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을 무대로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
송언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처음 읽은 것은 이십 대 때였다. 작가 박경리에 대한 동경으로 선택한 책이었는데 얇지도 않은 두께에 켜켜이 쌓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어 두 번 다시 꺼내 들지 않았던, 책장에서도 그 앞에만 서면 서늘해지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을 다시 꺼내 든 것은 서른 중반, 통영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한 다음 날이지 싶다. 스토리 중심이 아닌 지명 중심으로 읽으니 읽을 만했다.
통영에 대한 회색빛 밑그림을 들고 이사했는데 정작 통영은 총천연색으로 나를 맞았다. 어디를 가든 마음을 열게 하는 풍경이 펼쳐진 곳에서 그 책을 다시 들여다볼 이유는 없었다. 그러다 길을 걷고 향토사를 배우며 다시 펼쳐 들게 되었는데,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료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다.
소설 1장의 한 꼭지는 통영에 대한 설명으로 장황하다. 공간적 배경을 설명하기에 너무 많이 할애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통영이라는 곳을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통영은 남해와 거제 사이에 위치하며 크고 작은 섬들이 파도를 막아 호수 같은 바다를 갖고 있다. 그 바다에 어족이 풍부함은 물론 연평균 기온 차가 크지 않다. 풍광이 좋으니 절로 예술적 소양을 갖추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준말이다. 어느 지역의 행정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시청이나 도청처럼 군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을 행정명으로 사용하며 지명이 된 것은 1914년부터다. 그나마도 거제를 포함한 것이었다. 1953년부터 거제와 분리하여 통영군이라 칭했으며, 1955년 통영군과 충무시로 나뉘었다가 1995년에 시군을 통합하면서 통영시로 통합한다. 통영이 통영이 된 것은 불과 18년 전이다.
책의 내용은 1864년 봉제·봉룡·봉희 삼 남매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가족사다. 통제영은 1895년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폐영되었으므로, 당시는 통제영이 있던 시대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임진전쟁 중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충청·전라·경상의 다섯 개 수영을 통괄하는 군영이다. 통영의 지형이 고성에서 이어지는 부분을 제외하곤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수군 사령부의 지세로 안성맞춤이었다고 한다. 1604년 당시에 두룡포라 부르던 작은 어촌인 지금의 통영에 영을 설치하였는데, 통제영의 역사는 통영의 문화예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의 양반이다. 임금의 영을 받들어 2년의 임기로 다녀갔는데, 당시 양반은 자기만의 문화를 향유하는 신분이었다. 당신의 취미를 위한 수도 한양의 문물과 문화는 통제사의 임기 때마다 다양하게 통영으로 유입되었다. 통제사의 의복은 수도 한양의 최신 유행을 임기마다 이 남도 끝으로 가져왔고, 찬모의 음식솜씨는 풍부한 해산물과 만나 고급 요리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봄이면 다섯 개 수영의 수군들이 모여 훈련과 점호를 하였다. 훈련과 점호가 끝나면 연회도 베풀었다니 수군 최고 사령부에 오면서 그냥 오진 않았을 것이다. 교통이 열악하여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던 당시에 타 지역 문물과 문화 또한 수용 했던 곳이 통영이다. 통제영의 살림살이를 위해 전국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십이 공방을 설치해서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 재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통영의 공예품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진 명품이었다. 박경리 생전에 말씀하신, 통영 사람에게 흐르는 예술의 DNA는 삼백 년 통제영 역사가 이루어 놓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제영을 방비하던 통영성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었다. 성안에는 소위 잘 사는 사람들이 살았다. 최근까지도 태어나 살던 지역을 따지며 ‘성안 분, 성밖 놈, 그 외 떨거지들’로 나눌 수 있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 것으로 보면 신분사회였던 당시엔 더 심했을 것이다. 김약국 집안의 가세를 말해주는 부분이다. 김약국 아버지 대는 간창골이라는 곳에 살았다. 간창골은 관청이 많은 골이라는 뜻을 지닌 관청골에서 변화한 지명이다. 세병관과 중영에서 가까운 곳. 봉제는 그 한가운데서 약국을 했으며, 봉룡이 살았던 곳은 서문 가까이 여황산 자락이 끝나는 지금의 문화빌라 자리쯤 된다.
봉희의 아들 중구는 살림이 어려워 성안에 살지 못한 듯 보인다. 동문 밖에 자리 잡는다. 용숙이 사는 대밭골은 서문 바로 밖 명정골, 용란이 시집간 연학의 집은 도릿골, 용옥과 기두의 집은 충렬사 부근 명정고개 가는 길쯤에 있었을 것이다. 지형상 육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북문엔 공동묘지와 문둥이들이나 살던 곳이었다는데, 한돌과 살림을 차린 용란의 집 또한 그곳 어디 허름한 곳이었으리라.
백석의 통영이라는 시에 보면 ‘처녀들이 모두 어장주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이라는 구절이 있다. 조선의 수산업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어업이 아닌 발을 쳐 놓고 고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거나 낚시 혹은 짚으로 만든 그물을 이용하는 소규모 어업이었다. 그러다 일본의 기술이 들어오면서부터 수산업이 발달하게 된다. 근대 기술에 앞선 그들에겐 나일론이라는 소재가 있었던 것이다.
수산자원이 풍부한 통영을 수산물 공출기지로 삼으면서, 도남동 발개에는 일본인 어업기술자들을 위한 마을을 조성하고 우리의 수산물을 일본으로 실어 갔다. 김약국이 약국 대신 어장을 하게 된 동기는 나오지 않았으나 수산업 붐을 타고 일어난 일이었으리라. 그마저도 방관으로 서씨네에 일임함으로써 폐가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말이다.
1910년 한일합병을 거쳐 1940년대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는 동안 우리는 일본인들에게 바다를 빼앗기고 자식을 빼앗겼다. 태윤이 독립이라는 꿈을 꾸며 타향을 떠도는 것 또한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치기가 아니었을까. 윤이상 기념관에는 윤이상 선생이 쓴 글이 전시되어 있다. 두 장 분량의 글 내용은 이렇다. 3.1만세운동 이후 전국으로 만세 운동이 퍼진다. 통영에도 만세 운동을 펼치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많은 청년이 옥고를 치르고 옥사했다. 만세운동 실패 이후 통영의 청년들은 두 개의 파로 나뉜단다. 세상을 직시하여 일본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경제력에 빌붙는 파와, 그런 세상이 싫어 그냥 조용히 모든 것을 포기한 파. 실리를 추구한 자들은 일본 상인의 가게에라도 들어가 돈을 벌려 했고, 염세주의에 빠진 청년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술이나 마시고 허허 웃으며 다녔단다. 뒷장은 앞장에 가려 읽을 수 없어서 그 두 파로 나뉜 청년들의 다음 이야기는 읽을 수 없었다. 태윤의 행동을 허공에 해대는 주먹질이라 생각하는 정윤과 그런 형의 모습을 부르주아라고 비판하는 태윤의 모습은 당시 청년들의 엇갈린 사상에 대한 대변으로 보인다.
김약국 사후 용빈은 용혜를 데리고 통영을 떠난다. 윤선마루였던 지금의 문화마당엔 통영을 떠나거나 찾아 들어온 이들의 희망과 절망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들이 오고 간 그곳은 나름의 사연을 안고 있을 것이다. 통영의 중심이 되는 그 문화마당에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이 오간다. 그들이 통영의 미래가 되어 줄 것인가. 통영은 그 이름 안에 어떤 아픔을 품고 있어도 여전히 총천연색이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