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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금헌집] 해제
이원걸(문학 박사)
1. 문집의 개요
[낙금헌집]은 임진왜란 때 안동 의병장이며 선비인 이정백(李廷栢:1553-1600)의 시문집(목판본 2권 1책)이다.
2. 문집의 체제
이 문집은 경신년(1848년)에 간행되었다. 서문 2편(柳氵奎撰․李秉遠撰)이 있다. 권1에 시(詩) 5언절구 15제(題), 5언4운 16제, 7언절구 47제, 7언4운 11제, 5언고시 6제, 7언고시 5제, 가(歌) 3제, 제문(金垓)이 수록되어 있다.
권2는 부록인데 낙금헌에게 준 벗들의 시 7편과 고인을 추모하는 만사 1편(崔晛), 제문 2편(崔晛, 崔暐), 낙금헌의 위패를 유암서원(流巖書院)에 봉안할 때 작성한 「봉안문(奉安文) 」 1편(李級)․「상향축문(常享祝文)」 1편이 실렸다. 이어 그 위패를 다시 고인의 구택(舊宅)으로 모실 때 지은 「이안축문(移安祝文)」 1편(柳長源), 「유사(遺事)」 1편(李庭檜撰), 「가장(家狀)」 1편(李朝衡撰), 「행장(李仁行撰)」, 「묘갈명」(柳台佐撰), 「후지(後識)」 1편(李有白撰), 「발문(跋文)」 1편(柳致明撰)이 실려 있다.
부록의 말미 추록(追錄)에는 낙금헌의 시 3편이 실려 있다. 이어 습유(拾遺)에 여러 문집이나 문건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낙금헌에 대한 기록을 발췌해 두었다. 출처를 보면, 향병일기(鄕兵日記)․진중별록(陣中別錄)․남정록(南征錄)(經理 楊鎬)․행정기(行程記)(遊擊 吳惟忠)․「답순찰서(答巡察書)」(總兵 劉珽)․총화(叢話)(東岡 金宇顒)․군향별록(軍餉別錄)․응천별록(凝川別錄)․계림고사(鷄林故事)․계문제자록(溪門弟子錄) 등이다. 맨 끝에는 낙금헌을 퇴계 문도로 인정했던 계문제자록(溪門諸子錄)의 언급도 소개하였다. 이어 「묘지명」 1편(金道和撰)과 「발문」 2편(金興洛撰․李晩燾撰)이 실려 있다.
3. 문집의 특징
이 문집은 경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권1의 시를 중심으로 본 문집의 성격을 규명해 내야 한다. 이로써 낙금헌의 작가 의식과 내적 고민을 간취해 낼 수 있다. 시의 내용을 대별해서 정리한다. 나그네 서정을 토로한 작품군이 돋보인다.
마른가지에 바람소리 밤은 참 길어 枯樹風鳴夜正長
객지 창가에서 고향 생각 간절하네 客牕偏苦憶家鄕
서쪽 산 달 아래 모진 서리 내리니 西峰月下霜猶重
병든 몸 찬 방에 누워 있기 어렵네 病骨難堪臥冷房. 「病中憶故山」
병중에 고향을 그리며 지은 작품으로, 나그네 서러움이 투영되어 있다. 겨울을 맞은 객지의 수심이 그려진 작품이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 가지에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부는 긴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나그네 근심은 깊어 간다. 객지에서 느끼는 나그네의 고독한 심상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나면서 나그네의 수심은 그만큼 고조되기 마련이다.
시인은 당시 병이 든 몸이기에 더욱 외롭고 고통스럽다. 찬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해 마냥 밖으로 나왔는데 깊은 밤 정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서쪽으로 달이 지려고 하며 매서운 겨울 서리도 내린다. 긴 겨울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나그네의 고독을 덜어 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낙금헌은 성균관 유학생으로 동학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연찬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불만감으로 인해 내심 불편하게 지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그는 고향의 옛 정취를 잊지 못했다. 현실 좌절감은 향수 서정의 시적 형상화 및 사우 교류로 확대된다.
낙금헌의 고독한 정서 표현은 결국 자신을 둘러 싼 환경적 제 요인에 의한 불안감이나 불만족에 대한 내심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그가 처한 환경과 주변 여건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다는 점을 반증해 준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교유하는 인물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은 결국 객지의 불만족에 대한 일종의 보상 추구 차원에서 이를 애써 추구했던 흔적이다.
다음 전란의 고통을 담은 작품군을 들 수 있다. 낙금헌 생애의 핵심은 왜란을 당해 국토를 침탈하고 백성을 어육으로 만든 왜구를 물리치고 공을 세웠던 사안이라 할 수 있다. 의병 활동 과정에서 표현된 시를 통해 그의 애국심과 의리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도처에 전개된 전란의 상처로 인해 시인은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현실 비극에 대한 한탄은 절규 이상의 비애를 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확대된다.
왜 길게 부르고 또 부르는가 何事長歌復長歌
좋아 길게 부르는 것 아니오 長歌非是好長歌
통곡하여도 어찌할 도리없어 痛哭不可無可柰
길게 부르고 또 길게 불러요 所以長歌復長歌. 「義兵陣與金守愚痛哭時事歌之」
노래를 길게 부르는 이유를 타인들은 알지 못한다. 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는 이유는 그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다. 통곡해도 견딜 수 없는 현실의 고통과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이 장가를 느리게 반복해 부르는 것이다. 견디기 힘겨운 조국의 전란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바는 현실 개탄과 절규였다.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 마음을 어둡게 하였을 뿐 아니라 왜적들이 날뛰는 조국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어찌할 수 없는 고통 탓에 비애가 담긴 절규와 분노의 심정을 노래에 실어 보낸다.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도 가슴에 맺힌 한과 분노를 잠재우지 못한다. 그에게 임란의 조국 현실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다음은 난국의 현실 타개 의지를 담은 작품이다.
만 리 산과 강에 오랑캐 미쳐 날뛰니 萬里關河驕虜狂
변방의 먼지 갑자기 대궐에 가득하네 邊塵一夕滿昭陽
그 언제 즐겁게 하늘이 열린 날 보고 何時快覩天開日
회서를 평정한 당의 공업을 칭송하리 功業淮西頌大唐. 「移陣醴泉在松丘旅館不勝新亭之感」
낙금헌이 예천으로 진지를 옮기고 송구여관에 머물면서 국운이 쇠함을 슬퍼하며 지은 것이다. 온 국토 산하에 왜구가 미쳐 날뛰는 통에 온 백성이 겪는 고통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그가 본격적으로 왜구 토벌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왜적들에 의한 피해가 매우 심각함을 목도하고 우국 정서를 표현하였다. 왜적들이 온 산하를 점거하여 갖은 만행을 일삼아 급기야 대궐까지 우환이 미처 선조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는 비운을 맞은 현실을 보도했다.
이로 인해 그는 주상의 안위를 염려하며 위급한 현실을 초래한 왜적들에 대한 울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일개 의병장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역량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당장이라도 어려움에 처한 조국의 위기를 극복해 내고 싶지만 그럴 여건이 충족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며 조속히 전란이 평정되어 주상으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안온한 삶을 누리길 소망했다. 이러한 소망 표출은 곧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의분에 찬 신념의 발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그의 시의 한 특징으로 보이는 자연 흥취와 한거의 미학 관련된 시를 들 수 있다. 이는 그가 귀향한 이후 산수자연에서 느끼는 흥취와 한거자락의 정서를 반영한 작품군이다. 일련의 시에는 전란에서 느끼는 격렬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산수 자연미를 누리는 데서 오는 흥겨움을 담고 있다.
이는 그의 시 품격의 한 특징으로 평가된 ‘충담소산’의 시평과 연관이 있다. 시인은 산수 자연 경광 속에서 내면에 잠재된 풍류 감흥 정서를 발휘한다. 시인의 멋진 풍류 서정은 달이 오른 밤에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양 절벽의 단풍나무 강에 거꾸로 비치고 兩崖紅樹倒江心
하늘의 구름 모두 걷혀 그늘마저 없구나 天廓雲消未作陰
이슬 맺힌 오동나무에 가을 달이 밝기에 露滴梧桐秋月白
잠 못 이루고 앉아서 거문고를 연주하네 幽人無夢坐鳴琴 「月夜彈琴」
달밤에 거문고를 연주하는 풍류 감흥을 담았다. 시간적 추이에 따른 시상을 배치했다. 낮의 서경 묘사에 이어 달이 오른 저녁의 고즈넉한 풍광을 포착했다. 양쪽 절벽을 수놓은 붉은 단풍이 강에 반사되어 강은 단풍의 물결로 넘실댄다. 하늘과 강에 붉은 단풍이 채색되어 감흥의 미학은 더욱 고조된다. 이 뿐 아니라 청명한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다. 높푸른 가을 하늘을 바탕색으로 해서 붉은 단풍이 수를 놓은 정경은 황홀하다. 이러한 지상과 천상의 아름다운 정경이 수상에 비쳐 이 일대는 온통 단풍으로 채색되어 시인의 미적 체감을 고조시키고 감흥 정서를 한껏 흥기시킨다.
시인은 이미 낮부터 가을 단풍의 멋진 풍광에 흠뻑 젖었고 시적 감흥도 충만하다. 가을의 낭만 정취에 도취되어 일일이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그러한 흥취는 저녁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슬이 내린 밤, 늦은 시각이 되도록 잠을 청할 수 없다. 풍류 정취에 만취된 시인에게 전개된 이슬 맺힌 오동나무와 청아한 달빛은 풍류한적 미학의 절정을 이룬다. 이어 정적인 흐름 속에 시인의 거문고 연주는 상호 멋진 조화를 생성하여 이 시의 품격을 제고시킨다. 풍류 감흥 의식에서 동적인 분위기는 이어지는 한거자락의 정서에 이르면 사색과 관조의 경지로 몰입해 청적미를 향유하는 것으로 진전된다.
낙금헌의 한거자락의 미학이 담긴 시는 철학적 사색과 세상을 관조하는 여유에서 창작되었다. 전란의 상흔을 겪은 이후 일시적 한거의 여유가 그에게 주어졌을 때 지은 시로 추정된다. 낙금헌의 48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감한 시점이 1600년인 점과 임란 발발 및 귀향 시기를 종합해서 유추해 보건대, 일련의 시는 1594년 이후 임종 직전까지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에서 태평 시절에 벼슬을 그만 두고 향리에서 지내는 일반 선비들이 향유했던 여유를 느낄 수 없다. 당시 시대 상황이 여전히 전란 중이거나 전란은 종식되었지만 전란 후유증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당시 창작된 그의 시에서 일시적 휴식기 내내 우국충정심이 토로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한거자락의 시는 모순 현실에 대한 일시적 여유 모색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말하자면 그가 이 당시 마음을 둘 데 없어 잠시 산수자연에 가탁해 울분과 내적 고민 해소를 위해 취한 방편이라 하겠다.
산 속 창가에 종일 지내니 山窓坐終日
날아드는 건 물새뿐이라네 飛來惟水鳥
거문고타며 말없이 지내니 鳴琴久不言
이 마음 아는 이 없으리라 此意人知少. 「呈白文瑞見龍」
산 속의 한가한 일상이다. 산속에서 조용하게 지내는 동안 그를 찾아오는 대상은 물새뿐이다. 인간 세상과 발길을 끊고 잠시 한적함을 누리는 정경이 그려진다. 그는 본의와 상관없이 전란 중에 병이 깊어 귀향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이기 때문에 방황하는 서정 자아를 불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내면의 불안과 왜적을 토벌하지 못한 울분을 잠재우려는 심산으로 전원의 삶을 도모했던 것이다.
우리는 말없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그의 형상을 통해 내재된 고민과 삭히지 못하는 울분을 읽어내야 한다. 그가 외면으로는 여유를 부리는 것 같지만 실상 내면의 고민을 잠시 내려놓기 위한 한 방편인 까닭에 거문고를 연주해도 평안을 누리진 못한다. 그래서 그는 말미에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독백을 한다. 이런 그의 내면에는 우국충정심이 자리하고 있다.
흐르는 물에 복사꽃 띄워 보내지 말지니 休放桃花泛水流
이 사이 영주산 있을 줄 그 누가 알리오 此間誰識有瀛洲
거문고 타는 소리가 산 넘어도 두렵잖고 鳴琴豈怕山前過
구기자 따먹는 즐거움 물외의 노닒 같네 食杞欣同物外遊
솔숲 달빛이 물가에 가득해 천상과 같고 松月滿汀疑上界
뽕나무 삼나무 집을 둘러 신선 세상일세 桑麻圍屋喜仙區
강호에 살아도 임금 은혜 잊지 않았으니 江湖不是忘君地
대궐 바라보던 두보 누각이 어찌 없으랴 望北寧無杜子樓. 「次白文瑞」
흘러가는 강물에 복숭아꽃을 띄워 보내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곳에 신비로운 경관이 펼쳐진 공간이 있다며 흥겨워한다. 이처럼 숨겨진 산속 은거지에서 거문고를 튕기며 흥겹게 지내더라도 남의 눈치를 받을 필요가 없다. 구기자를 따 먹으며 전원생활에 만족하기에 그곳 생활은 흡사 별천지에서 노니는 것 같다고 했다. 이러한 풍경은 밤이 되면 더욱 우아해 진다. 숲 속엔 청아한 달빛이 가득하고 그 달빛이 냇물에 담겨 천상의 달과 지상의 달빛이 한데 어울려 야밤의 향연을 이룬다.
이 시의 핵심은 말미에 있다. 시인은 이처럼 강호에 살아도 임금님의 은혜를 잊지 못해 내내 사모의 정을 토로한다. 이로 인해 안록산의 난리 기운데 조국의 장래를 염려했던 두보처럼 주야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낙금헌의 산수자연 흥취와 한거자락의 삶은 여느 선비들이 누리는 호사스런 풍류 향유와는 변별된다.
그에게 주어진 이 시기의 강호 생활은 일시적 휴식 공간으로 그는 오매불망 임란 종식을 완수하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는 그가 그만큼 충직한 유자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남다른 우국충정 의식을 지녔음을 반증해 주는 사례이다. 그의 이런 의식 체계는 왜구들이 날뛰는 현실에 대한 우국분세 의식으로 확대된다.
이 시절 통곡한들 무엇 하리 痛哭知何事
백성들은 매우 고통스러운데 民今方倒懸
분통한 심정 모두 말 못하니 說憤難一口
열 냇물로도 부끄럼 못 씻네 洗恥豈十川
흘러가는 세월 끝이 없는 날 地老無窮日
바다의 계절은 끝이 없는 해 海秋不盡年
저 원수와 함께 살고 있으니 與讐俱在世
남은 원한 임천에 붙일 밖에 餘恨付林泉. 「聞鄭景任經世韻有次」
백성들이 어육이 되는 전란 속에 귀향했던 것이 내내 부끄럽다고 느껴진다. 왜적들에 대한 울분은 일일이 말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며 부끄러움을 씻을 길이 없다고 자탄한다. 이 대목에서 강한 적개심이 표출된다. 불쌍한 백성의 삶은 전혀 보장되질 못한 채 세월은 자꾸만 흘러가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실감의 현실을 분노한다.
왜적들과 잠시라도 함께 살아갈 수 없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채 그들 만행을 지켜봐야 하는 분통과 원한을 품고 임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개탄한다. 위기의 현실을 고뇌하는 시인의 내적 고통은 여전히 깊어간다.
시국 걱정에 마음 아프고 또 다시 슬퍼 傷心時事轉悲凉
남국서 소백의 감당나무 더욱 생각하네 南國偏思召伯棠
원수왜적과 함께 살자니 정말 부끄러워 與賊共天眞可恥
다만 남은 울분 천 잔의 술을 기울이네 惟將餘憤倒千觴. 「次金鶴峯」
시국을 걱정하니 마음이 아프고 슬퍼진다. 학봉을 회고하며 지은 것인데, 여기에 나오는 소백의 감당 나무 고사는 주나라 문왕 때 남국의 백성들이 소백(召伯)의 어진 정치에 감사하는 뜻에서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겨,무성한 감당나무를 자르거나 베지 말라. 소백께서 그 그늘에 쉬셨던 곳이니라라고 노래한 시경(詩經)에 근원한다.
이 시에서 낙금헌은 학봉이 임란 때 경상우도순찰사로 활약한 점을 소백의 행적에 비유해 이렇게 표현했다. 원수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모순 현실을 생각하면 뼈저린 치욕을 느낀다. 조선 백성들이 겪는 치욕의 삶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며 울분으로 다가온다. 그는 삭혀지지 않는 울분을 달래지 못해 술잔을 기울인다.
이처럼 낙금헌에게 거문고 연주, 시 창작, 음주는 한가한 풍류 놀음이 아니라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의 위기를 이완키 위한 최소한의 방안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울분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는 늘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안전 보장을 염원했다. 그런 점에서 낙금헌은 임란 종군 의병장으로 사정상 끝까지 왜적 토벌의 과업을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그 이상 우국애민의 일념으로 번민했던 선비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4. 마무리
[낙금헌집]에 의병장이며 선비였던 낙금헌의 고뇌와 애국충정이 드러나 있다. 낙금헌은 어렸을 때 선조 퇴계로부터 학문 추구에 대한 격려를 받으며 자라나 이를 평생 사모하며 행동으로 실천하기를 다짐했다. 그는 학봉과 내외종 간으로 학문적 교류를 증진시키는 한편 비지․송소 등과 긴밀하게 교유하며 학문의 폭을 넓혔다.
임란을 맞아 그는 선비로 배우고 익힌 학문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리라는 다짐을 하고 근시재․금역당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종군하여 의병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김해 및 경주 전투를 고비로 뜻하지 않은 병으로 귀향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향리로 돌아 온 그는 종식되지 않은 임란으로 침탈당하는 조국의 현실을 지켜보며, 왜구에 대한 적개심과 왜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울분을 삭히지 못한 채 4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는 그의 생을 고스란히 전개해 놓은 드라마였다. 그는 성균관 유학시절, 한양에서 느끼는 고독한 정서를 시에 담았다. 성균관 유생으로 지내는 고독한 형상이 시를 통해 반추되고 있었다. 그런 탓에 객지에서 느끼는 고독감은 진한 향수 서정의 시로 표현되었다. 성균관과 한양에서 채워지지 않은 불만감이 결국 고향을 사모하는 시로 형상되었다. 그의 이러한 의식은 결국 벗님과의 교류를 통해 그러한 현실 위기를 해소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낙금헌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미학이 작품 속에 녹아 있었다. 이러한 인간애는 조국이 임란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맞서는 의기 실천으로 연결된다.
임란을 맞은 조국의 전 국면이 참담한 현실을 시를 통해 고발하면서 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애국적 의기를 담아내었다. 적개심의 발산과 함께 조속히 원수를 섬멸하고 말겠다는 충정심이 시에 절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병을 얻어 귀향해야만 했다. 이어 산수자연에서 누리는 흥취의 시를 통해 그가 일시적으로 안정을 누리는 것 같았지만, 전란을 수습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왜구에 대한 적개심을 떨쳐 버릴 수 없어 날마다 괴로워하였다.
그러한 낙금헌의 고뇌 흔적이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의 한거자락은 결국 ‘모순 현실에 대한 일시적 여유의 모색’ 내지는 ‘산수자연에 의탁해 울분과 내적 고민을 해소하려고 취했던 현실 대응의 한 방식’이었다. 그런 속에서 강인한 우국충정심이 토로되고 있었다. 그러한 낙금헌의 투철한 정신 지향은 임천에서 울분을 삭히며 임종을 맞기까지 계속되어 우국적개 의식의 표출로 이어졌다.
그는 퇴계의 학문을 가학으로 계승한 전형적 선비 형상을 지녔다. 낙금헌은 탁월한 문학적 감수성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여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다. 그는 임란 대응 의병장으로 여건상 끝까지 종군하여 순국하지는 못했지만 시종 우국애민의 투철한 정신으로 임종까지 울분하고 고뇌했던 강인한 지식인 선비였던 점을 확인했다.
이러한 그의 정신 지향은 후손 및 퇴계 학맥 계승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항일 독립 운동의 대동맥을 형성했다. 특히, 항일 독립 운동 전개사에서 퇴계 후손들이 큰 역할을 수행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낙금헌과 연계한 안동 지방 임란 의병 문학사의 새로운 연구 지평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