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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03
디모데후서 3장 16절 [1장 2-3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제1장 성경이라는 주제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1항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은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을 특별계시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특별계시 가운데 기록된 말씀을 성경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바를 기록하게 하셨고(1, 구약),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2, 신약). 그러므로 특별계시인 성경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기록하게 하신 이후로는 더 이상 없습니다. 특별계시는 종결되었고, 종결된 만큼 거기에 또 다른 계시가 덧붙여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고백 1장 1항은 그의 뜻을 그의 백성에게 알리셨던 하나님의 이전 계시 방식들은 지금 중단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특별계시의 종결과 완성, 그래서 더 이상 성경이 기록될 수 없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8절과 19절입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러므로 새로운 계시, 그리고 계시를 따라 성경이 더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항은 계시의 완성으로 기록된 성경 목록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 혹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 다음과 같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됩니다. 구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하, 열왕기상· 하, 역대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신약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바울서신들 -로마서, 고린도전·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 후서, 디모데전·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 후서, 요한일· 이· 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이상]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모든 성경은 신앙과 삶의 규범입니다(눅16:29,31, 엡2:20, 계22:18-19, 딤후3:16).
구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39권으로 기록되었고, 신약은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27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 목록과 관련해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경우 바울의 서신을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만 언급합니다. 영어 표현으로 로마서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Paul's Epistles to the Romans)’인데, 바울이 어느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할 때 ‘...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Paul's Epistles to...)’라는 한번의 표현이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수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The Epistles to the Hebrews)’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는 바울의 편지에서는 제외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 거의 천년 동안 히브리서는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체와 내용의 차이 등을 이유로 히브리서는 누가 기록했는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게 되었는데, 성경 사본인 P46은 히브리서를 바울의 서신으로 수록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살필 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은 다양한 필기재료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파피루스나 양피지, 나무판 등이 그 재료입니다. 이 가운데 파피루스는 사본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파피루스의 연대 때문입니다. 사본학에서 볼 때 양피지에 기록된 거의 모든 사본들은 주후 5세기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반면 파피루스들은 현존하는 성경 사본들 가운데 가장 이른 연대의 기록으로 간주됩니다. P46의 경우 파피루스(Papyrus)를 뜻하는 알파벳 이니셜 ‘P’에 파피루스를 발견한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붙이게 되는데, 지금까지 성경 파피루스가 발견된 것은 128번까지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김진옥 교수에 의하면(http://repress.kr/2702/) 파피루스들은 약 2,000년 이상의 세월을 사막의 건조한 날씨를 조건으로 견뎌왔기 때문에 심하게 훼손된 경우가 많고, 대부분 파편들만 남이 있지만 어떤 파피루스들 속에는 감사하게도 많은 부분들이 손실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본을 뽑으라면 P45-47까지로 분류된 ‘체스터 베티 사본’이라고 합니다. P45의 경우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P46의 경우는 바울서신을, P47은 요한계시록의 부분들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체스터 베티 사본의 위엄은 현존하는 파피루스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의 성경 본문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연대가 3세기 이전으로 소급된다는 점에서 확인된다고 합니다. 특별히 P46의 경우는 김영규 교수의 역량 있는 논증으로 그 연대가 1세기 후반까지로 고려되는 사본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Cf. Young Kyu Kim, “Palaeographical Dating of P46 to the Later First Century”, Biblica 69 (1988).). 그러니까 P46에 기록된 필체가 1세기 파피루스 필체로 쓰여 졌다는 것을 증명한 것인데, 대략 주후 8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증명에 대해 P46을 주후 20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믿는 국제학계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반박할 한 것이 나와야 하지만 반박하지도 못하면서 받아들이지도 않고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김영규 교수의 논증대로라면 P46의 경우 지금까지의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랜 된 성경 사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사본에 있는 바울서신의 목록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로마서 다음에 히브리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순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히브리서가 다른 서신에 비해 발신자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만, 오랫동안 바울 서신으로 여겨 온 것도 있고, 또 가장 일찍 기록된 P46이 히브리서를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벨직 신앙고백의 경우는 바울서신으로 열 네 개를 말합니다(제4장). 히브리서가 바울서신에 속한다는 것을 명시한 고백서입니다.
이제 2항의 내용을 살펴보겠는데, 성경 혹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 다음과 같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구약과 신약을 열거하는데,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66권만을 정경(正經)으로 고백합니다.
그럼 성경 66권만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어떤 기준에 의해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2항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모든 성경’이라는 표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혹은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정확하게 오늘 본문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증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때 모든 성경은 바울 당시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약을 의미하지만, 신약 성경이 완성된 지금으로서는 구약과 신약 전체로 이해해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감동’(θεόπνευστος[데오퓨뉴스토스])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으신’, ‘하나님의 숨이 들어 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로 말씀하신 바를 기록하게 하실 때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도록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자면 베드로후서 1장 21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여기서 예언은 앞 절(벧후1:20)에서 언급하지만 성경의 모든 예언을 말합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인데, 거기에는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일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록된 모든 말씀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고, 기록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의 오류가 개입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모든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이기 때문에 무오하게 기록케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서는 4항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말합니다. 또한 6항에서 구원에 필요한 계시로서의 완전한 충분성을 말하고, 7항에서는 구원에 필요한 계시로서의 명료성에 대해 말합니다.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충분하고 명료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할 때(이하 (개혁교의학 14장 106-10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조) 구약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기록케 하셨는데,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생애 중 어느 시기에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알려 주셨고, 그들의 입에 할 말을 주었으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거나 ‘주의 말씀이 임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정요석 교수는 성경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들에게 임하였다는 내용이 곳곳에 나온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란 표현이 성경에 100번 넘게 나오고,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는 표현은 8번 정도,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는 표현은 40번이 넘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말씀을 선지자로 기록하게 하시는 명령도 곳곳에 나온다고 설명합니다(출17:14, 민33:2, 사30:8, 렘25:13, 30:2, 단12:4, 합2:2). 결국 선지자들은 말을 하든 글을 쓰든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 성경에 대해 신약에서의 인용은 구약의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신적 기원과 신적 권위를 지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때때로 기록자의 이름으로 구약을 인용합니다. 그래서 모세를, 이사야를, 다윗을, 다니엘을 말하기도 합니다. 자주 사용하는 문구는 ‘기록되었으되’입니다. 혹은 ‘성경이 말하기를’ 이렇게 인용하기도 합니다. 복음서의 기자들 역시 ‘선지자로 하신 말씀’ 혹은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이라고 하면서 인용하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 누가복음 16장 31절을 언급했지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다고 할 때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는 구약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목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세오경을 비롯하여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과 같은 시가서가 구약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3:15) 기록자는 사도 바울이지만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대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유다서 1장 17절과 1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베드로후서 3장 2절과 3절을 인용한 것인데,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사도 바울 자신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4:16)고 권면합니다. 기록할 때의 수신자는 골로새 지역의 교회들과 성도들이지만,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를 의식하고 썼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바울 개인의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쓴 것임을 의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는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살전5:27)는 권면까지 하게 됩니다.
참고로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영감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설명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6-17세기 신학 토론 가운데 성경이 영감 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확정적인 사실로 고백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서가 비록 구체적인 영감의 방식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김병훈 교수는 당대의 성경 영감과 관련된 전통적 이해를 고려할 때 그것은 완전 영감이며 축자 영감이며 또한 유기적 영감으로 이해가 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의 저자들에게 그들을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시는 교리들뿐만 아니라 단어들도 영감하셨으며, 동시에 저자들의 문체와 교육 정도 등 그들의 특성들을 사용하셨음을 당시의 신학은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서가 성경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영감이 되었으며(완전 영감), 단지 사상만이 아니라 단어들도 영감이 되었고(축자 영감), 또한 사람의 저자가 기계적으로 사용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연적인 특성들이 활용이 되었음(유기 영감)을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http://repress.kr/1965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모든 성경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고 고백하는데, 성경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전해준다고 할 때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규범인 것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이러한 성경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성경을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규범’이라고까지 말합니다(3문). 소요리문답 역시 인간의 목적과 관련된 유일한 규범이 성경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논할 때, 또한 우리의 삶과 순종에 대하여 논할 때 성경 외에 다른 규범을 가지고 올 수 없습니다. 성경만이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간혹 세상 법은 바뀌기도 합니다. 오늘날 간통죄가 헌법상 보장되는 성적 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로 폐지가 되었지만, 세상 법은 신자에게 삶의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과 일치하는 한에서는 세상 법도 규범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만 제한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법은 언제나 외적인 행위들에 대해서만 판단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할 때는 외적인 행위들만이 아니라, 내적인 우리의 마음까지 살피도록 하십니다. 때문에 엄밀하게는 세상 법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계속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3항을 통해 외경에 대하여 말하는데, 성경 66권만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고 할 때 66권 외에 일부 교회가 받고 있는 외경은 결코 성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적 영감으로 말미암지 않은 보통 외경이라 칭해지는 책들은 성경 정경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권위가 없고, 인간의 다른 저술들 그 이상으로 어떤 것도 인정될 수 없고 사용될 수도 없습니다(눅24:27,44, 롬3:2, 벧후1:21).
2항에서 성경 혹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고 했다면, 외경에 대해서는 신적 영감으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성경은 66권 외에 7권의 외경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목록은 이러합니다. 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비 상과 하입니다. 신약 정경에 있어서는 27권으로 다르지 않는데, 이 내용이 구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톨릭은 구약 39권이 정경이 아니라 46권이 정경인 겁니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구약 성경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70인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이 기록될 당시 공용어가 헬라어였는데, 주전 3기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위해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히브리어로 기록된 39권만이 아니라 그리스어로 기록된 7권의 책을 포함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전 2세기와 1세기에 그리스어로 쓰인 문헌들이 히브리어 성경에 더해졌는데, 그것이 외경입니다.
주후 90년경에 유대인들은 회의를 열어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얌니아 회의입니다. 하지만 5세기경 제롬이라는 교부가 서방 교회를 위하여 성경을 번역할 때 외경이 들어 있는 70인역을 사용했습니다. 헬라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된 것이 벌게이트(Vulgate) 번역입니다. 벌게이트라는 말은 백성의 언어, 혹은 대중적인 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서방 교회는 이 번역을 공인 번역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심지어 1546년 트리엔트 종교회의의 제4차 모임에서 이 외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졌다고 인정하게 되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제1교령 성경과 사도들의 전승을 수용함 부분인데, “만일 누가 가톨릭교회에서 예로부터 읽혀져 왔고 라틴어 불가타 고전본에 실려 있는 대로 이 책들 전체를 한 부분도 빠짐없이 거룩한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앞서 언급한 전승을 고의로 업신여긴다면, 그는 파문 받아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가톨릭 성경 안에 외경이 들어 있게 된 배경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외경이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66권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정경인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우리가 볼 때 외경 7권을 정경으로 여김과 동시에 그들 입장에서 외경으로 여기는 책들도 있는데,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66권 외에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규범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으로 어떤 유익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과는 달리 어떤 분은 정경은 아닐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잉글랜드 성공회의 39개 조항, 제6조에 보면 (제롬이 말했던) 다른 책들은 교회가 모범된 생활과 훈련된 태도를 위해서 읽고 있기는 하지만, 교리를 제정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고백의 내용도 있습니다(개혁교회의 신조, 박일민). 그러니까 외경으로는 어떤 교리도 세울 수 없다고 인정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모범된 생활과 훈련된 태도를 위해서는 유익이 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심지어 루터조차 1534년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구약성경 끝부분에 7권의 책인 외경을 부록으로 첨가하면서 외경을 성경과는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읽으면 유용하고 좋은 책들이라고 평했다고 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이런 입장에 대해 채드 반 딕스혼 & 에밀리 반 딕스혼 부부의 공저인 「믿음의 고백」이라는 책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적 생활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당연히 우리의 믿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경건은 기독교 신학이 투영된 것이어야 하며, 외경이 교리를 세우는 데에 사용될 수 없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으로 높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오직 성경 66권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외경은 신앙, 다시 말해 성공회의 39개 조항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교리를 제정하는 데 있어서 사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앙과 삶이 동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삶에 있어서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간혹 보면 목회자들 가운데 탈무드 이야기를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의 지혜를 배운다는 측면에서 설교 시간에 언급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사람의 지혜일 뿐 하나님의 지혜가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까? 물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6항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및 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주의 몸 된 교회는, 그리고 주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성도는 성경만을 말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사실 시간이 부족합니다. 외경을 말하고, 탈무드를 말하고, 세상에 있는 어떤 책들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성경과 다르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을 성경이 말한다고 할 때 우리는 성경으로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성경에도 있고, 다른 책에도 있다면 다른 책이 아닌 성경을 출처로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외경에 대해 조금 더 말하자면, ‘외경’(Apocrypha[아포크리파])이라는 말은 ‘감추어진 것들’, ‘숨겨진 책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66권을 정경으로 고백하면서 나머지 7권을 외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고 가톨릭에서 외경이라고 생각하는 것들까지 외경 혹은 위경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저자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부는 저자와 제목을 거짓으로 표기함으로 그 저작들의 실제 작성 시기가 언제인지, 또 누가 작성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도 정경의 전체적인 본질에서 크게 상이하며 근거가 없는 것들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요석 목사는 그의 책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단적이므로 감추어져야 된다는 뜻도 되고,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감추어진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도 된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가톨릭의 연옥 교리가 이런 외경으로부터 추론한 것입니다(마카비 하). 그러니까 어떤 책을 정경으로 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외경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신적 영감으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성경 정경의 일부가 아니라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권위가 전혀 없습니다. 권위가 없기 때문에 신앙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결코 규범이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외경에 대하여 인간의 다른 저술들 그 이상으로 어떤 것도 인정될 수 없고 사용될 수 없다고까지 고백합니다. 그 말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인정할 수 있고 또한 사용되어야 할 유일한 책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으로 된 이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66권으로 된 성경만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에 바른 신학이 있으며, 여기에 바른 교회가 세우질 수 있으며, 여기에 바른 성도의 삶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