가 구경하는 바람에 그의 눈에서 나온 불빛이 도리어 과녁이 되어 더 쉽게 잡히지 않는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라니는 야행성 동물이라 손전등에서 나온 빛이 자기를 정통으로 비출 때 그 빛을 너무 강렬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라니는 그 강렬한 빛에 익숙해지려고 그 빛을 주목하여 본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는 동안에 사냥꾼의 총에 죽게 됩니다. 그것이 고라니 사냥입니다.
저는 이 고라니처럼 우리의 눈을 붙드는 강렬한 빛이 우리에게도 비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그것이 너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사로잡고 우리의 마음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력과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를 바보로 만듭니다.
전에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을 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휴대폰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 작은 기기에서 우리는 온 세상의 일들과 연예인들의 사소한 일을 봅니다. 그리고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통해서 일반인들의 일들도 구경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우리는 고라니처럼 강렬한 불빛에 마비되어 누군가에게 사냥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라니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고라니는 불빛으로부터 도망해야 합니다. 고라니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불빛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라니가 살려면 불빛이 이러저리 밭과 들판을 훑고 다닐 때 그 불빛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는 그 불빛에서 도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서 그 빛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 빛에 갇히면 그는 죽습니다.
지혜의 말씀인 잠언에서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14 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15 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 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14~15, 20~23
지혜자는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므로 마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지키려면 눈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을 읽고 써야 합니다.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눈으로 본 것에 의해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고라니가 사냥꾼의 손에 죽지 않고 살려면 그 죽음의 불빛을 보지 말고 거기에서 달아나서 자기의 눈을 지켜야 합니다. 눈을 지켜야 삽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생명의 샘물을 마시려면 마음을 지켜야 하며 그 마음을 지키려면 눈을 지켜야 합니다. 눈을 지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마음에 충만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3. 눈은 몸의 등불이다
우리의 눈은 우리의 마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의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눈이 온전하면 밝게 볼 수 있지만 눈이 나쁘면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눈이 좋은 사람은 사물을 또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눈이 나쁘다고 할 때는 보통 근시나 원시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고 난시처럼 망막에 주름이 가서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눈이 좋다고 할 때는 유리처럼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반대로 눈이 나쁘다고 할 때는 깨진 유리처럼 밖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빛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굴절된 빛입니다. 그 빛을 막고 온전한 빛이 들어올 때 우리의 눈은 제대로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이 온 몸을 밝히는 등불이라고 할 때 그 눈은 어떤 눈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눈입니다. 우리 육체의 눈으로는 빛을 감지하고 사물을 파악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빛을 감지하고 우리가 어디 있는지를 파악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성하면 우리는 밝은 빛 가운데 있는 것처럼 옴 몸을 밝히 볼 수 있습니다.
금요일 밤 기도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리면서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마음의 책망을 듣고 나서 찬송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저는 우리 교회 1월의 찬송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 찬송은 찬송가 203장입니다. 눈을 감고 그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의 눈에 무엇인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 / 광야 같은 세상에 길 잃고 방황할 때 / 절망 중에 빠진 이 몸 하나님 보호하사 / 생명샘이 솟아나와 새 힘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이라 / 누구든지 믿고서 참으로 회개하면 / 하나님이 사해주사 구원함 베푸시고 / 가이없는 큰 은혜로 늘 품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라 / 믿음으로 지키어 자유를 얻게 되면 / 어려운 일 힘든 일도 담대히 할 수 있어 / 온전하신 말씀으로 승리케 하십니다.
이렇게 찬송을 부르는 동안에 저의 과거가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믿음으로 나온 일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서 기뻐하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책을 내고 말씀을 전하는 저의 최근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밝히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찬송을 부를 때 저는 마음의 눈으로 저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준 것은 찬송가 가사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저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바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제가 마음의 눈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어주는 빛 가운데서 저를 발견할 때 저는 비로소 제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하면 즉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 앞에 있는 저 자신을 보아야 비로소 밝게 보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바보들의 행진
우리 마음의 눈을 열고 모든 것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경고에 잘 나타납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6:39
제대로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인도하면 그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지도자나 선생에게 주는 경고이면서 동시에 그런 나쁜 지도자를 분별하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MBC실화탐사대가 방영한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의 설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부부가 하나는 하나님 소속이고 하나는 바벨론 마귀 소속입니다. 그 둘이 다 천국 가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네가 바벨론 가든 말든 나는 천국 가야겠다! 이러면 갈라져야 되죠? 아멘! 부부지간이라 할지라도 하나가 아니라면 갈라져야 되겠죠? 아멘! (2020년 6월 3일 방영)
이렇게 해서 많은 가정이 깨졌습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천국에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때 그것을 분별할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그 사람을 따라가다가 가정을 잃고 말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맹인 인도자가 만들어 내는 비극입니다. 이런 일이 종교 집단에 많은 이유는 사람들이 종교에 대하여 맹목적인 자세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즉, 천국에 대하여 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자신도 가정도 그리고 사회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신천지가 가르치는 천국론은 이미 기성교회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온전한 눈으로 읽기 시작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임을 바르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 세상은 바로 이 땅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면 신천지의 유혹을 정확하게 퇴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한 행동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그것은 결국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그물에서 나누는 어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심판을 기억한다면 오늘 우리의 행동을 좀더 신중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좋은 세상이 열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 가치를 자신이 발견했기에 거기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언제나 좋은 세상은 그렇게 자신을 선한 일에 투신한 사람들을 통해서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이처럼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후에 저 하늘에 있는 어떤 곳으로 간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어떤 세상을 위해 살 것인가를 결정하라는 강력한 가르침입니다.
생각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가는 바보들의 행진은 이미 오래 전에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에서 멋지게 풍자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포레스트 검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유튜브에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바보들은 그들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물론 일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무작정 이 사람 저 사람을 따라 하다 보면 인생은 바보들의 행진에 끼어 따라가다가 끝나고 말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단은 ‘저출생 극복 및 영적부흥과 국민대통합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각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서명을 받아서 총회에 제출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왜 그런 서명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번 서명운동은 교단차원에서 100만명 서명운동을 통해 저출생 극복을 위한 입법청원과 관련하여 필요로 하는 정부나 공공기관에 제출할 예정’이라는 답신이 왔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야말로 대표적으로 바보들의 행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고 무턱대고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생각없이 뛰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물론 달리기는 건강에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일이 결국 바보처럼 생각없이 따라 나섰다가 낭패를 당한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저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자녀를 낳을 때 셋째부터는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셋째가 태어나면 큰 돈을 받고 정부로부터 적지 않은 혜택을 받습니다. 우리는 왜 지금 출산율을 걱정하는 걸까요? 우리나라의 인구는 지금 너무 많은 걸까요, 아니면 너무 적은 걸까요? 누가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주입할까요? 우리는 지금 누구의 말에 따라 움직이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것을 바르게 살펴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누군가의 말에 휘둘려 바보들의 행진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입시경쟁, 명품 경쟁, 으뜸도시 경쟁, 그리고 노후대책 경쟁, 장례 준비 경쟁 등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준비를 하라고 경쟁적으로 광고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은 마치 거센 물살이 흐르는 시내를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들이 선행학습을 위한 학원과외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 취업이라는 경쟁의 장에 빠질 수 있습니까? 노후 대책을 위한 보험을 무시하고 살 수 있습니까?
이런 경쟁에서 하나라도 뒤쳐지면 인생에 실패한 사람이 된다는 생각은 우리를 오늘도 쉼을 모르고 불행한 행진에 참가하게 합니다. 이런 격랑을 헤쳐 나가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5. 거센 물살을 건너는 법
거센 물살이 흐르는 시내를 건널 때 가끔은 무거운 돌을 몸에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가벼운 것은 그만큼 쉽게 물살에 떠내려 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밀려오는 수많은 주장들과 가설들과 소문들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거운가에 따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세속의 탁류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느냐가 결정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들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유념해야 흘러 떠내려가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유념한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프로세케인(prosechein)입니다. 그 뜻은 앞에 두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방을 등에 멜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방을 옆에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념하다는 말은 앞에 들고 가다는 말입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의 표어는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1월달 암송 말씀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심으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6:8)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앞에 모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에 유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 들고 사는 방법입니다.
올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다립시다. 그 음성과 분부를 들읍시다. 그리고 그것을 힘써 실천합시다. 그런데 우리 눈이 고라니처럼 죽음으로 이끄는 빛에 붙들리면 하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나빠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앞에 둘 수 없다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방황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 유념한다면 우리는 이 격랑을 헤치고 나가 자유를 얻게 될 것이며, 어려운 일 힘든 일도 담대히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올해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