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코스 : 애기봉 입구 → 전류리 포구(한강 철책길)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 소달구지 덜컹대던 길
시냇물이 흘러내리면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
눈이 오나 바람 불어도 포근하게 나를 감싸던
나 어릴 때 친구 손 잡고 노래하며 걷던 시골길
아~~~ 지금도 아~~~ 생각나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 소달구지 덜컹대던 길
시냇물이 흘러내리던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 <이수연 작사. 임성훈 노래>
경기 둘레길 3코스는 시골길을 걸어가는 길이다. 가금리에서 마근포리를 지나 철새 도래지인 후평리, 철새 조망지인 석탄리를 거쳐 전유리 포구에 이르는 길이다. 노래처럼 정이 넘쳐나는 다정한 길일까?
가난으로 얼룩져 있던 시골이었자만 그 빈궁한 생활에도 인간의 훈훈한 정을 잃지 않았던 시골을 연상하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전류리로 향하였다. 출발지인 가금리의 명소는 분단의 상징인 애기봉이다. 애기봉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가는 곳에 솟아 있다. 병자호란 때 평안 감사와 기생 얘기와의 슬픈 일화가 서려 있다.
이곳은 북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실향민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으며 송악산 등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인데 오늘 가야 할 길이 장거리인 관계로 애기봉까지 다녀가기에는 무리로 여겨진다. 또한, 애기봉은 자동차만이 통행할 수 있고 도보 여행가는 출입이 금지되어 어차피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 전유리 포구 〉 ’ 팻말이 어서 진입하라고 재축하고 있었다. 5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걸어가는데 보기만 하여도 커다란 두 그루의 나무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82년 10월 15일 보호수로 지정한 450년 된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는 우리를 기다렸을까? 우리가 입을 벌리고 세월의 무게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 모습에서 느티나무 또한 경기 둘레길을 걸어가는 당당한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라고 느티나무의 마음을 헤아리며 또다시 걸어간다.
애기봉 목장에 이르니 축사에서 시골 냄새가 진동한다. 소달구지 덜컹대던 그 길에 소는 보이지 않고 소똥의 향기를 발사하며 농촌 지역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비록 소똥 냄새가 코를 막게 할지라도 오랜만에 우리의 소를 만나니 반갑기도 하였다.
한우, 어렸을 때는 농촌 지역 어디를 가도 집안에서 송아지를 키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는 장성하면 시골장에 내다 팔렸으니 소는 농촌의 가난한 살림에 자기를 희생하여 가정에 보탬을 주었고 우리에게 그 몸을 바쳐 소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였다.
우리와 살면서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을 한 우리의 소! 여기 축사에 갇혀 냄새를 피우고 있지만, 저 소도 우리의 어린 시절과 같이 똑같은 길을 가고 있다. 인간의 먹이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희생되는 불행한 소란 쓸데없는 생각 속에 박신선생을 추모하는 저한재에 이르렀다.
박신朴信(1362~1444)은 고려 말 정몽주의 문인으로 우왕11년(138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자 원종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세종 때 통진에 13년 동안 유배되었으며, 통진과 강화 갑곶진 사이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내리기 위해서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개인재산을 털어 석축로(성동나루)를 만들었다. 세종 14년(1432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83세의 일기로 이곳에 묻혔다.
사당 앞에는 500년 된 향나무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제껏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보았는데 향나무는 본 적이 없어 다시 한번 눈을 들어 살펴보니 깨우침을 주는 나무라고 적었다. 향나무에는 어떤 사연이 감추어 있을까?
조선 초 영의정을 지낸 박신은 마음을 수양하고자 이 향나무를 심었다.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학문을 닦는 데 힘써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심성이 약하거나 어질지 못한 사람 행동이 불미한 사람이 이곳에서 공부하면 어질고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 배움에만 전념하게 된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학목學木이라 부르며 학문을 닦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고 적었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선보인다. 하늘은 푸르고 길가에는 바람도 솔솔 불어온다. 걸어가기 좋은 날씨이다. 차선도 없는 작은 도로, 5ton 이상의 대형차량이 지나갈 때면 잠시 길을 멈춰 서서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아늑한 길이었다.
나 어릴 때 친구하고 손잡고 놀던 길에는 조금만 더 올라가면 마을의 처자들이 꽃가마 타고 저 마을로 시집가던 길이었고 밭일을 하는 농부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하였던 곳이며 심성이 삐딱한 사람은 행인에게 텃세를 부리던 길이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소달구지를 대신한 자동차가 달리고, 새색시의 꽃가마는 사라지어 보이지 않지만, 그 자취가 맺혀있기 때문인지 경기 둘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낭만의 길로 안겨 주고 있는 길이었다.
애기봉 농장을 지나 경기 둘레길은 가금리 도로와 헤어져 농로에 진입한다. 이곳에 전류리 포구 14.9km를 알리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농로에 진입하니 또다시 축사의 향기가 진동한다. 없어질 듯 없어지지 않는 축사의 향기에서 아직도 농촌 땅을 맴돌고 있음을 직감할 때 들녘을 상징하는 광활한 평야에 푸른 물결이 넘실댄다.
봄부터 피땀을 흘리며 일구어 놓은 초록빛 바다, 바라만 보아도 장관이다. 농부가 흘린 땀이 사람다운 진정한 수고로움을 알겠다. 논밭의 벼 이삭은 고개 숙여 과객에게 인사를 하고 끝없이 펼쳐진 저 멀리 끝자락에는 고만고만한 산들을 넘어 개성의 송악산이 힘차게 뻗어 손짓하고 있다.
산은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그것은 보는 각도에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겠지만 어떤 산을 보든지 간에 공통으로 느끼는 것은 나의 연인을 기다리는 것 같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특히 오늘처럼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북녘땅의 송악산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반가움과 기쁨이 아닐 수 없는데 그 산세가 고려 5백 년 왕조의 기상과 같이 힘차게 뻗어있었다.
농로에서 마근리 도로에 진입하였다. 이곳에서 둘레길 따라 1km를 진행하면 마근포다. “ 마근포는 강녕포구, 조강 포구와 함께 6·25전쟁 이후 포구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포구의 모습은 사라졌다.
마근포 일대를 마근개라고 하여 마근개가 있는 부엉 바위산에는 뱃사람들이 용왕제를 지냈던 당집이 있었다. 개풍군 임한면 정곶리를 왕래하던 나루터로 조선지지 자료에 마근개 주막이 등재되어 있던 곳이다.
마조리 가는 도로는 차선이 없는 포장도로였지만 간혹 대형차도가 지나간다. 그러면 안전을 위해 잠시 서서 자동차를 보내고 걸어가는 길이다. 가을 날씨를 보이지만 햇빛에 노출되어 걸어갈 때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며 청정 장수 마을을 지나 연화봉로에 이르렀다.
연화봉로는 연화봉 기슭에 도로를 개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화봉은 해발 75m의 동산으로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한강하구의 영토전쟁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승리하면서 이곳에 주둔하게 된 고구려 병사는 마을에 사는 백제 낭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백제군이 반격하여 고구려군이 한수 이북으로 패퇴하게 되자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그 후 낭자는 돌아오지 않는 낭군을 찾아 강을 건너다 그만 개펄에 빠져 죽였다. 낭자가 죽은 그곳에는 한 송이의 연꽃이 피어났으며 사람들은 그곳을 연화봉이라 불렀다.”<평화 누리길 이정표에서 퍼옴>고 한다.
연화사 주차장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먹었다. 도로의 주차장의 한쪽에서 길가에 떨어진 낙엽을 치우고 점심을 먹는 모습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길을 걷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마음을 쓸 것이 없다. 때가 되었고 목적지까지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한데 배에 힘이 없으면 어떻게 진행할 수 있겠는가?
연화사에서 후평리에 이르렀다. 후평리는 김포 하성면 석탄리와 사리 파주 교하면 신남리와 문발리. 신촌리 등지와 묶어 천연기념물 250호 한강 하류 재두루미 도래지로 지정된 수도권 최대 철새 도래지라고 하지만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진 지금으로서는 철새 떼의 장관은 볼 수 없었고 북한산, 도봉산, 고령산 등 산줄기가 철새의 아쉬움을 대신해 주었다.
13시 방향에는 계양산, 11시 방향 심학산, 10시 방향 북한산을 벗하며 석탄리를 지난다. 철새 도래지에서 철새를 만나지 못하고 석탄리, 사암리의 한강 철책선 따라 일직선의 길을 걸어간다. “ 다소 지루한 길이 될 수 있는 길을 한강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강물과 강가의 갈대숲과 정을 나누어 주려니 지루하지 않았다.”라고 먼저 종주하신 조용원 회장님의 설화가 떠오른다.
혹자는 “평화 누리길 3코스 한강 철책 길은 한 마디로 이 길은 자기와 싸움을 하면서 지루한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여름에는 그늘도 전혀 없어 많이 힘들 것 같고, 한겨울에는 강바람이 불어 많이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넓은 들판 곳곳에 새까맣게 앉고 있는 겨울 철새를 위안 삼아 걸으면 조금은 위로가 될 것이다. 후평리에서 후평 철새 도래지로 들어서면 먼저 눈 앞에 펼쳐진 끝이 안 보이는 들판에 놀란다. 이 들판을 직선으로 질러가는 농로 또한 끝이 보이지 않으니 또 한 번 놀란다.” 하였다.
일면 수긍할 수 있는 말이나 성인께서 이르시기를 ‘ 아는 것이 좋아함만 못하고 좋아함이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길을 걷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즐거움으로 다가오기에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즐거워한다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이 체질화되었을 때만이 그 즐거움을 절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길을 걷고 다리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다 있으랴 마는 그 육체의 아픔보다는 내 마음에 느끼는 감흥이 다리의 아픔을 잊게 하는 것이 아닐까?
전유리 포구 4km를 알린다. 김헌영 총무는 다 왔다고 좋아한다. 철책선 따라 직선으로 뻗어간 길이 되어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아직도 1시간을 더 걸어가야 하는데 다 왔다고 서슴없이 말을 하고 있으니 진정 걷는 것에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
후평리에서 시작한 일직선 상의 길, 걸을 때는 지루한 것 같아도 목적지에 이르면 다시 걷고 싶은 길이 한강 철책선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 마침내 전류리 포구에 이르렀다.
” 전류리 포구는 조선지지자료에 전류리 주막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도 사람들이 왕래가 빈번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헌종 8년에 간행된 통진부 읍지에 전류리 나루 근처에 전류정에 대한 기사가 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김포의 최북단 포구로 유일하게 어업 활동을 하는 곳으로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랐다는 웅어가 특산물이며 실뱀장어, 잉어, 황복, 참게, 참숭어, 새우, 붕어 등이 많이 잡힌다.” <평화 누리길 안내문에서 퍼옴> 고 경기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알려 준다.
● 일시 : 2022년 8월28일 일요일 맑음
● 동행 : 박찬일 사장님. 김헌영 총무님.
● 행선지
- 09시58분 : 애기봉 입구
- 10시26분 : 저한재
- 10시55분 : 마근포 입구
- 11시55분 : 연화사
- 15시11분 : 전류리 포구
● 소요시간 거리
◆ 총거리 : 17.2km
◆ 소요시간 : 5시간 1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