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의 가람문학관을 찾았다
며칠새 겨울 날씨가 많이 풀렸다
내란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현직대통령 윤석열의 체포 이후 영장신청까지 이 나라 정치도 같이 풀려나가는 듯 하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1968)는 생전에 시조 1천여 편을 남기며 시조 문학의 부흥에 앞장선 문인이다.
그는 1891년 음력 2월 28일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에서 아버지 연안 이씨와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가람(嘉藍). 변호사 이채(李俫)의 큰아들이다.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챠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 관립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시조 연구와 창작 및 고문헌 수집에 관심을 기울인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 · 전주제2· 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당시 수집한 서책은 뒷날 방대한 장서를 이루었는데, 말년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가 설치되었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 · 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 ·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다.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 ·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때 귀향하였다가 광복이 되자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이곳은 가람선생의 생가이다
한국 현대 시조의 중흥을 이룩한 시조 시인이며 국문학자였던 이병기가 태어난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정자 등 여러 채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는 승운정(勝雲亭)이라는 1칸 규모의 모정[茅亭 : 집 · 새 따위로 인 정자]이 있고, 그 옆으로 사랑채를 길게 배치한 후 앞에 작은 연못을 파 놓았다. 사랑채는 一자집이다.
전후 퇴집의 구조로서 전면은 툇마루를 구성하고, 안마당에 면한 툇간은 골방과 창고, 다락 등 수장 공간으로 사용한다.
칸살은 동쪽부터 방 · 부엌 · 방 · 방 · 대문간 및 헛간 순으로 이루어졌다.
진수당(鎭壽堂)이란 편액이 붙은 끝 방은 가람이 책방으로 사용했으며, 평소 기거하던 곳은 한 칸 건너 수우재(守愚齋)라는 편액이 붙은 방이다. 수우재와 책방사이는 칸 전체를 다락으로 만들었다. 밑은 양측 두 방 모두 구들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 공간을 이용하여 다락을 만든 것이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좁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마주하게 된다. 안채는 호남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ㄱ자 집으로서 잡석 축대 위에 높은 자연석 초석을 사용해 비교적 높게 지었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마주하며, 안방 전면으로 부엌이 돌출한 형태다.
건넌방은 전면과 측면에 툇마루를 시설했는데 전면 툇마루는 대청마루 보다 높게 구성해 마루 밑에 아궁이를 만들며 입면(立面)에 변화를 준다. 또한 윗방 한쪽은 칸을 막아 찬방을 두었으며, 아랫방 뒤쪽에는 쪽마루를 달아 고방채와 장독대가 있는 뒷마당에서의 출입을 배려하였다. 3칸의 고방채는 광 · 헛간 · 안변소로 이루어졌다.
고졸하고 소박한 초가의 모습에서 담백한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이 곳에서 가람은 한국 문학사에 뛰어난 족적을 남기고 말년을 맞이하였다.
그는 스스로 제자복 · 화초복 · 술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이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옛 것을 본받고 있었다.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에 조남령(曺南嶺) · 오신혜(吳信惠) · 김상옥(金相沃) · 장응두(張應斗) · 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은 6·25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탱자울」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비리의 고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 후기의 특징으로 꼽히는데, 이것은 현대시조의 새로운 일면을 개척한 것이었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 · 「인현왕후전」 ·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 「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전라북도 예총장(藝總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2년 문화포장을 받았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