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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
(23.09.10)
<마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전주) 소금과 빛에 대하여 나눈바... 중요하기 때문에 노파심에서 한 번 더 핵심 포인트를 짚고 갈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말씀 했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한 게 아님에 주의를 기울여야할 것). 00가 되라는 말은 행함을 요구하는 말이기에 주님의 의사성에서 벗어났다는 말이지요.
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임(마치 성도는 썩어져 가는 세상을 썩지 않도록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처럼, 어둠을 밝히는 빛처럼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세상을 선도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으로 오해 한다는 것임..)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면, 주님 자신도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역할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임. 만일 테레사 수녀나 밥퍼 주는 목사처럼 빈민층이나 사회에서 소외 받는 계층을 위해서 희생의 삶을 사셨다면 왜 세상이 예수를 죽였겠는가? 영웅으로 칭송했겠지요. 반대로 예수님은 ㅎ님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구제하고 변화시키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향해, 너희는 다 악하고 틀렸다라고 질타하셨음.
그리고 만일 성도가 세상을 썩고 어두운데서 점차적으로 개선시킨다면 ㅎ님은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으실까요? 그것도 말이 안되는 발상임. 보다시피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짐으로 그 멸망은 정해진 수순 인 것임. 그 악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임.
소금의 짠 맛은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짠 맛은 영원성을 상징함. ㅎ님의 언약을 비유하는 말인 것임. 너희는 ㅎ님의 변치않는 언약으로 존재하는 자들임을 잊지 말라는 것임. 즉 ㅎ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존재케 되었으니 한시라도 은혜성을 잃어버리면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이 된다는 의미임. 빛도 세상의 윤리 도덕적 빛이 아니라, 참 빛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빛이 된 자들이라는 말이죠. 이는 인간의 행함의 댓가로 주어진 게 아니라 택하심을 따라 은혜로 주어진 신분임. 그래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 높이고 자랑하고 전하는 것을 ‘착한 행실’이라고 ~지난주에 (살펴 봤슴).
......
오늘 나눌 본문 5:17~20 말씀은 산상수훈의 핵심되는 내용임. 계란으로 치면 노른자와 같은 부분임. 사실 이번에 이 내용 때문에 산상수훈을 공부 하는 것이고 이 부분이 성경 전체를 함축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그만큼 중요하고 또 중요한 말씀임.
3파트로 구분됨( 17절: 율법을 완전케 하려함..이게 무슨 말인가?/ 18~19절,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다? 이건 또 무슨 의미? / 20절, 너무도 유명한 그리고 오해가 빚어지는 구절,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의 진의는 무엇일까?
오늘 이 어마어마한 내용에 대해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선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씀은 ㅎ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바로 세우신다는 의미임. 본문 17절에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성경 전체를 말함. 구약이 말씀하는 바는 너희는 죄인이야-를 깨달으라는 것이었음. 그런데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같은 ㅎ님의 의도를 모르고, 액면대로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고 했음. 한마디로 배달 사고가 난 것임.
그러나 사실을 알고보면, 이는 이스라엘의 잘못이 아닙니다. ㅎ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율법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게 감추었다는 것임(계5~7인으로 인봉됨..누가 떼나? 어린양이.../ 고후3~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으로 그 눈을 가렸다. 그러나 주께 돌아가면 벗겨지리라.)
=예수 십자가 사건 전에는 철저히 가려져 비밀로 인봉된 상태임. 부활후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깨닫게 되도록 안배하신 것임.
<갈3:22~24> 22절~성경이 죄 아래 가두다( 그 당시 성경은 구약을 말함, 본문은 율법과 선지자라고 함-( 구약의 목적..율법의 목적->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함.)
23절~믿음이 온다(십자가 사건후 부활의 성령 오심을 말함..믿음은 주어지는 것임...그래서 계시될 믿음이라함, 십자가 복음이 믿어진다? 이게 복, 이게 기적임..ㅎ님이 주신 거니까..)
24절~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임(안내자 역임, 주인공이 아님, 조연이고 엑스트라임,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임)
이같이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면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사함 받고 성령받아서 ㅎ님의 아들됨(구원)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갈4:1~7임)...읽으면서 설명 (세상 재벌 2세..모형/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어려서 말단현장에서 빡빡 기게 만듬 체험, 세자도 엄격한~)
(핵심: 너희가 아들인 고로...) 인간의 어떤 행함 때문에 주는 구원 아님, 아들인 고로(ㅎ님의 택하심에 대한 강력한 증거임, *(질문)천국의 유업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으로 실력을 채워야 하나?(은혜 바라기, 정수리~ 발끝까지..)
<롬7:7~9> 7절~인간사회에선 인간의 마음속의 탐심을 죄라고 말하지 않음. 행동으로 드러난 욕심을 죄라고 규정할 뿐임. 그런데 ㅎ님은 우리 마음속의 탐심을 죄로 보고 계심. 탐심 없는 자 있나? 행함이 없어도 이미 죄인인 것임. 이를 알려주기 위해 율법을 주셨음. 이것을 분명히 드러내신 분이 주님이셨음. ~ 주님은 마음속의 분노를 살인죄로 간주하심. 마음속의 음란한 생각을 간음죄로 말하심. 결국 모든 사람이 ㅎ님 앞에서 죄를 범한 죄인으로 규정되고 ㅎ님의 심판을 피할 인간은 없게 됨. 이 일을 율법이 행하는 것임. 우리의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ㅎ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는 것이 율법임(3:19).
8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온갖 탐심을 이룬다?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 되어 있는 탐심이 계명으로 인해서 그 실체가 드러난다'라는 의미(7절을 강조). 그래서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라고 말한 것임. cf. 롬4:15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9절~율법을 모를 때는 내가 살았더니: 육신이 살아 있을 때의 바울 -> 율법을 행하는 자신의 의를 자랑하며 경건의 행함이 없는 자들을 멸시하며 지냄(눅18:9). 육체를 자랑하는 삶(빌3:4-6)
.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영의 눈이 열려 계명의 참 뜻을 알게 되니, 죄로 죽은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됨. 그러자 내 안의 죄가 살아나고 정죄를 받음으로 죽음을 경험하게 됨. 이 죽음의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주의 양들임. 이들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자들임(요10:3).
12~13절,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3b~계명으로.. 죄로 심히 죄 되게 함..이게 오늘 본문 마5:17절 말씀과 같은 의미임. 율법을 완전케 하려 하심이라는 뜻임(즉, 율법의 본 의도를 만천하에 공개해서 모두 죄인들로 드러내시겠다는 말씀임).
=> 율법의 정죄를 받고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님. (cf. 사6:5, 겔37:2-5) @은 우리를 이 죽음의 자리, 무덤에 서게 하심으로 생명을 주러 오신 그리스도의 살리는 생명의 말씀을 알아듣게 하심.
=> 율법 아래서 죄의 정죄를 받고 죽음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이 성도임. 그래서 성도는 단 한 순간도 회개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임. @께서 지금 당장 우리를 죽여 지옥에 보내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임. 그런데 이상하게 죄인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림. 그의 부르심에 이끌려 그에게 나아가 생명을 얻게 되었고, 주의 말씀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자들이 된 것임.
18절~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의 기능은 마치 MRI와 같음. 속의 질병을 찾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임. 그러면 의사가 치료에 돌입하게 되듯이, 율법으로 자신에게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로 가득찬 구제불능한 존재임이 밝혀지면 예수님께 나아와 그 십자가 피를 의지해서 죄사함 받으라는 것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임(일점일획이라는 말은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간과할 수 없다는 의미임.) 그래서 다음 구절로 이어짐..
19절~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사실 하나님의 계명은 크고 작은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표현을 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크고 작은 것으로 구분하여 큰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고, 작은 계명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기고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작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계명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고 버린다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천국에 그러한 차등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동일한 지옥입니다. 그런데 왜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천국에는 작다 일컬음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천국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들어가지만 작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따라서 누구든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이 보기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만을 골라내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실천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 사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자신은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이나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 앞에서는 나름대로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지 않고 주일예배에도 빠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는 말씀도 있고, 면제년이 되면 이웃에게 꾸어준 것을 면제하라는 규례도 있습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잠 3:27)라는 말씀도 있고,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잠 3:30)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말씀들 중에 작은 것이 있거나, 지켜도 되지 않는 가벼운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웃에게 베풀기를 아끼면서도 조금 베푼다는 것으로 마치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이웃과 다투면서도 자신이 말씀을 어겼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주일에 교회를 빠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며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한 것, 가벼운 것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고 가벼운 것은 상대적으로 버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율법을 자기 취향에 따라 어느 것은 중요하고 어느 것은 중요치 않고..라는 생각을 하여 자기 입맞에 맞는 율법만 지킨다면,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날까요?(죄인은 고사하고 의인으로 둔갑할 것..배달사고). 그래서 19절후반부~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다...고 재차 강조하고 있음.
본문에서 행하며 가르치라는 말의 진의는 율법을 아주 작은 것까지 철저하게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율법의 높은 벽에 한계를 깨닫고 항복하라는 취지를 말하는 겁니다(이런 말을 또 오해해서..봐라 이렇게 행하고 가르치라고 했잖냐? 하는 사람이 있어서 하는 말임...앞뒤 문맥을 전혀 무시한 채 그 단어만 붙잡는 자들이 빠지는 함정임)
오죽했으면 마23:2절 이하에서도~주님이(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을 꼬집으시면서 말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지키되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는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는 것도, 같은 취지의 말씀임. 바리새인은 특정한 몇 가지는 목숨 걸고 행함(십일조, 안식일, 금식, 구제..),
왜? 십일조에 목매지요?(복 준다니까..네 창고가 차고 넘친다는..), 안식일 지킴(이것처럼 쉬운게 없음. 안식일날 강론이 생업이니까/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자들에겐 힘든 영역임)), 금식(두 번씩? 나 이런 자야../오늘날 새벽기도? 목사들의 차별화 영역, 일년365일 이게 쉽지 않거든, 우리 목사님 참 신령하시다..추앙받음), 구제(외적인 선행으로 착하고 훌륭한 분으로 인식시킴...) 그런데 나머지 율법은 대충 지키면서 자신은 거룩하다, 의롭다, 신앙 좋다 자화자찬하며 잔치 상석, 시장 문안받기를 좋아하던 그들의 외식주의를 주님이 고발하심(목사 까운?)
이러한 율법의 요구 앞에서 드러나는 것은 누구도 율법을 완전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지만 완벽한 실천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말씀을 자기 편의대로 조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율법을 완벽히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설명(드러냄)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을 제시하고 그 수준을 목표로 삼고 살 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완벽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 앞에서 인간은 ‘나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왜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죽어야 하는가를 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에게서 나올 것은 바리새인들의 모습뿐입니다. (좀전 살펴본 대로...외식과 위선을 자아냄)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지만 그들 역시도 율법을 구분하고 중요하다고 여긴 것만을 지키고자 했을 뿐입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하라는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리나 창기와 같은 사람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으면서 자기들만큼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고 자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야 말로 가장 먼저 지옥에 들어갈 자들이었습니다(외식하는 서, 바리새인들이여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이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그런데도 눅18장,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모습, 큰길 4거리, 저들과 다름을 감사...종교 행위를 자랑.../세리는 감히 얼굴도 못들고 가슴을 치며 난 죄인, 불쌍히..) --> 누구에게 예수가 필요할까요? 자신이 중죄인임을 아는 자다
결국 인간은 율법을 결코 완전히 지킬 수 없음에도, 자신들이 설정한 목표를 어느 정도 지켜내면 ㅎ님은 기뻐하실거야-라는 생각으로 자기 입맞에 맞는 율법을 지키고 그것이 마치 자신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착각하는 그들이야 말로 가장 먼저 지옥에 들어갈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ㅎ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뭐다?(자기 가능성을 가진 자임 /...아이 캔 두 잇, 나는 말씀을 잘 지킬 수 있어, 난 반듯하게 살수가 있어..주제파악이 안된 자들)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벽히 실천할 수 없는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 구절도 많은 오해가 있는 부분임. 이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라고 할 때에, 더 완벽한 순종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율법을 주신 ㅎ님의 목적을 모르는 소경된 자들의 무식한 주장일 뿐이다. 비록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부분적으로 소홀히 여긴 율법 행함이 있었다고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율법 행함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들임. 인간으로서 이들보다 더 잘 지켜낼 수가 없다는 말임(자칭 타칭: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그들은 직업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온 힘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선행과 구제와 십일조 생활로는 그들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되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니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과연 그들보다 더 뛰어난 종교적인 삶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제아무리 수준 높은 율법 행함과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입니다.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란 전혀 다른 의를 뜻합니다. 그 의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예수님의 의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의가 아니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롬3:19~28> 읽고..(지금까지의 설교 내용을 다 담고 있는 부분임)
율법을 완벽히 이룰 수 없고,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나에게 율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님이 오셨고, 그분의 의가 나를 생명에 이르게 함을 믿게 되었다면 신자는 주님의 오심과 그 사랑에 감사하며 주께 매인자로 살게 됩니다. 세상을 보지 않고 하늘의 생명을 바라보고 살게 됩니다.
이러한 성도가 과연 세상이 볼 때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게 될까요? 하늘의 소망을 갖고 사는 자가 땅의 것을 매여 이전투구하며 개차반 같이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말임. 성도는 세상이 볼 때 전혀 다른 의의 모습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입니다. 성령이 성도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의를 의지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고 높은가를 자신의 허물과 죄 속에서 깨닫고 또 깨달으면서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 점령된 심령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야 말로 거듭남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사 육신은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심령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하고, 그 예수님의 다시 오심만을 학수고대하는 자들이 성도요 교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여기에 해당되시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