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없는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뿌리 없는 나무에 생명이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사람은 그 본래의 뿌리를 통해 인생의 결실을 맺는다. 나의 뿌리는 어디로 깊숙이 뻗어 가고 있는가? 이것은 내 평생 끊임없이 반복해서 제기했던 하나의 화두(話頭)였다.
나는 1927년 정묘(丁卯)년 음력 9월 18일, 충남 부여군 양화면 원당리 235번지에서 한 분 누이와 6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 때는 3․1 운동이 일어난 지 8년이 지난 해로, 민족과 국가의 수난이 파란만장하여 참으로 비참했던 내우외환의 시기였다. 한국 침례교회사적으로 보면, 교단에서 파송된 이현태 교사가 몽고지역에서 야만적인 토족들에게 습격당해 순교의 잔을 받은 해였다. 이 시기는 동아기독교의 해외선교가 온갖 역경을 딛고 확산되던 때였다. 그 해 함북 고읍(古邑)에서 열린 제22회 대화회(지금의 총회)에서는 그동안 함북, 종성, 경흥과 시베리아, 만주 등지에서 교회와 교인들이 공산당으로부터 방화와 살해의 위협을 받고 사는 실상을 전해 듣고 더욱 신앙을 다짐하고 전도의 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광산 김가(光山 金家)의 시조(始祖)인 흥광(興光) 왕자공(王子公)의 38대 손인 동시에 사계(沙溪)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11대 손이요, 선친 영오(永吾; 1900-1992)와 모친 경주 김씨 차연(次蓮, 1909-1993)의 맏아들이다. 나의 선친은 천현(千鉉, 1864-1922) 옹과 김해 김씨(1880-1915)의 2남 2녀의 장남으로, 충남 청양군 목면 안심리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셨다. 그러나 양친이 별세한 후, 선친은 이모부인 우(禹)선비의 주선으로 고향을 떠나 부여군 양화면 원당리로 이사하셨다. 이제와 회고해 보니, 아버지가 교회가 있는 곳으로 이사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 같다. 내가 살던 고향은 철따라 꽃피고 나비들은 한가롭게 노닐며 새들은 노래하던 아름다운 작은 농촌이었다.
우리 마을은 1개 면(面) 12개 리(理)의 중앙에 위치했고, 동쪽은 우리나라 3대강인 금강(錦江)이 유유히 흐르는데, 하루에 두 번씩 어김없이 조수(潮水)가 드나들었다. 이 강은 군산(群山)과 강경(江景)을 내왕하는 정기 연락선이 있어 교통수단으로도 요긴한 곳이다. 서쪽은 수원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원당산(元當山)이 병풍같이 둘러있고, 마을 앞은 가을이면 황금물결 치는 들판이 펼쳐있다. 북쪽은 서천군과 부여군을 잇는 국도(國道)가 있으며, 국도변에는 내가 공부했던 소학교[초등학교]가 있다. 우리 마을에는 100여 호가 모여 있었는데, 행정구역으로는 3개 구(區)로 분리되어있고, 마을에는 한산이씨, 김해김씨, 밀양박씨가 주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서당(書堂)을 통해 한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또 야학당(夜學堂)이 있어 남녀 청년들은 문맹을 퇴치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특히 마을중앙에 세워진 원당교회는 서구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해주었다.
부여군 양화면 원당마을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