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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홀릭
2024. 9. 향기 영란
벚나무 잎이 제법 떨어져 쌓일 정도이다. 밟으면 싸그적싸그적 소리가 난다. 물러갈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여름은 자리를 비킬 생각을 않는 고집불통을 닮았다. 여름 가뭄에 지친 나무는 잎을 달고 있을 힘조차 없는지, 슬그머니 손을 놓는다. 뭔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날씨에 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진 잎은 밟을 때마다 성마른 소리를 낸다. 아침, 저녁으로 어두움의 양은 고무줄처럼 늘어났지만 여전히 덥고 습하다.
지난 8월, 창원을 오가며 두 가지 연수를 들었다. 배움은 확실히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가 된다. 조금 거칠게 말해서 이미 알 것은 다 아는데 무얼 더 배울 게 있을까 하는 쪽의 사람도 있고, 나처럼 읽을 것도 들을 것도 많을 뿐더러, 또 다른 장소에 직접 모여서 배우면 그 색깔을 달리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나처럼 생각하는 부류의 장점은 목표 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잡념은 덜하지 않나 싶다.
천성이 부지런하거나 야무진, 혹은 인내심 있는 스타일은 못 된다. 게으른 사람이 발명을 잘한다는 말이 있다. 부지런하지 못한 내가 공부 욕심은 제법 있는 편인데, 그 욕심을 채우는데, 다른 사람을 동원하는 능력? 같이 하자고 설득시키는 능력? 거기 공부하는데 끼워주실래요? 이걸 해 보고 싶은데 모임을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등의 말을 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해 보고 싶은 공부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상대에게 그렇게 밀어 붙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여름 연수에서 책 모임을 100개?(설마 사실확인이 필요하지는 않겠지요?) 정도 한다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나서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주변 사람들을 부추겨서 조금씩 바꾸기도 하고, 새로 만들기도 하고, 끼워 들기도 했으며, 또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면 만들거나 참여하고 싶은 모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조금씩 바뀌어진 나의 생활을 살펴본다면, 일단 책갈피 시스템을 좀더 촘촘하게 보완시켰다. 영어원서 읽기, 코스모스 낭송 등을 모여서 하려니 지지부진을 면치 못한다는 공감대는 내 제안을 빠르게 납득했고, 덕분에 다들 집에서 코스모스를 들고, 원더를 들고 씨름을 하고 있다. 물론 그녀들이 하는 씨름은 우아할 것이다. 나의 원더 씨름은 사실 고역이다. 스토리가 지상 3미터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느낌인데 깡충 뜀을 뛰어 간신히 붙들어 잡는 짜투리들로 이야기는 얼기설기하다. 그러나 언어를 공부하는 가슴 뿌듯한 보람이 있다. 하루 서너줄만 하고 넘어갈 때도 있지만, 하루의 루틴으로 자리를 만들어 둔다. 야무지게 정리하면서 읽는 <코스모스>의 세계는 그야말로 지성의 확장, 지적 희열, 인류 집단지성을 총괄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칼 세이건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무대 뒤가 풍요로워지고 있다.
두 번째 스터디는 비폭력 대화 공부모임이다. 친한 동료들, 이야기를 했다하면 킬킬거림의 대화가 65% 가량인 세 명이서 일요일 오전(나는 6시쯤부터 괜찮지만 아직 40대 초중반인 이 분들은 어림없는 시간이어서 7시 반으로 정했다)에 만나서 읽어온 분량에 대한 질문과 의미를 나누고 실습을 한다. 비폭력 대화 이론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신뢰, 또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품고 있어서 적은 분량이지만 이야기거리가 풍성하다. 새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좋은 동료들과 다른 방향으로 충만한 모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강요나 충고, 평가, 조언, 도덕적인 판단을 적용시키기 좋은 상대인 아이들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관찰적 언어, 느낌으로 말하기, 나와 상대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부탁하기를 공부하는데, 평화로운 직업생활을 하는데 굉장한 도움을 주는 이론이다. 나는 공부하기를 좋아한다기 보다 오히려 필요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이 정확하다. 나는 공부하는 것이 별로다.
세 번째 모임은 얼굴한번 본 적 없는, 38명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동시 필사 모임인데, 이건 매일 필사해서 올린다는 점에서 부담이 세다. 옮겨 적고 자기 소감을 붙여야 하는 일이 여간 에너지가 드는 일이 아니다. 찾는 일도 품이 드는 일이다. 38명 모두가 참여하는 건 아닌 듯 해서 조금 빼먹어도 눈치 보이지 않아서 좋다. 여기서 동시는 어른들이 쓴 쉽고 말랑말랑한 시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올려서 쓴 시를 잘 베껴 적는다. 고역인 부분도 있지만, 놓치지 않고 싶은 부담스러운 과제이다.
그 밖의 다른 모임은 매주 화요일 그림책 공부모임인데, 경남지역 교사들로 구성되어있다. 하고잽이 선생님들이다. 이 모임의 단점은 준비시간에 할 일이 없다는 점이다. 참가자들의 애정은 자신들이 애쓴 만큼 생긴다고 생각한다. 한두 사람이 일방적으로 끌고가는 모임은 느슨해지기 쉽다. 일단 올해까지는 책임구성원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모임은 제대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순 없다. 이금이 작가의 작품을 깊이 읽는 모임인데, 격주로 일요일 오전 6시에 눈떠서 한다. 책을 못 읽어서,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등으로 2번 모두 참석을 못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스터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건 접근해 본 후 성사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쓰다보니 어른들과의 공부만 말하게 되었지만, 실은 내 머리 속에 있는 내용과 가장 가까운 동료는 나와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이다. 내 생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들과 생활하는 것을 책 모임 하듯, 공부 모임 하듯 하려고 하고 있다. 내 공부의 대부분은 이것을 위한 시간이었고, 그것이 곧 나를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실은 벅차다. 이런 것들이. 내가 잘하는 건 감당 못할 정도의 일을 벌여놓고 허우적 대는 것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일을 수월하게 해 내는 편도 아니다.(그렇게 보이는 사람도 쉽게쉽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그런 건 없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일을 저 혼자 부산스레 오가면서 이것저것 손대기만 하는 내가 좀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조금씩 나의 영토가 넓어지고, 우정은 단단해지고, 또 생각지 못한 기회도 생긴다고 생각한다. 스터디 홀릭으로 빠지게 해 준 지난 여름 책모임 100개의 선생님과의 만남이 꽤나 괜찮았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